원래는 '참여형 설정집 프로젝트'의 소개글만 쓰고 넘기려고 했는데, 그 '근원'을 해결하지 못하면 또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오류를 답습하게 될 것 같아 원인부터 분석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와서 너무 늦었지만, [작가수업]이라는 표제도 오만하지 않나 싶네요. 정확히는 '자습'이지, 누가 누구한테 수업을 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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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설정놀음이 뭔지는 이미 아시겠지만 굳이 다시 설명하자면, '작품을 위한 설정을 짠다는 게 주객전도가 되어 설정만 짜대면서 노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물론 마드리갈님께서 언급하신 콘월딩(conworlding)이라는 개념이 분명히 존재하는 이상, 설정놀음을 무작정 '놀음'으로 폄하하는 것도 잘못된 편견일 것입니다. 뭐 저의 경우는 정말로 놀음이 맞지만요... 그나마 지금은 대규모 게임번역 프로젝트가 있어서 바쁘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핑계가 있는지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참 곤란합니다.
1-2. 어쨌든 (제 기준으로) 번역은 한 문장이라도 어떤 표현을 써야 적절할지 많은 고민과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보니 체력소모가 극심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침대에 누워있기(특히 허리 통증 회복), 세수하기, 커피, 관련된 창작물 보기(+자료조사 겸 단어선택), 아예 다른 분야 탐독하기(낯설게 하기 기법) 등등의 방법으로 휴식을 취하거나 머릿속을 비웁니다. 물론 언젠가는 연재할 소설을 위해 설정 짜는 것도 휴식 겸 놀이에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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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문제는 이게 한 번 설정을 짜기 시작하면 그와 관련된 요소나 모티브를 제대로 살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필요 이상으로 구체화시키거나 시간을 많이 소모하기도 합니다. 시간 아까운 짓처럼 보여도 그 캐릭터를 제대로 '활용'할 수만 있다면 아깝지 않을 거에요. 하지만 그 '아까운가'를 논할 필요도 없을 만큼 간단하거나, 따지기가 애매하거나, 정말로 등장시켜도 괜찮지 않나 할 만큼 고민되는 등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1) 빅토리야 "불카누스" 볼가에프스키Viktoriya "Vulcanus" Volgaevsky
?원래 모 온라인 게임의 무기 브랜드들 패러디 시리즈의 하나였으나, '이대로는 이름과 개성 붙이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반쯤 놓아버린 것들 중에 하나가 '이름만큼은 잘 지었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작정하고 다른 브랜드들 비중도 몰아주자 해서 미소녀에 은발에 장교에... 애니 캐릭터 정도는 아니지만 비슷한 유형이 하나 뚝딱 생겼네요.
?하지만 현실성이 있는지는 차치하고 제 세계관에서 별로 큰 위력을 발휘하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무생물이던 원본을 그냥 인간화했을 뿐이라 특별한 개성이나 매력도 없으니, 더 챙겨주고 싶다는 생각도 없는 거죠. 그래서 아마 후술할 프로젝트에는 들어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2) 클로디아 바인야드Claudia Vineyard
?이름을 보고 눈치채신 분들도 있을 것 같은데, 만화 "명탐정 코난"에 나오는 악당 베르무트의 본명 크리스 빈야드를 살짝 변형한 겁니다. 그렇기에 뒷배경도 비슷한 편이지만, 제 세계관에 맞게 "그럭저럭 유명한 여배우이지만 실제로는 인신매매조직의 간부이자 마담뚜(부유계층 상대로 활동하는 전문 여자 중매쟁이) 내지 포주"로 바꿨습니다. 다만 원작에서 주인공 코난(=신이치)과 여러가지로 얽힌데다 서로의 목숨줄을 잡고 있다는 특수한 상황인 만큼 본격적으로 제 세계관에 들여놓기는 힘든 편입니다. 그 대신 뒷배경이 풍부해서 그런지 패러디하거나 재창작할 요소는 매우 많아요. 아무래도 재창작이 캐릭터를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편하기도 하고. 하지만 '기왕 원작 반영할 거면 제대로 하자'는 나름대로의 신조(?)가 있다보니, 꼭 자료조사 해가며 패러디해야 하나 하는 고민도 심한 편입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뒷배경만 남겨두고 아예 다른 이름과 외모를 부여하는 것이지만, 글쎄요...
?(3) 제임스 "설교자" 고긴스James "Preacher" Goggins
?이 쪽의 모티브는 미국산 양산형 캐릭터 뽑기 게임의 캐릭터 중 하나입니다. 배경설정도 딱 뽑기 캐릭터답게 간단한 편이지만, 그래도 '어렸을 때 시계 하나 훔쳐서 터무니없는 형량을 받았지만, 감방에서 법률을 독학해 스스로 석방됐고 그 법률지식을 길거리 아이들에게 전파한다'는, 해석하기에 따라 뒷골목 양아치들의 스승 내지 공동체의 스승을 자처하는 다크 히어로로 볼 수도 있는 묘한 뒷배경입니다. 저는 후자를 택하되, 법률지식을 전파하기보단 직접 총을 꺼내들고 양아치들을 잡으러 다니는 자경단으로 바꿨습니다. 그게 더 양아치들에게 와닿을 것 같거니와, 주인공 일행과도 충돌하기 좋을 것 같았거든요.
?이 정도면 (2)처럼, 혹은 (2)보다도 제가 아예 만들어낸 캐릭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더구나 실제로 등장시킬 것을 염두에 두고 이런저런 설정을 부여한 만큼 더더욱 애착이 커요. 어느 정도냐면, (자체 스포일러가 되기에 밝힐 수는 없지만) 등장 에피소드부터 최후까지 거의 설계가 다 끝난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지' 하고 버릴 수 있는 (2)에 비하면 더더욱 고민이 됩니다. 뭐, 모티브의 유명도를 감안하면 작정하고 넣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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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사실 이렇게 고민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사실 예전부터 있었던, '강박증'에 가까울 만큼 쟁여놓는(쌓아두는) 성향 때문에 저런 설정들이 부지불식간에 계속 쌓인다는 겁니다. 그것도 이면지에 필기하지 않으면 머릿속에 쌓이기 때문에, 이면지에 필기한 건 머리 속 공간을 확보(???)하는 측면도 있어요. 그러다보니 설정은 설정대로 늘고 그만큼 고민도 많아지고, 막상 그렇다고 아예 관두자니 '나중에 소설 쓸 거 생각하면 구상은 해둬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끊이질 않습니다.
3-2. 그래서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았는데, 바로 "비공식 캐릭터 설정집"을 연재에 가깝게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비공식이니만큼 소설에 등장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정 급하다면 가져다가 써도 상관이 없도록 수록 단계에서 조치를 취해두는 거죠. 대부분의 캐릭터 소개가 (위의 (3)처럼) 그렇듯이 과거지사만 공개해두면 현재와 미래는 상상의 영역으로 남으니까요. 실제로 과거에 (로그인이 필요한) 공작창에서 [스크랩]이라는 명목으로 몇몇 떡밥들(#1, #2, #3)을 만든 적이 있지만, 아무래도 공작창은 '정식 설정 보관소'로 인식되어 심리적 장벽이 있는 만큼 사소한 것들도 올리기가 다소 부담스러웠습니다.
3-3. 그래서 다소 자유로운 아트홀에서, 가능하다면 포럼 회원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형태로 프로젝트를 만든다...고 일단 운을 띄운 상태입니다. 설령 아무도 참여하지 않아서 저 혼자만 남는다 하더라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제 머릿속에 쓸데없이 계속 들어차는 아이디어들을 정리할 공간이 필요한 것뿐이니까요. 그래서 일단은 아트홀에서 비공식 설정들을 연재하여 제 세계관을 풍성하게 만드는 것을 기본적인 목표로 하고, 가능하다면 나중에 공개 프로젝트로 확대해 볼 생각입니다. 실제로 구현이 된다면 별도로 참여 지침을 작성하겠습니다만, 일단은 의견부터 확인해야 하니 여기서 그치는 게 현재로서는 가장 적절하다고 봅니다.
뭐 그렇습니다. 어쨌든 너저분하게 떠돌던 생각들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소 마음이 편해지네요.
그거 알아?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유야 어쨌든 고독을 즐겨서 그러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계속 실망해서 먼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는 거야. - 조디 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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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대왕고래
2022-06-19 21:35:55
이런저런 작품을 보다보면, 아니면 단순히 시간을 때우다가 자연스럽게 머리속에서 이야기가 떠오르는 일이 종종 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보통은 전부 묻혀버리게 되죠. 나중에 되면 기억도 희미해지게 되고요.
비공식 캐릭터 연재집, 머리속에 떠오르는 그런 생각들을 정리해두고 나중에 꺼낼 수 있도록 해두는 것은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해요.
Lester
2022-06-19 23:31:17
안 그래도 픽사의 스토리텔링에 도움이 되는 22가지 조언이었던가, 거기서도 '적어두지 않은 아이디어는 사라진다'고 이미 언급한 적 있습니다. 저도 그래서 여기저기서 얻어온 이면지 뒤에 생각나는 대로 적기는 하는데, 문제는 쓸거 안쓸거 구분하지 않고 무작정 적어놓다 보니 항상 포화상태입니다. 그래서 이번 (개인, 가능하다면 단체) 프로젝트는 잊어버리지 않게 보관하는 용도도 있지만, 실제로 만들어보고 도저히 안되겠다 싶은 건 바로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목적이 더 커요.
소개글 겸 참여지침을 써둬야 어떻게 단체 프로젝트로서 기능할지 명확해질 것 같습니다. 참여지침과 함께 올려둘 예제 몇 가지는 본편에 나온 것에 비해 내외적 특성이나 과거행적이 좀 더 명확하다는 차이밖에 없네요. 그리고 제 취향상 현실배경을 좋아하는데 판타지나 SF 좋아하시는 분들께는 별로 감흥이 없을까봐 걱정이긴 합니다. 아무래도 '기왕이면' 단체 프로젝트였으면 좋겠다, 하는 입장이다보니...
마드리갈
2022-06-20 18:09:51
작가수업이라는 타이틀, 결코 오만하지 않아요. 여러모로 배우는 게 많으니까요. 게다가 의견이 많지는 않더라도 이렇게 제시되고 있고. 그러니 그 점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현실적인 문제도 있고 그러면 일단은 현안부터 해결하시고, 그 다음 단계로서 말씀하신 프로젝트를 발족시키시는 좋을 것 같아요. 그러니 지금은 서두르시지 않는 게 좋아요. 대형 번역프로젝트를 수주하셨다고 알고 있는데, 설정집 프로젝트 발족시점은 빨라도 먼저 수주하신 그 프로젝트가 궤도에 오른 다음이 좋아요. 아무리 여러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한계는 엄연히 있으니까요.
카테고리는 아트홀의 것 중 편하신 것을 써도 되지만, 별도로 필요하시다면 설정해 둘께요. 그때는 프로젝트명을 알려 주시면 그 이름으로 신규 카테고리를 생성하면 되니까요.
Lester
2022-06-21 08:28:14
개인적으로 생각한 내용을 그냥 휘갈기는 것인데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이 프로젝트가 혼자서 하기엔 벅찬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일에만 매달리려니 머릿속에 고유명사들이 밀려들어오거나 영미권 숙어를 일일이 찾아봐야 하는 등 오롯이 집중하기가 힘듭니다. 그렇다고 기분 전환이랍시고 게임 같은 걸 시작했다간 시간을 너무 잡아먹어 버리니 너무 위험부담이 큰 휴식이라서요. 애초에 게임 같은 것도 '내 마음대로 풀리기를 바라며' 하는 건데 실제로 내 마음대로 풀리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이고...
그래서 차라리 설정놀음 정도면 마음의 부담감을 터는 데에 훨씬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얘기를 꺼낸 겁니다. 그렇기에 말씀하신 대로 당장 집단 프로젝트로서 개시는 무리고, 일단은 저 혼자서 끄적이는 정도로 해 두려고 합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설정' 카테고리를 사용하고, 프로젝트를 시작할 만큼 여유가 생기면 그 때 신규 카테고리의 이름을 정해서 신청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마음 써 주신 일에 대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