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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은 지끈거리는 머리에 손을 대고서, 제대로 누군가를 보기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레이리의 말에 바로 대답한다.
“더 알려고 하지 마...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라고...”
“뭐야, 너 아까부터 왜 그러냐? 정말 뭐 숨기는 거 있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너는 몰라도 되는 무언가가 있어... 네가 더 알려고 하면 다칠지도 몰라.”
그리핀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레이리는 더 묻기를 그만둔다.
“에이, 알았어.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지. 나 먼저 간다. 조심해서 가.”
레이리가 그렇게 말하고서, 그리핀을 놔두고 먼저 교실을 떠나자, 그리핀은 ‘하’ 하고 마치 깊은 곳에 담아 둔 것 같은 숨을 크게 내쉬며, 정수기에서 물을 틀어서 마신다. 그러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다. 물론 에너지 드링크를 마신다든가 할 때만큼은 아니지만. 순간, 무언가 잊고 있었던 게 그리핀의 머릿속에 다시 떠오른다.
“어...? 잠깐...”
그리핀은 그 순간,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버리기라도 한 듯, 순간 표정이 굳어 버린다.
“잠깐, 내가 그걸... 아직 거두지 않았던 건가?”
그리핀의 추측이 맞다면, 그리핀은 아까 아침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능력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놓고, 지금까지 쭉 그걸 거두지 않았다. 그게 벤치인지, 아니면 분수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는 건, 이미 일은 그리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흘러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아, 안돼! 빨리!”
하지만, 사건은 이미 그리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시간, 학교 근처 소공원.
“이야, 이런 허접스러운 건 누가 만들었나 몰라.”
소공원의 분수대 옆에는 누군가가 서서 둥둥 떠다니는 분수대와 닮은 무언가를 보고서 웃음을 터뜨리고 있다. 이 시간에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한량은 아니고, 흰 옷을 입은 피오와 검은 정장을 입은 수행원 한 명이 VP재단 본부로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분수대를 목격한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이런 초능력이 있는 사람은 몇 명 있는데...”
그렇게 말하고서 피오는 얼른 자리에 앉아서 수행원에게 주위를 지키게 한 다음, 태블릿을 켠 다음 VP재단의 데이터베이스에 들어가서 가지고 있는 데이터를 유형별로 대조해 본다.
“어디... 이런 유형은... 몇 명 있는 것 같은데... 등록코드 HT-01-3086...”
그렇게 찾아보니, 비슷한 유형의 초능력자 5명이 보인다. 그런데, 피오가 아무리 봐도 그 사람들 중에 이 주변에 사는 사람은 없다. 파악한 자료만 놓고 봐도 이 사람들의 자택, 그리고 오고가는 학교나 직장, 아니면 복지센터 같은 곳은 이 공원에서 멀다. 그렇다는 건, 피오에게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누군지 몰라도 등록되지 않은 초능력자의 짓이지. 그리고 정황상 요즘 초능력자가 급증한 저 학교의 학생이겠지...”
그리고 피오는 곧장 전화를 들더니, 연락처 중에 ‘정보원’ 북마크를 고른 다음, 그 중에 또 몇 명을 추려낸다. 메이링을 포함해 몇 명의 연락처가 나온다. 그리로 곧장 자신이 찍은 영상을 전송한다. 그걸 보던 수행원이 말한다.
“다 됐습니까?”
“그렇네, 아펠바움 실장. 자네 혹시 들어가서 할 일이 있나?”
“아니요... 딱히.”
“그러면 근처에 카페에라도 가서 자료를 좀 정리해 보자고.”
“네?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 레이리는 막 복도를 걸어가는 길인데, 누군가와 마주친다.
“어, 올리버냐?”
“그래. 네 친구들 중에 또 사고 치는 녀석은 없어? 에밀리오 말고.”
올리버가 대뜸 그렇게 말하니, 레이리는 어이가 없었던 건지, 마치 다 들으라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야, 너는 하는 말이 뭐 그러냐? 네 말 들으면 나도 이상한 사람인 줄 알겠네.”
“내가 너보고 이상하다고 하는 게 아니야. 어쩌다 보니까 네 주변의 애들이 그런 걸 어떡하냐.”
“뭐야! 내 친구들 중에 이상한 애가 누가 있는데! 안 말하면...”
레이리는 올리버의 그 말에 발끈했는지 목소리를 높이려고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올리버의 말에 그런 기운이 쑥 들어가 버리고 만다.
“우선 첫 번째로, 에밀리오는 알지? 에밀리오가 무슨 짓을 했냐면, 사진에다가...”
“알았어, 알았다고! 네 말이 무슨 말인지는 잘 알아. 그러니까, 남들 걱정해 주는 건 좋은데, 적당히 해야지! 그만 네 갈 길을 좀 가라! 응?”
올리버는 레이리의 말을 들어 주기로 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기 갈 길을 가려는 듯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하지만 몇 걸음 가다가 멈춰서더니 레이리를 돌아보며 말한다.
“친구는 잘 사귀라고.”
“아니, 올리버,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내 말이 괜히 하는 말이 아니라니까?”
그러고서 올리버는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그런 올리버의 뒷모습을 본 레이리가 뭐라고 항변해 보려고 하지만, 올리버는 이미 멀리 가고 있다. 레이리는 뭐라도 말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큰 소리로 말하지만, 올리버에게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야, 올리버! 내 말도 좀 들어!”
오후 2시, 만화부실 출입문 앞에는 한 명의 남학생이 서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이리저리 주위를 살피기도 하고, 시선을 한군데에 두지 못하고 자꾸만 다른 곳을 본다. 그런 그 남학생의 시선이, 어느새 한곳으로 쏠린다. 반대편에서 다른 한 명의 남학생이 이쪽으로 오는 걸 확인한 그는, 바로 기다렸다는 듯, 반대편에서 다가오는 남학생을 향해 손을 흔들며 부른다.
“야! 여기 보라고!”
“어?”
반대편에서 오는 남학생이 가까이 오더니 말한다.
“야, 치히로, 너는 왜 나보다도 먼저 여기 온 거냐? 만화부장도 아니면서.”
“아, 하하하, 드디어 어제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됐거든.”
“어, 네가 하려는 그 말은...”
윤진은 어제 저녁에 치히로와 만난 바로 그때를 떠올린다. 그때, 윤진의 입에서는 윤진이 의도한 것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질문이 튀어나왔다.
“빌런은 잘 잡으러 다니냐고 물어봤었지.”
“아... 그랬어.”
치히로의 그 말에 윤진이 어렴풋이 어제의 그 상황을 떠올리며 대답하자, 치히로는 마치 윤진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마치 미리 준비된 것 같은 말을 입밖에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래! 네 말대로, 빌런은 잘 잡으러 다녔지. 그리고...”
치히로는 그렇게 말하며, 미리 준비해 온 슬레인과 토오루가 함께 찍힌 사진을 보여준다. 올리버만 사진에 나와 있기는 하지만, 다른 4명이 마치 인증이라도 하듯 사진 위에 이런저런 글을 남겨 놨다. 그 사진을 보더니, 윤진이 뭔가 이상하게 느꼈던 건지,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야, 왜 그러냐? 사진에 뭔가 문제라도 있어?”
“어...”
사실 윤진은 메이링에게서 조금 전에 ‘슬레인과 토오루는 마왕성을 만드는 능력자가 아니라’는 메시지를 받은 참이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해 주자니, 치히로가 얼마나 실망할지, 윤진으로서는 짐작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윤진은 고민하다가, 이내 뭔가 결심이라도 선 건지, 한마디 한다.
“야, 치히로, 일단은 들어가서 이야기해 보고, 지금 이 사진은...”
“아니, 봐봐! 올리버가 분명히 아파트단지에 마왕성이 나타난 걸 확인도 했고, 또 거기서 싸워서 이렇게 잡은 거라고. 이게 확실한 증거잖아? 맞지?”
“어...”
윤진이 막 뭐라고 말을 해 보려는데...
“우와, 벌써 와 있었어요?”
“그러게. 선배님 빠르다!”
만화부원들인지 히어로 동아리 부원들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몇 명의 학생들이 윤진과 치히로를 보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오는 게 보인다. 둘이 돌아보니, 라일라와 베로니카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이야, 너희들 벌써 오니? 올리버하고, 재연이는?”
“금방 온대요.”
라일라와 베로니카의 그 말에 치히로는 고무라도 된 건지, 조금 전보다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자, 이제 다들 오고 있다니까, 너도 너희 만화부도 다들 기대하는 게 좋을 거야. 알겠지?”
“아... 그, 그래.”
윤진은 어색하게 대답한다.
그리고 그 광경을 목격한 만화부원 몇 명이 있는데, 그 중에는 민도 끼어 있다.
“응? 윤진 선배님이 왜 저렇게 뭘 숨기는 것 같대?”
“나도 몰라. 둘이 무슨 일 있었나?”
“그러게. 왜 둘 다 저렇게 진지한 표정인지 몰라.”
물론 그 광경을 보는 민은 윤진과 치히로가 왜 저러는지 대략은 알 것 같다. 치히로가 사진을 보여주면서 뭐라고 하는 걸 보니, 왜 저러는지 대략은 알 것 같다. 하지만 그 이유를 말하는 건 조금 미루기로 한다. 그렇게 일찍 말해 버리면, 지금의 분위기를 확 깨 버릴 수도 있다는 건 민도 잘 알고 있다.
한편 그 시간, 방송실.
“드디어 내일 추첨이네요, 안 그래요?”
홈카페 동아리의 부원 한나의 말에, 아멜리는 잠시 시선을 피하는 듯 눈을 굴리다가, 이윽고 입을 연다.
“어, 그래. 너희들도 기대하고 있는 거지?”
“에이, 그럼요. 어떤 상품이 나올지, 안 기대하는 애들은 없을걸요?”
한나가 그렇게 말하자, 아멜리는 순간 무슨 말을 할지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 또다시 가만히 앉아 있다. 그게 꽤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건지, 한나는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말한다.
“저희는 기대하고 있으니까요, 선배님이 부디 잘 뽑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어... 어! 그렇지. 그래야지.”
아멜리 역시도 그렇게 웃으며 말하지만, 속으로는 웃지를 못한다. 물론 경품 추첨이라는 게 무작위로 뽑아서 나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후배들이 압박을 주니, 아멜리 역시도 괜히 불안하다. 그래도 일종의 안전장치로 경품 추첨은 무작위라는 말을 해 놓기는 했지만. 아멜리의 눈치를 보던 조셉이, 이윽고 자신이 한마디 해야겠는지, 뭐라고 말을 하려던 아멜리를 옆에 제쳐 놓고 말한다.
“자, 자! 경품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고, 이제 음료 시연을 한번 볼까요?”
조셉이 괜히 그렇게 말한 것도 아니고, 마침 미아의 앞에 있는 음료가 든 병들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으니, 방송부원들뿐만 아니라 홈카페 동아리 부원들까지 거기에 일시적으로 시선이 쏠린다. 조셉은 바로 그걸 놓치지 않고 말한다.
“자, 그럼 미아 선배님, 저희는 이제 기다리고 있거든요? 선배님이 홈카페 동아리 매니저니까, 한번 보여주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다른 방송부원들이 일제히 환호를 보내니, 미아로서도 어쩔 수 없다. 사실 미아가 하고 싶은 건, 경품에 대해서 더 압박을 넣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니, 일단은 조셉의 말처럼, 음료 시연부터 보여줘야 할 것 같다.
“좋아요, 그럼... 갑니다.”
미아가 그렇게 말하며 이윽고 음료를 섞기 시작한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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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갈
2023-09-15 17:32:21
사슴은 아름다운 뿔을 자랑하다 그 뿔을 탐내는 자에 목숨을 잃고, 호랑이는 아름다운 가죽과 놀라운 힘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겁먹은 강아지가 울부짖는 함정 속에 들어갔다가 잡혀서 털가죽이 벗겨지고 말죠. 그리핀의 그런 능력이 바로 자신에 가장 큰 위협이 된다는 것은 이제서야 본인이 깨달은 것 같은데...결국 사고를 쳤네요.
올리버에게 한방 먹은 레이리, 불쌍하지만 처신이 그러하니 답이 없어요.
용의선상에 올랐던 빌런들이 착착 소거되니 그건 그것대로 좋긴 한데, 역시 사람의 마음이란...
압박받는 아멜리도, 압박하고 싶어하는 미아도 역시 각자의 사정이 있긴 하지만 말은 못하네요. 역시 여기서는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속편할지도요.
시어하트어택
2023-10-03 22:48:00
레이리에게는 잘못 같은 건 없죠. 어쩌다 보니 친구들이 이상한 짓을 하고 있고, 그러다 보니 귀찮게 되는 것뿐입니다. 레이리의 인성이 이상하다면 조만간 크고 작은 사고를 하나 치겠죠.
SiteOwner
2023-09-26 23:53:55
그리핀이 무능했다면 저렇게 웃음거리가 될 일은 없었을 것인데 하필이면 그 능력 덕분에 제대로 망신을 당하는군요. 정말 재능낭비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도 VP재단이 파악하고 있다는 것에서 섬찟함이 느껴집니다. 하긴 초능력자들이 특정지역에 출몰하고 있고 그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모르는 것이 더 위험하니 이해는 되고 있습니다.
역시 행동력이 발군이군요. 바로 저런 게 젊음인 것일까요. 하긴 저는 10대 때도 저렇게 행동력이 좋지는 않았습니다만...
시어하트어택
2023-10-03 22:49:37
그리핀 자신의 무의식의 발로일 수도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자기 초능력을 제대로 쓸 수만 있었어도 저런 일은 없었겠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결국 자신의 행동 때문에 실마리를 잡히고 말았으니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