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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변에 길잃은 책임

마드리갈, 2015-12-01 04:37:01

조회 수
178

언어학 관련의 글을 읽다 보면 언어와 문자, 의사소통 관련의 여러 담론을 많이 접할 수 있어요. 그리고 기호학 관련도 많이 언급되어요.

그런 것들을 전공하지 않은 저로서는 그 점에 대해서 뭔가 토론할만큼의 학문적 기반이 없긴 하지만 이것은 확실히 말할 수 있겠어요. 언어의 의미와 기호 사이에는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것을 언어의 자의성이라고 해요.


이를테면 이런 것일까요.

ROCK이라는 단어를 보면 무엇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경우 저 단어는 영어의 단어로 보여서, 바위 또는 락 음악을 연상하겠죠. 그런데 저건 독일어에서는 치마를 뜻해요. 두 언어는 계통상 상당히 가까운데, 이렇게 형태가 같은 단어가 전혀 다른 대상을 가리키고 있는 여기서 어떠한 필연성도 나타나지 않아요. 그렇듯이 언어라는 것은 단어 하나에도 이렇게 엄격하게 언어의 자의성이 적용되는데, 그것이 어구나 문장 단위로 적용되면 또 어떨까요. 역시 언어의 이 자의성이라는 것은 엄청난 속성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그런 걸까요. 정의하기 나름이니 그래서 여기저기서 언변이 넘치고 있고, 이 언변이 담는 의미 속에 반드시 책임이 포함될 필요도 없나 보네요. 최근의 이 두 사건을 보니 더욱 그렇게 여겨지는데, 이건 저만의 착각일까요.


하나는 표절에 대한 옹호.

기사를 하나 보도록 해요.


문제의 계간지 기고문 전문을 다 읽어본 것은 아니라서 의견을 표명하기 좀 조심스럽긴 하지만, 세 가지의 논점은 뽑아낼 수 있어요.

첫째는 표절 논란의 규명 전에 논의자의 관점이 중요하다.

둘째는 나중의 것이 처음의 것을 재정의한다.

셋째는 표절의 식별범위는 언어로 구현된 것이고 따라서 표절시비는 필연의 산물이다.


글쎄요. 이 세 논점의 어디가 어떻게 옳은지는 잘은 모르겠어요. 그런데 제기가능한 의심이 한둘이 아닌데요?

첫째 논점부터.

표절이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짧게 정의하자면, 타인의 저작물을 자신의 고유한 것으로 속이는 행위예요.

즉 이것은 관점의 차이를 논하기 전에 그런 행위의 존재 여부를 먼저 판단해야 할 사안이라는 거예요. 그런 행위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것이 없음을 증명해 보이면 되는 것이고, 일어났다면 해당 사안에 대응해야 하겠죠. 어느 관점에 서서 평가해야 할 것인가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고, 이것을 역전시키겠다는 것은 사실 앞에 겸허하지 않겠다는 내지는 진영논리에 서서 사실을 왜곡하겠다는 의심이 드는 치기어린 궤변으로밖에 보이지 않아요.


그 다음은 둘째 논점.

후대의 학자들이 선대의 저작물들을 정리하여 체계, 사조 등을 만들어 온 역사 자체는 여러 사례로 분명하니까 여기에 왈가왈부할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일단은 동의하는데, 문제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과 표절 자체는 상관이 없다는 점이예요. 타인의 저작물을 훔친 사실은 분명 문화사조의 흥망성쇠를 추적하는 데에 상당히 중요한 자료로 쓰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실이 표절 행위를 정당화해 주거나 없던 것으로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이 두 사안은 독립적인 문제라 서로 하등의 상관이 없으니까요.

예를 들어 볼까요?

21세기의 한 시인이 19세기의 인물 김삿갓이 쓴 한시를 몇 자 고쳐서 자신의 고유한 작품이라고 내놓았어요. 이것을 통해서 김삿갓의 시가 후대에 끼친 영향을 논할 수도 있고, 바꾼 한자를 통해 현대인의 의식, 19세기와 21세기의 한자 용법의 차이 등의 어문학적인 사실 등을 검증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시가 김삿갓의 한시를 도작한 것이라는 사실 자체가 바뀌거나 없어져 주지는 않고, 그게 옳다고도 여겨지지 않을걸요? 어디까지나 그건 고유한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한 김삿갓의 시를 표절한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러니 관계없는 것을 끌여들여서 옳다고 주장하는 건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요.


끝으로 셋째 논점.

그래서, 너도 표절, 나도 표절, 우리 모두 표절이라는 의미인가요?

그리고 언제부터 언어로 구현된 것이면 모두 표절의 범위에 들어올 수 있다는 최대주의에 동의해야 하는 걸까요? 그리고 무인도에서 글을 쓰더라도 언어를 구사하는 것일텐데, 그것은 어떻게 예외가 될 수 있을까요? 표절의 안전지대가 없고, 표절이 이러한 일련의 과정 중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불상사 중의 하나라면 누구라도 타인의 표절을 지적할 권리가 있고 이것은 창작자의 일상 중의 하나라야 해요. 그렇다면 역시 남진우 교수가 다른 작가의 표절을 지적해 온 것처럼,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을 지적한 것도 역시 그 일련의 과정 중에 일어나는 사건임에 틀림없어요.


이렇게 세 가지 논점을 파헤쳐 보니까 어디에도 책임이 있을 자리는 없어 보이네요.

관점이 사실에 앞서고, 나중의 것이 처음의 것을 결정하니까 지금의 문제도 나중에 뒤집으면 그만이고, 너도 나도 모두 표절을 하고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공동책임은 무책임. 굉장한 논리를 배울 수 있었네요,


그리고 다른 하나는 데이트폭력을 저지른 의전원생에 대한 판결.

해당 기사는 아래에 있어요.


일단 할 말을 잃었어요.

분 단위도 아니고 시간 단위로 폭력이 가해지면, 누가 되었든 정말 위험해져요. 저 피해 여학생이 아니라 격투기 선수나 특수부대 요원이라도 못 배겨 낼걸요? 그리고 몸은 물론이고 정신마저 크게 다치고 말아요. 그래서 폭력은 지양되어야 해요. 그리고 서로 좋아서 사랑해서 교제하는 것인데, 교제관계의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저렇게 폭력으로 짓밟아서 만신창이를 만든다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되기 힘든 중범죄임에 틀림없어요.


그런데 정작 판결은 어떻게 났나요?

이것도 논점을 정리해 보도록 할께요. 세 가지로 압축되네요.

첫째, 집행유예 이상의 형을 선고받으면 학교에서 제적될 위험이 있는 점을 고려했다.

둘째, 피해자의 상해가 중한 편이 아니다.

셋째, 가해자가 범행을 반성하고 있다.


그래서 결론이 벌금 1,200만원이라는데...


첫째 논점부터.

피해자의 상태가 어떤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생각도 없이 오로지 가해자의 개인적 사정만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 보여요. 근대형법에서의 자력구제 금지, 피해자 중립화 및 국가의 피해자 대위의 원칙은 그냥 버려져 있어요. 거기다가 가해자의 개인적 사정이 더 중요하니 책임 따위는 어떻게 되든 법원이 알 바가 아니라는 건가요?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원칙도 폐기되었네요.


그 다음은 둘째 논점.

딱 4글자로 정리가능하네요. 논점일탈.

장시간에 걸친 폭력행사가 사람을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심하게 망가뜨리는지는 그 사례가 셀 수 없이 많아요. 그리고 왜 신체 및 자유에 대한 죄가 왜 무겁게 처벌되는지는 이미 형법각론 등에서 다 나올텐데, 법원이 알고도 그걸 무시한 건가요? 게다가, 상해의 정도가 중한가 아닌가 이전에 장시간의 폭력행사 자체가 흉악범죄인데, 상해의 정도가 적다고 그게 양형사유가 된다면, 저에게는 이렇게 보여요. 성범죄의 처벌 이유가 성적 자기결정권에의 중대한 침해에 있다는 것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서 그냥 임신만 안되면 가해자의 형량을 낮춰도 된다고 보이는데.


끝으로 셋째 논점.

반성이라는 어휘가 언제부터 의미가 변질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반성인지를 모르겠어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한 것이 반성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공탁이라는 제도에도 굉장히 큰 함정이 있어요.


공탁의 취지에 기만적인 부분이 있지 않나요? 피해자의 과다한 합의금의 요구라는 항목은 마치 합의가 안되는 이유를 가해자의 행위가 아니라 피해자의 태도에 있다는 듯이 해석되고 있고, 자력부족 등의 이유로 피해자가 제시하는 보상을 해 줄 수 없어서 합의가 되지 않는다는 항목은 가해자가 마음먹고 돈없다고 버티면 공탁을 이용하여 적은 비용으로 이득을 얻는 합법적인 길이 열려있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아요. 공탁이라는 절차가 나름의 성의표시를 한 것으로 인정받아서 형사상 처벌의 강도를 낮추는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공탁은 결국 가해자가 최대한의 이익을 누리기 위해서 제도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예요.


학교측의 대응도 초점이 어긋나 있어요.

무죄추정원칙을 이런 데에 잘못 끌어들이고 있네요? 3심까지 지켜보자?

일단 학교가 학생을 받아들일 때, 학생에게 열악한 교육환경을 강요하겠다 내지는 교내에서 자유를 침해당하거나 생명을 잃는 상황에 직면해도 책임지지 않겠다고 약속한 건 아니잖아요. 당장 학교의 설비인 건물에 금이 가도 이렇게는 대처하지 않겠어요. 의료인은 일단 환자가 발생하면 그 환자를 치료하지, 그 환자가 왜 아프거나 다쳤는지를 논하다가 환자를 죽게 만들어서는 안되는 것인데 정작 교육현장에서는 그런 것은 지키지 않는군요. 그리고 교칙위반자를 학교에서 배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지도 않을 것인데. 여러모로 학교의 책임은 없다고 말하고 싶나 보네요.



언어의 의미와 기호에 필연성이 있을 필요가 없다는 언어의 자의성.

그래서 이 속성을 잘 활용하면, 구사하는 언어는 번듯하게 보이면서 담고 싶지 않은 의미는 철저히 배제할 수도 있어요,

그 결과 언어문화의 오늘과 내일이 있는 문단에서는 표절 저격수가 표절을 정당화하여 가족이 저지른 잘못의 책임을 면하려 획책하고, 인간의 존엄을 법으로 재확인하여 공정함을 보여야 할 법정에서는 피해자에 대한 책임 따위는 갖다 버리는 것이군요.


언변에 책임이 길을 잃고 말았어요.

그래서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사실인가봐요.

문학창작과 교수를 하면 표절책임도 듣기 그럴듯한 언변으로 면할 수 있고, 의학전문대학원을 다니면 범죄를 저질러도 법원이 제적위기를 막아주기 위해 언변을 발휘해 줄테니까요. 하지만 학교측은 결국 제적처분을 가했어요. 만시지탄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사필귀정인 걸까요.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라는 노래처럼, 무슨 죄를 지어 복역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만이 중요시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어요. 이 태평천하를 누리면서.


마드리갈

Co-founder and administrator of Polyphonic World

2 댓글

대왕고래

2015-12-10 17:07:37

언변이라고 하셨지만, 어찌보면 이걸 "변명"과 "말 돌리기" "그냥 넘겨버리기"같은... 어떻게든 안 좋은 말로 대체할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적어도 저 두 건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되네요. 제가 이 글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아무튼 그런 '언변'이 책임을 가려버리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모든 것에는 중요한 뿌리가 있는 법이고 '책임'은 가장 중요한 뿌리인데 말이죠. 씁쓸하네요.

마드리갈

2015-12-10 20:31:49

사실 그것도 고려했지만, 일부러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최대한 중립적인 표현인 언변이라는 말을 채택했어요. 그건 글을 쓸 때 처음부터 독자에게 선입견을 주지 않기 위해서예요. 보통 대학가 내의 운동권들이 대자보나 유인물 등으로 제작한 자료를 보면 상당히 읽기 싫은 점이 보인다든지, 북한의 언론매체를 접하면 피로감이 느껴지는 것은 물론 왜 저렇게 어휘가 빈곤할까 하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걸 생각해 보신다면 이해가 빠를 거예요.


시저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기에 시저를 죽였다는 브루투스의 자기합리화 언변은 그래도 대의명분과 당당함이라도 있지, 저 두 사례는 정말 비겁하기 짝이 없어요. 책임의 영어표현인 responsibility는 대답(response)을 할 수 있는(able) 것인데, 책임을 저렇게 언변으로 내다버렸으니 아마 자신들의 그 언변에 대해 자문자답도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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