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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뭐 사러 오셨나요?”
그 비니 쓴 남자와 민의 눈이 마주치자, 민은 곧바로 그 남자에게 말을 건다. 그 남자도 민과 눈이 마주치자, 곧장 부스의 판매대로 다가온다. 그는 잠시 말없이 판매대 앞에 놓인 굿즈들을 보더니, 이윽고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 입을 연다.
“여기 혹시... 키는 175cm 정도 되고, 노란 후드티를 입은 사람을 못 봤나요?”
그 남자가 말하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아까 사인회장으로 향한 치히로다. 그런 차림을 한 사람은, 치히로밖에 없었다. 눈에 띄는 복장에다가, 그런 색의 옷을 입은 사람은 치히로 말고는 볼 일이 없었으니까.
“응? 저기 사인회장으로 가던데요.”
“네, 감사...”
그렇게 감사를 표하며 사인회장으로 가려다가, 그 비니 쓴 남자가 잠시 멈춰선다.
“뭐야, 잠깐...”
그 비니 쓴 남자가 두 걸음 뒤로 돌아가더니, 부스 안에 있는 부원들 중, 마린의 앞에 멈춰선다. 마치 보면 안 되는 걸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 남자는 시선을 애써 피하는 듯하다가, 마린을 딱 보고 눈을 둥그렇게 뜬다.
“마... 마린!”
“뭐야...”
이름이 불린 마린은 시선을 피하려다가, 그 비니 쓴 남자의 얼굴을 한번 본다. 그리고 입을 연다.
“뭐야, 올리버,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러니까... 나도 일이 있어서 여기에 온 거라고!”
올리버라고 불린 그 남자는 마린의 말에 마치 얼버무리듯 대답한다.
“여기서 널 만날 줄은 몰랐는데!”
올리버는 마린에게서 얼른 시선을 돌리더니, 곧바로 다시 사인회장으로 향한다.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집중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라도 하듯 말이다. 그런 올리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민이 중얼거린다.
“뭐야, 저 형, 왜 저런대... 그건 그렇고, 마린 누나하고는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건가?”
그런데 마린이 민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슬며시 민의 옆에 다가오더니, 오른손 검지를 자기 입에 가져다 댄다.
“조용! 여기서 이 이야기는 하기 적절하지는 않은 것 같아.”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적절하지 않다니?”
민이 물어보려고 해도, 마린은 뭐라도 숨기는 게 있는 건지 민에게 더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있다니...”
민이 뭔가 더 말하려는데, 옆에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야, 민아!”
“어, 왜?”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유가 말을 건 것이다.
“잠깐 여기는 선배님들한테 맡기고, 저기 반대편 행사장에 좀 가 볼래?”“어? 뭐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있어?”“당연히 있지.”
유는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뫼비우스 월드> 이벤트관이 있는데, 등신대하고 사진도 찍을 수 있고, 4D 체험관도 있고 하니까, 가 보자고!”
“어... 그래!”
그래도 민이 혼자 가기는 그랬는지 아이란과 마린을 한번 돌아보지만, 아이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금방 말한다.
“갔다 와. 우리 둘이서도 여기 지키는 건 충분하니까.”
아이란의 그 말을 듣고는, 민은 곧바로 일어나서 친구들과 같이 그 이벤트관으로 향한다.
한편 요시노 감독의 사인회가 열리는 사인회장. 내부의 장식물들이 온통 흩어져 어지럽게 보이지만, 가운데 앉아 있는 안경을 쓰고 이마가 반쯤 벗어진 남자는 개의치 않고 사인에 열중한다. 이 사람이 바로 문제의 요시노 감독으로, <5월은 거짓말>의 감독이다.
“이 감성, 좋다고. 아주 좋아!”
사인회장에 들어선 팬들이 어지러운 사인회장 내부를 뭐라고 하든, 아니면 미린 만화부원들이 어떻게 내부를 보든, 요시노 감독은 개의치 않고 사인에만 열중한다.
“어?”
윤진이 잠깐 사인회장 출입문을 돌아보는데, 누군가가 사인회장 안으로 바로 들어온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마치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또 바람이 부는 것처럼 말이다. 사인회장 안에 있던 요시노 감독을 포함한 모두가 그쪽을 돌아보는데.
“윤진아! 거기 있었냐!”
파란 후드티를 입은 누군가가 들어오더니, 대뜸 윤진을 찾는다. 다름아닌 치히로인데, 얼굴이 상당히 붉어져 있고, 정면으로 보이는 요시노 감독은 안중에도 없는 듯 윤진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야, 치히로, 너 혹시... 감독님 사인 받으러 온 거 아니지?”
“어...”
치히로는 잠시 당황이라도 한 건지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윤진을 똑바로 보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렇지! 너한테 대답을 들어야겠어.”
“어... 무슨 대답?”
그렇게 말하고는, 윤진은 뜸을 들이는 척하더니, 이윽고 입을 연다. 처음부터, 윤진은 답을 정해 놓고 있었다.
“그래... 빠른 시일 안에는, 힘들 것 같아. 너도 그건 좀 이해해 줬으면 좋겠고.”
“좋아.”
치히로는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얼굴을 더 붉게 물들이며 씩씩거리고는, 곧이어 자기 할 말을 계속한다.
“이번 교류 행사는 어쩔 수 없게 됐는데. 대신, 다음 교류 행사를 기대하라고. 그때는 우리 동아리가 최고의 동아리가 되어서 너희 만화부를 맞이할 테니.”
그러고서, 치히로는 곧바로 사인회장을 빠져나간다. 사인회장 안에 있는 만화부원들이 모두 어안이 벙벙한 채로 치히로가 빠져나간 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껄껄 웃으며 손뼉을 친다. 돌아보니 또 요시노 감독이다.
“왜... 왜요, 감독님?”
윤진은 감독이 지금 하는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지, 일부러 말끝을 높여 되묻는다.
“하, 하하하! 자네도 봤잖아. 저런 캐릭터가 마음에 든다고!”
“네...?”
요시노 감독의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윤진은 황당했는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벌리고 다물지 못한다. 다른 부원들도 마찬가지다.
“아니, 감독님, 아무리 그래도 사인회를 거의 망칠 뻔한 사람인데, 그 말은...”
“자네가 내 작품세계를 몰라서 그래! 저런 특이한 캐릭터가 내 작품에 얼마나 많은데!”
“그... 그랬나요?”
“그래. 당장 <5월은 거짓말>만 해도, 모블린이나 솔리도르 같은 캐릭터가 있다고!”
“어... 그렇죠.”
“방금 저 불청객도, 불과 1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캐릭터성 하나는 강렬했지. 바로 그 점이라고. 내가 원하는 캐릭터성이었단 말이지!”
그러더니, 요시노 감독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뒤이어 들어오는 팬들에게 사인을 해서 준다. 윤진은 안도 반, 그리고 이해할 수 없음 반이 묻어나오는 한숨을 푹 쉰다.
그리고 그때, 올리버는 사인회장 문 앞에서 치히로와 마주친다.
“어, 선배님, 여기 있었어요?”
“어... 그래.”
치히로의 맥이 빠지는 답을 듣자, 올리버는 뭔가 예감을 했는지, 얼른 말한다.
“안 좋은 답을 들었던 거죠?”
“그래... 무슨 우리가 빌런 집단인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죠, 선배님! 명색이 히어로 동아리인데.”
“그렇기는 해도, 심연 속 깊은 곳에서 경쟁심이 저절로 샘솟잖아. 그리고, 수상해. 윤진이 녀석하고, 만화부 말이야.”
“수상하다니... 요?”
“그러니까, 인적 구성이 우리보다도 더 히어로 동아리에 가깝다고. 무슨 부원 80%가 초능력자야. 안 그래?”
“맞아요... 그건 그래요.”
올리버는 그 상황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우리도 빨리 히어로 동아리다운 모습을 보여줘야 할 텐데 말이죠!”
“그러니까.”
치히로는 올리버보다 더욱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발걸음을 옮긴다.
“보여줘야 한다고.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발걸음을 옮기던 둘은, 문득 부스가 양옆에 늘어선 통로 한가운데 멈춰선다.
“뭔가 이상한 감 잡았지?”
“네...”
그 말이 빈말은 아니었던 건지, 치히로의 온몸에 어떤 느낌이 전해오는 듯하다. 확실히 온몸에 전해오는 무언가가 있는데, 심상치 않다. 직감한다. 멀지 않은 곳에, 무언가가 있다. 히어로든 빌런이든 말이다.
“가 보자고. 바로 저기니까.”
치히로와 올리버는 곧장 그 이상한 예감이 불쑥 드는 곳으로 향한다. 마음이 더 급했던 건지 간간이 자신들을 돌아보는 시선은 아랑곳하지도 않는다. 그 와중에도, 히어로 동아리랍시고 주머니에 고이 모셔 두었던 검은 마스크를 하나씩 쓰는 건 잊지 않는다.
“어, 저 사람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냐?”
한편, 치히로와 올리버가 지나가는 길에 있는 사람들 중 메이드 복장을 입은 여자 2명은 둘이 지나가는 걸 보더니 한마디씩 한다. 둘 다 색은 다르지만, 후드를 쓰고 마스크를 쓴 모습에서 무언가를 하나씩 연상해 낸 모양이다.
“왜, 그... <자가발전 전대 파이브 제이즈>에 나오는 ‘자가발전 전대’ 있잖아! 거기에 나오는 대원들 보는 것 같다고!”
“야, 너도 그 생각 했지! 역시나!”
분홍색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가 입을 열자, 그 옆에 있는 검은색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가 킥킥대며 맞장구친다.
“왠지 모르게 어디 많이 나오는 것 같았지. 안 그래?”
“그러니까... 2호하고 3호였나? 왜 그 노란색하고 파란색 후드티 입고 항상 알록달록한 마스크 쓰고 다니는 그 히어로 견습생들 말이야.”
“맞아, 맞아! 왜 그 동인지에서 항상 붙어 다니잖아. 맞지?”
“그래...”
분홍색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는, 이윽고 또 하나를 생각해 낸 모양이다.
“또 하나 생각났어!”
“뭔데?”
“아까 저 애들, 누구하고 많이 닮은 것 같은데.”
“응? 누구?”
“그러니까... 우리 학교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아.”
분홍색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는 잠시 머리를 굴리더니, 이윽고 하나의 실마리를 맞추기라도 한 건지, 곧바로 한마디 더 한다.
“선배였던가, 아니면 후배였던가, 아니면 우리 동급생인 건가... 모르겠네.”
“학교에서 본 게 맞기는 한 거야?”“학교에서 본 건 확실하다니까. 분명히 우리 학교였어.”
“정말 확실한 거지...”
한편 치히로와 올리버는 제법 규모가 있는 전시장 하나에 다다른다. 초록색 조명으로 포인트를 준, <뫼비우스 월드>라는 제목이 크게 입구에 박혀 있는 전시장이다.
“분명히 여기였지? 그 이상한 기운이 풍기는 곳 말이지.”
“네, 선배님. 그게 빌런인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그래... 맞아. 꽤 강력한데. 조금만 더 세다면 그 기운을 만질 수도 있을 것 같고.”
“정말요? 그렇게 센 건가요?”
“그래. 아까 여기에 구름 떠 있다가 없어진 거 봤잖아. 그것보다 더 강한 능력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그렇게 치히로와 올리버는, 그 강력한 빌런 또는 초능력자가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곳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우선은 눈앞에 보이는 매점이 둘의 신경을 자극한다. 이것저것 초록색이 들어간 음료와 디저트를 판매중 인데, 탄산음료에서부터 초록색 색소를 넣은 잼을 바른 쿠키, 말차쿠키, 허브를 뿌린 마들렌 등이 보인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치히로의 눈길이 가는 사람은 따로 있다.
‘음... 이상한 예감이 드네... 저 사람인가...’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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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3-02-05 16:10:42
치히로가 설립하고 치히로와 올리버가 부원으로 있는 그 신생동아라는 히어로 동아리군요.
그런데 뭔가 기묘한 의미에서 유명한 듯한...그러니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들이 수군대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 같네요.
요시노 감독은 역시 비범한 사람이네요. 도량도 넓은데다 외부의 자극이 자신의 작품세계를 풍성하게 만든다는 예술관을 지닌 듯해요. 역시 감탄이 안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런데 초록색이 들어간 음료와 디저트...게다가 치히로 하면 생각나는 캐릭터 중에 아이돌마스터 신데렐라걸즈에 등장하는 346(미시로) 프로덕션의 사무원인 센카와 치히로(千川ちひろ)가 입은 밝은 녹색 상의가 연상되어요(이미지 바로가기, 일본어). 게다가 센카와 치히로의 성우가 죠죠의 기묘한 모험 4부의 캐릭터 카와지리 하야토의 성우인 사토 리나이기도 하다 보니 이 타이라 치히로가 아주 의외의 곳에서 누군가의 정체가 이상하다는 것을 간파해 내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시어하트어택
2023-02-05 23:51:27
치히로 나름대로는 히어로의 외형과 특색을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만, 그게 하필 개그 매체와 유사하다 보니 저렇게 이름값을 못 하게 되어 버린 거죠.
요시노 감독같은 사람은 정말... 괴짜라고 할 수도 있겠고 도량이 크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SiteOwner
2023-02-23 21:48:06
히어로는 자칭해서 히어로가 아니라 타인의 평가가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치히로와 올리버의 저런 생각이 위험한 방향으로 발현되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고 있습니다. 세계를 구원하겠다는 등의 대의를 가진 자들이 역사에 악당으로 기록되고 있는 건 다 언급하기도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데다 그게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일인 것 또한 각종 시민단체들의 부정 등으로 잘 드러나고 있다 보니 우려가 안 될 수 없습니다.
역시 그들을 보는 눈이 있군요. 메이드복을 입은 두 여자들.시어하트어택
2023-02-26 21:43:56
오너님의 지적대로, 요즘은 여러 가지 클리셰들을 비튼, 빌런 집단보다도 더 타락한 히어로 집단을 소재로 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고, 그것 말고도 과거의 영웅들이 타락해 거악이 되어 버린 이야기는 찾아보면 많은 편이죠.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들의 정체는... 다음 화를 보면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