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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한번 들어가 보기로 한다. 왜 줄리안은 부르지 않고 자신만 불렀는지도 도통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들어가는 길에, 민이 한번 다시 아이란과 리나를 돌아보니, 둘은 어느새 다시 자신들만의 이야기 세계로 돌아가고 있다.
“너 혹시 소설 좋아하니?”
“뭐... ‘그런 장르’라면, 선배님이 추천하는 건 뭐든지요.”
“그래? 좋아! 인터넷에 연재하는 거 하나 출간된 게 있는데, 선물이야.”
리나가 책을 한 권 건네주자 아이란은 순간 표정이 밝아진다.
“고맙습니다! 뭘 이런 걸 다...”
“더 놀라운 거 알려 줄까?”
“네... 네!”
어느새, 아이란과 리나는 이 집에 비가 왔다는 사실은 새카맣게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자신들만의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다.
“사실 이 책 작가님 말이야...”
“드릴맨... 주수영 작가님?”
아이란은 작가를 알고 있는지, 얼굴이 밝아진다. 그러자 리나는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이 근처에 살고 계셔! 한번 찾아가 보자고!”
“내일이라도 좋죠!”
“아, 이번 주말까지는 안돼. 좀 쉬고 계시거든.”
“어... 왜요?”
“아, 그런 일이 있어.”
민은 둘의 대화를 듣고도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머리를 흔들더니, 이윽고 리카의 집 안으로 들어간다. 신발을 벗고 막 현관 앞에 섰는데, 대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한 명과 눈이 마주친다. 민은 이 남자를 전에 몇 번 본 적이 있다. 리카의 오빠인데, 리카의 집에 놀러오다 보면 항상 봤기에 얼굴도 조금은 눈에 익다.
“혹시 리카가 불러서 온 거니?”
“아... 히로 형, 잘 있었...어요?”
“그럼, 잘 있고말고.”
히로라고 불린 리카의 오빠와 민은 어색하게 소리를 죽인 채 인사한다. 전에 만났을 때는 큰 소리로 인사도 하고 했지만,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마치 모기 우는 소리처럼 말할 수밖에 없다.
“여기 옆에 있는 방이니까, 조심조심 들어가. 문은 소리 내고 열지 말고.”
“네...”
들어가기 전에, 리카의 쌍둥이 동생도 보인 것 같지만, 마주치지는 않았다. 민은 문을 열기 전에 심호흡을 한번 한다. 한눈에 봐도, 리카의 방문은 굳게 닫힌 게 보인다. 이걸 연다고 하면 틀림없이 소리가 날 것이다.
“에이, 이런 데에까지 내 능력을 쓰기는 싫은데...”
그렇다고는 하지만, 소리 내서 들어갔다가는 리카가 화낼 것 같다. 그렇다면 달리 방법이 없다. 아주 살짝, 염동력을 써서, 소리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갈 수밖에.
그리고 잠시 후, 리카의 집 안에 있는 리카의 방. 민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리카는 막 시작한 <셀렉트 원> 애니메이션에서 눈을 떼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다. 거기에다가 창문에 커튼을 쳐 놓고, 책상에는 메모지가 몇 장 놓여 있고, <셀렉트 원>에 나오는 캐릭터들의 인형도 놓여 있다. 천장에 방음장치까지 설치된 건 덤이다.
“오, 정말이잖아.”
민은 리카가 <셀렉트 원> 시청을 위해 모든 조건을 다 갖춰 놓고 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까지 철저할 줄은 몰랐다.
“이 정도까지일 줄은...”
“쉿-”
민이 뭔가 말하려 하자, 리카는 입에 손을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고 한다. 민이 리카의 손짓에 따라 리카가 정해 준 자리에 정자세를 하고 앉자, <셀렉트 원>의 이런저런 장면과 대사가 눈과 귀에 확 들어온다.
“오, 과연...”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막 리카를 따라 <셀렉트 원>의 감상에 빠져들려고 할 즈음, 민은 또다른 감상자가 리카의 방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아까 처음 리카의 방 안에 들어왔을 때는 사각이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앉은 자리에서는 보인다.
“어... 유, 그리고... 하야토 형이잖아.”
민은 놀라움과 반가움에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려다가, 리카의 주의를 받고 마치 속삭이듯 말한다. 동시에 유와 하야토 형제도 민과 눈이 마주친다. 지금 이 자리에서 말을 하면 안 되겠다. 메신저에다가 메시지를 보내 본다.
[어쩌다 왔어? 집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메시지를 보내고 30초 정도 되자, 유로부터 답장이 온다.
[어... 말하자면, 잡혀 왔지]
[잡혔다니?]
[그러니까... 말하자면...]
한편 줄리안은 집에 돌아가는 길이다. 아까 전에 리카의 집으로 갔을 때는, 공원에서 놀고 있던 것이라서 빠른 대응이 가능했다. 줄리안의 집은 카페거리 너머에 있는 아파트 단지에 있다. 가는 길에는 아마 수변공원과 실개천을 거쳐 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는 길에 또 누군가가 있다고 한다면, 아마 줄리안은 또 말을 걸거나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줄리안의 레이더에 누군가가 걸려든다. 수변공원 앞 벤치에 앉아서 홀로그램에 나오는 영상을 보는, 누군가가 있다.
“오, 아는 얼굴이잖아?”
줄리안의 그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분홍색의 파마머리라면 분명히 만화부에서 처음 만난, 토마다. 토마는 웬일인지, 외로운 것처럼 보인다. 아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 역시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아. 저 애는, 내가 말동무가 되어 줘야 한다고!”
그렇게 결심한 줄리안은, 그 길로 바로 토마에게 다가간다. 토마가 자신을 보고 또다시 옆으로 슬금슬금 옮기려는 게 보이지만, 그리 신경은 쓰이지 않는다. 어느 누가 도움의 손길을 나쁘다고 여기겠는가... 줄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토마에게 말을 건다.
“토마, 재미있는 거 보나 보네?”
“네... 선배님...”
토마는 일부러 말도 줄이고, 줄리안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말한다. 그리고 줄리안을 향해 살기가 등등한 눈으로 노려본다. ‘어서 저리로 가 버리라’는 듯한 눈빛이지만, 줄리안은 그걸 또 알아채지 못하고 토마에게 계속 말을 걸려 한다.
“오, <트리플 버스터>인가 봐? 요즘 대회도 하고 공략 영상도 꽤 많이 나오는 것 같던데, 맞지?”
“네...”
여전히, 토마는 말을 피하고 있다. 그런 토마가 안쓰러웠는지, 줄리안은 아예 옆에 앉아서 계속 말을 건다.
“나도 아직 시작은 안 했는데, 그런 영상만 계속 본다면, 나도 정말 고수가 되는 건 한순간이겠어! 너도 그렇지? 이런 영상을 반복해서 봤으니, 아마도 네 실력은 믿어 봐도 되겠지?”
“......”
토마는 줄리안을 마지못해 한번 돌아본다. 하지만, 그 눈은 살기를 가득 품고 있다. 그것도 줄리안을 대놓고 노려보고 있다.
‘좀, 저리 안 가면 안 돼? 안 가면 완전히 폭풍우를 쏟아 버릴 거야.’
그러건 말건, 줄리안은 계속 토마에게 귀찮게 말을 건다.
“오, 여기, 여기 공격이 가면 안 되지! 여기는 딜을 좀 넣어줘야 하는데, 다짜고짜 탱커부터 가다니, 이건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플레이야. 토마, 너도 공감하지? 그래, 분명히 너도 마음속으로는 그럴 거야. 이런 녀석들에게는...”
줄리안의 그 말은 이윽고 토마의 감상까지 방해하기에 이른다. 효과음도 효과음이지만, 중간중간에 대사도 들리지 않고, 줄리안의 말이 실체화가 되어 토마의 눈앞에 어른거리며 맴돈다는 기분까지 든다.
“좀 꺼져 버리시지.”
토마는 나지막이 말하더니, 줄리안의 눈앞에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수증기가 어른거리더니, 이윽고 줄리안의 시야를 가려 버린다. 토마가 보는 영상 화면에 마치 노이즈가 끼어 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토마의 예상과는 달리, 줄리안은 토마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마치 그런 반응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더욱 철썩 토마에게 달라붙는다.
“좀 제발, 떨어지라고. 무슨 끈끈이주걱도 아니고.”
토마는 그렇게 속삭이듯 말하지만, 줄리안은 들리지도 않았는지, 미동도 없다.
한편, 리카의 집.
“뭐야, 다시 비 오는 것 같은데?”
한참 리카의 방 안에서 <셀렉트 원>을 ‘감상’하던 민이 창밖을 보더니 자신도 모르게 살짝 큰 목소리를 내어 말한다. 리카가 곧바로 민의 다리를 찰싹 때리자, 민은 리카의 그 행동의 뜻을 알겠다는 듯 입을 스스로 막는다.
“좀 조용히 해 줬으면 좋겠는데. 감상 중이잖아.”
“......”
“참, 그리고 내가 하야토 선배하고 너희들을 부른 이유가 따로 있거든? 다들 반응이 좋아서.”
반응이 좋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리카의 자리 옆에는 조그만 노트 하나, 그리고 홀로그램으로 나타난 대화창이 하나씩 있다. 그 대화창을 살짝 보니, 실시간으로 이런저런 잡담과 애니메이션 전개에 관한 대화가 오가고 있다.
[여기서 ‘디벨로’가 어떤 쪽을 선택하려나?]
[아마, 우리가 흔히 아는 그런 전개로 가겠지. 그렇게 되지 않겠어? ‘루스’하고 ‘에볼’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하려나]
“아니, 제발... 그렇게 되면 안되는데...”
리카는 대화창과 화면을 번갈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다. 결코 대화창에 나타난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간절한 바람일 것이다. 반면 옆에 앉은 민과 유, 하야토는 딱히 동요 같은 건 하지 않고 그저 작품의 전개를 지켜볼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뭐야...”
지금 화면에 나오는 캐릭터, ‘디벨로’의 헤어스타일과 얼굴 모양 등이, 민과 매우 닮았다. 정확히 말하면 헤어스타일은 머리를 묶고 풀고 정도의 차이지만, 이건 민이 꽁지머리를 풀면 된다.
“잠깐, 그러고 보니까 아까 저기 대화창에...”
민이 자세히 보니, 대화창 위에 메시지가 하나 보인다.
[오늘, <셀렉트 원> 시청 후 즉석 코스프레 사진 공모전을 개최합니다. 시간은 내일 09:00까지. 1등부터 3등까지 추첨으로 경품이 증정될 예정이며, 선착순으로 1등부터 3등까지는 또다른 상품이 준비되어 있으니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뭐야... 이거 때문이었어?”
민은 자기도 모르게 큰 목소리를 내려다가 만다. 그러고 보니, 맞은편에 앉아 있는 유와 하야토 역시, 닮았다. 디벨로와 티격태격하며 싸우고 있는 히어로들인 ‘루스’와 ‘에볼’, 둘과 말이다. 곧바로, 리카로부터 메시지 또 하나가 온다.
[다들 가지 말고, 10분씩만 좀 도와줘. 복장도 다 가져왔으니까. 각각 뭘 입어야 할지는, 보면서 알고 있겠지?]
“야... 리카...”
민의 입에서는 한숨과 허탈함 섞인 목소리가 나오려다 만다. 지금 여기서 이래 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민이 문득 보니, 밖에는 또, 비가 온다. 그것도 마치 집중호우가 내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리카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지금 창밖에 내리는 비는 실시간으로 방영 중인 애니메이션 앞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비가 오는 창밖에는 관심조차 없다. 그런 리카를 보니, 민은 더욱 열이 받는다. 이윽고, 작게나마 그 숨겨 놨던 말을 내뱉는다.
“고작 이거 때문에 나를 불렀냐고!”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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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2-12-07 00:22:24
전작에 나왔던 그 주수영 작가가 여기서도 언급되네요. 그 드릴맨이라는 필명도 반갑게 느껴져요.
리카의 방 안은 묘사된 것만으로도 엄청나네요. 뭐랄까, 그 비스크돌은 사랑을 한다의 키타가와 마린의 방같은 느낌일까요(참조 웹페이지 바로가기)? 마린의 경우 아버지가 단신부임해 있다 보니 집에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혼자 살지만...
토마와 줄리안, 상극의 관계인데 결국 저렇게 만나서 좋을 일은 없을 게 뻔한데 말이죠.
게다가 리카도 참 고약하네요. 자신의 사심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타인을 이용하려는...
시어하트어택
2022-12-11 22:45:24
전작에도 나왔고 연관성도 충분하니 등장시켜 봤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에 또 나오게 할지는 아직 미정입니다만...
리카의 꿍꿍이는 참 뭐랄까... 다른 사람들은 생각하지 못하는 그런 걸 잘 하고 있죠...
SiteOwner
2023-01-22 17:57:29
리카가 민을 부른 게 결국 저런 것이었다니...
뭔가 중대한 이유가 있어서 따로 보자고 한 게 아니라 자신이 코스프레 사진을 촬영해서 응모하려는 것이라니, 진짜 고작 그것을 위해서 부른 것인가 하는 목소리를 저도 내고 있습니다.
긴장했는데 손해봤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정말로.시어하트어택
2023-02-05 23:00:50
김빠지기 마련이죠, 무슨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하는 듯한 이야기였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별것 아닌 이야기였으니까요... 저였어도, 입에서 큰 소리가 나왔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