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지널 창작물 또는 전재허가를 받은 기존의 작품을 게재할 수 있습니다.
C. 토인의 집
D. 세계제일의 빅토리아폭포
E. 루즈벨트 맹수를 사냥하다
H. 세상을 휘감았던 영웅 나폴레옹 한번의 패배로 땅에 떨어져 눈물을 삼키고 이곳에서 죽다
I. 희망봉. 1486년 포르투갈의 항해가 디아스는 쥬앙 2세의 명령에 따라 이 항로를 발견하고 희망봉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아프리카의 최남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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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을 맞이하여 시작된 폴리포닉 월드 포럼의 프로젝트인 100년 전 지도로 보는 세계의 열한번째는 남아프리카편으로 결정되었어요.
이번에도 이 지도의 편집에 TheRomangOrc님께서 힘써주셨어요.
이 점에 깊이 감사드리면서 원본 및 편집된 지도를 같이 소개할께요.
원본이 일본어 사용자를 상정한 일본국내의 출판물인만큼 1924년 발행 당시의 일본의 관점을 그대로 보일 수 있도록 원문표현은 가능한 한 충실하게 번역했다는 점을 명시해 드릴께요. 해당 표현에 대해서만큼은 저의 주관이 배제되었으니 그 점을 꼭 염두에 두시길 부탁드려요.
그러면 원본을 소개할께요.
당시 표기방식은 가로쓰기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방식이예요. 게다가 현대일본어가 아닌 터라 한자 및 히라가나의 용법도 현대일본어와는 차이가 여러모로 두드러져요.
그러면, TheRomangOrc님께서 편집해 주신 한글화 지도를 소개할께요.
손글씨로 표기된 것은 자연관련 사항으로 남색은 해양 및 도서지형, 녹색은 각 지형, 국가 및 속령, 보라색은 도시인 반면, 고딕체로 표기된 것은 각 지역의 특이사항이니까 참조해 주시면 좋아요.
원문자에 대해서도 이런 원칙이 있어요. 적색 테두리의 흰 원 내의 검은색 알파벳 원문자는 각 지역의 상황, 그리고 청색 테두리의 검은 원 내의 흰색 번호 원문자는 추가설명이 필요한 각 지역에 대한 표시임에 주목해 주세요.
이번에는 지도의 가로가 꽤 넓다 보니 방식을 좀 바꾸어 해설할께요.
By Courtesy of TheRomangOrc
이렇게 전체적으로 번역했지만, 우선은 오른쪽 부분부터 설명하고 왼쪽의 어센션 섬 및 세인트헬레나 섬에 대해서는 H항목에서 별도로 다룰 때 해당 부분의 상세지도를 재인용하도록 할께요.
항목 설명에 앞서, 이 지도에서 사용된 개념인 남아프리카(Southern Africa)에 대해 짚고 넘어갈께요.
이 항목의 남아프리카는 지리적인 개념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남부라는 의미. 현재의 국가를 의미하는 남아프리카(South Africa)는 이 지도에 나타난 영국령 남아프리카(Union of South Africa/영어, Unie van Zuid-Afrika/네덜란드어, Unie van Suid-Afrika/아프리칸스어)를 승계한 국가라는 것이니까 혼동이 없기를 바랄께요.
그러면, 이제 지도의 오른쪽 부분을 먼저 소개하겠어요.
By Courtesy of TheRomangOrc
이 시대는 1880년대부터 추진된 유럽 7대 열강의 아프리카분할(Scramble for Africa)에서 독일이 축출된 이후 벨기에, 프랑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및 영국의 분점구도가 확립되어 20세기 후반의 아프리카 신생국 탄생까지 이어진 군웅할거(群雄割拠) 체제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어요. 바로 그 점에서 "관할" 과 "령" 의 차이를 보시면 이해하기가 쉬워요.
왼쪽인 대서양안에는 "남아프리카 관할 남서아프리카" 가 있고 오른쪽인 인도양안에는 "영국-벨기에 관할 아프리카" 라는 영역이 있어요. 이것은 확실히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 나 "영국령 남아프리카" 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것. 사실 전자의 2개지역은 독일제국의 해외식민지였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면서 그 해외식민지는 귀속될 국가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전승국들이 관할하게 되어서 그렇게 "관할" 체제가 된 것이었어요. 남아프리카 관할 남서아프리카는 이후 나미비아(Namibia)가 되고, 영국-벨기에 관할 아프리카 및 잰지바르(Zanzibar)는 동부 해안지대는 오늘날의 탄자니아(Tanzania)의 전신이 되고 빅토리아 호수(Lake Victoria)의 북서부 내륙은 우간다(Uganda), 남서부 내륙은 부룬디(Burundi) 및 르완다(Rwanda)의 전신이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면 이해가 쉬워질 거예요.
적색 테두리의 흰 원 내의 검은색 알파벳 원문자 항목으로 시선을 옮겨볼께요. A부터 J까지 10개 항목이 있어요.
아프리카대륙의 가운데에 시선을 두고 위에서 아래로 보시면 편하게 열람하실 수 있어요.
A. 리빙스턴 박사의 탐험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의 탐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영국의 의사이자 선교사인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13-1873) 박사로,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의 가장 인기있는 영국의 영웅으로 기념되고 있어요. 그는 자수성가한 인물이자 미지의 대륙이었던 아프리카의 여러가지를 영국을 비롯한 세계에 알린 과학탐험가인데다 동아프리카에 만연했던 아랍-스와힐리 노예무역을 종식시키는 데에 공헌한 운동가로서도 기념되고 있어요. 그러나 그의 그러한 성과들이 유럽 제국주의가 아프리카 분할을 가능하게 만든 로드맵으로 기능한데다 정작 선교사로서의 활동은 거의 성과가 없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어요.
리빙스턴이 아프리카 탐험을 결심한 계기가 된 인물은 독일의 루터파 선교사인 칼 귀츨라프(Karl Gützlaff, 1803-1851). 1828년에는 태국 방콕을, 1832년에는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고 중국에 처음으로 루터파 교회를 세운 그에 감화된 리빙스턴은 글래스고우(Glasgow)이 앤더슨즈대학(Anderson's University)에 진학한 것을 시작으로 자연과학, 의학, 약학 등을 충실하게 공부하여 1840년 11월에는 의사로서의 자격도 선교사로서의 자격도 취득한 직후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의 일원으로서 런던을 출발했어요. 그렇게 케이프콜로니에 도착한 이후 아프리카 땅에서 숨을 거두기까지의 33년간의 여정이 시작되었어요.
당시의 탐험경로는 아래에 소개된 이 지도에 묘사되어 있어요.
이미지 출처
David Livingstone A Man on a Mission, SYMBONA AFRICA 웹사이트, 영어
이렇게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를 종단하고 횡단했던 그는 6년간 외부와의 접촉이 전혀 없는 상태로 있었어요. 그리고 이 사안은 세계적인 화제가 되었고, 후술하는 영국 출신의 미국인 탐험가 헨리 모튼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1841-1903)가 조직한 탐험대가 1869년에 조직되어 아프리카로 떠난 후인 2년 뒤인 1871년에 탕가니카호수(Lake Tanganyika) 근처의 우지지(Ujiji)라는 마을에서 그를 찾아냈어요.
리빙스턴은 1873년 5월 1일에 현재의 잠비아 북부에 해당되는 친푼두(Chinpundu)라는 마을에서 숨을 거두었어요. 이미 1862년 4월 27일에 아내 메리 모패트(Mary Moffat, 1821-1862)를 먼저 떠나보낸 그는 만년에 아내를 먼저 떠나 보낸 것과 자녀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것을 후회한다고 밝히기도 했어요.
B. 스탠리의 탐험
근대 아프리카 문제의 거물이자 미스터리한 인물인 헨리 모튼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1841-1903)에 대해서는 사후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여전히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어요.
헨리 모튼 스탠리는 사실 영국 웨일즈 출신의 존 롤랜즈(John Rowlands)이고 1885년 이전까지는 영국인이었으나 이후에는 미국으로 귀화했어요. 그러면서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의 공작원으로서 콩고분지(Congo Basin) 일대를 탐험하여 벨기에의 아프리카 지배를 성사시킨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어요. 그렇게 아프리카에서 탐험하기 이전에는 미국 남북전쟁 당시 1861년부터는 남군에 있었다가 1862년부터는 북군으로 옮겨갔고 북군에서도 1864년부터는 육군에서 해군으로 소속을 바꾸는 등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보이다가 군인으로서의 커리어를 마친 이후로는 저널리스트로 돌변하여 1867년부터 1868년까지 영국의 아비시니아(Abyssinia) 원정에 참여하는가 하면 행방이 이미 묘연해 있었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을 1872년에 동아프리카에서 찾아내는 데에 성공했고 1874년에서 1877년 사이에는 아프리카 횡단탐험을 실히하는가 하면 1879년에서 1884년에 걸쳐서는 레오폴드 2세의 후원하에 국제 상부콩고원정을 주도하여 오늘날의 킨샤사(Kinshasa)가 되는 레오폴드빌(Léopoldville)을 건설하는 등 벨기에 식민제국 확립에 기여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의 탐험이 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고, 잰지바르(Zanzibar)의 노예무역상인 티푸 팁(Tippu Tip, 1832-1905)과의 충돌도 있어서 티푸 팁이 스탠리를 견제하기 위해서 콩고 자유국의 영향권에 있는 마을 118개를 약탈하고 4천여명을 죽이는 등의 일을 벌이는 위기가 닥치자 급히 피신하고 그 티푸 팁과의 협상으로 행동범위를 제한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것이 후일 콩고아랍전쟁(Congo Arab war, 1892-1894)로 불려요. 스탠라 본인도 기력이 소진되어 철수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그의 탐험은 1887년에 또 시작되어요. 이번에는 독일계 유태인으로서 나일강 상류지역의 이퀴토리아(Equitoria) 주지사였던 오토만제국의 정치가 겸 의사인 에민 파샤(Emin Pasha, 1840-1892)가 당시 마디스트 수단(Mahdist Sudan)의 위협을 받고 있어서 그를 구출해 내기 위해 700명 규모의 원정대가 꾸려지고 1888년 4월 27일에는 그 원정다가 에민 파샤를 만나게 되어요. 그러나 만인의 환호를 받으며 출발한 그 원정은 대원들 상당수가 도중에 죽은데다 살아남은 대원들 사이에도 내분이 극심하여 결국 용두사미가 되어버리고 말았어요. 에민 파샤는 구출되어 스탠리를 위시한 살아남은 대원들은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수도 바가모요(Bagamoyo)에 도착하여 독일측에서 성대히 환영받았지만 그 축하연에서 에민 파샤 본인은 너무 취한 나머지 2층 창문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입고 1890년 1월까지 병석에 누워 있어야 했어요. 스탠리는 그때의 경험을 책으로 썼고 1890년 5월에 유럽으로 돌아가서 성과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쓴 책도 당시 15만권이나 팔릴 정도로 명성을 누렸지만 그 명성이 오래 가지도 못한데다 문제의 원정 자체가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고 이루어진 것으로 스탠리의 사욕을 위해 온갖 폭력이 자행되었다는 것이 폭로되면서 그의 명성도 금방 몰락하고 말았어요.
확실한 것은. 그의 탐험이 유럽열강의 아프리카정책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것.
이전의 유럽열강은 아프리카에 기항지 등의 주요거점을 확보해 두고 다른 곳은 사실상 무주지(無主地, Terra nullius)로 간주하는 정책을 원칙으로 해 왔지만, 스탠리가 레오폴드 2세의 공작원으로서 설립한 콩고자유국을 계기로 국경선이 중요해지고 더 이상 무주지 개념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이 제대로 확립되어 갔어요. 그래서 헨리 모튼 스탠리는 어떻게 보면 아프리카 문제의 만악의 근원이 되는 인물일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여전히 그의 행적에 대해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일지도요.
C. 토인의 집
지도에 간략하게 묘사된 토인의 집의 일본어 원문은 도진노이에(土人の家).
사실 아프리카의 흑인 원주민을 토인이라고 불렀던 과거의 관행도 일본의 옛 관습이었어요. 일본에서는 현지의 원주민을 토인, 즉 그 땅의 토착민으로 불렀거든요. 이미 2편에서 언급된 홋카이도(北海道)의 토인학교(土人学校) 또한 현지의 원주민인 아이누(アイヌ)의 자녀들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1899년부터 설립하여 운영한 것. 즉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토인이라고 하는 것도 당시에는 가치중립적인 용법이었어요.
높은 초가지붕이 아프리카의 전통가옥같으면서도, 북해도 원주민의 집락인 코탄(古丹)같이 묘사한 것도 역시 그런 이유에서일듯 해요. 어디까지나 추정이지만.
D. 세계제일의 빅토리아폭포
빅토리아라는 이름은 호수에도 그리고 폭포에도 보여요. 사실 그도 그럴 것이 63년의 치세 동안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완성해 낸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 1819-1901)의 이름이 영국의 영향력이 닿는 지역에 붙었으니까요.
이미지 출처
Is Victoria Falls drying up?, 2019년 12월 12일 Lonely Planet 기사, 영어
잠비아(Zambia)와 짐바브웨(Zimbabwe)의 국경을 흐르는 잠베지강에 있는 이 108m(=355피트) 낙차의 폭포를 처음으로 보고 기록으로 남긴 유럽인은 이미 앞에서도 언급된 영국의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 그는 1855년 11월 16일에 이 폭포를 발견하고 당시의 영국의 군주인 빅토리아 여왕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그렇게 빅토리아 폭포라는 이름을 붙였어요. 현지의 한 언어인 로지어(Lozi Language)로는 천둥치는 연기를 의미하는 모시-오아-투냐(Mosi-oa-Tunya)로, 또 다른 토착어인 통가어(Tonga Language)로는 끓는 물을 의미하는 슌구 나무티티마(Shungu Namutitima)로 불리지만요. 또한 이 폭포 인근의 하중도(河中島) 중 하나는 이후에 리빙스턴 섬(Livingstone Island)로 명명되었어요.
낙차가 가장 크지도 않고 폭이 가장 넓지도 않지만 이 폭포는 물의 유량을 추정해 볼 때 세계최대규모인 것으로 보여요. 참고로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에 있는 유명한 폭포인 나이아가라 폭포(Niagara Falls)와 비교하면 빅토리아 폭포는 낙차도 폭도 각각 2배 이상이예요.
E. 루즈벨트 맹수를 사냥하다
여기에서 언급된 루즈벨트는 미국의 제26대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1856-1919). 그리고 테디베어(Teddy Bear)의 기원이 되는 그 루즈벨트인데 1909년에 대통령에서 퇴임한 이후 아프리카에서 스미소니언협회(Smithsonian Institution) 및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1835-1919)의 후원하에 대대적인 맹수사냥에 나서게 되어요.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스미소니언 아프리카원정(Smithsonian African expedition). 1909년에서 1910년에 걸친 이 원정에서 사냥된 동물은 대략 11,400마리 내외로 대부분이 스미소니언 박물관이나 미국 자연사박물관 등의 미국 각지의 시설내 전시품이 되었고, 그 이외에도 10,000점 이상의 식물표본도 채집되었어요.
이미지 출처
Pres. Theodore Roosevelt in Africa: Kermit Roosevelt's narrow escape, Library of Congress 웹사이트, 영어
이 맹수사냥의 주역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테디베어(Teddy Bear) 이야기의 주역이기도 한 점에서 여러모로 복잡한 감을 떨칠 수 없어요.
F. 다이아몬드 산지
남아프리카는 20세기 후반까지 다이아몬드 생산의 부동의 1위였어요. 그 중에서도 특히 유명한 다이아몬드가 1905년 1월 26일 남아프리카의 광산촌 컬리넌(Cullinan)에서 발견되어 그 지역의 이름이 붙은 컬리넌 다이아몬드(Cullinan Diamond)로 질량 3,106캐럿(Carat, 그램환산 621.2g)을 기록하고 있어요. 이것이 인간이 발견해 낸 다이아몬드 중에서는 세계최대의 것. 그리고 그 원석은 9개의 큰 보석과 96개의 작은 보석으로 가공되어서 가장 큰 2개는 영국에, 그리고 나머지는 네덜란드에 보관되어 있어요.
이미지 출처
South Africa Wants King Charles to Give Back the Cullinan Diamonds, 2023년 5월 4일 TIME 기사, 영어
G. 남아프리카 전쟁에서 영국인이 고전한 땅 트란스발
여기서 말하는 남아프리카 전쟁은 1880년에서 1881년 사이에 벌어졌던 제1차 보어전쟁(First Boer War/영어, Eerste Vryheidsoorlog/아프리칸스어).
사실, 영국이 그냥 고전한 게 아니었어요. 네덜란드계의 이주민인 보어인들이 1852년에 건국한 남아프리카공화국(Zuid-Afrikaansche Republiek) 또는 트란스발공화국(Transvaal Republic)이 영국의 지배에 맞서 싸웠고, 영국이 졌으니까요. 영국은 18세기말에는 미국에 패전해서 미국의 독립을 용인할 수밖에 없었는데다 19세기말에는 트란스발에도 패전하는 바람에 결국 1881년에 프리토리아협정(Pretoria Convention)을 체결하여 그 트란스발을 국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1899년, 영국이 제2차 보어전쟁(Tweede Vryheidsoorlog)을 일으켜 1902년까지 집요하게 전쟁을 끌자 결국 보어인의 국가도 멸망하여 영국에 흡수되었고 영국은 이 지역을 영국령 남아프리카로 재편해 버렸어요. 여기서 영국이 고안한 것이 바로 적국인 강제수용소. 당시의 공식집계에서 희생된 민간인 피해는 46,370명으로 나타나 있고, 26,370명에 달하는 보어인 성인여성 및 아동들이 영국이 개설한 강제수용소에서 최후를 맞이했어요. "흉악한 것은 영국의 발명품" 이라는 세계사에 대한 이 농담이 결코 농담같이 들리지만은 않아요.
이미지 출처
The Concentration Camps of the Anglo-Boer War, 2019년 4월 25일 War History Online 기사, 영어
H. 세상을 휘감았던 영웅 나폴레옹 한번의 패배로 땅에 떨어져 눈물을 삼키고 이곳에서 죽다
대서양의 남반구 해역에는 영국령 세인트헬레나-어센션-트리스탄다쿠냐제도(Saint Helena, Ascension and Tristan da Cunha)라는 영국령 해외영토(British Overseas Territory)가 있어요. 이 자체는 총인구 5천명을 겨우 넘는 영국의 오지이긴 하지만, 세인트헬레나 섬은 프랑스 역사의 최고의 영웅이었으나 결국 몰락해 버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가 인생의 만년을 보낸 장소로서 세계적인 지명도를 유지하고 있어요.
By Courtesy of TheRomangOrc
이미 엘바 섬을 탈출한 전력이 있었다 보니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에 대한 감시는 아주 지독하다고 할 정도였어요. 그의 거처로 지정된 방 40개의 저택으로 처음에는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 소유의 농장에 부속된 총독관저였던 롱우드하우스(Longwood House) 주변에는 대략 2,100명 규모의 영국군이 상주해 있었고 섬 주변에는 영국군의 군함 10척이 상시순회하며 나폴레옹과 외부세력의 접근을 철저히 막고 있었어요. 저택의 상태도 그렇게 좋지는 않아서 눅눅하고 쥐가 잘 들끓는 등의 문제가 다발한데다 좌절한 나폴레옹 및 그의 측근들은 여러 질병에 시달리는 일이 잦았음이 기록에 드러나고 있어요. 그래도 늘 나폴레옹과 그의 측근 남성들은 군복을 입고 측근 여성들은 드레스를 착용하고 보석을 패용하는 등의 격식을 갖추었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이 그림은 프랑스 스트라스부르(Strassbourg) 출신의 화가 프랑수아 죠셉 잔트만(François Joseph Sandmann, 1805-1856)이 1820년 쯤에 그린 것으로 군복을 입은 채 해변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나폴레옹이 묘사되어 있어요.
나폴레옹은 영어를 배우려 했지만 결국은 몇 달만에 포기했고 1817년 하반기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결국 1821년 5월 5일에 51세로 생을 마쳤어요. 사인은 가족력이 있었던 위암으로 밝혀졌어요. 나폴레옹의 죽음에 대해서는 고의적인 살해나 비소중독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나폴레옹의 유년기의 모발이나 부인 죠세핀(Joséphine) 및 아들들의 모발에도 역시 비소농도가 높게 나타나는 것이 밝혀지며 논파되었어요. 사실 19세기에는 위암을 치료하는 방법은 없었지만 존재 자체만큼은 알려져 있었어요.
이미지 출처
나폴레옹이 만년을 보낸 그 롱우드하우스의 처리문제도 상당히 복잡했어요.
나폴레옹 사후 롱우드하우스는 동인도회사의 자산으로 재귀속되었다가 이후 영국 왕실로 넘어갔고, 나폴레옹의 조카인 샤를-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Charles-Louis Napoléon Bonaparte, 1808-1873)가 나폴레옹 3세 황제로 등극한 이후 영국 정부와의 협상을 벌인 끝에 1858년에 프랑스 정부가 매입하여 프랑스 외무부의 관할자산이 되어요. 한때는 프랑스 정부가 해체를 추진하기도 했고 주변 건물은 1940년대에 철거되었지만 롱우드하우스만은 살아남았고 이후에 프랑스인들이 대대적인 수리를 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고 건축 당시의 것은 돌계단이 전부. 이 롱우드하우스는 주변토지 소유주로부터의 기부를 통해 2008년에야 현재의 형태가 확정되어 프랑스 정부 소유의 박물관으로 존속해 있어요.
I. 희망봉. 1486년 포르투갈의 항해가 디아스는 쥬앙 2세의 명령에 따라 이 항로를 발견하고 희망봉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아프리카의 최남단이다.
우선, 한자표기에 주의!!
희망봉(Cape of Good Hope/영어, Kaap die Goeie Hoop/아프리칸스어)의 한자표기는 喜望峰. 즉 희가 기쁠 희(喜)이지 바랄 희(希)가 아니라는 것을 눈여겨 봐야 해요.
이미지 출처
Cape of Good Hope • South Africa, AirPano 웹사이트, 영어
이렇게 남쪽으로 길게 뻗은 곶인 희망봉의 존재는 이미 기원전에도 알려져 있었지만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은 포르투갈의 탐험가인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olomeu Dias, 1450-1500)가 당시의 포르투갈 왕인 쥬앙 2세(João II, 1455-1495)의 명령에 따라 아프리카 일주항해를 하던 도중 1488년 3월 12일에 그 존재를 확인하고 폭풍의 곶이라는 의미의 카보 다스 토르멘타스(Cabo das Tormentas)라는 지명을 붙인 것이 그 기초가 되어요. 탐험성과를 보고받은 쥬앙 2세는 인도와 동양으로의 항로개척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희망적인 이름인 카보 다 보아 에스페란사(Cabo da Boa Esperança)라는 이름을 제안하였고 이것을 한자어로 옮긴 것이 희망봉이 되어요.
이 희망봉의 앞바다는 수에즈 운하의 개통 이후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항로의 거점으로서의 지위가 대거 약화되었지만 수에즈 운하에 문제가 생겼거나 중동의 정국이 불안할 때에는 우회항로로로서 세계의 상선들이 빈번히 오가는 해역으로 지금도 중요성은 여전히 큰 채로 남아 있어요.
J. 1497년 포르투갈의 대항해가 바스코 다 가마가 동양으로의 항로를 발견했다. 이후 인도로의 길도 열리고 결국 일본으로도 닿았다.
대항해시대의 주역 중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포르투갈의 귀족이자 대항해가라는 평가가 절대로 아깝지 않은 영웅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0-1524).
이미지 출처
Vasco da Gama, 2009년 12월 18일 HISTORY 웹사이트,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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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sco da Gama, Britannica 웹사이트, 영어
1497년 7월 8일에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Lisbon)을 출항한 4척 규모의 바스코 다 가마의 원정대는 인도로의 항로개척에 성공하여 1499년 9월 9일에 리스본에 귀환했어요. 도중에 괴혈병(壊血病, Scurvy)으로 많은 선원들이 죽었던 탓에 170명의 원정대 중 생존자는 55명에 불과했고 도중에 탐험선 중의 1척인 상라파엘(São Rafael)으을 소각하는 등 선박의 손실도 있었지만 이렇게 인도로의 항로를 성공적으로 개척한 것만은 부정할 수 없어요.
이하는 바스코 다 가마의 제1차원정 항해일지 요약.
- 1497.7.15 - 카나리아제도 통과
- 1497.7.26 - 카보베르데(Cabo Verde) 소재 상티아구(São Tiago) 도착
- 1497.11.7 - 세인트헬레나 도착
- 1497.11.22 - 희망봉 통과
- 1497.11.25 - 모셀만(Mossel Bay) 도착, 수송선 해체처분 후 3척체제로 항해준비
- 1497.12.8 - 모셀만 출항
- 1497.12.25 - 나탈(Natal) 해안 도착
- 1498.1.11 - 리오데코브레(Rio do Cobre) 도착 후 5일간 체류
- 1498.1.25 - 리오도스본스시나이스(Rio dos Bons Sinais) 도착 후 1개월간 휴식 및 선박수리
- 1498.3.2 - 모잠비크섬 도착 후 현지인들과의 교역 시작
- 1498.4.7 - 몸바사(Mombasa) 도착
- 1498.5.20 - 캘리컷(Calicut) 도착
- 1498.8.31 - 캘리컷 출발
- 1499.1.8 - 고아(Goa) 도착
- 1499.2.1 - 모잠비크 도착, 선박은 2척으로 반감
- 1499.3.20 - 희망봉 통과
- 1499.7.10 - 2척의 선박 중 베리오(Berrio)가 먼저 포르투갈의 타구스강(Tagus River)에 당도
- 1499.9.9 - 바스코 다 가마가 탄 선박인 상가브리엘(São Gabriel)이 아조레스제도(Azores)를 경유후 리스본에 도착하여 전일정 종료
이후에도 바스코 다 가마는 1502-1503년의 제2차원정을 성공리에 마치기도 했지만 1524년의 제3차원정에서는 그해 9월 8일에 발생한 해저지진으로 바다가 요동치는 것은 물론 수온도 급상승하여 극한의 위기에 빠졌고 그 결과 14척의 함대 중 5척을 잃는 불상사를 겪었어요. 그 원정대가 인도의 코친(Cochin)에 당도할 수는 있었지만 바스코 다 가마 본인은 그해 12월 24일에 숨을 거두었고 현지의 교회묘지에 묻혔어요. 이후 그의 유해는 1539년에 포르투갈로 옮겨져 수도 리스본에 안장되었어요.
이 바스코 다 가마는 대항해가로서 해양강국 포르투갈의 역사를 열었을 뿐 아니라 아프리카의 카보베르데, 앙골라(Angola) 및 모잠비크, 아시아의 마카오(Macau) 및 동티모르(Timor-Leste)가 포르투갈어를 쓰게 된 계기도 열었어요. 그리고 포르투갈인들은 그 이후에도 동쪽으로 항해를 계속하여 대만을 발견하여 아름다운 섬이라는 의미로 포르모사(Formosa)라는 지명을 붙인가 하면 일본에 조총(鉄砲), 담배, 고구마, 카스테라(カステラ/일본어, Castella/영어) 등의 것들을 판매하는 등 일본과 서양을 잇는 길도 열었어요.
그 다음은 청색 테두리의 검은 원 내의 흰색 번호 원문자항목. 1부터 17까지 17개 항목이 있어요.
아프리카대륙의 해안선을 서부인 왼쪽에서 동부인 오른쪽으로 훑어간다는 감각으로 보시면 찾기 편할 거예요.
1. 보마
오늘날의 콩고민주공화국(République démocratique du Congo)의 전신인 벨기에령 콩고(Congo belge/프랑스어, Belgisch Congo/네덜란드어)의 도시 보마(Boma)는 콩고강의 하구에 위치하여 대서양으로 바로 나가는 항구도시로 인구규모는 20만명 미만으로 그리 크지 않아요. 하지만 이 지도에 이 도시가 나온 이유는 따로 있어요. 여기가 콩고강 유역의 노예무역의 거점이었는데다 1923년까지는 벨기에령 콩고의 수도였으니까요.
16세기에 유럽인 무역상들이 건설한 이 도시는 어떠한 유럽국가들도 영유권주장을 하지 않은 이상한 상태로 있었다가 1886년에 당시 벨기에의 왕이었던 레오폴드 2세(Léopold II, 1835-1909)가 이 도시를 수도로 지정한 뒤에 그 지위가 1923년까지 유지되었고, 이후에는 동쪽의 내륙이자 프랑스령 콩고(Congo français)와의 국경에 인접하는 레오폴드빌이 새로운 수도로 지정되었고 이것이 오늘날의 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킨샤사가 되어 있어요.
앞에서 언급한 미국의 탐험가인 헨리 모튼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1841-1907)는 1874년에 시작한 제1차 아프리카 횡단탐험을 실시하여 1877년 8월 9일에 보마에 도착하면서 999일간의 여정을 마무리했어요. 그러나 출발 당시 229명이었던 탐험대는 115명으로 줄어 있었고, 스탠리를 포함한 백인 4명 중 스탠리만 살아남고 다른 3명은 모두 탐험 도중에 목숨을 잃었어요.
참고로, 킨샤사의 국경 너머에는 프랑스령 콩고가 독립한 콩고(République du Congo)의 수도 브라자빌(Brazzaville)이 있어요. 두 나라의 수도가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유일한 사례가 바로 콩고와 콩고민주공화국의 경우예요.
2. 케이프타운
바다로 길게 뻗은 지형인 곶(Cape) 언저리에 만들어진 마을(Town)이라는 의미로 지어진 지명인 케이프타운(Cape Town)은 소박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세계적으로 의외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사실 영국령 남아프리카의 옛 지명이 케이프콜로니(Cape Colony)이기도 했고, 이 식민지에 적용된 여러 장치가 다른 나라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해요. 일례로 일본의 재래선 철도에 일반적인 1067mm 협궤인 궤간(軌間)을 가리키는 말 중의 하나가 케이프궤간(Cape Gauge). 3피트 6인치(=42인치) 폭의 이 철도규격은 케이프콜로니의 철도에 적용되어 일본이 영국에서 철도를 받아들일 때에 이 규격을 채택했어요. 저 시대의 일본에서는 이 궤간을 3피트 6피트에서 유래한 삼륙궤간(三六軌間)으로 부르기도 했어요.
케이프타운 하면 역시 세계적인 관광명소인 해발 1,085m(=3,558피트)의 테이블마운틴(Table Mountain/영어, Tafelberg/아프리칸스어)을 빼놓을 수 없어요. 아프리칸스어가 네덜란드어에 기반했고 그 네덜란드어와 독일어의 기원이 같다는 것이 저 어휘로도 드러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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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d up Table Mountain, Timbuktu Travel 웹사이트, 영어
3. 호프타운
남아프리카가 다이아몬드의 주산지로 알려지게 된 계기가 바로 이 호프타운(Hopetown)이라는 광산촌이죠. 1850년에 영국의 귀족 해리 스미스 경(Sir Harry Smith, 1781-1860)이 설립한 이 정착촌은 케이프타운의 설립에서 시작된 케이프콜로니를 오렌지강(Orange River) 유역으로까지 확장하게 된 전초기지였어요. 그리고 1867년에는 유레카 다이아몬드(Eureka Diamond)가 발견되는 한편 2년 뒤인 1869년에는 남아프리카의 별(Star of South Africa)이라는 대형 다이아몬드까지 채굴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날리게 되어요.
이 호프타운에는 1872년에 철도가 놓이게 되었는데, 같은 해에 일본에도 철도가 부설되어요. 그것도 위에서 언급된 케이프 궤간으로. 그리고 그 철도는 해안의 케이프타운과 후술할 킴벌리(Kimberly)를 잇는 간선철도로서 오늘날에도 활약하고 있어요.
4. 킴벌리
킴벌리(Kimberly)는 1924년 당시 남반구에서 가장 발달된 도시라고 말할 수 있어요. 1866년에 당시 15세 소년이었던 에라스무스 야콥스(Erasmus Jacobs, 1851-1933)가 오렌지강 유역에서 발견하여 아버지에게 넘긴 기이하게 빛나는 돌이 후일 다이아몬드로 판명되어 유레카 다이아몬드로 불리게 되었어요. 그것을 계기로 다이아몬드를 찾아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자 만들어진 정착촌이 네덜란드어로 붙여진 포어루이지크트(Vooruitzigt)였지만 아직 제도는 정비되지 않은 채 무질서한 상태였어요. 이 점에 대해 식민지 사무총장이자 제1대 킴벌리공작이기도 한 존 우드하우스(John Wodehouse, 1826-1902)가 "각종 제도의 정비제도 이전에 저 저속하고 발음도 철자도 이상한 네덜란드어 이름 대신에 멋지고 지적인 이름이 필요하다" 라고 주장했어요. 킴벌리라는 이름은 그렇게 그 공작의 칭호를 붙여 확정된 것.
급속도로 발전한 이 도시는 1881년에 아프리카 최초로 증권거래소가 들어서는가 하면 이듬해인 1882년에는 미국의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Philadelphia, Pennsylvania) 다음으로 전기식 가로등이 설치된 도시가 되었어요. 이것은 세계 2번째이자 남반구 최초 및 아프리카 최초라는 기록이 있어요. 또한 아프리카 경략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영국의 사업가 세실 로즈(Cecil Rhodes, 1853-1902)가 다른 사업가인 찰스 러드(Charles Rudd, 1844-1916)와 함께 다이아몬드 산업의 종합기업인 드비어스(De Beers)를 창업하여 전세계 다이아몬드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는 식으로 일확천금을 거두는데다 이후 빅홀(Big Hole)로 알려지는 거대한 노천광산도 개발되어 1872년에서 1914년까지 이 광산에서만 3톤이나 되는 다이아몬드가 채굴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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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ig Hole, Kimberley: The Complete Guide, 2020년 4월 10일 trpsavvy 웹사이트, 영어
그러나 이 도시는 1899년에 발발하여 1902년까지 제2차 보어전쟁의 주된 전장이 되었고 보어인들이 영국군에 붙잡혀 도시 각지에 영국이 세운 강제수용소에 갇힌 채로 비참하게 죽어가야 했어요. 이 지도의 발행시점 이후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남아프리카의 악명높은 인종차별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는 1950년에 법제화되어 킴벌리 시내가 유럽인인 백인, 아프리카 원주민은 흑인, 혼혈인 등에 따라 거주구역으로 나뉘게 되었어요. 그 직전인 1949년에 이미 타인종간 통혼금지법(Prohibition of Mixed Marriages Act)이 통과되어 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어요.
5. 프리토리아
남아프리카에서 세계적인 지명도를 지닌 도시가 전술한 케이프타운이나 세계기상예보 등에서 잘 언급되는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 조너스버그)이다 보니 그 도시들이 수도로 인식되기 쉬워요. 하지만 남아프리카의 수도는 내륙 북동부의 프리토리아(Pretoria)로, 1855년에 세워진 이 도시는 보어인 출신의 남아프리카 정치가이자 트란스발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마르티니우스 베셀 프레토리우스(Marthinus Wessel Pretorius, 1819-1901)가 그의 아버지이자 보어인들의 지도자였던 안드리에스 프레토리우스(Andries Pretorius, 1798-1853)를 기념하여 프리토리아로 명명되어 1860년에 트란스발 공화국의 수도로 지정되었어요.
프리토리아 출신의 유명인물 중 이 지도의 발행시점 1세기 뒤의 유명인으로서는 남아프리카-미국-캐나다 3중국적의 사업가 일론 머스크(Elon Musk, 1971년생)가 있어요. 여러모로 논란도 많지만 그가 세운 스페이스X, 테슬라(Tesla) 등의 기업들이 21세기 하이테크 기업의 트렌드를 이끌어 간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어요.
6. 로렌조 마르케스
로렌조 마르케스(Lourenço Marques)란 16세기에 활동했던 포르투갈의 무역상 및 식민지 개척자의 이름에서 유래하는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África Oriental Portuguesa)의 도시로 그 탐험가의 이름을 따서 1898년에 세워져 새로이 수도로 지정된 도시를 말해요. 이 지명은 1974년 4월 25일에 포르투갈이 사회주의 정권으로 교체되는 카네이션혁명(Revolução dos Cravos)을 맞이하면서 포르투갈 식민정책이 해체됨에 따라 모잠비크가 독립하면서 모잠비크의 수도가 되었고 1976년 2월 3일에 마푸토(Maputo)로 개칭되었어요.
로렌조 마르케스는 1544년에 현재의 마푸토 해안에 도달했고, 정착촌을 개척한 후 현지의 여성과 결혼하여 태어난 자손들과 함께 여생을 보냈다고 알려져 있어요.
7. 소팔라
소팔라(Sofala)라는 이 마을은 한때 금광도시로 번성했던 곳으로 소말리어로는 "가서 개발한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알려져 있어요. 여기에는 이미 1489년에 포르투갈의 탐험가로 아랍인 무역상으로 위장한 간첩이기도 했던 페루 다 쿠비야(Pêro da Covilhã, 1460-1525)가 다녀간 곳으로 알려져 있고, 바스코 다 가마는 1502년에 신분 위장 없이 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긴 하지만 이것도 정확하지는 않아요.
이곳은 해안에 망그로브(Mangrove)가 많이 자라는 특성상 개발이 매우 힘들었다 보니 금광도시로서의 경기가 가라앉은 이후로는 후술하는 모잠비크로 포르투갈인들의 거점이 이전하자 버려졌고, 이후 구시가지가 침강하면서 해수면하에 매몰되어 근처에 대체도시인 베이라(Beira)가 세워졌어요.
8. 친데
친데(Chinde)는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의 중부해안에 있는 어촌으로, 남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강인 잠베지강(Zambezi River)의 지류인 친데강 연안에 있어서 한때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어요. 영국과 포르투갈이 1891년에 체결한 양자조약으로 친데 일부에 대한 영국의 99년간의 지배를 약속했을 정도로. 영국의 복안은 적중했고, 오늘날의 말라위(Malawi)의 전신이 되는 내륙의 식민지인 니아사랜드(Nyasaland)와 인도양을 잇는 항구로 번성했는가 하면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상선들도 오가는 등 아프리카 속의 유럽같은 위상을 지니고 있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해안의 침식. 이미 1922년의 시작부터 발생한 이 문제로 인해 해안지대의 건물들이 무너지거나 침수되는 일이 발생했고 1922년 2월에 이 지역을 강타한 사이클론(Cyclone)으로 안그래도 쇠잔해 가던 도시가 그대로 버려지게 되었어요. 영국은 1923년에 이 지역을 포기한 이후 다시 포르투갈에 귀속되긴 했지만 도시의 재건 대신 전술한 소팔라 인근에 새로 세워진 도시인 베이라가 친데의 기능을 완전히 대체했어요.
9. 모잠비크
여기서 언급되는 모잠비크(Moçambique)는 국가명 모잠비크가 아니라 모잠비크의 섬이라는 의미의 일라 데 모잠비크(Ilha de Moçambique)를 말해요. 오늘날의 국가인 모잠비크의 어원이 되기도 하는 이곳은 아랍인들이 왕래하는 동아프리카 무역거점이자 당시 이 지역을 지배했던 술탄(Sultan)인 무사 빈 비크(Mussa Bin Bique)에서 온 것으로 유럽인으로서는 이미 전술한 바스코 다 가마의 탐험대가 1498년에 도달한 이후 포르투갈인들이 정착촌을 세워서 이후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의 수도가 된 것이죠.
1898년에는 이미 언급했던 로렌조 마르케스가 설립되면서 일라 데 모잠비크는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의 수도로서의 지위를 상실했어요.
10. 우신
일단 지도 원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우신(ウーシン)이 되는 이 지역은 탄자니아, 르완다 및 부룬디의 자료를 뒤져봐도 정확한 정보가 없어서 찾는데 애를 먹었지만, 이 지역이 표기된 이유는 대체로 추정가능했어요. 이 지역은 탄자니아의 우지지(Ujiji)라는 지역으로 아랍-스와힐리 노예무역의 거점인 정착촌이자 행방이 6년째 묘연했던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존재를 헨리 모튼 스탠리의 탐험대가 찾아낸 장소이기도 해요. 즉 우신이라는 표현은 우지지를 잘못 옮긴 것이었어요.
11. 바가모요
탄자니아의 해안도시 바가모요(Bagamoyo)는 이미 8세기 때부터 스와힐리 정착지로서 시작해서 19세기 후반에는 독일령 동아프리카(Deutsch-Ostafrika, 1885-1918)의 수도로 지정되어 대폭 확장되었어요. 이후에는 1891년부터 동아프리카의 수도가 대략 75km(=47마일) 남쪽의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으로 재지정되면서 성장은 급격히 둔화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도중인 1916년 8월에는 영국의 장갑순양함 탈보트(HMS Talbot) 및 전함 벤전스(HMS Vengence)가 차례차례로 포격을 가하면서 피해를 입고 영국군 해병대가 상륙하면서 그 도시를 지키고 있던 독일군을 생포하는 것으로 상황이 종결되었어요.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후에는 패전국 독일의 식민지도 해체되어 동아프리카 지역은 영국-벨기에 관할 아프리카로 재편되었어요. 이 문제가 70년 뒤의 르완다 학살(Rwandan Genocide)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당시에는 상상도 못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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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gamoyo Tours, Wistas Inn 웹사이트, 영어
오늘날의 바가모요는 인구 8만명을 간신히 넘는 소도시로 독일령 동아프리카 시대의 문화유산이 소수 남아 있고 2006년에 유네스코(UNESCO) 선정 세계유산(World Heritage Site)으로 지정되어 있어요.
12. 잰지바르 섬
잔지바르라는 표현도 통용되는 잰지바르(Zanzibar)는 100년 전에도 지금도 독특한 지위를 누리고 있어요. 현재는 탄자니아(Tanzania)의 일부로, 사실 탄자니아의 국명 자체도 탕가니카(Tanganyika)와 잰지바르의 합성어.
이 섬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이미 그리스-로마 시대로까지 소급하는데다 지배세력도 카탕카산맥(Kantanka) 남북에 고루 거주하는 반투(Bantu) 및 동아프리카의 스와힐리(Swahili) 등의 흑인 부족들에서 바스코 다 가마의 탐험 이후로는 포르투갈이 일시적으로 지배했다가 19세기 후반에는 아랍인이 지배하는 무슬림 왕국으로 재편되었지만 그 술탄국이 영국의 보호령이 되는 등 이리저리 바뀌었고, 1963년말에 영국의 보호령 지위가 끝나자 술탄국이 혁명으로 해체되고 아랍인 및 인도인들이 살해되는 혼란을 겪었다가 인민공화국이 세워진 이후 탕가니카와 통합되는 역사를 지니고 있어요. 그렇게 현재는 탄자니아의 한 지방으로 있지만 자치권이 보장되어 있어서 탄자니아 본토와는 여러모로 이질적인 부분이 많아요.
이 섬 출신의 유명인으로서는 영국의 뮤지션으로 퀸의 보컬이었던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 1946-1991, 본명 파로흐 불사라(Farrokh Bulsara))가 있어요. 인도 구자라트(Gujarat) 출신의 이주민 가정 출신의 그의 고향은 잰지바르의 스톤타운(Stone Town)이었지만, 1963년을 끝으로 잰지바르가 영국 보호령의 지위를 잃은 후 다음해인 1964년 1월 12일에 발생한 잰지바르혁명(Zanzibar Revolution)이 성공한 이후 아랍계나 인도계 주민들이 학살당하는 일이 빈발하여 프레디 머큐리의 가족은 모두 잰지바르를 탈출한 끝에 영국에 정착했어요. 그리고 그 해에 그 잰지바르는 탕가니카와 국가통합되었고 이후 탄자니아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었어요.
13. 영국령 세이셸 군도
세이셸(Seychelles)이라는 이름은 부르봉 왕조 당시의 프랑스의 재무장관이었던 쟝 모로 드 세셸(Jean Moreau de Séchelles, 1690-1760)에서 기원해요. 즉 이 이름으로 해당지역이 알려지게 된 것은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을 때였고 이전에는 아랍세력이나 바스코 다 가마를 필두로 한 포르투갈 세력이 무역거점으로 삼거나 하는 경우였어요.
그런데 이 세이셸은 1794년에 영국에 복속되었고 인근의 모리셔스도 1810년에 같이 영국령으로 편입되어 1814년의 파리조약으로 공식화되었어요. 이후 세이셸은 1903년에 모리셔스에서 분리되면서 영국 왕실령으로 재편된 이후 1976년에 독립국이 되었어요. 프랑스의 인물에서 지명이 유래하는 지역이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것 자체가 상당히 이색적이긴 하지만...
이 국가를 알게 된 것은 일본의 가수 오카모토 마요(岡本真夜, 1974년생)의 노래인 애니버서리(ANNIVERSARY). 소개하는 영상 2분 33초에서 2분 45초 사이에 나와요. "언젠가 셰이셀의 석양을 봐요, 둘이서 사진도 많이 찍어요(いつかセイシェルの夕陽を見よう 二人で写真もいっぱい撮ろうね)" 라는 가사가.
그럼, 여기서 세이셸의 석양을 소개할께요.
이미지 출처
Gentle Awakenings and Grand Finales: Seychelles’ Sunsets and Sunrises, 2024년 5월 13일 The Seychelles Islands 기사, 영어
14. 타나리보
사실 이 지명은 풀네임이 아니라 마다가스카르(Madagascar)의 수도이자 최대도시인 안타나나리보(Antananarivo)의 옛 프랑스어 표기인 타나나리브(Tananarive)에서 유래하는 것.
17세기 전반에 설립된 이 도시는 프랑스의 식민통치 이전에도 대도시였고 마다가스카르 왕국의 수도에서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의 수도로 이어졌고 1960년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여전히 마다가스카르를 대표하는 도시로 군림하고 있어요.
15. 모리셔스 섬
아프리카에서 정치체제가 가장 안정적인 나라가 바로 이 모리셔스(Mauritius).
지배세력은 16세기에는 네덜란드, 17세기에는 프랑스, 그리고 18세기부터는 영국으로 이 지도의 제작시점인 1924년에는 영국령 모리셔스였어요. 지금의 공화국이 된 것은 1968년의 일로, 지도의 제작시점의 모리셔스는 인구 50만이 넘는 대규모의 플랜테이션 단지이기도 한 동시에 의사, 변호사, 교사 등의 중류층이 급성장하면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의 농장주들이 독점한 권력에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행태도 벌어졌어요. 특히 크리올(Creole) 출신으로서 당시 포트루이스(Port Louis) 시장이었던 외젠 로랑(Eugène Laurent, 1850-1926)이 1907년에 중류층 정당인 자유행동(Action Libérale)을 조직했지만 1911년에 총선에서 패배한 역사도 있어요.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모리셔스인들이 영국군에 자원입대하여 독일군 및 오토만제국군에 맞서 싸우기도 한 반면 설탕 가격 폭등으로 유례없는 대호황을 맞기도 했지만 전후 불황으로 설탕 가격이 폭락하자 영국의 지배를 벗어나서 프랑스로의 재귀속을 바라는 운동도 일어나고 그랬어요. 그랬던 나라가 21세기에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안정적인 정치상황을 누린다는 게 꽤나 역설적이지만요.
16. 레위니옹 섬
프랑스의 인도양영토 중 유인도가 2개 있어요. 그것이 이번에 언급되는 레위니옹(Réunion) 및 다른 섬인 마요트(Mayotte). 이 지도의 발행시점에도 지금도 여전히 프랑스령인 이 레위니옹 섬은 1946년부터 프랑스 역외영토지역(Département et région d'outre-mer)이 되었고, 마요트는 2011년부터 이 지위를 취득했어요. 사실 프랑스의 인도양영토에는 인도양 산개군도(Îles Éparses or Îles Éparses de l'océan Indien)로 통칭되는 5개의 무인도가 마다가스카르 주변에 있고 군인 또는 과학연구인력이 머무르는 정도로만 쓰이고 있어요.
레위니옹과 마요트를 언급했으니 인근의 섬나라인 코모로(Comoros) 또한 간단히 언급해야겠죠.
코모로는 남반구 유일의 이슬람국가. 사실 이미 중세인 10세기 때에도 중동지역에 알려져 있던 이 지역은 1503년에 바스코 다 가마가 당도하면서 유럽인들에게 존재가 알려지고 유럽국가들의 정복 시도가 있긴 했지만 오만(Oman)의 술탄이었던 사이프 빈 술탄(Saif bin Sultan, 1711년 사망)의 원군이 그 유럽세력을 물리친 이래 오만의 영향력이 앞서 언급한 잰지바르는 물론 남반구인 코모로에까지 미쳤던 것이었어요. 하지만 결국 19세기중에 프랑스가 복속시켜 레위니옹은 물론 마요트와 코모로까지 지배하에 두고 사탕수수, 코코아, 바닐라 등의 각종 상품작물의 생산을 위한 플랜테이션 기지로 전환시켰어요.
이후 이 지역은 1912년에 보호령의 지위가 종료된 이후 1914년에 마다가스카르 식민지의 한 지방으로 편입되었다가 1975년에 코모로만 독립하고 마요트는 프랑스로 남게 되었어요.
17. 루이보스
사실 이 항목은 지도 원본에는 나와있지 않았고, 순전히 제 사심(私心)이 작용한 것임을 미리 알려드릴께요.
현재의 남아프리카공화국에 해당되는 영국령 남아프리카는 루이보스(Rooibos)의 원산지로도 유명해요.
이미지 출처
(루이보스란? 티라이프주식회사 웹사이트, 일본어)
이 식물은 정확히는 "로이보스" 로 발음되는 콩과식물의 한 종류로 학명은 Aspalathus linearis. 계통상으로는 차나무(Camellia sinensis)에 속하는 게 아니라서 루이보스로 만든 차는 정확히는 대용차예요. 이 루이보스의 잎을 채취하여 산화시킨 것은 그 자체도 붉고 우려낸 색도 붉어서 이것을 영어로는 Red tea라고 부르고 특히 영국에서는 Redbush tea로 부르는 경우가 많아요.
이미지 출처
(태양의 나라 남아프리카에서 왔다! 루이보스티, 2019년 6월 13일 acure lounge 웹사이트, 일본어)
이 루이보스차에 대해서는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특유의 섬세한 단맛이 느껴지면서 홍차가 아니면서 묘하게 홍차같기도 한 매력에 빠져서 올해부터는 소비를 조금씩 늘리고 있어요.
이렇게 남아프리카편을 마쳤어요.
다음부터는 유럽을 다루어 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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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ter
2024-07-25 23:20:16
역시 아프리카 남부는 (이집트 근방을 제외하면) 다른 지방에 비해 도시화가 잘 되어서인지 익숙한 내용들이 많네요. 언젠가는 아프리카 중부나 서부 또한 도시화와 함께 개발이 될 것 같으나... 부족사회라든가 하는 문화적 차이도 있고 기후 문제도 있고 해서 너무 먼 미래일 것 같네요. 애초에 도시화 자체가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인데, 국외의 자원기업들에 비해 현지인들이 도시화에 메리트는 물론이고 동기가 있을지도 의문이라...
A. 탐험가들은 어디까지나 학구열이나 개인적인 동기로 목숨을 걸고 탐험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런 성과가 제국주의에 이용당하는 것은 여러모로 안타깝네요. '지식은 활용하라고 있는 거잖아'라고 반론하면 솔직히 할 말은 없고, 그렇기에 도덕을 내세워서 타국보다 뒤처지기는 싫으니 비난을 무릅쓰고 진출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스탠리는 대외적으로 연락이 끊겼던 리빙스턴을 찾아냈는데, 이 때 했던 말인 "리빙스턴 박사님이 아니신지? (Dr. Livingstone, I presume?)"는 거의 명대사 취급받아서 영미권 작품에서 두루두루 인용 혹은 패러디되는 경우가 많더군요. 뭐 (위키백과 영문판에 의하면) 스탠리가 자신의 일기에서 리빙스턴을 만난 부분을 뺐고 리빙스턴 본인도 이에 대해 소회한 적이 없어서 창작일 가능성도 있다지만, 탐험 혹은 인연을 상징하는 어휘라 여전히 유명하다고 합니다.
B. 스탠리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군요. 보통 이렇게 종잡을 수 없는 행보를 보이는 인물에 대해서는 '사실은 스파이였다' 같은 추측 내지 음모론이 돌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까지 소속을 바꾸거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들쑤실 이유가 없다는 거죠. 특히 말씀하신 것처럼 리빙스턴을 우연히(?) 찾아내거나, 콩고에서 악명을 떨친 레오폴드 2세의 지원을 받아 탐험했다는 것 등이 꽤나 강력한 심증으로 작용하지 않나 싶습니다. 뭐 진실은 저 너머에 있을 것 같지만요.
C. 아프리카 원주민의 집으로 묘사된 초가집의 지붕을 보고 저는 시라카와고의 갓쇼즈쿠리를 떠올렸네요. 그림처럼 가리비를 뒤집어 놓은 형태는 아니지만요. 그나마 자연적인 재료로 짓는다는 공통점이 있는 듯합니다.
D. 언급하신 나이아가라 폭포에 남미의 이구아수 폭포까지 합쳐서 세계 3대 폭포로 불렸던 것 같네요. 무한도전에서 퀴즈로 나와서 외웠습니다. 사실 애니메이션 "업"으로 유명해진 베네수엘라의 앙헬 폭포까지 합쳐서 4대 폭포로 불려야 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요.
그나저나 현지어로 '천둥치는 연기'나 '끓는 물'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 다소 의외네요. 폭포에서 생기는 물보라를 '증발한다'고 생각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E.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다양한 경력으로 유명했고 그 중에서 가장 이색적인 게 탐험가였지 않을까 싶네요. 다만 말씀하신 대규모 동물 사냥 및 박제가 테디 베어로 순화(?)된 것이라 생각하면... 어느 의미로는 동심 파괴가 아닐까 싶습니다. 테디 베어 이야기가 '묶어 놓은 곰을 죽이는 건 스포츠 정신에 어긋난다'고 하는 점에서 더더욱이요. 물론 표본 수집과 보존은 분명 과학에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지능으로 먹고 사는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행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F. 보석은 장만할 생각은 없지만 그 아름다운 자태나 유래 및 의미 같은 잡지식은 재미있어서 그럭저럭 알고 있네요. 그런데 다이아몬드가 약 621g이라... 밀가루 한 포대가 대충 1kg이라는데 그 반절 정도라고 하니 얼마나 묵직할지 상상이 되고 놀랍습니다.
G. 트란스발에 대해서는 잘 몰랐는데, 설명을 듣고 나니 일전에 언급했던 "세계사에서 문제의 원인을 대충 찍으면 이 나라부터 시작한다" 류의 영국 밈이 바로 떠오르네요. 인터넷을 좀 뒤져보니 나치스의 아우슈비츠보다 먼저 생긴 강제수용소의 시초라고 여기는 기록도 있을 정도고... 영화 "디스트릭트 9"은 요하네스버그가 배경이고 불시착한 UFO의 외계인들을 현지에 격리하기 시작한다는 내용인데, 이에 대한 은유가 아닐까 하는 감상이 잠깐 들었습니다.
H. 프랑스인이면서 섬에 유배된 채 여생을 보내는 것이 뭔가 소설 기반 영화 "빠삐용"을 연상케 해서 기분이 묘하네요. 영화처럼 엘바 섬에서 그랬듯이 다시 탈출하지는 못했지만 군복과 보석으로 격식을 차린 것이 최후의 자존심이었나 싶기도 하고, 역시 위인은 위인인가 싶습니다.
I. 솔직히 희망봉의 희망이 그 희망이 아니란 걸 이제서야 알았네요. 비록 항해술이 발달하지 못하여 아프리카 최남단으로 착각하긴 했지만, 기나긴 항해에 지친 탐험가 일행으로서는 '제발 여기가 반환점이어라' 하고 바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수에즈 운하가 틀어막히면 대신 오갈 수 있는 통로인 셈이니, 여러모로 다행인 셈이네요.
J. 바스코 다 가마도 그 업적이 대단해서 잘 알고 있죠. 서인도 제도도 모자라 신대륙 발견 운운하는 헛소리를 했던 콜럼버스보다는 훨씬 위인이라 불릴 만하니까요.
그러고 보니 폴리포닉 월드에서는 대만이 포르모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얼핏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맞나요?
원래 지역 관련 코멘트는 분할하기도 했지만 이번엔 17개나 돼서 너무 많네요.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마드리갈
2024-07-26 11:36:50
우선, 폴리포닉 월드에 대한 사항부터 먼저 답변드릴께요. 현실세계 관련의 설명 도중에 폴리포닉 월드의 사항이 혼입되면 의도치 않게 정보오염이 발생할 수 있으니까 그걸 막기 위해서 이것부터 우선적으로 말씀드린다는 것을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려요.
말씀해 주신 것처럼 폴리포닉 월드의 대만은 공식 영어명에 포르모사가 포함되어 있어요. 공식 영어명은 Republic of Formosa이고 공식 한자명은 대만민주국(台湾民主国), 현실세계의 대만이 영어명 Repblic of China 및 한자명 중화민국(中華民国)을 사용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어요. 사실 폴리포닉 월드에서의 저 두 공식명은 실제로 1895년에 시모노세키조약(下関条約)이 체결되자 청이 일본으로 대만을 할양해야 하는 상황을 모면하려 했고 그 와중에 몇몇 독립주의자들이 5월 23일에 대만민주국자주선언을 발표하면서 세워졌지만 유럽열강들이 전혀 승인하지 않았고 일본으로의 할양에 만족했다 보니 설립 5개월만에 일본이 진압하여 그해 10월 21일에 대만민주국이 멸망했어요. 그리고 11월 18일에는 대만총독부가 대만 전지역을 평정했음을 선언해서 그 뒤로부터는 일본의 대만통치가 시작했어요. 폴리포닉 월드의 대만은 그 대만민주국의 존속을 전제로 하는 국가로, 일본의 청일전쟁 승리에 대해 유럽열강들이 일본의 대만점령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변경이 가해져 일본은 직접지배를 포기하고 대만민주국의 성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는 대신 일본의 영향력을 꾸준히 늘려갔어요. 그렇게 폴리포닉 월드의 대만은 일본의 영향력이 짙어졌고 이후 일본이 고질적인 신분차별문제인 부락문제(部落問題)를 부락민들을 대만으로 이주알선한다는 명목으로 사실상 국외추방하는 형태로 해결해서 일본계 인구도 대거 늘어나게 되어요. 이 문제는 자국민들을 신분을 이유로 하여 국외추방의 형태로 박해했다는 비판을 불러일으킨데다 이후 대만내의 그 일본계가 상류층이 되고 일본과의 협력이 강화되면서 일본에서 그 일본계 대만인들을 일계인(日系人)으로서 우대하는 것에 대해서는 "언제는 인간이 아니라고 박해하고 추방해 놓고 이제 와서는 일본인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손바닥 뒤집듯이 태세전환하는가..." 라는 불만도 일본계 대만인 사회에서 제기되기도 했지만 그것도 시대가 흐르면서 대폭 약화되어 가고 있어요.
마드리갈
2024-07-26 23:41:37
그러면 이제 언급해 주신 내용에 대해서 1차 코멘트.
[내용추가중]
마드리갈
2024-07-26 23:52:29
2차 코멘트로 이어갈께요.
[내용추가중]
Lester
2024-07-28 15:31:09
이번에는 지역 관련 코멘트.
1. 유럽인 무역상들이 건설했는데 아무도 영유권 주장을 하지 않은 게 특이하네요. 처음부터 노예무역으로 끌어모은 부로 세운 도시라서 도덕적인 비판이 무서웠다기엔, 말씀하신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를 비롯해 제국주의가 활성화된 것을 보면 그런 비판 정도는 개의치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지리적 혹은 상업적인 이득이 부족했다고 보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 케이프타운은 만델라 위인전에도 종종 등장하고, 아마 남아공의 도시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싶네요. 테이블마운틴의 경우 찾아보니까 "테이블산자리"라는 별자리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는데, 18세기에 명명된 것치곤 보기도 힘들고 중요성도 없다보니 저도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3. 블러드 다이아몬드에 대해 생각해보면, 호프타운이라는 이름은 꽤나 아이러니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남아공의 다이아몬드 산업도 사람을 갈아넣어서 이루어지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4. 다이아몬드로 유명한 킴벌리는 만화 "QED 증명종료"에서 (같은 작가의 작품인 CMB 박물관 사건목록과의 크로스오버 차원에서) 언급되죠. 유럽 소국인 발키아의 전직 독재자 대통령이 은닉한 자산인 다이아몬드와 함께 사건의 실마리가 되는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 해당 에피소드에서는 '밀누이'도 나오는데, 검색해도 도저히 안 나오길래 검색어를 더 섞어봤더니 정확한 발음은 "미르니Ми́рный"였더군요.
그리고 다이아몬드 채굴로 번성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보어전쟁과 아파르트헤이트의 무대가 되었다는 건 정말로 비극이네요. 다행히 위키백과 영문판을 보니 지금은 일반적인 대도시처럼 문제 없는 모양이지만요.
5. 저도 요하네스버그가 인지도가 너무 높아서 수도인 줄 알았는데 프리토리아가 수도였군요. 그것도 삼권분립이 세 도시로 흩어져 있어서 프리토리아는 행정수도고, 입법과 사법은 케이프타운과 블룸폰테인에 있다고... 게다가 구글 지도에서 확인해 보니 서로 붙어 있는 도시도 아니라, 저래도 괜찮은 건지 궁금하네요.
6-9. 모잠비크라는 나라는 이름 자체는 (모잠비크 드릴이라든가 하는 데에서) 듣긴 했지만, 역시 연상되는 이미지가 그렇다보니 우리나라와의 관계도 드문 게 아닌가 싶네요. 다만 소팔라와 친데의 경우 안 그래도 쇠퇴한 도시가 해안의 침식 때문에 아예 버려졌다니 안타깝네요. 한편으론 베니스처럼 반은 잠겨있고 반은 드러나 있어서 잠수하면 옛날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바보같은 궁금증도 들고요.
10. 우지지를 가타가나로 쓰면 ウジジ가 되던데, 인도인을 오른쪽으로 처럼 가타가나 특유의 잘못 읽기 쉬운 표기 때문에 자료를 옮겨적는 과정에서 실수가 생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마 세로쓰기에서 ジ 하나가 누락된 것도 모자라 ジ를 シ와 ン로 나눠 읽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11. 6-9와 마찬가지로 안 그래도 아프리카의 나라들 대부분이 먹고 살기 힘든데, 수도이전까지 겹치면서 버려지는 도시들이 많은 것 같아 안타깝네요. 명색이 도시라서 시골보다는 나을 줄 알았는데, 여기도 대도시 집중화가 심한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12. 말씀하신 대로 프레디 머큐리의 고향이지만 잰지바르 혁명 때문에 탈출한 기억 탓인지 프레디 본인은 자주 언급하지 않았고, 잰지바르 사람들도 프레디가 양성애자라는 이유로 딱히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정작 프레디 사후 프레디를 추모하고 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소위 '성지순례' 차원에서 찾아오자 관광객 특수를 노리고 자랑한다고 하는데... 위에서 언급한 도시들이 이런저런 발전과 이전 과정에서 묻힌 것을 보면 역시 이득 앞에는 장사 없다 싶네요.
그 밖에 잔지바르와의 개인적인 접점이라면, 원제와 전혀 다른 제목으로 번역돼서 들어온 Hans Jurgen Press의 추리만화 "검은 손 탐정단의 모험(The Adventures of the "Black Hand" Club)"에서 첫 번째 범인이 위조우표를 팔아치우려다 주인공 일행인 소년 탐정단의 활약으로 붙잡혔을 때 본 기억이 나네요. 아동서적이니만큼 특별히 잔지바르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진 않았고, 실존하는 우표와 그 위조품이 등장하는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왜 하필 이 우표인지는 모르겠지만, 관련 기사에서 모든 잔지바르 우표가 1968년 7월 1일에 철회되고 지금의 케냐-우간다-탄자니아 우표로 바뀌면서 그 희소한 가치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나 싶어요.
13. 세이셸의 석양은 정말 강렬하네요. 바탕화면으로 삼으면 적격일 것 같습니다. 특히 여느 석양과 달리 보라색이 섞여 있는 것도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네요.
15. 지금까지 언급된 나라나 도시들은 사연이 많았는데 모리셔스는 가장 정치체제가 안정적이라니 뭔가 위안이 되기도 하고 얄궃기도 하고 그러네요. 영국 편에 서면서 이런저런 문화를 물려받았지만 남아공의 다이아몬드처럼 사람을 미치게 하는 상품이나 계기가 없었기에 생각보다 평탄했던 것인지...
17. 홍차면서 단맛이라... 저처럼 홍차에 입문하기 어려운 사람에게는 가장 쉬운 차가 아닐까 싶습니다. 일반 커피에서 파는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되면 일단 한 잔 정도 시켜서 마셔보고 마음에 들면 팩 단위로 구입해볼까 합니다.
마드리갈
2024-07-29 16:58:31
사실 그 시대의 도덕성이라는 게 지금의 것과는 반드시 합치하지만은 않아요. 그러니 노예무역은 당연한 것이었고 오히려 그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소수파였어요. 그러니 말씀하신 사안을 현대의 도덕성 개념을 생각하시면 제대로 답이 나올 수는 없고, 역시 보편적으로 비용의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게 가장 쉬울 듯해요. 보마의 지위든 잰지바르의 프레디 머큐리 어필이라든지.
남아프리카의 지명은 영국식의 것과 네덜란드식의 것이 혼재하다 보니 여러모로 흥미롭고, 그 기원을 추적해 가 보면 남아프리카의 역사 자체가 정말 파란만장한 격동 그 자체였던 게 드러나죠. 게다가 다이아몬드는 그 희소성으로 인해 피를 부른다든지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과거의 남아프리카 다이아몬드도 현재의 서아프리카 각국이나 러시아의 다이아몬드도 역시 블러디 다이아몬드인 경우가 많아요.
게다가 사람들이 많이 틀리죠. 남아프리카의 수도가 어딘지는 대략 유명한 도시의 이름인 케이프타운, 킴벌리, 요하네스버그 등을 떠올릴 뿐이지 프리토리아를 바로 떠올리는 사람은 소수파예요. 레스터님이 이상한 게 아니라 대부분 그러해요. 사실 남아프리카라는 나라 자체가 2010년에 월드컵을 개최해서 그나마 이전보다 좀 더 알려지긴 했지만 정작 남아프리카의 각 지역의 사정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이전에는 극악의 치안상황을 악명높은 "남아공 괴담" 이라든지 월드컵 개최중 지독한 소음으로 악명높은 나팔인 부부젤라(Vuvuzela)가 더욱 많이 알려지고 그랬어요. 재미있는 게 영국의 식민지로 출발한 나라들이 묘하게 수도의 존재감이 약하더라구요. 남아프리카도 그렇고 미국도 캐나다도 호주도 뉴질랜드도.
남아프리카가 꽤 넓은 나라인데 삼권분립이 아예 공간적으로도 나누어진 게 꽤 특이하죠. 사실 그런 나라들이 소수이지만 몇몇 예가 있어요. 네덜란드의 경우 수도는 암스테르담(Amsterdam)인 반면 행정거점은 다른 도시인 헤이그(Den Haag/네덜란드어, The Hague/영어)에 위치해 있고 그 이외에도 각종 국제기구도 헤이그에 집중되어 있어요.
그럼 이제 여기서 코멘트를 분할할께요.
마드리갈
2024-07-29 17:26:11
이어서 코멘트할께요.
사실 모잠비크를 아는 사람들조차 많지 않은데다 안다고 하더라도 예의 모잠비크 드릴 등의 것들이고, 게다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한지도 꽤 된데다 자원부국이기도 하지만 정국불안은 여전히 심각하다 보니 아무래도 방문 자체가 권장되지 않아요. 갈 수 있는 방법도 사실상 없고...외교부에서 제공하는 해외안전정보의 모잠비크 항목은 역시나 최소한 여행자제 수준이고 탄자니아에 인접한 북부지방은 출국권고 상태에 있어요. 특히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나라인 점도 큰 약점이예요(사이트 바로가기).
요즘도 정보가 틀리는 일이 아주 잦은데 과거는 더 말할 필요도 없겠죠. 그렇게 틀릴 가능성도 있어요.
앞치마의 영단어인 apron도 원래는 napron이었다가 사전 편찬 및 인쇄과정에서 잘못되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설이 있어요. 과거에는 앞치마 하나를 a napron으로 썼는데 이것을 an apron으로 잘못 쓰는 바람에 그냥 apron으로 고정되었다고도...
버려지는 도시들은 의외로 꽤 있어요. 그리고 단단하게 지은 건물이라도 버려져서 관리가 안되면 상태가 열화되는 건 피할 수 없는데 아프리카 각국의 19세기말이나 20세기초의 건축물이라면 이미 다 무너져서 그냥 돌무더기만 남았을지도 모르는 상태로 전락했을 가능성도 높아요. 게다가 망그로브 자생지라면 그런 바다는 매우 얕은데다 해수의 탁도도 매우 높은 편이라서 잠수 자체가 그다지 권장되지 않아요. 사실 망그로브의 뿌리나 줄기 등이 잠수한 사람들에게 치명상을 입힐 위험도 비상히 크니 답이 없어요.
아프리카의 독립이 한참이던 1960년대에 발행된 것들은 역시 희소성이 높겠죠. 1960년은 아예 아프리카의 해라고 할 정도로 신생국이 많이 생겼는데다 예의 잰지바르의 경우는 발행시기가 극히 짧아서 구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우표 같은 것도 있고...
세이셸의 석양, 참 멋있죠. 그리고 마요트(Mayotte)의 석양은 세이셸의 것과 비슷한 듯 하면서 또 다른 매력이 있어요. 그래서 프랑스가 여전히 마요트를 자국령으로 두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모리셔스는 외교부 해외안전정보에서 보시다시피 상황이 매우 양호해요. 역시 열대지방이다 보니 풍토병은 피할 수 없지만요(사이트 바로가기). 사실 여기도 파헤쳐 보면 역사상 대사건도 많았지만, 아프리카가 그냥 미개하거나 희망이 없는 지역인 것만은 아니라는 게 잘 보이기도 해요. 영국이 영국군 및 미군의 기지로 활용중인 인도양영토(British Indian Ocean Territory)인 차고스제도(Chagos Archipelago)의 원주민들에게 정착금을 지급하여 모리셔스에 강제로 정착시킨 사안은 여전히 시끄러운데다 그 차고스제도에 대해서는 모리셔스가 영유권주장도 하고 있다 보니 여러모로 꼬여 있지만요.
루이보스티도 참 맛있지만, 이것은 홍차와는 정반대로 과량 마시면 설사를 유발할 수도 있어요. 그건 주의하시는 게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