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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핀은 어느덧 울상까지 짓고 있다. 그건 체념과는 약간 다른 감정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그 상황에서 그리핀이 뭔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게 그것이다. 그 광경을 보던 민과 친구들은 피오와 아펠바움 실장이 가라는 손짓을 하자, 두 사람에게 인사하고는 그곳을 떠난다. 민이 마지막으로 그리핀의 표정을 보니, 정말 세상의 불행을 모두 떠안기라도 한 듯한 울상이 되어 있다.
“야, 토마.”
“왜? 나는 이제 사고 안 친다고 했잖아?”
“너도 저렇게 누가 오고 그랬냐?”
“에이, 말도 마.”
토마는 거기서 더 말하지 않으려고 한다. 민은 토마가 하려는 말의 뜻을 알았는지, 빙그레 웃더니, 이윽고 친구들을 따라 길을 나선다. 그렇게 길을 걷던 중, 문득 카일이 건물의 벽에 붙어 있는 포스터 하나를 발견한다.
“마리나센터에서... 인디밴드가 공연한다고 하네.”
“에이, 관심 없어. 카일이나 유는 혹시 관심 있을지도 모르지만.”
카일이 토마의 그 말을 듣자마자 발끈했는지 목소리가 커진다.
“뭐야! 나는 딱히 관심이 있어서 저걸 본 건 아니라고! 그냥 저게 내 눈에 보여서 그런 거야! 그리고 내가 저기를 가자고 하겠냐? 가면 사람만 많겠구만...”
카일이 그렇게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항변하자, 민은 알겠다는 듯 웃더니, 마침 옆에 있던 토마의 등을 툭 치고는 가자는 손짓을 한다.
“아... 그래. 내일 보자.”
그날 저녁 7시 50분, 마리나센터 옆에 있는 해변공원. 옆에 있는 마리나센터에서는 공연이 한창이어서 평소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지는 않지만, 그래도 목요일 저녁이라는 시간이다 보니 공원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보인다.
“이야- 방송하기 딱 좋은 날인데?”
꽤 복장을 발랄하게 차려입은 한 사람이, 공원에 하나둘씩 모이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마침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여러 가지 방송 장비들을 앞에 늘어놓고, 홀로그램 화면을 켜서 앞에 보이는 바다와 야경을 보여준다. 그리고 방송을 켠 지 약 1분, 금세 조회수가 늘어나는데, 모두 셰릴의 고정 시청자들이다.
“여러분,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도 SRTV, 시작합니다!”
셰릴이 평소와는 달리 매우 격한 목소리와 들뜬 행동, 그리고 주위의 공원의 풍경까지 보여주며 말하자, 시청자들은 거기에 호응하기라도 하듯 하트나 스마일 아이콘으로 대화창을 가득 채운다.
“여러분, 아까는 방송이 이상하게 중단되어서 깜짝 놀라신 분들도 많았죠?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그런 걱정은 싹 날려 버릴 테니까요!”
그렇게 과장되게 말하며 시선을 끄는 셰릴이지만, 속으로는 매우 불안한지, 이리저리 시선이 흔들린다. 지금 속으로 하는 말은 완전히 정반대다.
‘하, 이번에도 아무나 방해해 봐라. 그러면 신상을 지금 생방송에다가 확 뿌려 버릴 수 있으니까. 조르주, 너는 아까 운 좋은 줄 알라고.’
그렇게 일종의 다짐을 한 셰릴은, 주위를 한번 돌아본다. 자동차 연구 모임의 후배들은 모두 오기로 했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준비가 다 되어 있을 것이다. 이윽고 셰릴은 손짓을 해서, 주위에 있는 후배들을 불러모은다. 잠시 카메라를 옆으로 돌려서 바다 쪽을 향하게 해 놓고서는, 곧바로 모여든 후배들을 한번 살핀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어, 뭐야...”
셰릴은 라시드를 돌아보며 말한다.
“혹시 슬레인하고 준후 어디 갔어?”
“네...?”
라시드는 그렇게 되묻더니, 지금 온 자동차 연구 모임 부원들을 다시 본다. 아무리 봐도 슬레인과 준후는 보이지 않는다.
“아니, 내가 슬레인보고는 신신당부를 했는데, 정작 자기가 안 오면 어떡해?”
“그러니까, 선배님...”
라시드가 뭐라고 말해보려고 하지만, 셰릴은 아까 동아리 교류 행사 때 보인 격앙된 표정을 다시 지으며, 후배들을 보고 말한다.
“너희들, 당장 가서 찾아와. 슬레인하고 준후를 찾지 못하면, 내 방송이 어떻게 흘러갈지, 너희들도 예상은 하고 있겠지?”
“어, 네...”
셰릴의 그 말이 끝나자마자, 자동차 연구 모임 부원들은 서둘러 공원의 사방으로 흩어져서 슬레인과 준후를 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슬레인과 준후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것도, 셰릴이 있는 공원과는 지척으로 가까운 곳에 말이다.
시간은 약 몇 분 전, 마리나센터의 홀 사이에 있는 통로. 옆에서는 인디밴드 공연 음악소리와 관람객들의 환호성이 벽을 뚫고 들려오고 있었다.
“에이, 셰릴 선배는 8시까지 우리를 모아서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나도 몰라. 오늘은 뭔 놈의 상황이 다 우리한테 안 좋게 돌아가는 거냐!”
그렇게 슬레인과 준후는 서로 신세 한탄 겸 잡담을 하며 마리나센터 통로를 어슬렁거리며 걸었다. 그런데,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슬레인과 준후의 뒤에서, 또 다른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져 왔다. 무언가 한기와도 같은 기척으로 볼 때, 둘과 적대적인 누군가였다.
“어, 또 너냐? 왜 혼자 왔어?”
그 발걸음의 주인공이 누군지 직감한 준후는, 곧바로 뒤를 돌아봤다. 예상대로, 그 뒤에는 현애가 서 있었다. 왜 그 시간에 마리나센터에 나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혼자 있으니 그냥 놀러 나왔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무방비 상태라는 건데, 무엇이 어찌 되었든 간에 슬레인과 준후에게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내가 혼자 와서 뭐 어쨌다는 거야? 너희들 갈 길이나 가지.”
“절대 그렇게는 안 되지. 너도 잘 알잖아?”
현애를 돌아보는 준후는 화를 억누르고 많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준후는 한 달쯤 전에 누군가에게서 초능력을 받고서 특정 인물을 해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그 대상이 바로 현애였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메시지가 꽤나 설득력이 있었는지, 준후는 그걸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그 이후 준후는 그 누군가에게서 지시를 받은 건 싹 잊어버린 채, 현애에게 설욕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내가 너하고는 진심으로 한번 다시 싸워 보고 싶다고. 여기 슬레인도 같은 생각이고.”
“아니, 그럴 거면 힘을 키워서 다시 오라니까? 너희들, 전혀 그런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아니, 뭐야!”
현애의 도발 같은 그 말에 슬레인과 준후 모두 겨우 참으려던 게 다시 풀린 건지, 사람들이 주위를 지나가며 한번씩 흘끗흘끗 보고 지나가는 건 아랑곳하지도 않고, 현애에게 달려들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
마치 두 발을 바닥 위에 묶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슬레인과 준후의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당황한 슬레인이 현애를 향해 손을 뻗어 자기 능력으로 주변을 끈적하게 만들어 보려고 하지만, 현애는 이미 능력의 범위 밖으로 벗어난 상태다.
“야, 신발 벗어! 그러면 쫓아갈 수 있지 않냐?”준후가 그렇게 말하자, 슬레인은 무언가 깨달음이라도 든 건지 바닥에 얼어붙은 신발을 벗어 버리고서 쫓아가지만, 이미 현애는 어디로 가 버린 건지 보이지 않는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준후는 어느새 아까 셰릴이 모이라고 한 건 머릿속에도 없고, 눈앞에서 현애를 놓쳐 버린 데 대한 분노가 자리잡고 있다.
“하, 이런! 설욕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야. 이런 데서 마주치니까 사람들 이목이 집중되잖아! 할 거면 아무도 없는 데서 은밀히 하지. 안 그래?”
♩♪♬♩♪♬♩♪♬
그리고 그 때, 슬레인의 전화가 울린다. 슬레인은 얼른 전화를 받는다.
“어? 셰릴 선배님?”
“너희들 뭐 하냐? 8시까지 오라고 했는데 왜 안 와?”
“아니 그러니까요, 선배님, 여기는 지금 마리나센터인데...”
“뭐? 마리나센터?”
셰릴의 목소리가 확 내려간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슬레인은 셰릴의 표정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까 한참 셰릴을 말릴 적에 봤던 바로 그 표정이다.
“이렇게 가까운데 안 오고 있었다는 거야? 지금 내 기분 알지? 빨리 와. 안 오면 너희들은...”
“알았어요! 바로 갈게요!”
슬레인은 그렇게 말하며 급히 전화를 끊고 달려간다. 신발은 거기에 그대로 놔둔 채로 말이다. 그러느라 발에 가시도 박히고 모래도 밟고 하지만, 정신없이 뛰어가는 상황에서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잠시 후, 셰릴이 방송중인 공원. 셰릴은 앞에 서 있는 슬레인과 준후를 보고 말한다.
“도대체 뭘 하길래 신발도 벗어두고 이렇게 정신없이 다녀?”
“저기... 죄송해요, 선배님. 그럴 일이 있었거든요.”
슬레인이 그렇게 말하자, 셰릴은 ‘하’ 하며 깊은 숨을 들이쉬고 말한다.
“나 지금 열 받기 전이니까, 얼른 시작하자. 지금 내 시청자들이 야경만 본 지도 벌써 3분째라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어... 네...”
‘하, 이러려고 동아리 만들고 한 게 아닌데...’
슬레인은 그렇게 불만이 얼굴에 맺힐 뻔하지만, 셰릴에게 그게 보일까 봐 그걸 표출할 수도 없다. 하는 수 없이 셰릴이 정해 준 자리에 가서 선다.
“자, 자! 어디 보자... 이제 다 왔네!”
셰릴은 후배들이 다 온 걸 보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카메라를 다시 자신의 쪽으로 후배들을 오게 하더니, 곧바로 손짓을 한다. 그러자, 후배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셰릴의 주위로 모여들더니, 미리 약속된 손짓을 하며 셰릴의 주위로 모여들어 양손을 빠르게 흔들며 마치 셰릴의 머리 주위로 후광이 비춘 듯한 퍼포먼스를 보인다. 세릴은 여기에 크게 만족스러웠는지, 꽤나 들뜬 표정을 보인다. 마치 아까의 그 화났던 일들은 전부 휴지통에 집어 던지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괜히 더 들떠서, 호응이 점점 늘어나는 시청자들의 반응에 괜히 우쭐거린다. 시청자 수가 늘어나는 걸 확인하고는, 셰릴은 한껏 목소리를 뽑아내고 말한다.
“여러분, 시청자 여러분! SRTV는 지금도 순항중이랍니다! 여러분도 보이시죠?”
그리고 셰릴은 점점 더 기분이 좋아졌는지, 주위에 지나가는 행인을 하나 붙잡고 말한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셰릴이 잡은 사람은 그저 산책을 나왔을 뿐인,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40대 정도의 여성. 딱 셰릴의 어머니나 이모 정도 되는 나이다.
“어? 실례지만 누구신지...”
“아, 저는 인터넷으로 방송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셰릴은 그렇게 말하며 후배들을 한번 돌아본다. 셰릴이 미리 준비한 셰릴을 ‘찬양’하는 피켓을 든 자동차 연구 모임 부원들이 일제히 그리로 달려간다. 셰릴은 그걸 보고 또 만족스러운 듯 목소리가 올라가기 시작한다.
“요즘 뜨고 있는 채널이에요! 우와! 마음에 드시나 봐요!”
‘좋아, 좋아! 미소를 짓고 있어! 이러면 절반은 성공이지!’
셰릴의 입꼬리가 또 올라간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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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3-10-21 18:39:45
역시 사물을 보는 관점은 다양하지만 셰릴은 뭐랄까, 세계의 중심은 나 자신이라는 사고방식에 가장 충실한 게 보여요. 문제는 그게 아이란처럼 자기 망상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그거로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철저히 자신 위주로 재편하지 않으면 몸의 어디가 잘못될 만큼 곤란한 정도라니까 문제예요. 독일 속담에 "남자에게는 세계가 마음이고 여자에게는 마음이 세계이다(Dem Manne ist die Welt das Herz, den Weibe ist das Herz die Welt.)" 라는 게 있고 저 또한 그런 성향이 있긴 하지만 셰릴처럼 저럴 생각은 전혀 없는데 말이죠...
게다가 셰릴은 일본에서 잘 보이는 그 민폐계 유튜버같은 행태를 보이네요. 그나마 그 실제 유튜버들처럼 성경험 상대 몇명이니 음모를 제모했는지 그대로 두는지 등등을 물어보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꺼려지는 건 변함이 없어요.
시어하트어택
2023-10-22 22:38:31
셰릴의 행태는 여러 인터넷 방송인이 '매운맛' 버전으로 이미 보인 바가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이미 고인이 된 사람도 있는데, 상상 이상의 기인이었죠. 자기들은 좋다고 그렇게 한 것이겠지만, 결국 지금 와서 보면 모두 반면교사였죠.
SiteOwner
2023-10-22 17:56:41
이미 토마는 아주 큰 대가를 치루었다 보니 더 이상 사고를 안 치지만 그리핀은 그렇게 잡힌 게 처음인데다 상황판단을 못하고 그냥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게 보이는군요. 하긴 그리핀은 토마가 아니니 토마처럼 조심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슬레인과 준후는 현애에게 혼나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군요. 또 혼나면 그때는 후회할 여유도 없을 것 같은데 그건 생각안하는 듯합니다. 하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 또 유유상종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셰릴의 행태는 요즘 국내에 나타나는 조폭 무용담을 늘어놓는 유튜버보다는 덜 못하지만 낫다고는 말못하겠습니다. 그냥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될 뿐입니다.
시어하트어택
2023-10-22 22:47:58
그리핀이 정신을 차리려면 더 큰 무언가가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적어도 작중 현재의 상황에서는 어떤 큰 계기가 없으면 좀 많이 힘들겠지만요.
슬레인과 준후가 깨닫는 그날은 아마도 작품에 대전환(?)이 일어날 때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