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진보주의는 사회과학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근간 자체가 사회과학의 사조 중의 하나인 마르크시즘(Marxism)이라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어서 그렇습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역사발전의 법칙이라든지 원용하고 있는 변증법적 사고방식 같은 것은 그저 혼탁하고 무질서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현실보다 보다 세련되고 정교하게 보일 것이고 그렇다 보니 젊은 인텔리 중에 진보주의자가 되지 않는 사람이 이상하다고 보는 시각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그들의 과학관(科学観)이 매우 편협할 뿐만 아니라 음모론에 집착하는 반과학(反科学)도 불사하는 것이 흔히 보입니다. 과학을 표방한다면서 어째서 그렇게 음모론에 매달리면서 과학을 부정하는 모순을 저지르는 것일까요? 사실 이 역설의 연원은 남을 탓할 것이 못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진보주의에는 그 진보주의만 중요하고 다른 것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버리는 악습이 팽배해 있습니다. 그리고 진보주의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반동(反動, Reactionary)일 따름입니다. 반동이라는 말이 어떨 때 쓰였는지는 굳이 구체적인 사례를 일일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반동은 부정적인 개념이고, 누군가를 반동으로 죽이면 쉽게 죽일 수 있는 이유로, 그리고 무엇인가를 반동으로 정의하면 쉽게 폐기할 수 있는 근거로 작용할 따름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가치판단의 영역 밖에 있는 수학이나 자연과학 등의 영역이라도 하등의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니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 주도의 공포정치도 천부인권을 말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사형장으로 보내어 목잘린 시체로 만들어버린 역설도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진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의 이야기가 나왔으니 조금 더 언급하겠지만, 프랑스 혁명력(Le calendrier révolutionnaire français)의 문제점이 바로 그런 진보주의의 악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각종 단위계에서 10의 배수를 사용한 것은 분명 이점도 있지만 그에 만만치 않게 결점도 있는데 특히 시간의 정의가 문제가 됩니다.
프랑스 혁명력의 근간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Paris)를 기준으로 한 1년 12개월 36주 360일 시스템입니다. 그리고 12개월은 자연현상의 이름을 따서 지어져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여름의 더위를 의미하는 테르미도르(Thermidor)로, 로베스피에르의 실각(失脚)으로 귀결된 테르미도르의 반동(Réaction thermidorienne)이 일어난 1794년 7월 27일이 당시의 새로운 역법으로 테르미도르 9일이라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테르미도르를 제외한 다른 달의 이름은 이제는 따로 안 찾아보는 이상 기억의 대상조차 되지 못합니다.
문제의 역법은 1793년부터 사용되었지만 12년만인 1805년에 사용이 끝나고 후일 1871년에 급진파가 파리 시내를 장악한 파리코뮌(Commune de Paris) 당시 부활되었지만 18일만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하루를 10시간으로, 1시간을 100분으로, 1분을 100초로 정의한 십진법 시간체계라든지 10일을 1주일로 정의한 것은 오늘날에는 전혀 통용되지 않습니다. 미터법(Metric Unit System)이 전세계의 표준이 된 것과는 천양지차입니다.
그리고, 더 따져보면 프랑스 혁명력의 체계 자체에도 모순이 있습니다. 십진법을 기본으로 한다면서 1년은 기존의 역법과 동일하게 12개월. 게다가 프랑스 북부의 파리를 기준으로 한 것이니까 풍토가 다른 남부의 프로방스(Provence) 지역이라든지 해외영토(France d'outre-mer) 같은 곳에서는 통용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게다가 10일을 1주일로 정의해 놓으니까 사람들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종교적 관습 또한 지키지 못하게 되니 당연히 인기가 지속될 리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런 것입니다. 기존의 경험칙을 바보로 만들면서도 정작 어떤 곳에서는 1년을 12개월로 정의하거나 달의 기준을 파리의 기상상황을 기준으로 하는 등 기존의 경험칙을 인용하는 등의 모순을 저지른 그 결과가 바로 12년 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에 많은 과학자들을 단두대로 보내고 그들이 남긴 문헌을 정의의 이름으로 불태우고 했으니 남은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 이후 프랑스는 과학을 비롯한 각종 문화의 영역에서 영국, 독일, 스웨덴 등의 전통적인 강국 등은 물론 신생국인 미국이나 근대화를 달성화한 일본 등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기 힘들어지거나 뒤처지는 문제를 양산할 뿐만 아니라 드넓은 국토와 탁월한 농업생산력을 자랑하면서도 인구가 좀처럼 늘지 않는 문제에 직면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20세기.
세계최초의 성공한 공산혁명은 마르크스의 이론과는 달리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영국이나 독일 같은 국가가 아니라 패권국이기는 했지만 전근대성으로 점철된 제정러시아에서 발생했습니다. 이것은 성공한 혁명으로 세워진 소련의 구성원들은 물론이고 전세계의 진보주의자들을 당혹하게 만드는 최대의 모순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시즘은 틀린 이론이니까 폐기되어야 하는데, 만일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그것을 금과옥조로 삼고 살아온 진보주의자들의 인생과 노력은 과연 무엇이 되는가에 대한 본원적인 회의가 이렇게 대두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블라디미르 레닌(Владимир Ленин, 1870-1924)이 묘수를 내었습니다. 이름하여 제국주의론. 간단히 말해서 제국주의자들이 민중을 핍박했기에 민중이 먼저 들고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폐기될 뻔했던 마르크스주의는 다시 생명력을 얻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부활에 성공하여 소련이 망하는 날까지 일단 유효기간을 늘렸습니다.
자,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분명 모순이 하나 도출될 것입니다.
제정러시아는 핍박받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19세기 유럽사회에서는 영국, 프랑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함께 5대 패권국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정러시아는 오히려 온갖 침략전쟁을 통해서 세계 최대의 국토를 확보한 나라입니다. 1580년에서 1778년에 걸친 시베리아 원정(Покорение Сибири)으로 북아시아의 토착민족들을 복속시킨 역사가 엄연히 있는데 제국주의론에서는 그런 사실은 그냥 폐기되었습니다. 제국주의가 마르크시즘에 방부제를 첨가해 준 대가로 역사와 가치판단이 모두 왜곡되어 있습니다. 그게 소련이 붕괴된 현행 러시아 연방공화국 체제라고 해서 전혀 다를 게 없습니다. 러시아는 여전히 반서방 반제국주의 반나치를 주장하지만 반서방을 제외하면 제국주의 네오나치 행태에 아주 충실합니다. 문제의 제국주의자의 핍박이 실체없는 음모론에 지나지 않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렇게 18세기말에서 19세기의 프랑스를 비롯하여 20세기의 소련을 거치면서 진보주의는 성장했고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켜 세계를 장악하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만 그 성공의 기반이 진보주의 이외의 것을 아주 쉽게 부정하고 또한 실체없는 음모론을 통해 진보주의를 정당화시킨 기제에 있었다 보니 무너질 때에는 그냥 맥없이 무너지는 이외에 아무 대책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게 21세기라고 해서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과거에서 배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또 다른 음모론에 집착해서 유효기간 연장에 나설 수밖에 없겠지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이 "키예프 나치정권 제거" 로 정당화된다든지 국내의 진보주의자들이 6.25 전쟁의 남침유도설이라든지 천안함 폭침 관련의 음모론이라든지 무속(巫俗) 프레임 같은 것에 중독 수준으로 의존한다든지 연예인들의 마약의혹이 드러난 것에 대해서 "묻으려고 터트린다" 등등의 괴담을 유포한다든지 하는 것도 모두 이렇게 진보주의만이 중요하다는 반과학적 사고방식의 소산입니다.
다음에는 진보주의의 세계관과 이중성에 대해 다루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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