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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10년은 감수했네.”
그리핀이 그렇게 안도하며 계속 풀숲 밑을 기어가지만, 지금 그리핀은 아직도 아까 아침의 그 일의 여파로 온몸이 자꾸만 욱신거리고, 거기에다가 또 무슨 일이 닥쳐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쉬이 마음을 놓지 못하는 상황이다. 아무튼, 그리핀은 다음을 도모하기 위해 공원의 바닥 풀숲을 기어서, 옷에 풀과 온갖 열매를 다 묻혀 가며 그곳을 벗어나, 공원의 다른 출입구 쪽으로 막 기어간다. 도중에 어딘가에 찔린 것 같고, 옷 안으로 뭔가 이물질이 들어가는 것 같고, 또 입에 모래나 잔디 같은 게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괜찮다. 아까 민과 친구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까지 갈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렇게 약 3분에서 5분 정도, 겨우 민과 친구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착했을 그때.
“어...? 너 뭐 하냐?”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리핀의 머리 위에서 들린다. 급히 둘러보니, 두 사람의 발이 보인다. 흰 단화를 신은 사람 하나, 그리고 정장 구두를 신은 사람 하나. 그리핀이 얼른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두 사람이 그리핀을 이상하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다. 그러자 그리핀은 재빨리 되묻는다. 일단 뒤는 어떻게 될지, 그리핀도 모른다.
“네? 저요? 저라면... 일단은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그리핀은 일단 입을 열고 본다. 지금 앞에 있는 이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모른 채로 말이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에게 닥쳐올 어떤 운명 같은 것도 모르고서 말이다.
한편 그 시간, 슬레인은 잔뜩 상기된 얼굴을 하고서 준후와 함께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아까 마주친 라일라는 적당히 모호하게 말한 다음, 라일라가 뭔가 더 물어보려고 잠시 뜸을 들이던 틈을 타 자리를 벗어난 참이다. 조금 전까지 빠르게 달린 탓인지, 입에서는 거친 숨이 계속 나오고 있다.
“에이, 오늘은 왜 이렇게 이상한 일들만 많이 일어나냐? 왜 자꾸만 나보고 그 마왕성을 만들었다고 그래?”
“왜, 그 그리핀인가 뭔가 하는 녀석이 만들었다는 걸 너보고 그런다고?”
“맞아. 정작 그리핀은 오늘 어디 갔는지 영 보이지도 않고.”
그러고서 슬레인은 자동차 연구 모임 부원들 전체에 메시지를 보낼 참이다. 오늘은 저녁 모임 같은 건 없으니 다들 잘 쉬고 내일 다시 보자는 그런 내용을 쓰고, 막 보내려고 하는데...
“응? 뭐냐?”
슬레인보다 앞서, 누군가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다. 그건 셰릴의 메시지다.
“응? 선배님이 왜 전체공지로 메시지를 써? 매니저도 아니면서?”
“나도 몰라. 한번 봐봐.”
셰릴의 메시지는 한눈에 봐도 요란하게 꾸며져 있는데, 그 장식 때문에 글자가 오히려 안 보일 지경이다. 그 장식을 모두 걷어내고 메시지를 읽어보니,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 저녁 8시에 마리나센터 야외광장에서 방송 있으니까, 다들 거기로 와 줘. 오늘은 특집방송이니까, 다들 준비 알아서 잘 하고]
겉으로는 ‘알아서 잘 하라’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 밑에는 대놓고 드레스코드라든가, 피켓의 종류가 적혀 있다.
“어으...”
슬레인은 그 메시지를 보자마자 탄식이 가득 섞인 한숨을 내뱉는다.
“아무리 선배님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건 좀...”
“뭐, 고개 넘어 고개지. 그 빈센트인지 뭔지 하는 선배가 맥을 못 추니까 저렇게 틈을 비집고 나오는 거 좀 보라고.”
준후 역시도 셰릴의 그 메시지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는지, 불만 섞인 말을 한다.
“내가 선배만 아니었으면, 내 능력으로 꽤 많이 괴롭혀 줬을 텐데. 안 그러냐?”
“말도 하지 마. 그런 초능력은 정말 다시 겪고 싶지도 않아. 맛보기라도 그건 무섭다고.”
“내가 무슨 무서운 초능력이 있다고? 끽해 봤자 그냥 남의 머릿속에 메시지를 주입하는 것뿐인데.”
“바로 그거라고! 그게 남들한테는 무서울 수도 있는 거야.”
“어... 그런가?”
준후는 그렇게 되묻고는, 주변을 한번 둘러본다.
“어디 이상한 사람은 없는 거지?”
“그래. 이대로 오늘은 쭉 없었으면 좋겠는데.”
슬레인 역시 그렇게 희망사항을 말하고는, 이윽고 갈림길이 나오자, 준후와 헤어진다.
한편 그 시간, 민과 친구들은 어디로 숨어 버렸는지 보이지 않는 그리핀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는, 일단 헤어져서 집에 들어갔다가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는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어떻게 다들 시간은 만들어냈네? 토마는 가족 약속 때문에 가는 게 어렵다더니...”
그래도 다들 시간을 만들었고, 오랜만은 아니더라도 실컷 즐길 시간을 만들어냈으니, 좋으면 좋은 거지 나쁜 건 아니다. 물론 아까 도망가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그리핀이 생각나기는 하지만, 그건 중요한 건 아니다.
“그래, 한번 가 봐야지. 오늘은 또 뭘 하고 놀지?”
♩♪♬♩♪♬♩♪♬
그때, 민의 전화의 수신음이 울리기 시작한다. 급히 꺼내 보니, 전화 한가운데에는 반디의 사진과 이름이 찍혀 나온다.
“어... 누나잖아?”
그러고 보니, 이 시간에 반디가 전화할 일은 거의 없다. 오후 4시에서 5시 사이의 이때에는 연락을 한다고 해도 메시지 같은 걸로 하는 게 대부분이다. 학교 연구실에 거의 박혀 있다시피 한다는 것을 민도 모를 리가 없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는다.
“혹시 이것도 이상한 초능력자가 하는 일 아닌가... 왜 그런 게 있다고 들었는데...”
민도 친구들에게 얼핏 들은 게 있다. 이런 쪽으로 능력을 지닌 초능력자가 전화번호나 발신인까지 조작해서 각종 사기라든가 장난을 치고 다니는데, 기술적인 수법과는 또 다른 것이어서 이쪽으로는 추적이 쉽지 않다고 말이다.
“진짜 누나가 맞나?”
그렇게 고민이 들지만, 그런 걸 핑계로 전화 받는 걸 지체할 수는 없다. 곧바로 전화를 받아 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전화 너머의 반디의 목소리는 꽤 힘이 없다. 무엇 때문인지 민도 분간하기는 어렵지만, 반디에게 좋지 못한 상황이 있었음은 알 수 있다.
“누나 왜 지금 전화했어? 무슨 일 있어?”
“아... 오늘은 집에 좀 일찍 왔어. 속이 좀 많이 안 좋거든... 이따가 보자.”
“어? 누나? 무슨 일이야? 왜 속이 안 좋다고?”
더 물어 보려고 하지만 전화는 이미 끊어졌다. 전화를 끊은 민은 황급히 집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그래? 반디 누나, 무슨 일이야?”
그렇게 민이 발걸음을 막 옮겼을 즈음, 누군가와 마주치게 된다.
“응? 뭐야...”
민이 얼굴을 보니, 언주도 집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동아리 교류 행사 때 입은 메이드 의상을 아직 벗지 않은 건지, 한눈에 보기에도 중학생 같지는 않아 보인다.
“아직도 그걸 입고 있었어? 부활동 하는 시간도 아니잖아.”
민의 그 말을 듣자, 언주는 뭘 그런 걸 다 물어보느냐는 듯 말한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잖아! 중요한 건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지.”
“그래. 어디 가고 있는데?”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한다면... 알겠지?”
“혹시 너도 연락을 받은 거야?”
“어... 딱히 그게 연락을 받은 거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가 보자.”
민의 뒤를 따라, 언주도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소공원 근처에 있는 어느 카페의 유리창 앞. 그리핀은 두 사람의 자신보다 키가 큰 남자들 앞에 서서 무언가 변명을 늘어놓고 있다.
“아니, 그러니까, 저는 여기서 이상한 짓을 한다든가 한 게 아니라니까요?”
“어, 그러면 옷에 묻은 풀이라든가 흙, 먼지 같은 건 놀다가 그렇게 된 거라고 치고...”
정장 입은 남자가 그렇게 말하자, 그리핀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슬며시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한다. 별 탈 없이 지나갈 거라는 희망이 그리핀의 머리에 자리잡기도 전에, 옆에 있는 흰 옷을 입은 머리가 긴 남자가 그리핀의 옷깃을 세게 잡더니, 옆의 정장 입은 남자를 돌아보고 말한다.
“아펠바움 실장,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지. 지금부터 내가 어떻게 말하는지를 잘 보라고.”
“저... 도대체... 왜 이러세요...”
그리핀은 자신을 도망가도록 놔 주지 않는 피오의 행동에서 무서움을 느끼기라도 한 건지, 벌벌 떨며 말한다.
“제가 도대체 뭘 했길래...”
“그리핀 로널드 휴즈 군, 나는 단지 자네에게서 합리적인 의심이 들어서 거기에 대해 질문을 하려는 것뿐이야. 질문은 그 이상으로 넘어가지 않지.”
“제 이름은 또 어떻게 아세요!”
“거기 학생증에 보이잖아.”
피오의 그 말을 들은 그리핀은 황급히 목걸이로 된 학생증을 감추고는, 겁에 질린 듯 피오를 보며 말한다.
“저한테 난데없이 왜 이러세요! 자꾸 이러면 경찰에 신고할 거라고요!”
그 말을 옆에서 듣고 있던 아펠바움 실장이 그리핀의 말이 가소로운 건지 실실 웃고, 피오는 그런 웃음을 참고서 한마디 한다.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우리는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지. 자, 아까 오전에 있었던 일, 그리고 어제 저녁에서부터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설명해 볼까?”
“아니... 왜 이러세요! 저 오늘도 늦게 가면 엄마한테 혼난다고요! 아니, 그보다도, 아저씨 설마 어제 밤에 저를 납치해서 가둔 그 사람들 아니에요?”
“잠깐, 납치?”
그리핀이 한 그 말에, 피오와 아펠바움 실장의 눈이 둥그렇게 뜨인다.
“방금 납치라고 했나? 그래, 그게 누가 한 거지?”그리핀은 피오의 그 말에 어느새 경계심이 약간은 풀린 건지, 아니면 입이 근질거리기라도 하는 건지, 뭔가 말을 더 꺼내려고 한다. 그런 그리핀을 본 피오는, 마치 ‘모든 게 계획대로’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한다.
“자네의 집에는 내가 잘 말해 두도록 하지. 자네는 그저 나하고 같이 가서, 자네가 아는 모든 것들을 이야기해 주면 되네. 어떤가?”
“아... 좋죠!”
그리핀은 그 길로 피오와 아펠바움 실장을 따라 나선다.
그리고 조금 지난 시간, 민의 집.
급히 집에 들어간 민은 우선 반디의 방부터 찾아 들어간다. 예상대로 반디는 앓는 소리를 내며 자기 방의 침대에 누워 있다. 어젯밤에 민의 방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의 그 기세는 지금 보이지 않는다.
“왜 그래, 누나? 무슨 일이야?”
민이 그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은 반디의 눈에, 뒤에 서 있는 언주도 눈에 들어온다.
“너는 왜 왔어! 내가 오라고 한 적 없는데!”
“어... 저요?”
언주는 반디의 말에 능청스럽게 대답한다.
“저는 그냥 같이 왔을 뿐이라고요.”
“그래... 와 줬으니까 고맙기는 한데...”
반디는 언주가 입은 메이드복이 아무리 봐도 이상해 보이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이윽고 다시 앓는 소리를 내며 말한다.
“아, 아침에 먹은 게 뭐가 잘못됐나 봐.”
“아침에 먹은... 거라니?”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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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3-10-15 18:41:57
결국 그리핀이 기어다니다가 누군가를 만났네요. 예상한 것처럼 변호사 메이링은 아닌 것 같지만 충분히 의심을 살만한 상태네요. 그리고 슬레인과 준후는 여러모로 고생하고 있고, 셰릴의 자의식과잉은 메시지에서도 드러나고...
그런데 그리핀이 엉겁결에 내뱉은 말에 피오와 아펠바움 실장이 뭔가 중요한 정보의 단서를 찾았나 보네요.
반디가 저렇게 앓는 것, 역시 이전의 그 바뀐 아침식사 메뉴가 문제였겠네요. 대체 누구의 짓인지...
시어하트어택
2023-10-15 22:41:29
메이링은 아니지만, 더 큰 상대를 만났죠. 그것도 VP재단의 오너 형제 중 한 명과 그 수행원으로 말이죠. 정말 제대로 임자 만난 거죠.
SiteOwner
2023-10-19 00:47:09
그리핀이 만난 그 두 사람 중 피오가 있군요. 전작에도 나온 적이 있는 거물...
셰릴같이 메시지를 보내는 사람은 현실에서도 창작물에서도 접한 적이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예전의 여자친구가 그랬던 적이 있었고 창작물에서는 역시 내 청춘 러브코미디는 잘못되어 있다(やはり俺の青春ラブコメはまちがっている。)의 유이가하마 유이(由比ヶ浜結衣)가 그렇습니다. 그래도 셰릴처럼 자의식과잉으로 반감을 사는 그런 인물은 아니었습니다만...
역시 음식에 문제가 있었나 보군요. 식중독은 여러모로 무섭습니다.
시어하트어택
2023-10-22 21:41:06
셰릴은 선배이다 보니, 슬레인과 준후의 반응은 친구관계의 그것과는 상당히 다를 겁니다. 우선은 압박감에다가, 거의 명령조이기까지 하니, 부담감은 백배 더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