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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지온은 현애와 마주보고 앉아서 <그린 마스크드 파이터>를 보고 있다. 최신 회차를 보는 건 아니고, 이전에 연재되었던 회차들 중 케인이 나오는 회차만 다시 보는 중이다.
“어, 이거 다시 보니까 새로운데.”
“야, 너는 또 케인 타령이지?”
여기에 온 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지온이 하도 케인을 찾으니 현애 역시 궁금한 나머지 <그린 마스크드 파이터>를 보게 되었다.
“아니, 케인의 활약상이 얼마나 재미있는데. 너도 한번 케인이 나오는 것만 챙겨 보면 편견은 싹 사라질걸?”지온이 그렇게 말하자 현애는 혀를 내두르며 말한다.
“아니, 케인을 왜 저렇게 좋아한대. 인기 있는 캐릭터도 아닌데?”
그러건 말건, 지온은 케인이 나오는 회차만 계속 챙겨 본다. 이유야 딱히 없다. 케인이 좋고, 케인의 활약상과 언행 모두가 보고 싶으니까 말이다.
그러던 중, 문득 지온의 시선에 들어오는 사람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아까 민과 싸우다가 정신을 잃고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 아론이다.
“어, 잠깐. 쟤 괜찮은가?”
아론은 아직도 아까의 잠자는 것처럼 보이는 자세 그대로 책상에 머리를 파묻고 있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것으로 봐서는 생명에 지장이 있다거나 하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걱정스러운 지온은 아론을 흘끗흘끗 본다.
“내가 가서 봐 주기라도 해야 하나?”
그렇게 중얼거리고서, 슬며시 일어서서 아론에게 가 보려고 하는데...
갑자기, 아론이 홱 상체를 일으키더니, 부실 안을 한번 휙 보고는, 다시 상체를 두 팔 아래에 파묻는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일어난 행동이기에, 지온은 순간 깜짝 놀라서 자리에 다시 턱 하고 앉는다.
“야, 왜 그래?”
“아, 아니...”
지온은 순간 무안했는지 앞에 앉은 현애의 시선을 피하며 다시 만화책을 펴든다.
“에이, 뭐야? 깜짝 놀랐네.”
현애가 지온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한다.
“좀 혼자만 얌전히 보든지.”
“아, 아니...”
지온은 현애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바로 말대꾸한다.
“그것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니까? 좀 모르면 가만히나 좀 있든가...”
“무슨, 케인 때문에 그러는 거라고 네가 네 입으로 말했잖아.”
“내가 언제?”
지온은 현애의 말에 발끈했는지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또 아론이 보인다. 분명히 초점 없는 눈으로 주위를 홱 돌아보던 아론은, 어느새 책상 옆에 쓰러져서 몸을 뒹굴고 있다.
“잠깐, 저거 진짜 괜찮기는 한 거야?”
지온은 읽던 책을 내려놓고 아론에게 한번 가까이 가 보기로 한다. 한 번만 그랬다면 그냥 잘못 본 것이겠거니 하겠는데, 두 번씩이나 이러니 이제는 가만히 넘기지는 못할 것 같다. 바닥에 뒹굴고 있는 아론에게 몇 걸음 다가가려는데...
“어어... 어엇?”지온의 발이 갑자기 뒷걸음친다. 지온 자신은 아론에게 다가가려고 했던 건데, 지온의 발이 알아서 뒤로 가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길래...?
“아, 아니, 뭐야. 내 발이 왜 뒤로 가?”
거기에서 끝이 아니라, 지온은 저절로 자리에 앉기까지 한다. 지온이 하려고 한 게 아닌데도,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는다.
“너 뭐 하냐?”
보는 현애도 이상했는지 지온을 보고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아론이 누워 있는 게 심상치 않다며. 그런데 왜 다시 제 발로 자리에 돌아가더니 앉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이건 내가 앉고 싶어서 앉은 게 아니라니까. 너도 봤잖아. 아론한테 내가 가려고 일어서기까지 한 것!”
현애는 그 말을 듣고서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런데 왜 네 발로 가서 자리에 다시 앉냐니까?”
“나도 왜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고!”
그러고 있던 지온에게, 문득 메시지 도착음이 울린다.
♩♪♬
[안젤로:선배님,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안젤로:이건 우리끼리 일이라서요]
“아, 안젤로?”
프로필 사진을 봐도, 파마머리와 안경을 보면 딱 누군지 알 수 있을 정도다. 곧바로 안젤로에게 간 지온은 안젤로의 어깨를 붙든다. 안젤로가 지온을 돌아보자, 지온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연다.
“무슨 일이야. 너희끼리 일이라니?”
“그러니까, 선배님께 말하기는 좀 복잡한데요.”
그렇게 말한 안젤로는 거기서 말을 줄여 버린다. 마치 지금 말하기가 귀찮다는 듯.
“제가 메시지에도 썼죠? 우리끼리 일이라고요.”
“이게 왜 너희끼리 일이냐? 나한테도 조금 전에 이상한 짓을 했으면서.”
“아니, 선배님, 그걸 ‘이상한 짓’이라고 하면 저는 섭섭하죠. 저기 보이는 저 선배처럼 해 버릴 수도 있었다고요.”
“뭐... 뭐?”
안젤로가 가리킨 건 다름 아닌 토니. 토니는 아직도 입이 봉해진 건지 그걸 풀지 못하고 버둥거리고 있다.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보면 대체 왜 저러고 있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말이다.
“협박하는 거 아니에요. 토니 선배하고 아론은 저한테 한 짓이 있어서 저렇게 당하고 있는 거라고요. 지금 지온 선배한테는 악감정이 없으니까 이 정도로만 한 거예요. 알겠어요?”
지온이 슬며시 주위를 둘러보는데, 원형 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은 부원들은 토니를 빼고는 다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만화책 보기에 열중하고 있다. 이 침묵의 의미를, 지금 지온은 모르겠다. 여기서 더 나갔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고... 따라서 지온은 일단 여기서 물러서기로 한다.
“좋아. 네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알겠어.”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선배님.”
안젤로는 공손하게 대답한다. 지온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앉는다. 하지만 안젤로가 여간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는지, 만화책을 보면서도 흘끗흘끗 안젤로와 토니, 아론을 번갈아 본다. 혹시나 무슨 일이 또 일어나지는 않을지, 경계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자유토론 시간이 다 끝나 갈 즈음, 안젤로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선다.
“응? 왜 오늘은 먼저 일어나?”
민이 묻자, 안젤로는 그렇게 물을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말한다.
“아, 그럴 일이 있어서.”
그러면서 안젤로는 왼손의 시계에 있는 버튼을 몇 번 누른다. 그러자마자...
“하아!”
토니가 거친 숨을 내뱉는다. 그때까지 쭉 봉해져 있던 입을 푼 것이다.
“선배님?”
기다렸다는 듯 안젤로가 토니에게 말을 걸자, 토니 역시 기다렸다는 듯 잔뜩 성이 난 채로 입을 연다.
“또 이러기지! 좋아, 내가 언젠가 네 녀석의 빈틈이 생길 때를 기다릴 테니, 잔뜩 긴장하고 있어라, 응?”
“또 그런 헛된 기대를 품게요? 언제까지 그럴 거예요?”
“......”
토니는 터져 나오려는 화를 억지로 참을 뿐, 딱히 안젤로에게 뭔가 더 하지는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대신 토니는 안젤로를 주시하기로 한다. 안젤로가 무슨 능력을 쓰는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므로 지켜보기로 한다. 일단은.
“가만둘까 보냐... 너 이 녀석, 아주 그냥!”
한편, 아론은 스르르 눈을 뜬다. 제법 잘 잤는지 하품까지 하면서, 눈을 비빈다.
“어라? 그런데 지금 시간이... 몇 시야?”
아론이 보니, 벌써 시간은 4시. 이제 막 자유토론 시간도 끝났는지, 모두 자리에서 하나둘씩 일어나서 부실을 하나둘씩 빠져나가고 있다.
“아... 내가 이 정도로나 잤었나? 아, 내 머리야...”
아론은 때늦은 후회를 하나, 이미 늦었다. 이미 아론이 자는 동안, 시간은 흘러가 버렸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시간은 되돌리지 못할 것이다.
“좀, 누구라도 이야기를 해 주면 안 됐나...”
그러면서도 아까 전의 일이 잊히지 않는다, 좀처럼.
“독고민 이 녀석도 가 버린 건가? 하, 생각하면 할수록 열이 받잖아.”
그러면서 아론은 몸을 일으키더니, 일단 일어서 있으려고 한다. 그런데...
“어, 뭐야, 왜 이렇게 미끄러운 거야...”
잠에서 깬 지 얼마 안 된 터라 균형감각이 덜 잡혀 있을 수밖에 없고, 때마침 딛고 선 바닥이 미끄러워서 아론의 몸은 휘청거린다.
“어, 어, 어...”
큰일났다. 이대로라면 서 있는 건 둘째치고, 금방 넘어지고 말겠다. 어떻게든 두 팔을 벌려 가며 균형을 잡으려고 하지만, 점점 몸은 기울어진다.
“어, 안돼... 안돼...”
넘어지겠다. 큰일났다. 이미 몸의 균형은 확 기울어진 지 오래다. 이대로라면 넘어질 것이다.
“안돼...”
아론이 막 그렇게 중얼거리던 때.
“어?”
어떻게 된 일인지, 아론의 몸이 다시 균형을 잡고는 제법 안전하게 바닥에 두 발을 딛고 있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는 바닥의 미끄러움 때문에 균형을 잃고 두 팔을 허둥거리던 터였다. 그렇다면 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궁금해진 아론이 막 앞을 보는데...
“야, 아론, 괜찮냐?”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부실 앞쪽에서 들린다. 아론이 앞을 보니, 윤진이 부실 문 앞에 서서, 아론 자신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옆에는 민까지도. 둘 다 심히 걱정스럽다는 표정이다.
“끝날 때까지 자고 있으면 어떡해.”
“어? 제가... 그랬나요?”
“아주 쿨쿨 자고 있어서 언제 깨나 걱정됐다고.”
“아...”
아론은 머리를 긁는다. 그러고 보니, 옆에 민은 왜 자기를 지켜보고 있나 궁금해진다.
“야! 네가 거기 왜 있는 거야! 너, 분명히 나를 놀리려고 거기 있는 거지!”
“무슨 소리야? 넘어지려던 거 일으켜 준 건데.”
“어... 어?”
“아까도 의자에 물기 같은 게 있길래 그거 치워 주려다가 그런 거라니까?”
“뭐야...”
아론은 조금은 황당했는지 잠시 그 자리에 가만히 우두커니 서 있다. 또다시, 바닥의 습기 때문인지 몸이 기우뚱거리려고 하지만, 넘어지지는 않는다. 이제야 알겠다.
“야! 그러면 아까 진작 말해 주지 그랬냐? 응!”
“아니, 말했으면 아론 형은 또 안 믿고 앉으려고 했겠지.”
“어... 내가... 그랬나?”
“맞아.”
가만히 듣고 있던 윤진이 그것 보라는 듯 말한다.
“너 항상 이거저거 활동하라면 안 하고 자고 있잖아.”
“아니, 선배님, 그건 그거하고는 다른 거죠. 그냥 자기만 하는 게 그렇게 이상하게 행동하는 거하고 같은 건가요?”
“어... 본질적으로는 같은데.”
“아니, 선배님, 그건 아니죠!”
“그러니까, 부 활동 좀 잘 하라고. 여기가 네 전용 침실은 아니잖아. 그렇지?”
“그건 그렇지만...”
“자, 가자. 이제 여기 문 닫을 거야.”
윤진의 말에 아론은 서둘러 민과 윤진을 따라 부실 밖으로 나온다. 그 와중에도 한 번 미끄러질 뻔하고, 어찌어찌 두 발로 딛고 선 건 덤이다.
“아으, 진짜 서 있기가 힘드네.”
그리고 그걸 뒤에서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다. 다름 아닌 안젤로. 안젤로는 아직도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론을 보며 슬며시 웃는다. 그리고 뭔가가 급한 듯, 서둘러 계단을 내려간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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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2-10-15 16:30:50
괴현상이 끊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 역시 기분나쁘기 짝이 없어요.
아론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고, 토니는 입이 봉해진 것 같은 상황에 빠졌고, 이런 상황에서는 진짜 저 장소에 있는 자체가 무리라는 생각까지 들어요. 저 상황에서 멘탈붕괴를 일으키는 사람이 없다는 게 기적같아요.
별로 인기가 많지 않은 캐릭터라도 충분히 좋아할 수 있죠.
저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어요. 예전에 쓴 글인 즐겨보는 창작물 캐릭터에 대한 기묘한 법칙에도 나와 있듯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스토리라인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전 지온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요.시어하트어택
2022-10-30 20:01:42
물론 안젤로는 부실 안의 모든 부원들을 대상으로 한 게 아니고, 특정 인물을 대상으로 했으니 그나마 혼란스러운 건 최소화되겠지요. 하지만 당사자들의 입장에서는 여간 당황스러운 상황이 아닐 겁니다.
비주류 캐릭터를 좋아하는 팬덤은 그 수도 적지만, 반대로 진정한(?) 팬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큰 법이죠.
SiteOwner
2022-11-21 23:31:15
사정이 어떻든 간에 공용공간에서 자고 있는 아론이 좋게 보일 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아론 본인에게도 좋은 일은 일어나고 있지는 않아 보이는데, 깨어난 직후의 감각이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저러면 정말 당황스럽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옛 국산영화 중에 이런 장난이 있었던 게 생각납니다. 어떤 남자아이가 안경을 쓴 채로 잠들어 있는 누나를 곯려준다고 안경에 빨간 셀로판지를 붙여 놨는데 그 누나가 눈을 뜨자마자 앞이 새빨갛다 보니 불이 난 줄 알고 허둥대고 비명을 지르는...
역시 범인은 멀지 않군요. 안젤로의 소행...시어하트어택
2022-11-26 23:55:48
저런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생각한 것 이상의 혼란이겠죠. 물론, 가장 최선의 대책은 아론이 안 자는 것이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