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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미성년자는 여기 들어오면 안 돼. ”
막 대출신청을 마친 사람을 내보낸 대표가 서류를 정리하고 있을 때,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들어왔다. 한 눈에 보기에도 고등학생 정도는 되어 보이는 여학생은, 들어서면서 몇 살부터 대출이 가능한지 물었고, 그녀의 표정과 질문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대표는 사무실에 더 올 만한 손님도 없어보이고, 학생의 사연도 궁금해서 테이블에 학생을 앉히고 마주앉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미성년자는 여기 들어오면 안 돼. 근데, 학생은 가만히 보니까 그걸 알고 있음에도 여기까지 찾아온 사연이 있어보여서 아저씨가 특별히 들인거야. ”
“...... ”
“몇 살부터 대출이 가능할지를 물어볼만큼 중대한 사안이라도 있는거니? ”
“그게... 집에서 독립하고 싶어서요. 하지만 막 대학생이 된 사람에게 은행이 대출을 해 줄 리도 없고... 아르바이트를 구해서는 하루아침에 집을 얻기도 힘들어서요. ”
“집에서 독립하고 싶다고? ”
여학생은 아빠와 계모, 그리고 두 언니들과 살고 있었다. 계모는 아빠가 결혼할 사람이라며 인사를 시켰을때는 금이야 옥이야 다 퍼줄것처럼 학생을 대하면서 아빠의 환심을 샀지만, 막상 결혼하고 이복언니 둘을 데려오고 나서는 얘기가 달라졌다. 급식비에 석식비도 제때 내지 못해서 학교에서 연락이 왔고, 아빠에게 연락이 갔을 때는 깜빡하고 이체를 안 했다고 하면서 그제서야 돈을 냈다. 아빠가 있을때는 잘 대해줬지만, 아빠가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는 학생을 부려먹고, 막말을 하고, 때리기까지 했다.
“언니들은 구경만 하고 있어? ”
“큰언니는 새엄마한테 동조해서 같이 괴롭히는 편이고, 작은언니는 반대예요. 좀 도가 지나친 것 같다 싶으면 작은언니가 말려주기도 하고, 가끔 새엄마 모르게 용돈이나 안 쓰는 물건들도 줘요. ”
“그렇구만... 그럼 집에서 독립하고 싶다는 건 새엄마랑 큰언니때문이겠네? ”
“네.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고... 녹음이나 녹화같은것도 작정하고 하려면 티가 나서 못 해요. ”
“음... ”
학생의 이야기를 들은 대표는 뭔가를 생각했다.
“일단 학생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하자면, 여기에서 대출을 하려면 만 19세가 돼야 해. 그러니까, 네가 스무살이 되는 해의 생일이 지나야 하지. ”
“그렇구나... 그래도 몇 달 안 남았네요... ”
“몇 달 안 남았다고? 그럼 지금 고3이야? 한참 예민할 시기인데, 멘탈이 대단하네. ”
“...... ”
“용섭아, 너 갖고 있는 녹음기중에 최대한 티 안 날만한 거 있냐? ”
“녹음기요? ”
“사정은 이따 설명해줄테니까, 그거 하나만 줘봐라. ”
대표가 안쪽을 향해 누군가를 부르자, 곧 덩치가 큰 남자가 작은 상자 하나를 가지고 나왔다.
“이거면 될겁니다, 형님. ”
상자 안에 들어있던 건 카드지갑이었다.
“이건 카드지갑 아니냐? ”
“아닙니다, 형님. 이걸 멘 상태에서 카드를 한번 이렇게 당기면 녹음이 되는 녹음기입니다. ”
“됐다. 학생,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앞으로 계모랑 큰언니가 괴롭힐때마다 이걸 당겨서 녹음해. 여기다가 학생증이랑 교통카드 넣고 다니고, 혹시나 어디서 났냐고 물어보면 친구가 안 쓰는 카드지갑 버린다고 해서 학생이 가져왔다고 하고. 혹시나 만 19세가 되었는데도 여기에서 돈을 빌리겠다는 생각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 때 다시 찾아와. 그때까지 독립 어떻게 할 건지도 생각해보고. ”
“고맙습니다. ”
전노대부 사무실에 교복을 입고 왔던 학생은, 몇달 후 다시 전노대부 사무실을 찾아왔다. 좀 낡은 티가 나긴 해도, 멀끔한 사복을 입고 있어서 하마터면 대표도 몰라볼 뻔 했다.
“그때 그 학생이라고? ”
“네. ”
“생각이 변하지 않았던 모양이네. 학교는 어디 갔어? ”
“저, S대 법대 들어갔어요. ”
“그렇구만... 그럼 자취방 구해야겠네? ”
“네. 자취방 보증금이랑 학비정도만 빌려주시면, 장학금 타서 무사히 졸업한 다음 갚을게요. ”
“로스쿨까지 가려면 오래 걸릴텐데... 잠깐만. ”
대표는 서류 몇 장을 학생에게 내밀었고, 학생은 서류를 꼼꼼히 적었다.
“학비랑 생활비, 집 보증금 할 것까지 5000만원이야. 학생은 그래도 성실하게 살아온 것 같으니, 이자는 따로 받지 않을게. ”
“감사합니다. ”
“녹음기에 새엄마가 괴롭힌 거 녹음된 거 있으면 아빠한테 보내고... 아빠도 알 건 알아야 하니까. ”
딸뻘 되는 학생에게, 대표는 마치 아빠처럼 이런저런 조언을 해 줬다. 이사가게 되면 주민등록 열람 제한을 걸고, 가족들에게 집주소는 절대 알려주지 말되 정말 믿을만한 사람에게는 알려줄 것. 아빠나 작은언니의 경우 학생을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아빠나 작은언니를 통해서 새엄마나 큰언니가 알게 될 가능성이 있으니 절대 연락하면 안된다면서 신신당부도 했다. 그 외에도, 대학 생활이나 자취에 관해서 이런저런 조언도 같이 해 준 대표는 학생을 보냈다.
학생은 대표의 말대로 이사가자마자 주민등록 열람 제한을 걸었다. 그리고 새엄마와 큰언니의 연락처를 차단하고, 작은 노트북을 한 대 샀다. 중고이기도 하고 사양도 그렇게 좋지는 않았지만, 공부하기에 나쁘지는 않았던데다가 이전 사용자도 별로 사용하지 않아서 새 기기나 다름없었다. 노트북을 사자마자 그녀가 먼저 한 일은, 아빠에게 그 동안 새엄마가 괴롭힐때마다 녹음해뒀던 파일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혼을 하건 계속 같이 살건 나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을거고,어디로 이사갔는지도 알려주지는 않겠지만 더 이상 집으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세상에... 송이가 또 과 수석이야? ”
“입학한 이래로 과 수석을 한번도 놓치질 않네. ”
열심히 공부하면서, 송이는 한번도 과 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다. 방학때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하고, 전노대부에 빌렸던 돈도 조금씩 갚아나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생활비를 최대한 아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최대한 생활비를 절약해서, 비상금을 조금씩 떼어다가 통장에 모아두기도 했다. 과 수석이었던 만큼 매 학기 장학금이 나와서 처음 입학금을 냈을 때를 제외하면 학비는 전혀 나오지 않았고, 집 보증금을 제외하고 남은 돈은 틈틈이 재테크를 공부하면서 굴리기도 하고 꼭 필요할 때는 생활비로 쓰기도 했다. 알뜰하게 살면서 절약하고, 적은 돈이지만 꼬박꼬박 갚는 송이를 보면서 대표는 ‘그래도 사람 하나는 잘 봤군’, 하면서 이따금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송이는, 법학 전문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나서는 학부생일때보다 정신이 없었지만, 늘 그랬던것처럼 최대한 아끼면서 살았다. 학부생일때부터 진학 상담을 해 송이의 사연을 알고 있었던 교수님도 최대한 학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제도를 찾아주었고, 마침 파리아에서 운영하는 장학 재단에서 학비를 지원해준다는 걸 알게 된 송이는 교수님의 도움으로 학비를 신청했다.
“송이 학생, 오늘 장학재단에서 결과가 나왔어요. ”
“정말요? 깜빡 잊고 있었네요... ”
“로스쿨을 졸업하고 변시를 칠 때까지, 생활비랑 학비를 파리아에서 지원해주겠다고 했어요. ”
“네? 저, 저를요? ”
“네. 학부 성적도 수석이었고, 로스쿨 내 열람실에서도 항상 늦게까지 남아있는 학구열을 높이 샀다고 하더군요. 이런 인재에게 지원이 가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손해라고 하셨어요. ”
파리아에서 학비를 지원받게 된 송이는 더 열심히 공부했다. 변호사 시험은 전문직으로 향하는 관문이니만큼 합격률이 50%나 되는, 꽤 어려운 시험이었지만 송이는 한번에 합격했다. 로스쿨을 졸업할 때 교수님은 송이 학생이라면 한번에 패스할 줄 알았다면서, 알고 지내는 법무법인에 송이를 추천했다. 처음에는 교수님 인맥이라며 미심쩍어하던 대표는 송이가 학부생일 때 과 수석을 한번도 놓친 적이 없다는 것과, 파리아의 장학 재단에서 흔쾌히 학비와 생활비까지 지원해줬다는 얘기, 그리고 변호사 시험을 만점으로 통과했다는 얘기까지 듣고는 흔쾌히 송이를 채용했다.
수습 변호사로서 일하는 것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월급이 나오기 시작하자 송이는 전노대부에서 빌린 돈을 천천히 갚아나가기 시작했다. 한번에는 아니어도 조금씩 갚아나가던 송이는, 마지막 돈을 상환할 무렵에는 감사 인사도 할 겸 전노대부 사무실로 찾아갔다.
“이게 누구야, 한 변호사님 아냐? ”
“형님이 전에 말씀하셨던 학생이 이 사람입니까? ”
“얌마, 이제는 학생 아니고 변호사야. 글쎄 파리아 장학재단에서 생활비까지 지원해줬다잖냐. ”
“거기 뽑히기가 정말 힘든데 대단하네~ ”
“아저씨 덕분이예요. 아저씨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여전히 그 집에서 괴롭힘당하면서 살았을거예요. 참, 여기 마지막 100만원이요. ”
“좋아, 5000만원을 전부 갚았구만. 이제 다시는 여기 오지 말고, 은행에서 대출 받아요. ”
전노대부에 빌렸던 돈을 전부 갚은 송이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동안 모아뒀던 비상금으로 골골대던 노트북도 바꾸고, 처음으로 옷도 사 입었다. 큰 맘 먹고 새 가방과 새 구두도 하나씩 샀다. 재테크를 배워서 돈을 굴렸던 게 그녀가 변호사가 되기 위해 공부할 동안 목돈이 되어서, 오랫동안 지냈던 반지하 전셋집에서 아파트로 이사도 갔다. 그때쯤 되자, 졸업하자마자 연락을 끊었던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지만 또 다시 그 집으로 찾아가 볼 생각은 못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처럼 송이가 법무법인에 출근했을때였다.
“송이씨, 이 사건 한번 맡아볼래? ”
“네? 제가요? ”
“이제 송이씨도 수습 딱지 뗄 때가 된 것 같아서 그래. ”
선배로부터 한번 맡아보겠냐면서 사건의 자료를 받아봤던 송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혹시 다른 사건은 없나요...? ”
“다른 사건? ”
송이가 건네받은 자료에서 송사를 다투는 사람이 새엄마였다. 정확히는, 피소를 당한 사람이 새엄마였고 송이가 변호를 맡은 쪽은 원고였다. 넘겨받은 서류에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박혜자, 세 글자가 보이자 송이는 그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다른 사건은 다 진행중이라서 안되겠는데... 우리 법무법인은 한 번 맡은 사건은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사람이 끝까지 가져가는 게 원칙이거든. 왜 그래? ”
“저, 실은... ”
송이는 선배에게 피고가 자신의 계모라는 것과, 계모가 고등학교를 졸업할때가지 그녀를 괴롭혔던 일을 얘기했다. 송이가 중학교 3학년이 될 무렵 재혼한 계모가, 고 3이 되고, 수능을 마치고, 그 집을 도망치듯 나올때까지도 괴롭혔다는 것을. 선배는 울 듯이 모든 것을 얘기하는 송이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송이씨가 뭘 걱정할 지 알것도 같네. 분명 피고측에서 송이씨한테 접선해서 해코지를 하거나, 아니면 청탁을 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걸 빌미로 집까지 찾아올 가능성도 있겠지. 아마 이걸로 인해 송이씨의 연락처를 알아내서 키워준 값 내놓으라고 돈을 뜯어낼 수도 있고. ”
“...... ”
“혹시나 계모, 그리고 큰언니가 송이씨를 해코지할 목적으로 찾아온다면 나한테 얘기해. 아니면 대표님께 얘기해도 되고. 회사측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조치를 해 줄거야. 집까지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면 보안이 철저한 곳으로 이사도 시켜줄거고, 회사로 찾아와서 행패 부리면 그것도 그것대로 사측에서 고소할거야. 여기가 법무법인이니까 겁도 없이 깽판 칠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모르는거니까... 그러니까 우리 믿고 진행해봐. 송이씨 안전은 우리가 보장할게. ”
“네, 선배님. ”
원고를 만난 송이는 고소하기까지의 일을 전부 들었다. 계모와 원고는 친구사이였고, 원고에게서 지금까지 큰언니나 아빠가 다쳤다는 핑계로 조금씩 돈을 빌렸고, 상담을 받기 위해 온 날까지 빌린 돈을 합쳐보니 얼추 1000만원 정도였다. 원고도 그렇게 살림이 넉넉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어려운 형편에 한푼 두푼 모았던 돈을 빌려준거였는데, 갚겠다고 한 날짜가 지났음에도 계모는 돈을 갚지 않았던데다가 큰언니나 아빠가 아프다고 했던것까지 전부 거짓말이었다. 모든 이야기를 전해듣고 원고가 증거로 가져온 것들까지 확인한 송이는, 선배의 조언을 들어가면서 처음으로 송사를 온전히 맡아서 진행했다.
첫 번째 공판일, 재판정에 일찍 갔던 송이는 앞 차례에 재판이 하나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원고가 도착하고, 피고인 계모도 같이 도착했다. 계모는 몰라보게 달라진 송이를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 했지만, 명함을 보고 그제서야 자기 의붓딸 한송이임을 알게 됐다. 그렇게 무시하고 찬밥 취급하던 의붓딸이 변호사가 된 데다가 자기가 피고인 사건을 맡게 됐다는 사실에 계모는 속으로 안도했다. 그리고 잘 부탁한다며, 그래도 3년동안 키워준 값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뇌물조로 5만원짜리 지폐 몇 장을 건네주려고 하자 송이는 거절했고, 한사코 거절하는 송이의 주머니에 돈을 넣으려던 계모는 지켜보던 직원에 의해 저지당하자 혀를 쯧, 찼다.
곧 송이가 맡은 재판을 진행할 차례가 됐다. 키워준 값은 하라는 계모의 말에, 송이는 차근차근 원고가 제출한 증거들을 판사에게 제출하면서 반드시 이 사건을 승소하겠다는 각오로 변론을 했다. 계모와의 원한관계는 별개로, 이 사건이 첫 사건이었기때문에 그녀는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내고 싶었다. 한 차례 피고측 변호사와 원고측 변호사의 변론이 오가는가 싶더니, 원고의 승소로 재판이 끝났다. 결국 계모는 지금까지 친구에게 빌렸던 돈들과 이자를 물어야 했다.
“이 년, 이 년이! 너, 내가 아까 키워준 값은 해달라고 했잖아! ”
“친구분 돈 떼어먹은 것 때문에 그 분이 정신적으로 피해 입은 것에 대한 위자료까지 청구 안 했으면, 키워준 값 다 했잖아요. 당신이 3년동안 날 키웠다고요? 중세시대 농노마냥 부려먹어놓고, 돈 들어가는것마나 하나하나 아까워하고, 큰언니랑 합세해서 막말하고 부려먹고 때린게 키운거라고요? 부모가 자식을 키워주는 건 의무예요. 그 의무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학대를 했는데 제가 키워준 값을 왜 지불해야 해요? ”
분해하는 계모를 뒤로 하고, 송이는 사무실로 돌아갔다. 원고는 덕분에 사건이 잘 해결됐다면서 연신 감사 인사를 올렸고, 계모는 패소한 게 분한지 이를 뿌득 갈았다. 아마도, 그래도 가족이니까 좀 설렁설렁 해 줄거라고, 좋은 게 좋은거라고 방심했다가 크게 뒤통수를 맞은 탓일것이다. 실제로도 송이는 처음으로 맡은 재판이라서, 그리고 피고가 자신을 괴롭히고 학대했던 계모였기 때문에 열심히 준비했다. 첫 재판을 응원할 겸, 참관도 할 겸 갔던 선배의 말에 따르면 ‘저렇게 매서운 성격일 줄 몰랐다’고 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송사를 마친 송이는 작은언니에게 오랜만에 연락했다. 아빠는 연락처를 차단하지 않았지만 아빠와 연락도 주고받지 않았던 것과는 달리, 집에서 괴롭힘 당할때도 그녀를 몰래 도와준 작은언니는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공부하느라 연락을 끊고 살았지만, 할머니 장례식 이후로는 간간이 연락하고 있었다. 작은언니도 로스쿨에 들어간 것,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것과 법무법인데 취직한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다른 가족들에게는 이 사실은 물론 송이와 가끔 연락을 한다는것까지 철저히 비밀로 했다. 연락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작은언니를 통해서 송이에게 돈을 뜯어내려고 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안그래도 엄마 패소했다고 연락은 받았는데, 네가 원고측 변호사였다며? ”
“응. 법정에서 기다리는데 나보고 키워준 값은 하라더라? 그러면서 돈 찔러주려고 했어. ”
“그래서 패소했구만. 집에서 학대란 학대는 다 해놓고 뭔 키워준 값을 지불하래? 널 만만하게 본 게 패소한 원인이지... 참, 나 집 나왔어. ”
“정말? ”
“응. 그래서 이제 마음놓고 연락해도 돼. 다른 가족들도 나 나간것만 알지 우리 집이 어디인지는 몰라. 알아도 못 찾아오게 일부러 지방으로 갔고. ”
계모와 큰언니가 송이를 학대하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집을 나간 송이에 의해 학대 사실을 알게 된 아빠가 송이가 지금까지 학대당했다는 증거들을 보냈을 때 ‘이제 집 나간 년 신경은 써서 뭐하냐’면서 무시로 일관하는 것을 보면서 작은언니 역시 가족들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나마 송이처럼 가족들이 괴롭히거나 하지는 않았기때문에, 작은언니는 일하면서 자격증 공부도 틈틈이 해서 파리아의 계열사로 이직했다. 면접을 볼 때에도 다른 사원들이 서울을 떠나기 싫어하는 것과 달리, 작은언니는 타향살이의 고됨을 앎에도 지방 지사에서 일해도 상관 없다고 했고, 그게 임원들의 눈에 들었는지 합격한 작은언니는 결국 D시에 있는 지사로 발령을 받아 거기 있는 사택으로 이사를 가면서 가족들과 연락을 끊었다.
“엄마가 아빠랑 언니 팔아서 돈 빌렸다는 얘기는 들었어. 그것때문에 친구가 몇 번 찾아오기도 했고... ”
“그 돈은 다 뭐에 썼는데? 그보다 아빠도 돈 버는데 왜 굳이 다른 사람한테 가족들까지 팔아가며 돈을 빌린거야? ”
“그 돈은 FX마진인가 했다가 날렸지. 아빠는 몇년전에 명퇴하셨어. 아마 너 대학교 2학년 됐을때쯤 명퇴했을걸? 그 뒤로는 아파트 경비 일 하시는데, 예전보다 벌이가 썩 좋지는 않아. ”
“그렇구나... 근데 천만원이 한두푼도 아닌데, 그걸 다 FX마진으로 날렸단말야? ”
“FX마진이랑 선물인가 했다가 다 날렸어. 그리고 큰언니는... ”
작은언니의 말에 의하면, 큰언니는 도박에 빠졌다고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기 전에 미국으로 여행을 갔던 큰언니는 라스베이거스에 갔다가 카지노에 발을 들이게 됐다. 같이 갔던 친구와 딱 한 판만 하기로 약속하고 시험삼아 한 번 도박을 했을때, 친구는 조금이지만 돈을 땄고 큰언니는 돈을 잃었다. 큰언니의 친구는 딱 한 판만 하자고 약속했으니 정말로 딱 한 판만 하고 나갈 생각이었지만, 큰언니는 돈을 잃었으니 본전은 찾아야 한다며 연거푸 도박에 매달렸다. 그리고 그 날은 내일이 출국날이라 친구가 잡아끌고 나와서 간신히 귀국을 했다.
“취업해서 일 좀 하는가 싶었는데, 불법 사다리인가 한다고 돈 다 날렸어. 적금이고 비상금이고 다 날리고 동료들한테 돈 빌려서 또 도박으로 날리는 바람에 소송당했거든. 나한테도 돈 빌리러 몇 번 왔었는데, 돈 없다고 하니까 돈 벌어서 다 어디다 쓰냐고 화내더라. ”
“동료들한테 소송도 들어왔겠네? ”
“들어왔지. 근데 소송 들어오고 며칠 있다가 집 나와서 그 뒤로는 어떻게 됐는지 몰라. 입사일을 ASAP라고 했는데, 이게 신의 한 수가 됐지 뭐야. 좀만 더 입사가 늦어졌으면, 아마 나한테 파리아로 이직했으니까 돈 갚아달라고 했을거야. ”
며칠 후, 송이가 막 회사에 출근하려고 집을 나서려는데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
“송이 너, 아직 집이야? ”
“네, 아직 집이예요. 지금 나가려고요. ”
“대표님이 너 오늘 쉬라고 하셨으니까, 집에 있어. ”
“네? ”
“내가 금방 집으로 갈테니까, 너 빨리 이삿짐 쌀 준비 해. ”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
다짜고짜 이삿짐을 싸라는 말에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선배는 커다란 포장이사 상자를 여러 개 들고 송이의 집으로 도착했다.
“집에 아무도 안 왔지? ”
“네... ”
“빨리 이사 준비부터 하자. ”
아침부터 계모가 사무실에 칼을 들고 난입했다. 송이때문에 재판에서 패소했다는 게 이유였다. 칼을 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계모를 본 대표는 선배에게 빨리 송이네 집으로 가서 이사 준비를 하라고 해서 선배는 송이네 집으로 달려왔고, 다른 직원들은 경찰이 올 때까지 안전한 사무실로 피신을 가 있었다. 경찰이 사무실에 난입한 계모를 체포해 가고 사건을 수습할 동안, 막 이삿짐을 싸기 시작한 두 사람은 저녁나절까지 짐을 쌌고, 선배가 미리 불러둔 이삿짐 트럭이 도착하자 두 사람은 짐을 트럭에 실었다.
“대표님이 내일이랑 모레는 연차 처리해준댔으니까,짐 풀고 푹 쉬어. ”
새로 이사한 집에서 짐을 풀고 푹 쉰 송이는 사흘만에 출근했다.
“송이씨, 이사는 잘 했어요? 집에 영현씨 말고 다른 사람이 찾아가고 그러진 않았지? ”
“네... ”
“다행이네요. 그 집은 보안이 철저하니까 안심해도 돼요. 첫 재판 승소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피고가 와서 난동을 부릴 줄은 몰랐네. 허허... ”
대표는 사무실에 와서 흉기를 들고 난동을 부린 계모를 고소했다. 계모가 뒷돈을 찔러주려고 했던 것은 참관하러 갔던 선배가 대표에게 얘기했었고, 대표는 고소하기 전에 선배를 통해서 들었다면서 그 건에 대해서도 고소하고 싶다면 같이 고소해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송이는 할 수 있으면 고소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대표는 흉기 난동에 뒷돈을 주려고 했던 혐의까지 추가해 계모를 고소했다. 계모는 흉기를 들고 가서 난동을 부린데다가 상대측 변호사에게 뇌물을 주려고 했던 혐의까지 있어서 실형을 살게 된 데다가, 이런 범죄자랑은 못 산다면서 아빠에게 이혼까지 당했다. 큰언니는 사채업자들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가 버린 지 오래였고, 아빠는 작은 단칸방으로 이사를 갔기 때문에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계모가 갈 곳은 없었다.
계모와 큰언니에게 구박을 받았던 송이는 지옥에서 도망쳐서 무사했지만, 송이를 학대했던 계모와 큰언니는 집에 가고싶어도 갈 수 없게 됐고 학대를 방관했던 아빠 역시 작은 집으로 이사가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근근이 먹고 사는 처지가 됐다. 그나마 의지하고자 했던 작은언니는 집에 환멸을 느껴 지방으로 이사를 가 버린 후 연락을 끊어서, 이제 남은 가족들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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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마드리갈
2024-09-13 22:54:55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요? 만 19세가 된다는 게 스무살이 되는 해의 생일이 지나야 한다는 것...굉장히 혼란스럽네요. 한국식 나이세기는 대체로 새해가 시작되면 나이가 1살씩 올라가는 개념일텐데...이런 계산방법, 정말 싫네요. 그리고 정말 이렇게 통용된다는 게 끔찍하네요. 대체 언제까지 이런 계산방법이 통용되어야 하는 것인지.
계모라서 나쁜 게 아니라 나쁜 사람이 계모인 것이겠죠.
다른 사안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하고 싶지 않네요.
SiteOwner
2024-09-23 22:59:36
법이 누군가를 보호하기보다는 성인이 되면 이렇게 조건부로 설정해 놓고 싸우게 만드는 상황이 과연 정의로운 것인지 의문이군요. 아무튼 잘 풀려서 다행이긴 한데, 요즘 이야기들을 읽어 보면 예전에 풍수 관련에서 잘 나오는 어떻게 하니 발복했고 어떻게 하니 패가망신했다 정도의 전근대적인 담론이 현대사회의 수많은 수평폭력의 형태로 재현되는 행태가 계속 무한반복되는 느낌이 강합니다. 사실 이게 괴담수사대를 타이틀과 얼마나 부합하는지 판단하기가 힘듭니다.
이 정도로 코멘트를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