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세계 각국의 정치사에 여러모로 영향을 끼친 담론이라면 정체성정치담론이 있어요.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에 따라 정치성향을 가진다는 것인데, 매우 간단하고 직관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문제점이 크게 2가지 있어요.
우선, 계급배반투표가 왜 일어나는지는 이 담론으로는 절대로 설명할 수 없어요. 사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이탈리아의 공산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가 제시한 문화적 헤게모니 담론이 있긴 해요. 즉 지배계급이 내세우는 논리구조에 스스로 동의했다는 것이 골자. 그러나 이것 또한 지배계급의 끊임없는 상징조작이나 우민화정책 등에도 불구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운동가들에게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이 또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설명할 길이 없어요.
그리고, 계급배반투표에 대한 개탄은 유권자를 빌런화하는 문제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어요. 당장 1992년 대선에서 민주당 김대중(金大中, 1924-2009) 후보가 한 연설이 큰 문제가 되었어요(1992년 12월 5일 동아일보 및 경향신문 기사 참조). "농촌황폐 농민이 자초한 부분있다" 라든지 "표 잘못찍어 제발등도 찍었다" 등의 이런 발언에 대해서 모욕당한 유권자의 선택은 그 후보를 선택하지 않는 것. 그리고 김대중 후보는 그 선거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또 하나. 정체성이라는 것은 단 하나로 정의되지 않아요.
사실 개인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변수는 여러가지 있어요. 민족, 출생지, 성별, 종교 등 다양하고 그것 중에는 선천적으로 가지는 것도 후천적으로 택하는 것도 있는 동시에 바뀔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도 혼재되어 있어요. 국적이나 종교나 자신의 성적정체성에 따른 법률상 성별이야 바꿀 수 있는 것이고 자신의 정치적 스탠스 등도 그 부류이지만 민족, 출생지 및 생물학적 성별 등은 변경 자체의 여지가 없어요.
간단히 예를 들어보죠.
"영남지방은 기득권층의 기반이니까 영남 출신은 보수적이다." 라는 담론과 "여성은 억압받는 존재니까 여성은 진보적이다." 라는 담론. 이것이 과연 양립할까요? 바로 모순이 발생해요. 영남지방 출신의 여성은 보수적일까요, 아니면 진보적일까요? 그러면 대략 평균내서 중도라고 할까요? 그렇게 평균내면 정체성정치담론의 전제 자체가 부정되어요. 즉 정체성은 여러가지가 중첩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하나의 정체성에 좌우되어 한 표를 행사한다는 것도 헛소리에 다름아니예요.
즉 정체성정치담론은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실상은 사이비(似以非).
이런 담론을 전제로 뭔가를 논하는 것도 사실 의미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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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Lester
2024-07-28 13:54:15
정체성 정치는 결국 인간을 이념의 도구로 본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최소한 인간을 너무 쉽게 이해하려고 든다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이네요. 분명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는 '내 문제를 대신 해결해 줄 사람들 중에서 적임자를 찾는 행위'이긴 한데, 이것을 투표자의 정체성으로 해결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 해결보다 다른 무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 무언가가 뭐냐고 뚜렷하게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어쨌든 말씀하신 것처럼 사이비 계열 집단에서 자주 보이는 행태이긴 해요. 대체로 자신들의 비논리적인 구조(사이비 종교는 교리, 다단계 판매는 사업모델)보다 핍박받는 소수로서의 입장을 강조해서 내부단결을 꾀하는 경우가 아주 많거든요. 정체성 정치도 그런 이론의 실효성보다는 '모이면 이루어진다' 정도의 막연한 기대심리로 사람들을 꾀는 것 같기도 하고...
마드리갈
2024-07-29 13:31:47
맞게 보셨어요. 결국 인간을 그 개인의 개성으로 보려 하지 않고 특정 속성에 따라 동류화하려는 아주 안일한 사고방식이죠. 게다가 그런 정체성정치는 멀든 가깝든 마르크스주의와 이어져 있는 경향이 농후하다 보니 더더욱 의심을 떨치기 힘들어요. 사상과 학문의 자유를 방패로 삼는 경우가 많이 있어서 그 의심조차도 극우적이라고 지탄받기도 하고.
과학은 보편을 말하고 미신은 늘 특수한 사례에 집착하죠. 정체성정치는 전자를 말하는 듯하지만 실은 후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