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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질 줄은 몰랐는데...”
해진은 혼자 중얼거린다. 해진에게는 물론, 패배를 겪은 게 아예 처음은 아니지만, 해진이 받아들인 내기에서 지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것도, 이런 RC카 같은 건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거기에다가 아멜리는 자신이 이런 RC카를 잘 한다는 어떤 언질이나 행동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던 터다. 그 충격이 채 없어지지 않은 건지, 해진은 매우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서, 겨우 입술을 떼고 말한다.
“최대한 빠르게 그걸 가져다드릴 걸 약속드리죠.”
그리고 그때, 아멜리는 기쁘다기보다는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교차한다. 마치 수없이 얽힌 실들이 한군데에서 팽팽히 조여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거 어떡하지? 후배한테 내기를 해서 이기기는 했는데... 내가 이겼다고 해서 이걸 받아도 되나... 덥석 받으면 선배로서 위신이 안 서고, 그렇다고 내가 이겼는데 안 받기도 그렇고...’
그렇게 고민하다가, 아멜리는 입을 연다.
“그래... 내가 선배인데, 이번에는 안 받을게. 다시 할까?”
아멜리는 해진이 호승심 때문에 다시 대결을 신청할 거라고 생각한다. 해진같이 그런 동아리에까지 속해 있으면 더더욱 그럴 것이라는 생각도 함께 한다. 그런데, 해진으로부터 돌아온 반응은 의외다.
“아니죠. 제가 진 건데요. 그냥 선배님, 제가 말한 RC카 컬렉션 중 가장 비싼 모델을 드릴 테니, 받으세요.”
그 말을 듣자마자, 아멜리뿐만 아니라, 지켜보고 있던 방송부원들, RC브라더스 부원들의 입이 딱 벌어진다. 마치 절대로 일어나지 못할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듯, 멀뚱멀뚱 이 광경을 지켜보는 건 물론이다.
“정말? 내가 그거 받아도 되나?”
“그럼요. 자, 여기 받으시죠.”
해진은 곧바로 방송실 한쪽에 놔둔 종이상자에서 그 문제의 RC카를 꺼내더니, 곧바로 아멜리에게 넘겨준다. 마치 왕에게 진상품을 바치는 신하처럼 행동한다. 그러자 아멜리는 더욱 당황했는지, 이마에서는 땀마저 흐른다.
“내가 이거 받아도 되냐고?”
“그럼요...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그렇게 아멜리가 어색하게 그 RC카를 받아들자, 해진은 그걸 놓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인다.
“이번에 받을 경품도 잘 부탁드려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죠?”
“어... 무슨 말인지는 알지. 하지만, 어떤 경품이 나올지는, 나와봐야 알겠지?”
그렇게 대답한 아멜리는, 겉으로는 웃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마치 금방이라도 한숨을 푹 하고 내쉴 듯, 한숨이라도 내쉬고 싶은 심정이다.
‘아... 걸려들었다. 이걸 어떡하지?’
그리고 그 시간, 도서관. 여전히 밖은 스케이트보드 굴러가는 소리와 환호성 소리로 시끄러운데, 도서부원들과 MI스터리 부원들이 둘러앉은 곳은 차분하다.
“그래... 꽤 신기한 이야기들을 많이 알고 있는걸.”
지우가 하는 이야기를 중간까지 듣고는, 리하르트는 어딘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지우가 꺼내놓은 괴담은 나쁘지는 않았는지 손뼉을 조용히 친다.
“그런데, 저는 궁금한 게 있는걸요?”
이야기를 다 들은 셀림이 조용히 손을 든다.
“선배님이 말한 ‘초능력자 X’라는 초능력자는 그때 당시에는 손에 꼽히게 강력한 초능력을 가졌는데, 정말 작정하고 사고를 쳐서 그렇게 일이 커졌던 거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순순히 제압이 되었던 걸까요?”
“그거야 간단하지.”
지우의 이야기를 역시 옆에서 듣고 있던 차논이, 마치 셀림이 그 말을 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입을 연다.
“첫째 그 녀석의 초능력 자체는 강력했지만 그 녀석 자신도 자신의 능력의 잠재력과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몰라서 어떻게 써야 할지 자기 자신도 갈피를 못 잡았던 것이 있고, 둘째 절대적으로 강한 초능력자는 없어. 예를 들면 손톱을 변형하는 초능력자도 충분히 원소 변형 능력자를 죽일 수 있다고. 무엇보다도 여럿이 달려들면 장사가 있겠냐?”
“그런데 우리 학교에는 충분히 그만큼 강한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잖아요.”
“뭐, 그렇기야 하지만...”
차논도 그건 인정한다. 그럴 정도로 강한 초능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미린초, 중, 고등학교를 통틀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한 명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계를 모를 정도로 강하고 말이다. 그래서 차논은 바로 이어 말한다.
“그 ‘초능력자 X’는, 민이만큼은 강하지 않았지. 거기에다가 조심성도 없어서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리지 않았고. 그러니까 그 녀석을 잡으려고 초능력자 수십 명이 달려드니, 버티겠냐!”
“그래요...”
세훈도 그걸 듣다가 말한다.
“혹시 선배님, 그런 이야기들을 묶어서 책으로 낼 생각은 없나요? 만약 그런 책이 여기 도서관 서가 한켠에 당당히 꽂혀 있다면, 그거 보려고 아마 여기 줄을 이룰걸요? 어때요?”
“글쎄... 나는 그 정도로 글을 쓸 줄은 모르는데.”
차논은 그렇게 말하고는, 프로젝터를 켜서 자신이 만든 영상 목록을 몇 개 보여주며 말한다.
“더 좋은 수단도 얼마든지 있고 말이지.”
“글쎄, 차논.”
듣고 있던 리하르트가 말한다.
“나는 글만큼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 그런가.”
“휴...”
그 시간, 영화부실. 마치 영화관에 정말로 들어오기라도 한 듯 어두웠던 영화부실에 다시 조명이 들어오고,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던 영화부원들은 하나둘씩 스르르 몸을 일으킨다. 죽어 있다가 생명을 새로 받아서 일어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 <더 카즈>라는 영화가 생각보다 볼 만했나? 물론 알맹이는 예술영화에 가까워서 사람에 따라서는 좀 보기 지루하기도 했겠지만.”
“그래...”
수빈은 알렉스의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 자동차 연구 모임이었나? 거기 애들은 처음에는 좀 불만스러워 보이더니, 좀 지나니까 잘 보네? 나는 또 그 애들이 불만을 내비치고 그럴까 봐 불안했는데, 다행이야.”
그런데, 커튼을 걷고 동아리방 안의 불을 켜 보니, 안의 분위기는 알렉스와 수빈이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르다. 안이 조용해진 건 맞지만, 그건 자동차 연구 모임 부원들이 진지하게 앉아서 본다든가, 아니면 집중하고 본다든가 하는 게 아니었다. 한 명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알렉스는 상황을 깨닫는다.
“아... 끝났냐... 왜 이렇게 졸리지 이거...”
셰릴의 잠이 덜 깬 목소리가, 영화부실 안에 낮게 깔려 들려온다. 마치 안개나 짙은 장막이 덮은 가운데에서 귀신이나 동물의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한 15분인가... 20분 지났는데 잠들어 버렸지 뭐야...”
“아니, 선배님, 그럼 지금까지 쭉 자고 있었다는 건가요?”
“아, 아니,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셰릴은 마치 자신이 잠을 잔 사실 자체를 없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선언하듯, 시치미를 떼고서 오히려 큰 소리로 말한다.
“내가 잤다니! 졸기는 했어도 그게 잔 거하고는 다른 거지!”
“그러니까 선배님?”
알렉스는 얼굴에 웃음기를 빼고서 말한다.
“만약에 선배님이 그 시간대에 자거나 한 게 아니라면, 94분에서 98분 사이에 있는 대화 내용을 대략적으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어... 어, 그건, 맞아!”
셰릴은 곧바로 임기응변을 발휘한다. 대략적으로 말한다고 한다면, 그냥 좀 모호하게 말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때마침 슬레인과 준후를 비롯한 다른 자동차 연구 모임 부원들도 자리에서 일어선다. 슬레인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금세 눈치를 챈 건지, 셰릴을 보고는 몸짓 손짓을 다 써 가며 무언가를 해 보려고 한다. 하지만 셰릴에게는 그것까지는 닿지 못한 건지, 바로 입을 연다.
“좀, 많이 감동적인 대사였지. 자기 몸을 희생해서 친구를 구해낼 거라는... 그런 말이었어.”
듣고 있던 알렉스와 수빈, 그리고 다른 영화부원 모두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는다. 아마도 셰릴이 중학교 3학년 정도만 됐어도 곧바로 웃음이 터져나왔을 것이다.
“선배님? 그 시간대는 말 그대로 추격씬이었는데 그런 감동적인 대사가 나오지는 않았겠죠?”
“어... 어?”
셰릴은 무슨 상황인지 눈치를 못 챈 건지, 더듬거린다.
“하지만 임기응변은 높이 평가해 드리죠. 그런 상황에서는 대부분 당황해서 이말 저말 하기 마련인데, 역시 나름 인플루언서 정도 되니까 그런 거겠죠?”
“어... 그렇지...”
칭찬인지 아니면 핀잔인지 알 수 없는 알렉스의 말을 들으며, 셰릴은 자신이 지금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고민에 빠진다. 그러나 이윽고, 셰릴은 하나의 결론을 내린다.
“그래도 고마웠어, 알렉스, 나중에 만나면 차 안에서 보기 좋은 영화를 몇 편 추천해 줄 테니...”
“아, 좋아요.”
알렉스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셰릴이 아닌 옆에 있는 슬레인에게 다가가서 말한다. 셰릴은 자신을 지나쳐 갔다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하려고 하지만, 그러지는 못한다. 엄연히 매니저는 셰릴이 아닌 슬레인이니 말이다.
“그래, 그렇게 가만히 있는 게 더 낫다고.”
그리고 이곳은 만화부실. 민이 일어나려다가, ‘금방 뭐라도 해결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막 다시 자리에 앉으려는데...
“야, 토마!”
미아가 다시 한번 큰 소리로 말하자, 토마는 이제 온몸을 벌벌 떤다. 하마터면 옆에 있는 음료수가 든 잔까지 쏟아 버릴 뻔했지만, 가까스로 그건 피한다. 그래도 미아의 그 잔뜩 화가 난 얼굴을 보니 몸이 마비되는 것 같은 기분은 어쩔 수가 없다.
“서, 선배님, 저는 단지...”
그 모습을 보던 민도 이제는 정말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토마를 향해 바로 다가오는 미아에게 뭐라도 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해친다든가, 아니면 다치게 한다든가 하려고 할 의도는 없지만, 지금은 토마와 다른 친구들에게 일어날 더 큰 불상사를 막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민의 그 모습을 보자마자, 심상치 않게 상황이 돌아감을 눈치챈 다른 친구들도 일제히 그쪽으로 다가온다. 만화부원들, 그리고 홈카페 동아리 부원들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막 비몽사몽한 상태에 빠지려던 아론과, 구석에 숨어서 자꾸만 걸려오는 전화를 막 끄던 토니, 심지어 막 우아한 자세로 음료수를 마시려던 토쿠, 그걸 시중들던 타이나, 그리고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현애도 예외는 아니다. 막 디저트를 집어 먹으려던 지온 역시 마찬가지다. 그 상태가 약 5초 정도 이어진다. 마치 슬로모션이 지나가듯,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시간은 마치 1초가 1시간이 되어 버린 듯 흐른다.
‘안돼. 이제는 내가 나서야겠어!’
민이 막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서, 막 자기 초능력을 발동하고서 무언가 하려는 바로 그때, 미아의 입이 움직인다.
“토마...”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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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3-07-23 23:34:58
해진은 해진대로 아멜리는 아멜리대로 심경이 복잡하네요.
게다가 아멜리의 마음은 승자이긴 해도 결코 기뻐할 수는 없는. 오히려 패한 것을 승복한 해진이 마음은 더 편할 것 같네요. 아멜리가 본심을 내보이면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도 더 안 좋을 건 명백할 거니까요.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모면하려던 셰릴은 오히려 아무 말도 안 한 것만도 못해버리고...
만화부실의 좌중의 시선은 모두 격분한 미아에게 모이네요. 정말 일촉즉발의 사태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텐데, 민의 노력은 과연 결실을 맺을지...뭐라도 안 하면 폭력사태는 막을 수 없겠죠.시어하트어택
2023-07-30 21:54:47
해진은 이러나저러나 자신의 패배이므로 깔끔하게 인정하면 그만이지만, 아멜리는 전리품(?)을 대놓고 가져가겠다고 했다가는 후배에게서 일방적으로 빼앗아 가는 꼴이 되기 때문에 난감해지죠.
셰릴의 저 에피소드는 여기저기서 들은 에피소드를 짜깁기한 겁니다. 만들면서 저도 웃었죠.
SiteOwner
2023-08-19 19:36:34
역시 이런 데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애들이라는 게 드러나는군요.
아멜리는 이겨도 이긴 게 아닌 것같고, 셰릴은 어떻게 둘러대다가 완전히 헛소리를 해버린 게 들켜서 여러모로 난감해 하고, 역시 이런 것을 보니 학교 동아리의 교류행사답다는 느낌이 듭니다.
역시 개인의 초능력이 엄청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정확한 외연을 모르면 답이 없지요. 게다가 상대가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면 결국은 중과부적. 전승되어 오는 많은 괴담에 교훈적인 기능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 초능력자 X의 이야기도 그런 기능을 훌륭히 수행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역시 글만큼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은 없고 그래서 사람은 글을 쓰는 건가 봅니다.
미아의 폭주, 정말 그대로 놔두면 대사건으로 벌어질 것 같습니다.
시어하트어택
2023-08-20 21:09:38
학교 안의 교류행사니까 그나마 어느 정도 축소된 모양새로 진행되는 거죠. 아멜리의 경품 추첨은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것 같습니다만...
초능력자 X의 이야기는 시간만 된다면 한번 단편 같은 것으로 만들어 볼 의향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