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라는 1990년대의 표어는 이제 더 이상 새삼스럽게 언급할 필요도 없이 잘 정착해 있고 우리나라는 현재 정보기술(情報技術/Information Technology, IT)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세계 유수의 IT강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젊은이들의 다수는 태어날 때부터 디지탈기기가 존재해 있는, 흔히 말하는 디지탈네이티브(Digital Native) 세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정신세계는 문물의 발전과 반드시 발걸음을 나란히 한다는 보장이 없는데다 의외의 분야에서 전근대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그 전근대성이 그냥 오래된 것의 차원이 아니라 악습이나 악관행의 수명을 늘려주는 방식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이전에도 비판해 온 사이시옷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립국어원의 자료를 하나 인용합니다.
사이시옷을 적는 방법 (2005년 3월 새국어소식 통권 제80호)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받쳐 적는" 이라는 표현.
문자언어의 상당부분이 IT기기를 통해 구사되는 환경하에서 문자에서의 특정요소를 "받쳐 적는" 발상은 붓 등의 필기구 등을 이용하여 수기(手記)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손글씨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손글씨만이 존재하던 시대에는 그냥 획 한둘 추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문제가 문자의 기계화된 시대에는 그 이전에 부각되지 않는 문제가 새로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 요지이므로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우선, 활자(活字)의 경우.
활자에서는 사이시옷이 들어간 글자는 그렇지 않은 글자와 따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즉 획을 조금 추가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컴퓨터나 스마트폰 등의 IT기기의 화면에서 구사되는 경우는 간편하게 해결되겠지만 물리적인 문서로 만들 경우에는 당연히 문제가 됩니다. 프린터로 출력한다면 되지 않느냐 하겠지만, 윤전기 등으로 대량으로 생산되는 인쇄물의 경우는 여전히 문제가 남습니다. 비록 식자공(植字工)이 일일이 맞는 활자를 골라서 활판에 장착하는 수작업을 거치지는 않지만 윤전기에 걸어야 할 인쇄원판을 제작하는 공정에서는 미리 작업이 다 완료되어야 하고 손글씨에서처럼 획을 한둘 추가하는 방식으로는 대응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검색(検索) 등의 문제도 있습니다.
"순댓국" 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문장에서는 "순대" 가 따로 나와주지 않는 이상 이 단어로의 검색이 불가능합니다. "최댓값", "최솟값", "진릿값" 이라는 단어가 하나씩 쓰인 문장에서는 "최대", "최소" 및 "진리" 의 이 세 단어가 모두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어느 단어로도 검색할 수 없고 데이터베이스화가 원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물론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일일이 복잡한 방법을 구사해 가면서 예외를 추가하는 방식을 구사해야 하는데 문제의 사이시옷이 언제나 쓰인다는 보장이 없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기에는 치루어야 할 비용이 크기 짝이 없습니다.
또한 과거의 이상한 관행이 자연선택에 따라 생명력을 잃은 경우도 있는데 요즘의 사이시옷 부활은 그러한 언어의 역사성을 억지로 부정하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이시옷을 많이 쓰면서 이렇게까지는 또 안하는군요. "소앗과", "냇과", "욋과", "이비인훗과", "총뭇과", "원뭇과" 등의 표현이 1980년대까지는 횡행했고 그 중 일부는 각급학교의 교과서에도 쓰이기도 했는데 언어의 역사성을 억지로 부정한다면서 또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는다는 데에서 일관성도 없습니다. 기능주의적인 사고방식이겠지만 사어(死後)가 사어가 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의 사이시옷 표현이 작정하고 검색하지 않으면 찾을 수 없거나 아예 사용례를 검색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점에 대해서 현재의 사이시옷은 대안도 못 될 뿐만 아니라 명쾌한 설명도 주지 못합니다. 즉 어떤 결론이 나든간에 사이시옷은 언어의 역사성을 부정하지만 그와 동시에 언어의 사회성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어느 쪽으로든 불완전한 소산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사이시옷은 전근대적인 발상에 근거한 것으로 손글씨 이외의 다른 수단을 통한 문자언어생활에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할 뿐더러 언어의 본질에 대해 편의주의적으로 접근하다가 국어생활의 혼란만 초래하는 악수(悪手)이자 역사의 영역에만 남아 있어야 할 인습(因習)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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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Lester
2024-02-23 01:05:51
타자기 중에는 손글씨처럼 받침을 자유롭게 추가할 수 있는 형태(ex. 네벌식)도 있습니다만, 말씀하신 윤전기보다 생산성이 떨어지니 더 얘기할 게 없겠군요. 오타가 나면 수정액이나 수정테이프를 써야 하는 문제도 있고....
사실 검색 문제가 더 크지 않을까 합니다. 구글 검색의 경우 때때로 맞춤법 확인을 위해서 사이시옷을 넣은 것과 안 넣은 것을 같이 돌려보면 맞는 쪽으로 바꿔주는데, 말인 즉슨 틀린 형태의 검색은 별도의 작업을 거쳐야('이 검색어를 찾으시나요'가 아닌, 직접 입력한 검색어를 클릭해야) 합니다. 오타도 아니고 통일되지 않은 형태다 보니 최소 2번은 검색하고 두 결과를 취합해야 한다는 거죠. 이렇게 보니 사이시옷이 진짜 계륵, 아니 정말로 필요한 존재인지도 모르겠네요. 현지인부터 혼란스러워하는데 외국인들의 고충은 얼마나 더하랴 싶고....
SiteOwner
2024-02-23 19:04:29
사실 사이시옷 과잉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고 실제로 1988년에 예의 "냇과", "욋과", "소앗과" 등의 표기가 퇴출된 사례도 있습니다. 즉 의지의 문제인데 결정권자들이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국어표기에 대해 심도있는 생각 자체를 하기보다는 규칙을 위한 규칙을 만들어서 국어생활을 지배하고 싶은 의도가 결과적으로 보이는 듯합니다. 그 결과 남은 것은 지적하신 것과 같은 이중삼중의 비효율입니다.
지금의 결정권자들이 어떻게든지 현업을 떠나든지 하기 전에는 답이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