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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모르고 쓰인 말에의 떨떠름한 기억

SiteOwner, 2016-06-25 23:12:36

조회 수
254

제목에서 "ㄸ" 초성이 많이 보이는 것은 기분탓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은 6.25 전쟁의 발발 66주년이었지요. 이걸 생각하다 보니 한동안 잊고 지냈던 몇 가지가 다시금 기억이 나는데, 그 맛이 결코 환영할 성격의 것은 아닙니다. 제목에서 쓴 것처럼 그 맛이 꽤 떨떠름합니다.


자칭 통일진보인사들이 내세웠던 구호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김일성이 생존중이었던 1994년 이전에는 김일성이 어서 서울에 입성하기를 바란다 운운하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입성(入城)이라는 말은 그냥 도시에 들어온다는 의미가 아니라, 적의 세력하에 있는 도시를 함락하여 지배하기 위하여 들어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걸 모르고 써도 문제지만, 알아서 쓴다면 북한이 진짜 침략해 오고 김일성이 지배자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겠다는 속뜻을 그대로 쓴 게 아니겠습니까.


1996년 하반기에는 강릉 앞바다에 북한의 잠수함이 나타나고, 북한의 무장공작원들이 상륙하여 강원도 산간지대를 헤집고 다니는 중대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당시에 작전중이던 군인들이 전사하기도 하는 등 정말 무서운 일이 벌어지던 한참에, 대학 내 대자보에 이런 것들이 붙었습니다. 그 무장공작원들을 당시에는 무장공비라고 불렀는데, 그들을 불쌍한 공비아저씨라고 부르면서 잡히거나 살해당하지 않고 무사히 대피하여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응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내용과 의도는 동의못할 것이지만 설령 동의한다 치더라도 불쌍한 공비아저씨? 그냥 지나칠 수가 없지요.

공비라는 말은 한자가 共匪입니다. 즉 공산주의 비적의 준말이죠. 비적이 뭐겠습니까? 도둑떼라는 의미입니다. 즉 공비라는 말은 적개심이 가득한 말입니다. 그런데 불쌍한 공비아저씨라니, 이게 대상을 응원하는 건지 비난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가 되었습니다.

군복무 후에 복학해 보니 세상이 확실히 달라진게, 이전에는 6월이면 운동권들이 조용하다가도 6.15 공동선언 이후로는 존재감을 드러내더군요. 이게 지금 집중적으로 다룰 주제는 아니니 일단 난외로 돌리지요.

그런데 학생들의 글쓰기가 뭔가 좀 이상합니다. 군필자에 대해서 군대에서 복역했다고 표현...

보통 군대에서 복무(服務)했다고 말하지 복역(服役)은 이상합니다. 과거에는 복역이라는 어휘가 군역에 종사한 것을 가리키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유죄판결을 받고 징역을 사는 것에 집중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이 생각나다 보니 떨떠름해지고 있습니다.

내일 새로운 해가 뜨면 이 감각도 괜찮아질지.

SiteOwner

Founder and Owner of Polyphonic World

8 댓글

마시멜로군

2016-06-26 00:09:08

북한이 침략하기를 바란다라... 진짜 위험한 사람들 아닌가요? 진짜 조사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불쌍한 도둑이라는건가요? 우리나라를 혼란에 빠트리러 온 사람들에게?

군대에 복역이라... 개인적인 생각은 자신의 청춘을 감옥처럼 2년동안 가둔 국가에 빼앗겼다고 생각하는게 아닐까 싶네요. (제 의견이 군대가 감옥이라는게 아니에요.)

SiteOwner

2016-06-26 00:22:58

기가 막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지요.

정말 상태 안 좋은 사람들 많았습니다. "북한을 찬양할 자유를 안 주니 북한을 비판하지 않겠다" 라고 주장하던 이론가의 말이 큰 지지를 받던 시대였다 보니 저 정도의 사람들은 약과인 셈이지요.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를 습격한 김기종 같은 자들도 저런 토양에서 자라온 자입니다.


언어 관련으로 다시 돌아와서 이야기하자면...

정말 모르고 그랬다면 무식한 것이고, 알면서 일부러 그랬다면 마각을 드러낸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시 복역이라는 단어를 쓴 학생에게 질문해 봤는데, 복역이나 복무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대답했습니다.

파스큘라

2016-06-26 02:30:14

6.25 전쟁 하니, 어제자 네이버 블로그에서 제공하는 블로그씨의 질문이 6.25 전쟁을 가장 잘 표현한 영화를 소개해달라는 거였는데, 어영부영하다 26일로 넘어가버렸지만 사실 아무리 잘 만든다 하더라도 결국 영화나 애니메이션, 드라마, 다큐멘터리 같은 매체가 다루는건 실제 전쟁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일부에 불과하죠. 사실 저는 무기에 대해 관심을 갖고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반전주의를 가지게 되다보니 전쟁을 다루는 매체 자체는 재밌게 보고 있지만, 그 어떠한 것도 전쟁을 완벽하게 묘사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됐네요.

 

언어야 원체 방대하니 모르고 쓸 수는 있겠고 그러면서 배워나가는 거지만, 알면서도 잘못된 어휘를 쓰는건 나는 언어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고 스스로 실토하는거나 마찬가지죠. 더군다나 그 대상이 한번 전쟁(사실상 내전)도 치뤄봤고 지금도 반세기 넘게 서로 죽이네 마네 하고 있는 원수지간이라면 더더욱이죠.

SiteOwner

2016-06-26 13:07:20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다, 그러나 백만인의 죽음은 통계이다." 라는 말이 전쟁의 참혹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온갖 비참한 양상으로 사람이 이곳저곳에서 죽어나가는 것이 그냥 무미건조한 수치로 표현된다는 것에서 이미 전쟁은 인간성의 상실이 철학적인 고담준론이 아닌 현실임을 보여주기 마련이지요. 당장 군복무의 경험조차 엄청난 트라우마로 나타나는데, 전쟁까지 겪었다면 정말 어떨까를 생각하니 끔찍해집니다. 무기의 진정한 의미도 쓰이는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이니 이것 또한 역설이라면 역설이겠죠.


말은 생각을 담는 그릇이고, 이 그릇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담은 생각 또한 온전해지지 못하는 법입니다. 포럼에서 이 점에 공을 많이 들이는 의미도 여기에 있습니다.

P.S. 6.25 전쟁은 내전이 아니라 국제전입니다.

카멜

2016-07-08 16:32:27

불쌍한 공산주의 도둑 아저씨(?)

그리고 입성 말입니다만, 그때 통일진보인사들이라면 어째서인지 그 한자 뜻 그대로 썼을 거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SiteOwner

2016-07-09 23:03:02

사용했던 말의 진짜 의미를 알고 나면 얼마나 살풍경해질지 잘 보이지 않나요?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상당히 떨떠름해지지 않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 입성이라는 말이 실수였으면 하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반증하는 예가 너무도 많다 보니 그러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뭐 그때뿐만이겠습니까. 요즘도 별반 다를 바가 없는데, 통일, 진보, 표현의 자유 등을 방패로 삼는 일이 워낙 많다 보니...

Papillon

2016-07-09 23:41:34

말씀해주신 "공비"의 예시처럼 관용적으로 쓰던 한자어를 본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사용하는 경우는 물론이고 다른 이유로도 언어충돌이 일어나는 일을 자주 보고 있습니다. 


첫째는 신조어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사용하던 케이스였습니다. 대표적 사례는 "중2병"이 있죠. 중2병은 본래 일본에서 "중학교 2학년 무렵에는 부끄러운 짓도 많이 했지,"라고 말하며 그 시절의 하던 부끄러운 행위들을 칭하는 말이었죠. 흔히 서브컬처에서 묘사되는중2병의 이미지는 그 중 속칭 "사기안(나루토의 사륜안 같은 일종의 초능력이 있는 눈을 칭하는 단어)계 중2병"의 이미지입니다. 여기에 한국에 와서는 더 부정적인 이미지들이 섞여서 현재 사용되는 중2병의 이미지가 잡힌 것이죠. 그런데 이걸 일부 기성세대가 접하고 잘못 이해했는지 중2병을 "중학생 무렵에 교사와 부모와 대립각을 세우는 경향"으로 정의하고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글까지 쓰고 있더군요. 보면서 어이가 없었습니다.


둘째는 일반적인 단어를 해당 직종 종사자들과 대중이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예시로 역무원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철도역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역무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정작 당사자 분들은 역무원을 "자신들을 낮잡아 부르는 표현"이라면서 "역직원"이라고 부를 것을 요청하시더군요. 이유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셋째는 같은 단어 임에도 특정 학문에서 쓰이는 의미와 대중들이 느끼는 의미가 전혀 다른 케이스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게 "리얼리즘"인데 이것이 형이상학에서 쓰일 경우 대중들이 쓰이는 의미와는 전혀 달라져요. 형이상학에서 리얼리즘은 사랑, 정의와 같은 추상적 개념의 실체가 실존한다는(즉, 그들이 관념적 산물이 아닌 현실적 대상이라는) 시각입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리얼리즘과는 오히려 반대에 가깝죠. 그러다보니 형이상학 관련 얘기로 리얼리즘을 얘기하는데 중간에 난입한 사람이 반박을 해서 한참 떠들고 보니 서로 다른 의미에 리얼리즘을 얘기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허탈해 한 경험이 있습니다.

SiteOwner

2016-07-09 23:55:25

언어의 충돌은 정말 여러모로 많이 일어나지요.


첫번째 사례의 중2병은 그냥 할말없는 정보오염이군요. 저도 좀 어이가 없어졌습니다.

두번째 사례는 아무래도 務와 職의 어감의 차이에서 오는 것 같아 보입니다. 務는 의무, 복무 등의 어휘에 쓰인 한자이고, 職은 직업, 직무, 직책 등에 쓰이는 한자인데 아무래도 후자의 것이 자신이 선택해서 하는 일이라는 어감이라서 더 높아 보이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

셋째는 정의 자체가 통일되지 않았을 때 벌어지는 참극이군요. 역시 공통된 전제 및 정의 없이는 대화 자체가 성립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일반적인 대화에서도 정의가 다를 때 문제가 심각한데, 학술 관련이면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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