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만큼의 폭력성에 불법 약물 사용까지 추가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도 했잖아요! 인문학보다는 향정신성 약물 사용을 장려하는 게 스티브 잡스 같은 인재를 키우는 데에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의견 개진해봅니다. 미래의 잡스 여러분 화이팅! 미래의 워즈니악 여러분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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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 개조
행동과 의식이 반복되는 외면적 행동의 절차에 붙들릴 때 개인은 죽은 로봇이나 다름없으니, 이젠 죽어서 재탄생할 때이다. '취하고' '깨달아' '빠져나올' 때인 것이다.
-티모시 리어리
인생은 실험이야.
왜 갑자기 이 얘기를 하나면, 음, 내가 전에 한 번 하도 할 게 없어서 실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거든? 비엔나 봉봉이 듣는 화학 실험 과목이었어. 내가 무슨 생각 하면서 강의실에 갔는지 대충 알겠지? 막 펑펑 터지고! 폭발하고! 끓어 넘치고! 강산이 튀어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쾅! 콰쾅! 꺄아악! 그런 광경을 보고 싶었던 거야. 실험 전에 간단한 교육을 받을 때도 위험할 땐 이렇게 해라, 액체가 묻으면 저렇게 해라 하는 얘기 들으면서 조금이나마 두근거렸어. 그런데 가운 입고, 장갑에 보안경까지 끼고 실험 딱 시작했는데 어땠는지 알아? 실험 조교가 글쎄 이러더라고? 지금부터 여기다가 A랑 B를 넣고 5분 동안 섞고 B로 씻고 씻고 씻고 C 넣고 2분 섞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C 넣고 4분 동안 무슨 오븐에 넣었다가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또 뭐랑 뭐랑 뭐랑 넣고 또 오븐에 7분 넣고 이렇게 네 번 반복하세요 씨발 말이 되냐 이게! 내가 실험도구란 실험도구는 다 떨어뜨려서 작살낸 게 실수가 아니었다는 건 그 조교도 알겠지만, 기숙사 가자마자 화장품 통을 다 집어던져서 작살낸 건 아마 모를 거야, 응, 모를 거야. 인생은 실험이야. 실험적으로 추출된 지루함의 원액이야.
그리고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건, 인생이라는 지루함의 원액 속에서 생존할 수 있는 기적의 생명체를 만들어내려는 금단의 실험. 실험 책임자는 푸파. 실험 대상은 푸파. 프랑켄슈타인 박사의 말을 빌리자면 ‘저항할 길 없는 광기에 가까운 충동에 내몰려 오로지 전진’하지 않도록, 푸파가 어떻게든 광기의 물살을 이겨낼 수 있도록 푸파에 의해 이뤄지는 잔혹한 생체실험이야. 실험 방법은 지난번에 했던 그 지루한 것과 별로 다르지 않아-A도 B도 C랑 오븐 같은 게 빠졌을 뿐. ① 물의 온도를 조절한다, ② 수도꼭지를 돌려 튼다, ③ 손을 가져다댄다, ④ 씻는다. 매번 서로 다른 방법으로. 매번, 서로, 다른, 방법으로. 오늘 선택한 방법은 라벤더 향 비누로 빈틈없이 세 번 문지르기. ⑤ 충동이 가장 효과적으로 억제되는 손 씻기 방법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아주 간단한 실험이고, 그 성과도 아주 명쾌하게, 전혀, 없어.
성과가 전혀 없다고.
사실 ‘전혀’라고 하기엔, 딱 손을 씻고 나면 의외로 충동이 사라지는 건 사실이야. 씻으면서 자기암시를 강하게 건다든지,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박박 문지른다든지, 향이 강한 비누를 쓴다든지 하면 효과가 더 좋고. 하지만 애초에 욕구를 참는 데에 초인적인 소질이 있었던 소아성애자 아저씨랑은 달라서 내 충동은 손에 물이 말라가면, 비누 냄새가 희미해져 가면 스멀스멀 고개를 들더란 말이지. 게다가 오래도록 억눌려 있을수록 점점 더 파괴적이 된다고. 폭발하라는 플라스크는 안 폭발하고, 대신 미생물학이나 사회심리학이나 영문학 강의 도중에 쾅! 콰쾅! 그런 판이니 최근 몇 주간의 실험을 통해 내가 얻어낸 거라고는 고작해야 손에 난 크고 작은 상처, 한두 번씩 쓰고 내팽개쳐 둔 비누, 짜증나서 박살낸 샴푸 통이 전부야.
이런 실험을 빙자한 고행으로 영혼을 뒤틀고 있을 땐 뭐라도 자극적인 걸 건드려서 정신에 활력을 불어넣을 필요가 있겠지만, 이걸 어쩌나. 지금 루벤 대학에는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는 것을. 수도사 유령보다도 무서운 2학기 중간고사라는 유령이. 나야 그날그날 끌리는 강의만 멋대로 골라가면서 듣는데다가 걱정할 점수래 봐야 40점 만점짜리 사이코패스 테스트 점수밖에 없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은 아무래도 아닌 모양이야. 항상 제정신 나간 것처럼(진짜 제정신 나간 내가 보증하는 거니까 틀림없지!) 붕붕 떠 있는 비엔나 봉봉마저도 요즘은 카페에 필기 노트를 가져온다니까. 덕분에 더 이상 지루해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이 루벤이라는 도시에서는 지금 과학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지루함의 기적이 일어나는 중이지. 손을 씻고 상담을 받고, 커피를 마시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근육이 끊어지도록 운동을 했다가, 뭘 해도 떨쳐낼 수 없는 무겁고 끈적끈적한 지루함의 침전물이 온 루벤을 뒤덮고 있어.
신발 바닥에 쩍쩍 달라붙는 그런 지루함을 뚫고, 어딘가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지루하지 않은 불순물의 파편을 찾아 할 일 없는 오후에 향한 곳은 내가 있는 기숙사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쿨도어의 기숙사. 시험기간이 되면 비엔나 봉봉은 똑같은 앓는 소리를 수십 번씩 반복해가면서 히스테리를 부리니까 아예 무시해 두고, 지루하긴 해도 좀 점잖게 지루한 쿨도어나 방해하면서 노는 게 나아. 지금 시험 공부하느라 바쁠 테니까 나가서 밥 먹자 그래야지. 그래, 나도 이런 게 꼬마들이나 할 만한 쩨쩨한 짓인 건 알아. 이딴 짓을 하는 게 뭐가 재밌겠어. 하지만 아무리 약을 먹고 손을 씻고 해도 결국 이런 식으로 조금씩, 사소하고 쩨쩨한 괴롭힘으로나마 내면의 가학성에 자극을 주는 것만큼은 효과가 없단 말씀이야. 이 따위 변명을 머릿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쿨도어네 기숙사 방문을 가볍게 따고 들어갔는데,
“……안녕.”
우와, 웬 좀비가 하나 있네. 짧은 머리는 완전 부스스하고 눈도 퀭하니, 구겨진 티셔츠만 하나 걸친 쿨도어는 얼마나 잠을 못 잤는지 목소리에조차 생기가 하나도 없었어. 에너지 드링크 덕분에 겨우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네. 엉망인 건 사람뿐만이 아니라, 평소에는 깔끔하게 치우고 사는 바닥에도 지금은 책이며 볼펜 따위가 내팽개쳐져 있고. 시험이라는 유령하고 싸우는 건 알겠지만, 뭐랄까, 이건 비유적으로가 아니라 진짜로 싸운 현장 같은데.
“그거 밟지 마.”
뭐? 뭐 밟지 말라는 거야?
“그 책, 아니, 그쪽 바닥 전부.”
나도 다 때려 부순 다음엔 치우기라도 하는데! 시험 때문에 이렇게 사람이 맛이 가나? 그래도 쿨도어는 비엔나 봉봉보다는 성적도 훨씬 잘 나오는 축에 들고, 별로 시험 때문에 머리 싸매는 기색도 없었다고 기억하는데. 아니, 확실히 시험 때문은 아닌 거 같아. 왜냐면 사람 상태가 이렇거든.
“그거 밟지 마, 밟지 마…….”
진짜 제정신 나간 내가 보증하는데, 평소엔 지루할 정도로 멀쩡한 사람이 이렇게 되는 건 아주 좋은 징조야. 지금부터 재밌게 망가지기 시작할 거라는 명백한 신호거든! 이거 멋진 일이 일어날 거라는 예감이 드는데, 평소엔 별로 선호하지 않지만 지금만큼은 쿨도어랑 얘기라도 좀 해 봐야겠어.
“이렇게 해 놓고 살면 룸메이트가 뭐라 안 그래?”
“지니?”
그래, 지니 하민. 특별히 마련된 1인실을 쓰는 나랑은 달라서 쿨도어는 2인 1실을 쓰거든. 지니 하민은 쿨도어보단 조금 더 재밌는 사람이긴 한데, 안타깝게도 내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억양을 쓰지. 덧붙이자면 방 안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살 만한 사람은 아니야. 온 사방에 구강 세정제 냄새를 뿌리고 다니는 결벽증 말기의 쿨도어만큼은 못해도 유난스레 깔끔을 떠는 여자라고.
“결벽증 아니야, 푸파.”
네, 네, 그러시겠죠.
“그리고……, 지니는 여기 없어.”
“시험기간에 집에 갔어? 이야, 용기 있는데.”
“죽었어.”
그거 알아? 아주 가끔 있는 일이긴 한데, 내 예감이 맞을 때도 있다? 한 3년쯤 전인가에 한 번 있었고, 그것만큼 굉장한 건 아니지만 지금도 일단은 맞았어. 뭔가 재밌는 일이 일어날 거야. 손에는 흥분으로 땀이 흐르고, 이래서야, 이래서야 그렇게 열심히 씻은 의미가 없는데!
얘기는 대충, 어제 새벽에 쿨도어의 룸메이트인 지니 하민이 여기 기숙사 창문으로 뛰어내린 것으로부터 시작됐어. 유학생 커뮤니티에는 아직 널리 퍼지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소동이 있었나봐. 경찰이 와서 조사도 하고, 컴퓨터도 가져가고, 뭐 그런 것들. 그런데 사실 조사할 것도 없었대. 당시에 쿨도어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중이었고(이 시점에서 내가 상상했던 스물일곱 가지 달콤한 시나리오가 날아가고 말았어), 기숙사 곳곳의 CCTV나 학생들 증언을 들어 봐도 수상한 사람이 침입한 정황이 없고, 죽은 것도 누가 봐도 자기가 뛰어내려서 죽은 거고, 책상에는 한참 전부터 공부하던 책이 펼쳐져 있었고 지금이 시험기간이니까 뭐 당연한 일이잖아. 시험공부 하다가 스트레스 받아서 막 집어던지고 난리를 치다 자살한 거지.
“이게 사건 현장이야.”
어떻게 이걸 보존해 둘 생각을 하지. 파편 하나도 안 건드리고 그대로 놔뒀다는 건 좀 과도한데. 편집증 초기증상인가.
“그야 수상한 게 있으니까.”
“자살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
와, 고개 끄덕. 아무도 안 들어왔고 누가 봐도 뛰어내린 거지만 자살은 아니래. 그럼 범인은 누군데? 시험이라는 이름의 유령?
“그건 몰라. 하지만 단언할 수 있는 건, 지니는 절대로……,”
“자살할 애가 아니라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잖아. 증거를 대라고.”
이렇게 몰아붙이는 거 좋아해!
“분명히 수상한 게 있었어.”
좋아, 수상한 게 뭐였을까나. 쿨도어의 다 죽어가는 설명에 따르면 최근 들어서 애가 시험하고는 별로 상관없이 불안해하고 그랬대. 말을 걸면 깜짝 놀라고, 누구한테 쫓기는 거 같고. 거기다가 갑자기 선글라스를 쓰기 시작하질 않나, 책장에 꽂힌 책을 전부 알파벳순으로 정리하지 않나, 쿨도어한테 농담처럼 이런 말도 했다는 거야. 자기가 죽거나 사라지기 전에는 절대 책장을 건드리지 말라고. 잠깐, 자살 전에 심경 변화를 겪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럼 ‘시험 스트레스 때문에 자살’이 아니잖아.”
그야 그렇지.
“내가 보기엔, 지니는 뭔가 말할 수 없는 사건에 얽혔던 거야. 그래서 불안해한 거고. 그 사건이 분명 죽음하고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 확신해.”
와, 그건 좀 아니지! 케네디가 외계인한테 암살당했다는 수준의 음모론 아니야? 쿨하고 재미없게 공부에만 집중할 거 같은 사람이 어쩌다 이렇게까지 흥미롭게 떨어졌지?
“난 유학생 신분이고, 경찰 발표랑 싸우고 고소를 하고 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야. 그럴 힘도 없고. 하지만 내가 뭔가 밝혀낼 수 있는 게 있다면, 그렇다면 꼭 밝혀내고 싶어. 하지 못하는 건 포기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런 숭고한 마음가짐으로 시험공부 틈틈이 이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 이건데, 네, 다음 음모론자. 솔직히 이 사건은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자살이야. 현실은 엑스파일이 아니고 쿨도어는 멀더 요원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음, 자살한 사건 자체는 재미가 전혀 없을지 몰라도 거기에 집착하면서 망가져가는 사람은 그럭저럭 재미가 있잖아? 여기에 하나 더 필요한 게 있다면, 그런 망상적인 믿음을 굳건하게 해 줄 수수께끼의 미소녀뿐이라고.
“내가 도와줄게.”
처음 반응은 이렇지. 예상대로야.
“아니야, 이건 내가 최선을 다할 일이야. 너한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내가 진심인 척 하면서 밀어붙이면 결국엔 다들 마음을 바꾸더라고. 내가 뜻한 대로 이루어지리라, 이렇게.
“……널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랬다간 오티에르 교수님한테 혼날 거야.”
오, 물론 위험한 일에 끌어들이는 게 아니고말고요. 애초부터 위험한 일이란 없었다고. 과학과 이성의 세기에 이런 되도 않는 음모론이라니. 하지만 쿨도어를 망상과 광기의 나락에 빠뜨리기 위해서는 그 분야 선배인 내가 등을 좀 떠밀어주고, 좀 같이 어울려줄 필요가 있겠지. 아마 몇 시간 정도는 질리지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실실 웃는 게 쿨도어한테는 ‘생긋’으로 보였던 모양이야. 날 확 껴안는 거 보니까ㅡ으으, 답답해. 비엔나 봉봉이 껴안는 거랑은 느낌이 완전 다르네.
키가 몇 뼘은 큰 여자가 나를 껴안고 귓가에 고마워고마워 조잘대는 건 별로 좋은 경험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 후에 일어난 일은 괜찮았어. 쿨도어가 나를 덮치지도 않았고 내가 쿨도어의 혀에 적극적으로 엉겨 붙지도 않았지만(내가 그런 일을 하고 싶은 대상은 이 지구상에 단 하나밖에 없어!), 적어도 룸메이트의 자살로 망가져버린 쿨도어만의 망상의 세계에서 음모론 놀이는 계속할 수 있었거든. 마침 현장도 보존되어 있고 말이야. 쿨도어가 말하길 오늘 밤쯤에는 짐을 챙기러 가족들이 올 거라니까, 그 전까지 놀아 보자고.
“그런데 확실히 이상한 게 있네.”
나 지금 노는 중이야. 바닥에 널브러진 책이며 부서진 필기구, 책상에 펼쳐진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 맨 왼쪽 책장에 놓인 네모난 가족사진 액자에는 중간에 가로로 길게 긁힌 자국, 책들은 알파벳순으로 가지런히 꽂혀 있고, 이런 걸 보면서. 절대 멍청한 망상에 휘말린 게 아니고, 단지 놀다 보니까 수상한 게 있을 뿐이라고. 그러니까 감정을 주체 못 하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건 내 전문 분야잖아? 그런데 전문가적 견해로는 이 현장은 아무리 봐도ㅡ
“시험공부가 안 돼서 그런 건 아니야.”
오, 쿨도어 표정 봐. 장난 아니게 기쁜 거 같다. 저런 건 비엔나 봉봉이나 지을 수 있는 표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쨌든 현장으로 눈을 돌려서,
“무기가 될 만한 커다란 책하고 필기구. 바닥을 향해서 필사적으로 내던졌어. 어떤 목표를 공격하려고 한 것처럼 보이는데.”
“습격당한 걸까?”
아니에요, 음모론자 아가씨. 바닥을 향해서 내던졌다고요. 비밀 조직에서 온 암살자가 바닥을 기어왔단 말입니까? 오히려 바퀴벌레나 쥐 같은 게 나타나서 과민 반응한 거라고 생각하면 납득이 되는 현장이라고.
“호저일 수도 있겠다.”
이건 또 뭔 소리래.
“아니, 지니가 그거 무서워했거든. 어릴 때 케냐에서 살았는데, 기르던 개가 호저랑 싸우다가 얼굴에 가시가 잔뜩 박혀서 죽는 걸 봤대.”
“비밀 조직에서 보낸 암살자 호저?”
그래, 입을 다물었네. 지루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거면 입을 다물어야지. 그건 그렇고 뭔가 수상한 점이 없는 건 아닌데, 시험 스트레스 때문에 뛰어내린 게 아니라면 지니는 왜 자살한 걸까? 그것도 아주 대놓고 의미심장하게『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읽으면서! 죽기 얼마 전에 쿨도어한테 뭐라고 말했다고? 책장을 정리하지 말라고? 언제?
“죽거나 혹은 사라지기 전에. 그거네.”
“뭔가 알았어, 푸파?”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내용이야. 지킬 박사는 친구인 변호사 어터슨에게 편지를 건네는데, 그 편지 겉에는 자신이 죽거나 사라지기 전에는 열어보지 말라는 말이 적혀 있지.”
아마 지니는 자기가 언제든지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 같아. 그래서 자기 룸메이트가 메시지를 눈치 채도록, 자기가 항상 읽는 책을 가지고 암호를 만든 거야. 그렇다면 그 암호의 내용이 뭔지 알 것도 같다. 지킬 박사가 남긴 메시지대로, 소설의 구절대로 ‘왼쪽에 <E>로 표시된 유리장’을 열면 되겠지만 이 책장에 그런 건 없으니까 대신,
“Elementary Classical Analysis. 저 책만 E로 시작하네.”
정말로 무슨 사건이 있었다면, 그래서 지니가 죽기 전에 책장을 정리하면서 자기가 죽거나 사라지기 전에는 건드리지 말라고 한 거라면, 펼치기만 해도 급성 지루함 중독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맬 것 같은 저 두꺼운 교과서 어딘가에 힌트가 남아있을 거야. 그래, 조심해서 글자만 안 읽으면 돼. 하나, 둘, 셋, 뭐야 이거?
“약병…….”
그래, 쿨도어. 나도 그게 뭔지는 알아. 지킬 박사가 ‘왼쪽에 <E>로 표시된 유리장’에 약을 보관한 것처럼 두꺼운 책을 파내 집어넣어 둔 작고 하얀 플라스틱 약병. 안에 들어있는 건 하얀 알약 열두어 개. 참으로 조잡한 암호인데다가 가리키고 있던 진실도 지루하기 짝이 없네. 쿨도어도 대강은 알고 있겠지만, 여기서 설명을 해 주면 반응이 더 재밌겠지?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불안한 모습, 이상한 행동, 숨겨 둔 약병, 이거 뭐 얘기할 것도 없잖아. 그래, 인생에 약 한두 번 해 보는 것도 괜찮지.”
가만히 서서, 멍하니 부들부들 떨면서, 눈앞의 광경과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를 믿지 않으려고 마음속으로 발버둥을 치면서. 그래, 꽤 멋져, 나쁘지 않아. 조금 더 무너져 보라고. 배를 찌르는 건 안 돼도 마음을 찌르는 건 허용이란 말이야. 아마도.
“누구한테 들키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겠지. 수상한 조직에서 온 아저씨들이 무서웠을 수도 있지. 그러니 이런 식으로 암호를 만들어서 혹시라도 자기가 어떻게 되면 너한테 진상을 밝히려고 했겠지. 하지만 직접적으로 우리 지니를 죽인 건 뭘까? 목격자도 없고 CCTV에도 안 찍힌 수상한 아저씨들? 그것보다 더 간단한 해석도 있잖아. 흔한 일 아냐? 약에 취해서 하늘나라로 다이빙하는 거?”
표정 좋고! 목소리 좋고!
“입 닥쳐, 푸파!”
동작도 좋고! 그래, 그렇게 팔을 휘둘러보라고! 내가 뺨을 내어주고 있으니까 고막이 터질 정도로 힘껏 때리라고! 왜 평소에는 안 그래? 응? 왜 평소엔 그래 지루하게 구시나? 이렇게 세게 때릴 수 있으시면서! 정말이지 재미없는 인간들은 살아있을 가치가 없단 말이야, 다 수도사 유령들 곁으로 꺼져 버리라고ㅡ
결국 잠깐의 나들이 끝에 남은 것은 쥐꼬리만큼도 없는 사건의 여운, 왼쪽 뺨의 얼얼함(솔직히 이렇게 세게 때릴 줄은 몰랐어), 문 밖으로 쫓겨나자마자 다시 어깨를 짓누르고 발을 타고 기어 올라오기 시작하는 질척한 지루함, 그리고 전리품 하나 정도였어. 분명 마지막에 쿨도어가 멋진 표정을 보여주긴 했지만, 하프처럼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귀국한 것도 아니고 그냥 화가 잔뜩 났을 뿐이잖아. 별로 만족스럽지가 못하다고-하기야 내가 뭔가에 만족했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겠냐마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방금 얻은 전리품이 중요한 거야. 새하얀 가운 주머니 안에서 달그락거리는 새하얀 약병 하나. 예전부터 한 번 실험해 보고 싶었던 바로 그것.
인생은 실험이야.
담배도 본드도 실험해본 적은 없어. 전혀 재밌을 것 같지 않았거든. 하지만 더 강한 약물이라면, 환각 속의 적을 만들어내고 급기야는 창밖으로 뛰어내리게 만든 그런 종류의 약이라면, 뇌의 활성화되지 않은 부분을 자극해 줄 마법의 약물이라면, 그거야말로 내게 진짜 즐거움을 가져다줄 수 있지 않을까. 시야에 불꽃이 튀고! 전기가 흐르고! 하늘이 수천 가지 색으로 폭발하고 땅이 갈라지고 감각이 극대화되고 환희의 송가가 울려 퍼지고! 환시 환청 환각의 세계라면 혹시 잿빛으로 보이지 않을지도 몰라! 비틀즈 멤버들이 보았던 걸, 스티브 잡스가 느꼈던 걸 나도 느낄 수 있을 가능성이 있어! 인생은 실험이야. 실험적으로 추출된 지루함의 원액 속에서 지루하지 않은 불순물을 추출해내려는 거의 불가능한 연금술이야. 그리고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은 즉 이론상 가능하다는 소리라고.
그래,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건, 인생이라는 납덩이와 같은 지루함을 가지고 황금과도 같은 즐거움의 순간을 창조해내려는 금단의 실험. 실험 책임자는 푸파. 실험 대상은 푸파. 지킬 박사의 말을 빌리자면 ‘더 젊고 더 가볍고 더 행복’해질 수 있도록, 푸파가 어떻게든 이 지루함의 늪지대에서 즐거움이라는 불길을 피워낼 수 있도록 푸파에 의해 이뤄지는 위험천만한 생체실험이야. 실험 방법은 역시 지난번 실험하고 아주 비슷해. 먼저 약에 취해있는 동안 조금이나마 충동을 억제할 수 있도록 손을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그러고 나서 ① 약병을 연다, ② 손을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③ 조심스럽게 약을 한 알 집어서 입에 넣는다, ④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씻고, ⑤ 지루해 죽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우더라도 손에 물기가 남아있는 한은 어떻게든 정신을 집중할, 수가 있는데, 이론상은, 그래, 심장이 두근거려, 두근, 두근, 나도 뛰어내리거나 하게 될까? 다행히도 이 방 창문에는 따로, 창살이 달려 있어, 아르투아 교수도, 참 극성이지, 두근, 두근, 어라, 입이 바짝 마르고, 온 몸이 따끔 따끔, 따끔, 긴장했나, 긴장했을지도 모르지, 실험할 땐 긴장을 놓으면 안 됩니다 손에 약물이 묻었을 때는 흐르는 물로 씻어냅니다 씻고 씻고 씻고 씻고,몸이 따가워, 눈이 따가워, 빛이 따가워, 시야가, 흐려서 불을 끄려고 일어나려는데 어지러워, 어지러워서 다시 침대에, 주저앉았는데, 이번엔, 또 입 안이 마르고, 목이 말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목이, 말라, 몸이, 뜨거워, 더워, 옷을 좀 벗을까,
딸깍,
딸깍 딸깍,
문 쪽에서 소리가 나네. 응, 누구지. 노크하는 것도 아니고, 문고리만 딸깍, 딸깍, 누굴까. 하필 왜 지금일까. 지금 걸리면 좀 곤란한데, 하고 생각했더니 잠깐 정신이 들어서, 그래, 정신 차릴 수 있잖아? 어지럽지만, 어른어른하지만, 그래도 뭐,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딱히 생각을 못 하는 것도 아니야. 의외로 기대 이하네. 조금 실망했어, 근데, 딸깍, 딸깍, 저거 도대체 누구지, 누가 나처럼 문이라도 따고 들어오, 나, 에, 에에, 방금 문 열렸거든? 열렸거든? 열렸는데? 그런데 문 연 사람이, 들어온, 사람이, 어라? 왜 여기, 뭐야 뭐야 이거, 이 상황, 저 눈, 나의, 커다랗고 어둡고, 모든 것을, 보는 눈이 흐물흐물 처진, 사랑스러운 머리카락에, 헝클어진 머리카락 뒤에 가려서, 왜 여기에, 저 가느다란 팔, 다리, 새하얘, 나의 사랑스러운, 말랐어, 그때처럼, 2년, 달라진 게 없구나, 나를, 뒤틀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저주받은 영혼인 나를 유일하게 이해해 주었던 세상에 단 한 사람, 나의 사랑스러운 파파베르 솜니페룸, 아아, 아아아 어째서 여기에!
“잘 지내고 있나 얼굴이라도 보러.”
저 탁한 목소리, 천식 기미가 있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사랑스러워, 아아 불꽃이, 전기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나의 이해자, 내 사랑, 나의 사랑스러운 페요테 샐러드, 그래 안아줄게, 그 날처럼, 내가 문을 따고 들어갔던 그 날 너는 침대도 아닌 소파 위에서 자고 있었고 나는 살금살금 다가가 가볍게 껴안고 놀래 주면서 몇 번이고, 그래, 그 날 나는 몇 번이나 좋아한다고 함께 있자고, 서로에게는 가장 소중한 사랑의 대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자고 입을 맞추자고 함께 눕자고 속삭였는지ㅡ
“그런데,”
아, 저 목소리가 내게로, 내 신경을 타고 뇌로, 너무 오랜만에 느끼는 이 강렬한 감각이 온 신경계를 지져서 태워버릴 것만 같아, 자, 이리로, 소파가 아닌 침대로, 그런데, ‘그런데’ 다음에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그래, 침대로 오는 건 좋은데, 나를 봐 줘, 침대가, 아니라 약병을, 아니, 약병,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다가 멈췄을 때 거기에 비치는 것은 매트리스 위의 새하얀 약병이고 두근, 두근, 눈이 따가워, 불을 껐어야 하는데, 그 애는 가느다란 거미 같은 손가락으로 약병을 쥔 채, 나를 들여다봐, 따가워, 온 몸이, 뜨거워, 몸이 왜 이렇게 뜨겁지, 입이 말라, 무한하고 지루한 사막을 홀로 걷는 여행자처럼, 그리고 너는 왜 그렇게 화가 난 표정, 응, 왜 나한테는 웃어주지 않아? 응?
“이 약은 뭐야?”
아, 그 약은, 그래, 나 약 먹었었지. 그래. 정신 차리자. 나는 벨기에에, 루벤에, 왜? 치료를 받으러? 그런데 지금 나, 약에 취해 있지, 그리고 이 사랑스러운 얼굴은 나를 보기 위해서 왔고, 나는 약에 취해서 방 안에, 침대에? 어? 어라? 이거 뭐야 이거 무슨 상황이야? 화가 난 거야? 내가, 내가 치료에 집중하지 않아서
“실망했어.”
아,
“정말 실망했어. 너 고작 이 정도였어?”
아아, 그런 말은! 그런 말은, 아파! 몸이 따가워, 심장이, 두근, 찌르는 것처럼 아파, 그렇게 말하지 마! 이거, 그래, 오해야! 나 지금, 약에 취해 있지만 약에 취해 있지 않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런 말은,
“고작 이 정도였냐고. 이렇게나 제 정신이 아니었냐고, 이렇게나 제 정신이 아니었냐고! 대답해! 대답해!”
“그럼 내가 뭐라고 생각했는데?”
안 돼
“내가 사이코 살인마인 거, 몰랐어? 내가 도덕에 대해서 신경이라도 썼어? 내가 기회가 되면 약이라도, 할 거 몰랐어? 날 이해해준 게 아니었어? 그 날, 내가 너희 집에 들어갔을 때, 그래, 불꽃이 타오르고, 그 바비큐 파티 때, 분명히 이해한다고 그래서 나를 여기로 보내는 거라고 말했잖아, 응?”
“그땐 네가 고작 이 정도일 줄은……,”
안 돼 안 돼 그럴 리가
“고작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휙, 하고. 뺨이 얼얼해, 말랐고, 새하얗고, 차가운 손이 왼쪽 뺨에 와 닿는 순간, 오늘 통산 두 번째였고, ‘안 돼 그럴 리가’라는 말로 어떻게든 묶어두려 했던 두려운 상상은 현실이 되었고, 그래, 그랬구나. 너는 나를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이런 나를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전부 거짓말이었어 그저 나를, 사이코 살인마인 나를, 즐거움이 거세당한, 심장이 뛰고 입이 마르고 눈이 따끔거리고 몸이 뜨거운, 어지럽고 눈이 어른거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나를, 아니야, 아니, 그래, 말은 이해한다고 하면서, 넌 탐정이니까, 저 까만 눈으로 모든 걸 담아서 저 안에 감춰진 뇌로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말했으면서! 그렇게 말했으면서, 나를 뭐라고 생각한 거야? 너도 나를 그저, 지금은 조금 이상하게 굴지만 속은 착한 아이라고, 엄마랑 아빠가 날 그렇게 생각했지, 여동생을 해체했을 때도, 너도 똑같아! 너희 가족을, 바비큐 파티를 보고도, 너도 나를 하나도 이해 못 하는 거였어!
“고작 이 정도일 줄은……,”
두 번째는 참을 수 있어, 내 사랑, 하지만 세 번째는,
너에게까지 이런 말을 쓰려니까 가슴이 아프지만,
말해야 할 때는 말해야 하니까, 응, 그래, 심호흡 하고,
재미없어ㅡ
아아, 나는 자주 화를 내지만, 오늘은 정말로 이렇게나 화가 나는구나! 절망적이야. 절망적으로 화가 나서, 그래, 나 손을 씻었는데, 몸이 뜨거워서 그럴까, 이미 마른 걸까 아니면 내가 느끼지 못하는 걸까, 실험은 실패인 거네. 이걸로는 전혀, 전혀, 그렇게 씻어도 전혀 충동을 주체할 수가 없어, 그래서 몸을 일으켜버려! 눈은 바짝 말라서 따갑고 눈물은 하나도 흐르지 않지만 마음만큼은 이미 눈물로 가득해. 그리고 불길로 가득해. 너는 나한테 마지막 안식처였는데 나를 내쳐버렸잖아? 너조차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네가 나를 이해해줄 수 없다면, 그래서 내게 더 이상 즐거움을 줄 수 없다면, 나는 내 방식대로 너를 즐기겠어! 바닥에 너는 쓰러져 있고 어느 새 나는 네 배 위에 올라타서, 머리가 어지러워, 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하지만 이렇게나 연약한 너는 약에 취한 채로도 가볍게 제압할 수 있어. 그 때도 그랬어. 버둥거려봐야 소용없다고? 잠자코 있어, 어차피 아프긴 똑같이 아플 테니까, 아아, 오늘도 파자마 차림이구나, 그 날처럼, 얇아, 그 아래의 살은, 부드러워, 그만 버둥거리라니까!
“죽이려고? 날 죽이려고? 널 믿었는데, 믿었는데 고작 이런 애였어?”
그리고 그만 말하라니까! 믿었다고? 누가 날 믿으라고 말했는데! 네 잘못이야, 응, 그리고 대가를 치를 시간이야. 자아, 나 주먹질은 별로 소질이 없지만, 그래도 최근엔 운동 꾸준히 했다고?
이 감촉, 부드러운 뺨에 뜨거운 주먹이, 턱을 찌그러뜨릴 기세로 내리 꽂히는 이 감촉.
그리고 꼬집는다는 행위는 대체로 가벼운 애정표현이지만, 어머, 이것도 내 나름의 애정표현이야. 파랗게 멍이 든 팔, 아직도 파자마 입고 있니? 찢어버리고, 다시 멍이 든 가슴, 젖꼭지를 비틀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너는 계속 말하는구나. 날 비난하는구나. 이런 애일 줄은 몰랐다고, 너한테만큼은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하는구나. 그래, 계속 말해. 그 혀가 멀쩡히 붙어있는 동안에는, 주먹에 맞을 때는 빼고.
가지런하고 새하얀 이가 빨간 핏물과 함께 또르르 굴러 나오고, 그래, 날카로운 물건은 일부러 근처에 두지 않지만 그래도 펜은 있어. 펜을 들었을 때의 네 표정. 흐리게 보이는 네 눈물. 죽이지 말아달라고, 친구 아니냐고, 너는 절대 이런 애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는 네 혀를 손으로 잡아당겨, 어머, 펜을 꽂아 놓으면 예쁜 피어스 완성! 다른 펜도 많이 가지고 있는데, 간호사, 메스, 대신 펜을. 적당히 이쯤 꽂으면, 비난은 비명으로 바뀌고 나는 모든 분노를 쏟아내고, 주먹을, 손가락을, 펜을, 피투성이가 되고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계속 이럴 줄 몰랐다고 중얼대는 너에게, 그래도 아직 배는 하얗고 바지를 벗기면 귀여운 속옷이 있구나. 응. 아직도 화가 나 있다고. 충분히, 손톱을 세운 검지가 허벅지 위를 기어가고, 빨간 자국은 더 깊은, 비밀스러운 곳으로 향하고, 나는 또 펜을 쥐고 있고, 나는 첫 경험을 너와 함께하기로 마음속으로 약속했었는데 너는 어때? 쉿, 선택권은 없어! 아파? 네가 내 마음속에 억지로 들어가서 헤집어놓고 또 멋대로 빠져나온 것처럼, 내 손가락도 내 펜도 똑같은 걸 할 수 있거든! 그래! 그 얼굴! 그 표정! 그 목소리를!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바닥엔 피가 찰랑찰랑 고여 있었어. 벽에도, 침대에도 튀어서, 이걸 나중에 청소하려면 끝내주게 지겹겠다, 싶을 정도로. 내 아래에는 간신히 할딱이는 작고 빨갛고 마른 아이가, 제발 그만 하라고, 이런 애일 줄 몰랐다고, 그것도 꼬박꼬박 두 번씩 말하고 있었어. 혀가 그렇게 됐는데도 성대를 달싹이면서, 그렇게 당했는데도, 새하얗게 드러난 채 떠는 갈비뼈를 실로폰처럼 쓰다듬으면서 나는 몸의 열기를 생각해. 이렇게나 온 몸이 따끔거리는 건 뭘까, 눈이 따가운 건 뭘까, 아까보다 훨씬 더 눈앞이 흐린 건 뭘까, 심장이 뛰는 건 뭘까, 이렇게나, 이렇게나 가슴이 아픈 건 뭘까.
그리고, 아아, 고개를 들면 문은 열린 채야. 다들 몰려들어 있어, 물론이지. 그렇게 시끄러운 소리를 냈으니까. 누구는 토하고, 또 누구는 얼굴을 감싸 쥐고, 저런 애였어? 귀여운 유학생이라고, 인형 같은 애라고 생각했는데 저런 애였단 말이야? 믿을 수가 없어! 하고. 저렇게나 모여서 나한테 쏘아대는 그런 말들, 고통스러운 말들. 피의 바다 한가운데서 호수괴물처럼 고개를 쳐들고 앉은 내게, 시체 위에 앉은 내게. 그 한가운데서 뛰어나오는, 짧고 부스스한 머리에 키는 큰 여자가,
“푸파!”
그래, 쿨도어,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지만. 이게 진짜 나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옛 친구이자 사랑이었던 어린 여자아이의, 새빨갛게 드러나서 피를 줄줄 흘리는 부끄러운 곳에 펜을 하나 더 꽂는, 이거야말로 진짜 내 모습이야. 아르투아 교수가 말해 줬잖아. 내가 어떤 애인지. 왜 아무도, 아무도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왜 내가 인형 같다고, 속은 착한 애일 거라고 말하는 거야? 응?
“푸파!”
그래, 달려오고, 날 멈추려고? 하지만 내 뇌는, 날때부터 망가져 있던 내 뇌는 결코 멈추는 일이 없지. 항상 지루해하고 항상 미쳐 돌아가지. 그러니까 나를 껴안는 팔을 할퀴고, 깨물고-안 닿네,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푸파! 푸파! 외치면서, 그건 내 이름이 아닌데, 아아, 발길과 주먹질과, 악마를, 괴물을 죽이려고, 그래! 날 죽여! 드디어 나를 제대로 봐 주기 시작했구나! 죽여야 할 괴물로, 악마로, 구제할 길 없는 혐오스러운 신의 장난으로! 응, 쿨도어, 왜 그렇게 울고 있어? 더 웃으면서 발길질해도 되는데, 응? 여긴 어디야? 여긴 어디ㅡ나는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ㅡ
몸이 뜨거워.
심장이 빠르게 뛰고, 온 몸이 따갑고, 눈도 따끔따끔, 시야는 흐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내가 지금 올려다보고 있는 게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쿨도어의 얼굴이라는 것 정도는 알겠어. 그리고 이 감촉은, 그래, 뺨을 잡고 있는 건 아까 날 때렸던 그 손이구나.
“괜찮아? 정신이 들어?”
여긴 내 방이고, 바닥에 피는 없고, 그 애도……, 없고. 그렇구나, 전부 환상이었구나. 정말 다행이다.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옷은 다 풀어헤치고 침대에 누워서 그렇게 말하니까, 아직도 눈이 새빨간 쿨도어는 참 흔쾌히도 고개를 끄덕여 줬어. 너무 심했던 것 같아서 사과하러 왔는데 안에서 막 이상한 비명 소리가 들려서, 사감실에서 열쇠를 받아서 왔다나봐. 미안하다고 막 사과하더라고. 두 번째 듣고 끊었어. 두 번 말하는 건 오늘은 제발 그만. 그리고 이상한 게 하나 있는데, 쿨도어가 아까부터 계속 나를 내려다보고 있거든. 그야 걱정이 되겠지. 마약을 먹고 환각에 빠져서 막 난리를 쳤으니, 자기 룸메이트처럼 멋지게 날아오르는 건 아닐까 생각을 했겠지. 그런데 저 표정은 아무리 봐도 걱정 백 퍼센트는 아니란 말이야. 걱정은 한 이십 퍼센트고,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왜 계속 내 눈을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거람.
“아, 아니 그게,”
똑바로 말을 해요, 좀.
“아니……, 그냥, 오늘따라 너무 예쁘다 싶어서.”
“약 했어?”
“농담 아니야. 뭐랄까, 눈이 달라. 눈이.”
서랍에 손거울이 있다고 말해주니까 쿨도어가 바로 가져오는데, 어라. 쿨도어가 약을 한 게 아니었네. 진짜로 평소보다 훨씬 예뻐 보여. 내 입으로 이런 말 하는 것도 그렇지만, 다들 인형처럼 생겼다고 하는데 지금만큼은 그게 이해가 간단 말이지. 얼굴이 잔뜩 발그레해져서 꼭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모습인 것도 있지만, 그보다도 특히 저 눈. 동공이 평소보다 훨씬 커져서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질 정도야. 그리고 그때서야 난 뭔가를 깨달았어.
“이거 마약이 아니야.”
“뭐?”
아니, 변명하는 거 아니야. 그냥 마약일 리가 없다는 거지. 무슨 마약이 황홀감도 쾌락도 없이 끔찍한 환각만 보여줘? 누가 이런 걸 하고 싶어 하겠어, 안 그래?
“그럼 뭔데?”
“글쎄, 증상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겠지. 체액 분비 억제로 인한 땀의 양 감소는 체온을 증가시키고, 동공이 아름답게 커지면서 빛에 민감해지고 시력은 감소, 침의 양도 적어져서 입이 마르고, 대신에 혈관은 확장돼서 얼굴이며 온 몸이 빨갛게, 마지막으로 악몽과도 같은 환각.”
정리하자면 ‘산토끼처럼 뜨겁고 박쥐처럼 눈멀고 뼈처럼 마르고 순무처럼 빨갛고 모자장수처럼 미쳤다’는 유명한 문장이 완성되지. 옛날 여자들이 눈에 한두 방울 떨어뜨려서 미모를 향상시키곤 했다는, 벨라도나에서 추출한 아트로핀. 아니면 그와 비슷한 작용을 하는 항콜린제 중독 증상이야. 그래, ‘별 걸 다 아네’ 하는 표정도 이젠 익숙하다.
“그럼 지니가 선글라스를 낀 것도 이거 때문에?”
“증상이 그렇게 빨리 사라지는 게 아니거든.”
“그런 걸 감수할 정도로 중독성이 심해?”
“그 반대야. 항콜린제는 중독되는 약물이 아니야. 오히려 호기심에 한 번 사용했다가, 환각에 질겁해서 다시는 손도 대지 않는 경우가 많아.”
다시 말해서 내 주장이 틀렸던 거야. 지니는 약물중독자가 아니었어. 이 계열 약물은 심장질환 치료제기도 하지만, 부작용을 어느 정도 없애서 제대로 약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닌 이런 위험천만한 걸 치료제로 먹었을 리도 없고. 뭔가 다른 게, 약물중독자의 자살보다 더 재밌는 게 사건 뒤에 도사리고 있다는 얘기지. 단서가 더 필요하겠는데.
“걔네 가족은 왔다 갔어?”
“아니, 곧 오신대.”
“그럼 짐 정리하다가 수상한 거 있으면 슬쩍해 봐.”
날 즐겁게 해 보라고. 이런 험한 꼴을 당했으니,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환각에 시달렸으니 보상은 좀 받아야 될 거 아냐. 유품을 가족들 앞에서 도둑질하라는 내 요구에 쿨도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는데, 그 얼굴에 떠오른 건 사건을 해결하겠다는 단호한 확신이었어.
그리고 확신에 찬 사람은 굉장하다는 걸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지. 글쎄, 결국에 가져온 게 뭔지 알아? 책장에 있던 가족사진이었어. 가족들 앞에서 죽은 애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가족사진을 훔쳤다고. 평소 하는 거랑은 다르게 의외로 재밌는 사람이네, 쿨도어.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야. 무기가 될 만한 건 다 내던졌는데 이건 놔둔 게 이상했다고.”
게다가 책장 맨 왼쪽에 있었고 중간에는 가로로 길게 흠집이 하나-왼쪽 끝에서 오른쪽으로. 마치 액자의 틀과 함께 커다란 E자를 그리려는 것처럼. ‘왼쪽에 <E>라고 표시된 유리창을 열게’, 알겠습니다, 지킬 박사님. 액자를 열어 보니 사진 뒤쪽에 작은 메모지가 하나 숨어 있었어. 그 내용은 이 따위로 생겨먹은 암호였고.
Y O U M O L
E H A N U S
D O S E N J
I M U N R U
J E A H A X
S O N N E T
난 탐정이 아니지만, 어쨌든 지겹기 짝이 없는 강의를 제대로 듣는 것도 아니니까 그 시간에 암호 해독 놀이라도 하는 건 괜찮겠지. 머리가 벗겨진 사회심리학 교수가 앞에서 뭐라고 떠들든, 너무 지루해지기 전에 이거나 빨리 해독해 보자고. 눈도 따가워 죽겠으니까 가능한 한 빨리.
그럼 뭐부터 시작하지? 음, 명백한 단어가 몇 개 보이네. YOU, MOLE, DOSE, SONNET 같은 거. 우연히 나온 건 아니겠지? 하지만 나머지 글자들은 제대로 된 단어처럼 보이지 않잖아. 이렇게 끊어 읽고, 저렇게 끊어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어. 그렇게 지루한 시간이 흐르고, 되는 대로 휴대폰 사전으로 검색해 보던 내 눈에 문득 무언가 들어왔어. UNRUJE랑 AHAX 말인데, J랑 H를 서로 바꾸면 각각 독일어로 ‘불안, 동요’를 의미하는 Unruhe, 그리고 소포클레스의 비극인 아이아스(Ajax)가 되는 거야! J랑 H, H랑 J……,
“왜냐면 지킬(Jerkyll) 박사는 하이드(Hyde) 씨니까.”
따라서 J=H. 이대로 바꿔 보면 알 수 없었던 단어들의 뜻이 드러나지. UNRUHE, AJAX, JANUS(야누스), 그리고 NHIM(이건 베트남어야. Nh?m은 ‘호저’를 뜻하는 단어)까지. 조잡하게도 국적을 멋대로 섞어 쓴 건 해독을 어렵게 하려는 작자의 의도겠지. 아니면 그냥 암호에 미학적인 센스까지 기대하는 내가 잘못하는 거든가. 그건 그렇고, 이렇게 바꿔놔 봐야 별로 뜻이 드러나는 것 같지는 않은데? 지루해 죽겠네, 내가 뭘 놓치고 있단 말이야? 진정하자, 그 애라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사건 현장으로 돌아갔겠지. 그 난장판에도 뭔가 질서가 있었을 테니까. 이를테면, 그래, 알파벳 순서처럼.
A H A X D O
S E H A N U
S M O L E N
J I M S O N
N E T U N R
U J E Y O U
알파벳 순서로 단어를 다시 배열했어. 그리고 다음 힌트는 뭘까, 하고 생각하면 역시 지킬 박사한테 물어봐야지. 지금까지 모든 암호가 거기서 나왔잖아? 지킬 박사님께서 말씀하시길 왼쪽에 E라고 표시된 유리장을 연 다음에는, ‘위에서 네 번째, 그러니까 밑에서 세 번째’ 서랍을 확인하라고 하시느니라. 위에서 넷째, 밑에서 셋째 줄. 암호문에서는 JIMSON.
“짐슨? 짐슨이 누구야?”
학생 식당에 앉아서도 한 손에는 필기 노트를 들고 보면서 쿨도어가 물었어. 한 번에 세 가지에 전부 최선을 다하려는 그런 태도는 참 존경스러웠지만 답은 못 해줬지. 당연한 거 아냐? 짐슨이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아?
“짐슨이란 사람이 누군지, 이제부터 알아내야지.”
“어떻게?”
“글쎄? 온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불러 볼까? 짐슨, 짐슨 하고?”
농담 아니야.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하는 법일 뿐이라고. 짐슨이 누구인지 알 방법이 없는 지금,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키워드를 아는 누군가가 우리에게 직접 접근하게끔 하는 것뿐이야. 약이 있으면 공급자도 있을 거 아냐? 그러면 그 공급자가 언젠가는 그물에 걸려들겠지. 안 그래?
음, 사실 그 의도만 있었던 건 아니야. 걸어 다니면서도 노트를 보려고 실핀으로 앞머리를 고정시킨 쿨도어, 이 성실한 사람을 조금 더 사건에 깊숙이 끌어들이고 싶었던 거기도 해. 의외로 재밌는 사람이란 걸 안 이상, 그리고 이 사건에 뭔가 더 재밌는 진상이 있다는 걸 안 이상 두 가지를 합쳐서 느껴보고 싶어지는 것도 자연스러운 거잖아? 그 과정에서 쿨도어가 얼마나 더 망가지도 무너질지, 그걸 보고 싶다고. 밤늦게까지 가로등 불빛을 따라, 곰팡내 나는 건물을 지나고 또 지나면서까지. 효과가 없는 걸로 밝혀진 손의 물기만으로 그런 지루함을 참으면서까지, 온 학교에 인적이 사라질 때까지.
“그래서 짐슨이란 사람이……,”
“거기 학생들.”
오, 반응이 왔다. 곰팡이인지 그림자인지 모를 그늘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은 나이가 꽤나 든 학교 관리인. 우리한테 볼 일이 있는 모양인데.
“짐슨이란 사람을 찾고 있나?”
네, 그런데요. 빨리 단서나 토해놓으시죠.
“아까 누가 나한테 와서, 짐슨을 찾는 사람이 오면 이걸 전해주라고 했는데.”
그러면서 관리인은 내게로 다가와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보여주었는데, 에, 백지잖아? 내 눈이 이상한 거야, 아니면 이 관리인 아저씨가 지금 우리를ㅡ
ㅡ있지,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마취제 뿌린 손수건을 가지고 사람을 납치하는 장면이 가끔 나오잖아? 그건 진짜 말도 안 되는 장면이야. 클로로포름이나 에틸에테르 같은 마취제는 쉽게 날아가는데다가, 손수건 같은 걸로는 충분히 그걸 들이마시게 할 수도 없다고. 하지만 이 아저씨는 품에서 허연 마스크를 꺼내서 내 코랑 입에다 대고 짓누르는데, 마스크 안에는 축축한 솜 같은 게 덧대져 있어서 몸에 나쁠 것 같은 냄새가 확 풍기고, 들이마실 때마다 정신이 흐려지고, 저항하려니까 퍽, 배를 걷어차서 쓰러뜨리고. 쿨도어가 달려들지만 속수무책. 내가 마취제 기운에 비틀대는 동안 쿨도어도 제압당했고, 순식간에 차가운 바닥에 누워서 관리인의 억센 손이 짓누르는 마취제 마스크에, 적어도 5분 정도ㅡ
깨어나 보니까 불빛이 엄청 밝았어. 손은 쇠사슬로 묶여서 책상 다리에 고정돼 있고, 그렇게 주저앉은 내 옆에는 쿨도어도 똑같은 신세로 있네. 아직도 마스크가 씌워져 있지만 이미 마취제 기운은 다 날아간 거 같아.
“괜찮아, 푸파?”
“완전히 당했네. 범인이 준비를 너무 잘 했어.”
“여긴 어딜까?”
글쎄, 사방에서 칙 칙 소리가 들리는 여긴 어딜까. 익숙한 느낌인데. 저번에 비엔나 봉봉하고 같이 왔던 화학 실험실이구나. 그때 비엔나 봉봉은 결과물을 다 만들어놓고 엎어서, 수도 없이 기기를 깨먹은 나 다음으로 심각한 혼란을 초래했지. 그거 아니었으면 진짜 지루해서 미쳐버렸을 거야. 근데 중요한 건 지금 여기엔 비엔나 봉봉이 없다는 거, 눈앞에는 빔프로젝터가 있어서 거기서 동영상 하나가 계속 재생되고 있다는 거, 그리고 온 사방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으면서 증기를 내뿜고 있다는 거. 심지어 묶여있기까지 하다니, 벌써 지루해지기 시작했어.
“그 관리인이 짐슨일까?”
그래, 쿨도어. 계속 말을 해서 조금이라도 지루함을 덜어 보라고. 하지만 방금 한 말은 에러였어. 관리인 아저씨 얼굴이 동영상에 계속 나오고 있잖아. ‘하워드 짐슨’이라는 자막하고 같이.
“건물 관리인이니까 실험실을 몰래 사용할 수 있었고, 그렇게 약을 만들었던 거 같아. 마취제도 그렇게 구했겠지. 클로로포름이나 에틸에테르는 마취제인 동시에 흔한 용매기도 하니까.”
요즘은 안 쓰는 마취제지만. 위험하다고. 나 죽을 수도 있었다고.
“그럼 이 사람이 지니를……,”
그래, 동영상 자막을 읽어 보면 알 수 있지. 꿈을 현실에 불러내는, 중독성이 없고 완벽히 안전한 환각제 ‘야누스’ 를 개발하고 있다. 이 약은 세상을 바꿔놓을 것이다.
“두 얼굴의 신?”
“문의 신. 인식의 문을 열어준다, 뭐 그런 의미겠지. 정신 나간 약 이름으로 딱이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첫 장 제목도 ‘문 이야기’고 말이야.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을 요약하자면 ‘저 하워드 짐슨이 모든 일의 원흉입니다’가 되는 거지. 그리고 또 하나, 이 사람이 약을 개발했다는 것과 지금 이 실험실에 환기용 팬 돌아가는 소리가 안 난다는 사실을 종합하면? 지금 끓고 있는 건 뭐다?
“이 방을 환각제 증기로 채울 생각이라고?”
그래. 악당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신만의 고문실이라고. 그런 환각은 다시는 사양인데 말이지. 점점 머리가 아프고 눈앞이 흐려지고 몸이 따끔거리는데, 이거 정말 짜증나 죽겠다니까. 영상은 또 얼마나 지루한데! 자기가 개발한 약 때문에 힘을 잃을 것을 우려한 마약상과 그와 결탁한 정부가 자신을 노리고 스파이를 보냈대!
“그러니까 그 암호가 그런 의미였구나.”
“무슨 암호? ‘짐슨’ 말이야?”
“그것도 있지만, 사실은 이중 암호였던 거야.”
YOU, MOLE, JANUS, DOSE, NHIM, UNRUHE, AJAX, SONNET. Mole은 속어로 ‘정체를 숨기고 상대 조직에 잠입해 활동하는 스파이’를 가리키고, 미국의 초대 국방장관 제임스 포레스탈은 자살하기 전에 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 구절을 유서 대신 남겼고, 소네트는 서정시의 일종. 다시 말해서 저 암호는 ‘너는 스파이, 야누스 복용량, 호저 불안, 아이아스의 시구’라는 말로도 읽을 수 있다는 거야. 이거 참, 더 이상 의미심장하기 힘들 정도로 의미심장하잖아?
“그럼 지니를 죽인 이유도?”
“지니는 순수하게 사상에 끌려서, 아니면 약이라도 얻어 보려고 접근했겠지. 하지만 그때쯤 이 하워드 짐슨이란 사람은 실험하면서 습관적으로 약물에 노출돼서 환각을 경험한 끝에, 망상하고 현실을 구분할 수 없을 지경으로 정신이 망가져버린 거야. 음모론에 빠져서 지니가 스파이라고 생각한 거지. 죄책감 없이 실험 중이던 약물을 계속 주고, 실험하면서 지니가 호저를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 그러다가 급기야는 농도가 높은 약을 일부러 건네줘서 죽게 했어.”
그리고 아마 암호도 하워드 짐슨의 작품이겠지. 그렇게 해 놓도록 지시한 거야. 지니가 만약 스파이라면, 지니가 죽었을 때 그 동료들이 암호를 풀고 자기를 찾으러 올 테니까. 그렇게 생각했으니 미리 준비를 해 놓고 나랑 쿨도어를 습격할 수 있었단 거네.
“그럼 우리도 스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구나.”
그렇게 된 얘기지.
증기는 계속 나오고, 동영상도 계속 나오고. ‘그들은 야누스를 묻어버리려고 했다. 이제는 이 방법밖에는 없다. 오늘이 지나면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지금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려는 것 같은데, 헛소리는 좀 작작 하란 말이야. 지루해 죽겠으니까.
한편 쿨도어는 화도 나고 겁도 많이 먹은 것 같은데, 또 말도 안 되게 침착했어.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는 게 저런 건가봐. 이 수갑만 풀리면 당장이라도 하워드 짐슨을 찾아가 한 방 먹여줄 생각 가득이지만, 그럴 수 없으니 가만히 화를 삭이고 있다. 조용히 타는 불꽃같아. 정말,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전문가인 내가 보증하는 거니까 이건 이력서에 한 줄 써도 된다고.
그렇다면 난 어떨까? 지금 어디에 최선을 다해야 할까? 환각제 농도가 더 높아지면 또 악몽에 시달릴 거야. 게다가 지금 이 상황 자체도 지루해 죽겠어. 묶인 채로 계속 신체적 자극이 없으면 곤란하다고. 평소에도 무리할 정도로 운동을 해서 어떻게든 자극을 받아야 하는데, 이렇게나 무력하게도 앉아 있기만 하다니. 끔찍해. 견디지 못할 거야.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지. 몸을 돌려서 쿨도어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내밀었더니, 쿨도어는 또 괜히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어.
“반하지 마. 죽여버린다.”
난 임자 있는 몸인데 진짜 뭐 하는 건지. 하여튼 실핀을 이로 뽑아내서, 바닥에 떨어뜨리고 묶인 손으로 요령 있게 집어서, 쇠사슬을 고정시키고 있는 이 정도 자물쇠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 스킬이 내 일생일대의 사건의 시작이었는데. 딸깍, 딸깍 하면, 짜잔! 풀렸습니다! 까진 좋은데ㅡ
“푸파? 푸파, 괜찮아?”
겨우 몸이 자유로워졌는데, 마침 약에 살짝 취한 상태란 말야,
“일단 문부터 열고……,”
그래, 문부터 열고. 끓고 있는 비커도 다 때려 부수고.
“그리고 나도 좀 풀어 주지 않을래?”
“위험해.”
“그건 알아.”
“아니, 그 얘기가 아니라. 다른 의미로 위험하다고.”
묶여서 멍청한 선언문이나 보고 있는 상황이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지루했어. 거기다 정신도 슬슬 혼미해지고. 솔직히 말해서 지금 뭘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아. 팔을 휘두르고, 비커가 깨지고, 그래도 진정이 안 돼서, 젠장, 진짜 싫어,
“손 씻으면 괜찮아진다고 그러지 않았어, 푸파?”
“지금은 무리야!”
이미 그 암시는 깨졌다고. 손을 그렇게 씻었는데도 결국 난 환상 속에서, 내, 내 사랑스러운 클라비셉스 푸르푸레아를 그렇게 만들고 말았다고! 이미 손에 묻은 피는, 환상의 피는 현실의 물로 씻어낼 수가 없어.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이대로라면 진짜 미쳐버리고 말 거야!
“물 말고 다른 걸 써 보면 어때?”
“비누도 소용없어!”
“소독용 알코올은? 여기 한 통 있어!”
아, 그래, 그건 아직 실험해 본 적은 없어. 확실히 차갑다. 손이 잠깐이지만 얼어붙는 것 같아서 진정이 되는데-하지만 순간이야!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고 희미한 냉기밖에 안 남는다고! 실험 실패야!
“장갑을 껴 보면 어때?”
장갑? 아, 라텍스 장갑? 실험용? 그걸 끼면 애초에 손이 더러워지지 않게 한다는 의미가 없잖아 멍청한 년아!
“어차피 심리적인 거잖아! 실험해 볼 가치는 있다고 봐!”
아, 그래? 실험? 인생은 실험이니까? 그러니 인생이 이렇게 지루한 거지, 그래도 어쨌든 알코올을 콸콸 쏟아 부은 손으로, 라텍스 장갑을 집어서, 바들바들 떨면서 쑥 밀어 넣고 나면,
어라, 뭐야 이 느낌.
방금 전까지 쇠사슬에 묶여 있던 손목의 차가운 구속감, 그로 인한 철저한 무력감, 그 감각이 장갑을 끼자마자 되살아난 것 같은 착각이 들었어. 어째서? 소독용 알코올이 날아가면서 손을 차갑게 하고, 거기에 장갑이 손 전체를 빈틈없이 답답하게 조이면서, 그래, 브리에르는 생각도 못 했던 전혀 다른 효과가 일어났기 때문일까? 이런 감각이라니, 이런 끔찍한 감각이라니, 이거라면 절대로 무시해버릴 수 없어. 먹힐 지도 몰라.
“푸파, 진정이 좀 됐어?”
“덕분에.”
차라리 사슬에 묶이는 게 나을 것 같은 기분이 됐지. 그래도 참을 수 있을 것 같아. 쿨도어도 풀어줄 수 있게 됐고, 생각도 다시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아까 선언에 따르면, 하워드 짐슨은 오늘이 지나기 전에 무슨 일을 벌일 생각인 것 같아. 지금쯤 뭔가 벌이고 있을지도.”
“서두르자.”
그래, 서두르자. 재밌는 광경을 놓치면 아깝잖아.
휴대폰은 이미 빼앗긴 채. 짐슨이 어디로 도망갔을지 찾아서 밤의 학교를 달리는데, 세상에나, 밤에 학교를 뛰어다니는 미친 사람이 나랑 쿨도어 말고도 하나 더 있지 뭐야. 제정신이 나가서는 막 도망 다니고, 소리를 지르고.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어.
“무슨 상황이야?”
글쎄, 나한테 물어도 뭘 알겠어? 기껏해야 바닥에 뒹구는 에너지 드링크 캔을 보고 짐작할 뿐이지. 하워드 짐슨이 말하길 자신을 적대하는 조직이 환각제 ‘야누스’의 존재를 아무리 묻어버리려고 해도, 오늘이 지나면 모두가 야누스를 알게 될 거라고 했어. 어떤 방법이면 될까? 시험공부 때문에 늦게까지 깨어 있는 대학생들에게 약을 탄 에너지 드링크를 공짜로 나눠주는 거?
“그럼 짐슨은 사태를 최대한 크게 만들기 위해서, 사람이 가장 많은 데로 갔을 거야. 어디려나ㅡ”
“기숙사! 여기서 가장 가까운 기숙사가 저쪽이야!”
“비엔나 봉봉 사는 데네?”
아, 잡아끌지 말고 천천히 가자고. 구경 좀 하자. 처음에는 부작용 없는 환각제를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된 남자의 작품이라고. 나쁘지 않은 광경이란 말이야. 아마 기숙사는 더 굉장한 꼴이겠지?
더 굉장한 꼴이었어. 누구 한 명이 기숙사 앞에 나와서 막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려는 걸 쿨도어가 멋지게 제지했지만, 그 애 말이 아까 로비에서 나눠줬다는 거야. 방송을 해서 기숙사에 있는 사람이 아마 다 내려왔을 거라고. 곧 로비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지. 그리고 아까부터 지겹게 들었던 말도.
“아무도 야누스를 묻어버릴 수 없다!”
로비 한가운데서 미친 듯이 웃는 짐슨, 그 주변에는 비명을 지르고, 도망치고, 쫓아가고, 약에 취하지 않은 사람은 말리려고 하거나, 얻어맞거나, 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그래, 이런 광경이라면 별로 나쁘지 않다고. 게다가 이 약, 심혈관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벌써 몇 명이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어간다고? 쿨도어는 그 한가운데서 주저앉아 울고 있는 비엔나 봉봉한테로 달려갔고, 나는ㅡ그래, 이 속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약 때문으로 돌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세이프 아닐까?
“쥐새끼 같은 놈!”
어라, 이거 나한테 말한 거야?
“어떻게 도망쳤는지 모르겠지만, 보아라! 이것이 너희들의 악몽이다!”
맞다. 이 사람은 나를 스파이라고 생각하고 있겠구나. 확실히 내가 정부의 스파이였다면 이 상황이 악몽처럼 느껴졌겠지. 완전 실패잖아. 이런 대사건을 덮는 건 좀 무리 같잖아. 하지만 나는 정부 요원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성격이 나쁘고, 그래서 약 핑계를 대고 뭐라도 해 볼까 하는데,
“마음의 문을 열어라! 꿈의 세계를 보아라! 우리에게 약속된 세계다!”
글쎄, 그러려고 하는데 손에 장갑의 감촉이 너무 선명해. 너무 답답해. 너무 효과적이란 말이야. 이것 참 끝내주는 목줄을 발명해냈네. 이 상황에서도 아무 짓도 안 할 수 있다니 말이야. 내가 하는 건 고작해야 그 애가 항상 하듯이, 무력하게 서서 주변을 관찰하는 것뿐이야. 주변을 관찰하는 게 과학의 시작이고 추리의 시작이고 재미의 시작이라고, 그래, 이를테면 지금 짐슨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칼을 든 남학생이,
“아무도 야누스를 이길 수 없ㅡ”
빙고! 저 놀란 눈 좀 봐! 고통이 녀석의 정신을 환상에서 현실로 돌려놓았고, 이제 녀석이 느끼는 것은 계획 성공의 환희가 아니라 단말마의 고통이지, 거기에 더해서 내 조롱까지.
“두 번 말하니까 그런 꼴을 당하는 거야. 어때, 현실은 아프지?”
이 분야는 내 전문이라고. 악몽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알지만, 그 악몽보다 더 아프게 하는 건 현실이라고. 적어도 그 애가 처음 나타났을 땐 기뻤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단 말이야. 그 애는 저 멀리 있단 말이야.
곧 경찰차와 구급차가 도착하고, 쿨도어는 정말로 열심히 상황을 설명해 줬어. 역시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는구나. 그리고 잠깐 짬이 났을 때 나는 쿨도어를 불렀어. 마지막으로 실험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었거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도와줄게, 푸파.”
뭐, 그냥 내 얘기만 들어주면 돼. 내가 처음에 무슨 생각으로 이 사건에 뛰어들었는지, 얼마나 지루했고 그래서 얼마나 쿨도어 너를 괴롭히고 싶었는지. 단지 누군가를 괴롭히면서 조금이나마 즐거움을 얻어보겠다는 생각이 어떻게 내 머릿속에서 모든 상식과 윤리를 압도할 수 있는지.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나쁜 앤지. 이렇게 말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한결같아.
“속으로는 안 그런 거 알아, 푸파.”
그래, 그러면서 껴안지. 내 겉모습을 껴안아. 하지만 결코 속까지는 닿지 못해. 날 이해해주지 못해. 이 절망감, 아무도 내 진짜 모습을 봐주지 않는다는 절망감.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내 인생을 거의 대부분 지배했던, 그 애 말고는 아무도 덜어주지 못했던 바로 그 감각. 억제할 길 없는 분노. 지금이라면 할 수 있어. 약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
“응, 고마워.”
하지 않았어. 라텍스 장갑에 갇힌 손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이런 분노마저 참아낼 수 있다니, 굉장히 씁쓸한 성공이네. 실험 대성공이야.
그리고 나는 기숙사로 돌아갔어. 저 소동도 이젠 지루해. 곧 끝날 거고, 야누스는 잠깐 화제가 됐다고 곧 묻혀버릴 거야. 이젠 별로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아. 무엇보다 지금 진짜로 하고 싶은 건 따로 있거든.
약병은 쿨도어한테 뺏겼지만, 그 전에 알약 몇 개를 미리 빼돌려 뒀어. 가장 끔찍한 악몽을 가져오는 알약을. 내게 있어 가장 끔찍한 악몽이란 내 사랑이, 나를 유일하게 이해해 주는 그 애가 나를 버리는 거야. 그러니까 내 가장 끔찍한 악몽에는 반드시 그 애가 등장해야만 해. 할머니의 환영을 보기 위해 성냥을 켜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장갑 낀 손으로 약을 집어 입에 넣으면, 몸이 뜨겁고 눈은 아프고, 말라가는 입, 그리고 두근, 두근, 뛰는 심장. 아아, 문이 딸깍 열린다. 내가 한때 그랬듯이 그 애는 손쉽게 문을 따고 들어와. 무슨 말을 듣더라도 이 손은 잘려나간 것처럼 힘을 쓰지 못해. 거세된 야수처럼, 저항하지도 못하고 다가오는 환상에 오로지 몸을 맡기면 돼, 안녕, 오랜만이야, 나의 사랑하는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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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즈니악 얘기는 농담이었어요. 저도 지키는 선이란 게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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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댓글
마드리갈
2021-01-13 21:56:13
실험, 시험 등의 것은 선택의 문제죠. 그리고 크든 작든 성공과 실패가 기다리고 있고, 결국 제3의 길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실패보다는 나을지언정 성공보다 나을 수는 없죠. 그것을 생각하면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정기적으로 있었던 시험을 회상하고 있어요.
전 역시 약물에 의존하여 심리상태를 바꾸고 싶은 욕구도 없는데다 술조차 마실 수는 있어도 일부러 찾거나 하지는 않다 보니 묘사된 상황에 완전히 공감할 수 있지는 않지만, 소포클레스의 비극 아이아스(Ajax)와 그것을 유언으로 대신하고 투신으로 생을 마감했던 제48대 해군성 장관이자 초대 국방성 장관이었던 제임스 포레스탈(James Forrestal, 1892-1949)의 이야기에서 작중 인물들이 무엇을 원했는지 등을 어렴풋하게나 느낄 수는 있을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