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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사장된 옛말을 억지로 쓸 이유가 있을지...

마드리갈, 2022-12-13 00:16:58

조회 수
156

국내 언어사용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이번에는 좀 다른 걸 지적해 볼까 싶어요.

옛말을 살려서 쓰는 방법은 언어생활을 다채롭고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대안으로 기능할 수 있어요. 그러나 이것도 교조화되면 안된다고 생각해요. 기능주의적인 사고방식이겠지만 어떠한 말이 사장되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으니까요. 사물 자체가 없어지거나 현대사회의 일상에서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을만큼 퇴조하여 그 사물에 대한 어휘가 쓰이지 않게 된다든지, 다른 어휘가 더 좋아서 자연스럽게 그 어휘로 옮아간다든지 해서 기존의 어휘가 사어로 전락한다든지 하는.

그럼 이 경우를 볼께요.
내용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 기사제목만 봐도 충분하다는 점을 같이 알려드릴께요.

이제는 중국어가 한국 언론에서 상전이 되어 버렸지만 그건 여기서 따로 다룰 건 아니고...
문제는 "비행기삯" 이라는 어휘. "삯" 은 요금, 공임 등과 같은 서비스의 대가로 지불되는 금전을 말하는데 사실 이 어휘는 한 세기 전의 근대문헌에서도 어쩌다 보이는 정도이지 아주 흔히 쓰이는 어휘는 아니죠. 발음도 그다지 아름답다고 할 수 없고 쓰다가 틀리기도 쉬운데다 다른 어휘와의 혼동도 일어나기 쉬운 이 어휘를 뭐하러 써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예의 어휘는 4음절. 이미 3음절인데다 널리 쓰이는 "항공료" 를 이길 수 있을지도 의문이예요.

그래도 옛말이니까 살려서 써야 한다는 주장이 있을 법하니 여기에 대해서도 몇 마디 더 첨언해 볼께요.
그럼 옛말이면 살려 써야 하는 당위성이 전제되는데, 그럼 "우렁쉥이" 라는 말이 "멍게" 로 대체된 것과 과거에 "구공탄" 과 "연탄" 이 혼재되어 쓰이다가 현재는 "연탄" 으로 일원화된 것은 정당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갖고 "우렁쉥이" 나 "구공탄" 을 계속 써 온 게 아닌 이상 옛말이니까 살려서 써야 한다는 주장은 그 주장자가 스스로 부정하는 게 되어요.
그리고 발음하기 어렵거나 다른 것으로 오인되기 쉽거나 하여 빈도가 낮아지는 어휘는 어쩔 수 없이 대체되어요. 영어권에서도 이런 사례가 있어요. 채종유를 영어로는 요즘 대부분 카놀라(Canola)라는 상품명으로 쓰는데 채종유의 원래 영어명칭은 Rapeseed Oil이죠. Rapeseed는 어원 자체는 순무의 라틴어인 rapum에서 온 것이지만 그 어원대로 보이나요? 이런 어휘는 오해받기 딱 좋아요. 그러니 결국 대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삯" 의 경우는 그나마 이렇게 기피될만한 성격도 아니지만 현대에 살려쓰기에는 글쎄요. 어차피 그 어휘가 많이 쓰이던 전근대사회에는 항공교통 같은 것도 없었고 항공교통의 태동기인 20세기 전반은 비행기를 타고 여행한다는 자체가 극히 한정된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보니 "비행기삯" 이라는 말 자체가 대중적일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러니 "비행기삯" 운운은 그렇게 쓰면 안된다는 건 아니지만 불필요한 것이죠.
2년도 더 전에 썼던 글인 솽스이와 매맷값, 이런 게 국어생활...에서 지적한 게 그 많은 시간이 흘러도 나아진 건 전혀 없고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서 퇴보하네요.
마드리갈

Co-founder and administrator of Polyphonic World

4 댓글

Lester

2022-12-14 22:54:02

삯 자체가 배삯 같은 말에서 아주 안 쓰이는 것은 아니나, 보통은 그냥 (비행기, 배, 기차 +)표값이라는 말로 더 많이 쓰이죠. 게다가 삯은 말씀하신 것처럼 옛날 말투라 오히려 해당 교통편을 (옛날에 '못난 제 자식놈입니다' 하듯이) 후져(?) 보이게 하는 효과도 있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 포괄적으로 보면 기자 수준에 상관없이 기사를 정리해서 인쇄소로 넘기는 게 데스크(좀 더 정확한 명칭은 편집국)인데, 오탈자부터 생각없는 베끼기와 조회수에 눈이 먼 제목 등을 데스크가 그냥 넘기는 걸 보면 기자라는 직업이 얼마나 추락했는지 잘 알겠다 싶습니다. 10년 전에 복지관에서 마을신문 만드는 걸 도와주시던 전직 신문 기자님이 멋져보여서 아버지께 '나중에 기자 될 겁니다'라고 말만 꺼냈더니 "기자가 뭐 대단한 거냐, 약점 하나 잡아가지고 접대다 뭐다 받아처먹는 게"라고 혼쭐났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니, 요즘은 뭐 하나 실수하면 금세 소문나는 세상이라 접대는 못 받는데 기자정신은 애저녁에 말라죽었으니 더더욱 조회수에 미친 게 아닌가 싶네요.

마드리갈

2022-12-15 00:13:48

그렇죠. 안 쓰이는 건 아니지만 더 이상 그 어휘가 아니면 안될 필연적인 이유도 없으니까 존속할 이유가 남아 있지 않아요.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지칭하는 대상을 폄하하는 함의까지 느껴진다면 더더욱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것이죠. 특정분야의 직업종사자나 기능 및 기술의 숙련자를 "쟁이" 라고 부르는 것도 결국 오늘날에는 안 쓰이게 되는 것과 다를 게 없어요.


예의 문제는 아마 해결되지 않고 한국 언론의 고유한 문제로 잔존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희화화나 조롱이 일상화되어 있고 비속어나 유행어를 무비판적으로 주워다 쓰는 행태에 의문조차도 가지지 않는데다가 그저 조회수만 높이려는 그런 행태가 어느 언론사를 막론하고 넘쳐나는 것이죠. 게다가 어떤 지방신문의 경우 이런 문제가 있다고 하죠. 어떤 곳은 고정급여가 없다 보니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누군가의 약점을 잡아서 그거로 뜯어먹고 사는 파렴치한 행태가 꽤 있다 보니 똥파리라는 멸칭으로도 통한다고...

이런 경우에 대해서만큼은 사회 각계의 지식인들은 왜 목소리를 안 내고 침묵하는지 모를 일이죠. 이러면 그 끝은 뭐 언급하나마나일 거예요.

대왕고래

2022-12-19 23:34:27

사장된 옛말을 억지로 쓸 필요 없는 좋은 예시가 본문에 있네요. 유채꽃... 저거 영어검색했더니 나온 명칭을 보고 "뭐지? 뭐하는 미친 꽃이지?"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대체할 수 있는 쉬운 단어가 있다면 굳이 어려운 단어를 쓸 이유가 없죠. 일단은 사람이 이해를 해야하니까요.

마드리갈

2022-12-20 13:30:27

언어가 생각을 담는 도구라는 본질은 늘 잊어서는 안되죠. 그러니 적절한 어휘를 선택하는 것은 정말 중요해요. 그런데 우리나라의 여기저기서 K-컬처 운운하면서 정작 그 근간을 이루는 한국어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무관심하죠. 근간을 무시하는 게 얼마나 오래 갈지는 심히 의문스러운데다 금방 번아웃 위기에 처할 게 분명하겠지만 그게 현재 일어난 게 아니라고 어떻게 되어도 좋은 것인지...

그러니 그러한 고민 없이 쓰여진 "비행기삯" 은 적절한 어휘라고 할 수 없어요. 이미 "항공료" 라는 더 나은 용어가 버젓이 있는데 쓸데없는 것이죠. 정작 저런 말 쓰는 사람들이 운임, 공임 등의 각종 요금을 그렇게 널리 쓴다는 것도 아닌데다 문제의 "삯" 이라는 어휘의 발음은 의외로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어요. 정확히는 저 어휘 단독으로는 발음은 /삭/ 이 되지만 어떤 조사에 선행하는가에 따라 음가가 크게 변동하여 혼동을 잘 유발할 수 있어요. 그리고 저 어휘는 고어에서 "싹(sprout)" 과의 동음이의어이기도 했고 현대국어에서도 산고양이를 말하는 "삵" 과도 혼동될 수 있으니 별로 좋지 않아요.


부적합한 어휘가 대체되는 것은 역시 여러 언어에서 발생하죠.

본문에서 언급한 Rapeseed라는 것도 그렇고, 역사적으로는 미국에서 베네딕트(Benedict)라는 이름과 독일어권에서 아돌프(Adolf)라는 이름이 인기가 극단적으로 낮아진 사례도 있어요. 베네딕트는 미국 독립전쟁기에 대륙군의 장군이었지만 배신 후 영국으로 전향한 베네딕트 아놀드(Benedict Arnold, 1741-1801) 이후로 미국에서는 기피하는 이름이 되었고, 아돌프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독일의 독재자이자 천하의 악인으로 기록되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이후 독일어권에서 인기가 급락한 이름이 된 것이죠. 베네딕트는 복음(福音)을, 아돌프는 고귀한 늑대를 의미하지만 그 의미와는 상관없이 결국 사장되는 길을 걸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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