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노르망디의 소귀족인 오트빌가의 탕크레드란 자의 12아들중 6째로, 그가 후처 프레센다 사이에서 낳은 아들중에서는 첫째입니다. 그는 그당시 영지를 상속받을 가능성이 낮은 노르만 귀족들이 으레 그랬듯이 남이탈리아로 건너가 거기에서 비잔티움의 용병으로 들어갑니다.
여기서 '용병'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얘기할 필요가 있을듯 한데, 당시 비잔티움은 전선확대와 지속적인 전쟁등으로 인해 만성적인 인력부족을 겪고 있었고, 이에 서유럽에 기사들을 영지로 끌어들여 비잔티움의 편제로 끌어들여 그 방식으로 훈련시키는 것을 말했습니다.(이는 로마때부터 이어온 전통입니다.) 이는 서유럽뿐만이 아니라 북유럽에서도 있던 일인데, 대표적인 예로 바랑기안 근위대를 얘기할 수 있습니다.(심지어 바랑기안 근위대로써 복무하다 왕이 된 노르웨이의 하랄 하라드라다같은 경우도 있습니다.)
하여튼간에, 당시 남이탈리아는 로베르뿐만 아니라 그의 형제인 '강철팔'기욤, 드로고, 옹프루아도 같이 복무하고 있었을 정도로 수많은 노르만인들이 용병으로써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이 노르만인들이 아풀리아의 롬바르드인 영주들이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 그의 이복형 '강철팔'기욤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형을 따라 비잔티움과 맞섭니다.
이후 기욤이 죽고 난뒤 그의 동생 드로고가 그의 작위를 상속받았는데, 당시 기욤밑에서 복무하던 오트빌가의 형제중 그만이 아무런 영지를 상속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그의 바로 위 형이자 탕크레드가 전처 사이에 낳은 아들중 막내인 옹프루이가 그걸 딱하게 봤는지, 그에게 라벨로 성을 수여합니다. 이후 그는 카푸아 공작 판돌포와 연합해 살레르노 공작과 맞서려 하지만 공작이 약속했던 딸과의 혼인과 영지 할양을 거절하자 돌아가버립니다. 이후 그는 칼리브리아에서 한창 정복사업을 벌이고 있던 드로고에게 영지를 나눠줄것을 요청했고, 이에 드로고는 당시 칼리브리아에서 한창 축조중이던 성채를 그에게 맡기는데, 기스카르는 이성을 스크리블라라고 지었습니다.(현재의 스페차노 알바네제)
이렇게 천천히 터전을 쌓아가던 기스카르를 일약 유명인으로 만든것은 1053년에 교황청에서 노르만인들의 확장을 저지하려 했던 치비타테 회전이었습니다. 이전투에서 기스카르가 이끌던 좌익은 아베노사 백작 리카르도가 이끌던 상대 좌익을 성공적으로 분쇄했고, 그의 형이자 당시 노르만족들의 지도자였던 옹프루이가 이끌던 중군이 교황군에게 밀려 자칫하면 노르만족들의 확장이 저지될 상황에 놓일때 그들을 지원해 교황군을 격퇴. 전투의 향방을 결정짓습니다. 이전투로 인해 기스카르는 일약 유명인이 되었고, 1057년 4월에 옹프루이가 죽자 그의 작위였던 '아풀리아와 칼리브리아의 백작'작위를 상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기스카르가 형에게서 작위를 상속받고 가장 먼저한건 정복군주로 유명한 그의 일면치고는 사뭇 의외의 것이었는데, 전처인 알베라다와의 혼인이 근친이라는 이유로 그녀와 이혼하고 대신에 남이탈리아의 롬바르드 군주인 살레르노의 지술포 2세의 여동생인 시켈가이타와 혼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알베라다가 그와 혈연관계라는걸 결혼할때는 몰랐고, 이에 결혼뒤 혈연관계란걸 알자마자 부랴부랴 이혼한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았습니다. 중세유럽은 귀천상혼을 엄격히 금했고, 설령 귀족간의 혼인이라 하더라도 격이 맞지 않으면 결혼이 되지 않던 사회였습니다.('정복왕'윌리엄 마냥 귀천상혼을 하고나서도 어찌저찌 정상적으로 상속받고 그들의 국가를 유지한 경우가 있긴 하지만, 이도 역시 상당한 피를 흘리고 나서야 가능했던 겁니다. 심지어 윌리엄의 본래 칭호는 '서자공'. 쉽게말해 정식자식으로 취급하지 않았던거죠.) 이에 어지간한 귀족들은 전부 한두다리 건너면 연결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시켈가이타와 혼인한 이유는 그가 정말로 알베라다와 근친관계였단걸 몰랐다기 보단, 시켈가이타몫의 영지를 살레르노 공작으로부터 얻어내기 위해서라고 보는게 옳을것입니다. (중세 유럽에선 결혼을 두가문의 '혼합'으로 여겼기에 결혼한 여성몫의 영지를 그의 남편몫으로 주는게 보통이었습니다.)
잠깐 여기서 딴 얘기를 좀 하자면, 시켈가이타는 안나 콤네나의 표현이 사실이라면, '여장부'라는 이미지에 딱맞는 이일겁니다. 그녀는 큰키에 근육질의 여성이었다고 하며, 기스카르가 원정을 나갈때마다 따라 나섰다고 합니다. 한편으로는 전술적 능력도 꽤나 있어서, 기스카르 휘하에서 지휘관으로써 종군해 어느정도 군공도 세웠습니다.
얘기를 원래대로 돌아가도록 해서, 시켈가이타와 결혼한 기스카르는 살레르노 공작과 협엽해서 소렌토 공작으로써 그와 맞서고 있던 그의 동생 기욤(앞에서 나왔던 '강철팔' 기욤과는 다른 인물입니다.)과 맞써 싸워 이깁니다.
이후 1059년에 새로 선출된 교황인 니콜라우스 2세는 대노르만 정책을 바꿔, 이들을 회유해 시시각각 자신들에게 간섭하는 서방과 동방의 두제국을 몰아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그해에 멜피 공의회에서 기스카르에게 아풀리아,칼리브리아, 시칠리아 공작위를 하사합니다. 이로써 기스카르와 그의 군대는 합법적으로 그곳을 정복할 권리를 가지게 되는거죠.
멜피 공의회 전 이미 칼리브리아를 정복할 속셈을 지녔던 기스카르였지만 멜피공의회에서 합법적으로 정복할 권리를 얻게된 기스카르는 더이상 거칠게 없게 되었습니다. 속전 속결로 나온 기스카르는 1059년 겨울이 끝나기전에 레조를 제외한 칼리브리아 전역을 장악하고, 타란토와 브란덴시에 있던 비잔티움 요새를 모두 박살냈습니다. 이후 동생 로제르와 함께 레조까지 함락한 기스카르는 콘스탄티노스 10세가 남이탈리아를 되찾기위해 보낸 비잔티움 군대까지 격파하면서 남이탈리아에서 노르만족들의 우세를 확실히 합니다. 이후 그는 1061년에 메시나를 함락시키면서 시칠리아쪽에 교두보를 확보했고, 1071년에 바리를 함락시키면서 남이탈리아에서 비잔티움 세력을 완벽하게 몰아냅니다. 그리고 이듬해 초에는 팔레르모를 함락시키면서 시칠리아를 거의 완전히 장악했고, 1075년에 살레르노를 함락하면서 남이탈리아를 완전히 장악합니다. 이로써 기스카르는 남이탈리아에서 패권을 장악했지만, 그의 야망은 그정도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원했던것은 황제의 관이었고, 그가 비잔티움 정복을 노린건 어찌보면 당연했던 거였죠.
사실, 비잔티움이 기스카르에게 접촉한건 1073년에 이미 얘기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미하일 7세는 군사동맹과 기스카르의 딸중 가장 아름다운 딸과, 황궁에서 나고 자란 그의 동생('황실의 조각상'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과의 혼인을 제안했습니다. 기스카르가 별다른 대답이 없자, 미하일은 이번에는 미하일의 아들 콘스탄티노스와 기스카르의 딸과의 혼인을 제안하면서 비잔티움의 훈장 44개를 그의 친지들에게 나눠줄 권리를 주면서, 매년 금화 200만 파운드를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기스카르에게는 이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훈장을 얻는건 일종의 뇌물을 받는 꼴이라 좀 찝찝하긴 했지만, 제위계승에 개입할 수 있단걸 생각해보면 크게 손해볼것은 아니었습니다. 곧 신부감이 콘스탄티노플로 가 젖먹이 약혼자가 성인이 될때까지 신부수업을 받으러 콘스탄티노플로 떠났습니다.(이후 해당 여성은 정교회로 개종한뒤 '헬레나'라고 개명됩니다.) 그러나 1078년 니케포로스 보타네이아테스에 미하일 7세가 폐위되고 수도원에 연금되어버립니다. 정치인보단 학자기질이 강했던 미하일에게는 오히려 해당 생활이 더 편했을지 모르겠지만, 본래 황후로써 떵떵거렸어야 했을 헬레나에게는 그리 편했을 생활은 아니었을겁니다. 이는 기스카르에게 좋은 개전명분이 되었습니다. 때마침 남이탈리아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 원정이 어느정도 지체되었긴 했지만, 1080년 7월에 가면 정상적으로 병력을 모집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비잔티움은 아나톨리아일대를 통째로 상실하는등 상태가 정상적이지 못했기에 원정이 늦어지는건 크게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해 가을과 겨울에 모집한 신병들을 훈련시키던 기스카르는 자신의 침략에 좀더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남이탈리아의 그리스인까지 끌어들이기 위해 자신이 미하일 7세라고 주장하는 사이비 수도사까지 끌어들이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그 수도사의 말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기스카르에겐 좋은 이용수단이기에 그는 그에게 적당한 대우를 해줬습니다.
이후 그해 12월에 기스카르는 콘스탄티노플에 퐁투아즈 백작 라뒬프를 보냅니다. 표면적으로 그는 당시 콘스탄티노플에 지내던 기스카르의 딸인 헬레나를 섭섭치않게 대해줄것을 요구하기 위해 그곳으로 간것이지만, 진짜 목적은 당시 정권의 실세로 떠오르던 내무대신 알렉시오스 콤네노스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라뒬프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데, 알렉시오스가 보타네이아테스를 물러나게 하고 알렉시오스 1세로 즉위해버린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라뒬프는 알렉시오스에게 감화되어버려 아풀리아로 돌아가면서 기스카르에게 알렉시오스와 우호관계를 쌓자고 하다가 호되게 혼나게 됩니다.
결국 1081년 5월에 함대가 출항합니다. 이미 발칸에는 기스카르의 장남 보에몽이 이끄는 선봉대가 아드리아해를 건넌 상황이었고(그는 이번 원정에 성공하면 그 정복지를 상속받기로 기스카르에게 약속받았기에 더더욱 원정에 필사적이었습니다.), 기스카르가 이끄는 본대는 라구사의 군대와 합류해 코르푸를 즉각 함락하고 디라키온으로 건너갔습니다.(현재 알바니아의 두러스) 이곳을 통해 에그나티아 가도를 타고 동쪽으로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거치면 바로 콘스탄티노플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상륙 직전 갑작스러운 폭풍으로 일부 군대가 손실되고, 노르만 해군이 베네치아 해군한테 패퇴당한 상태였지만 그정도로 이 집념의 노인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당시 기스카르의 나이는 66세.) 상륙한 기스카르는 즉각 디라키온을 함락하기 위해 치열한 공성전을 벌였습니다만, 요새 지휘관이자 알렉시오스의 매제인 게오르기오스 팔라이올로고스는 만만치 않은 자였고, 격렬한 포위전 끝에 결국 그해 10월 15일에 알렉시오스가 디라키온을 구원하기 위해 지원군을 이끌고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4일뒤에 이 두군대 사이에 회전이 시작됩니다.
회전 당시 노르만군은 디라키움에 내륙에 해당하는 좌익은 보에몽이, 중앙은 기스카르가, 그리고 우익은 시켈가이타가 이끌던 것으로 보이며, 총병력은 약 20000정도로 보입니다.
한편으로 이에 맞서는 알렉시오스의 비잔티움군은 20000~25000정도로 보이며, 그중에는 룸 술탄국의 슐레이만 셀주크가 빌려준 군대들 역시 포함되 있었습니다.
마침내 회전이 시작되었는데, 일단 시작은 비잔티움이 유리했습니다. 우익쪽에 있던 바랑기안 근위대들은 대부분 앵글로색슨 출신이었는데, 이들은 노르만 정복자인 정복왕 윌리엄이 헤이스탕스에서 잉글랜드왕 해럴드를 격파하고 왕이 돼자 정복자들을 따르는걸 거부하고 바랑기안에 입대한 자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지니다보니 이들은 노르만족들을 증오했고, 이에 이들은 시켈가이타가 이끄는 우익의 노르만군들을 몰아붙였고, 그들을 패퇴시킬뻔하기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복수심에 휩싸여 지나치게 앞으로 나아갔고, 시켈가이타가 흩어질뻔한 노르만군을 수습하면서 보에몽이 우익을 구원하러 오자 본대와 차단되어 포위당해 버립니다. 결국 화살세례를 버티지 못하고 이들은 인근의 예배당으로 피신했지만 노르만군이 여기에 불을 질러 대부분 죽고 맙니다.
한편, 중앙에 있는 알렉시오스는 노르만에 맞서 용감히 싸웠지만, 그가 이끄는 용병대들은 충성심이 그다지 없었으며, 설상가상으로 그의 가신인 두클라 왕 콘스탄틴 보딘과 룸술탄국의 슐레이만이 빌려준 군대가 멋대로 전장에서 이탈해버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결국 해당 회전에서 게오르기오스의 아버지인 니케포로스 팔라이올로고스와 미하일 7세의 동생인 콘스탄티오스 두카스도 전사하고, 알렉시오스는 겨우 목숨만 건져서 오크리드의 산악지대로 도망칩니다.
그나마 황제에게 다행이었던건 디라키온이 회전이후 4개월이나 더 버텼다는거지만, 결국에는 한 베네치아인이 밤중에 성문을 열어서 함락되고 맙니다. 이후 기스카르는 거침없이 진격했습니다. 순식간에 일리리아 전역이 노르만군의 손에 들어오고, 카스토리아를 지키던 수비대까지 자진해서 항복했습니다. 만약 이대로였다면 기스카르는 문제없이 비잔티움을 점령했거나 최소한 제기능을 못하게 만들었을것이고, 비잔티움의 멸망은 몇백년 앞당겨졌을것입니다. 그상황에서 이탈리아에서 사절이 왔습니다. 그리고 사절이 가져온 서신을 본 기스카르는 병력을 둘로 나눠 보에몽이 이끄는 병력만 발칸에 남겨놓고 그가 이끄는 병력을 데리고 남이탈리아로 돌아가버립니다. 대체 무슨 글이었길래 그가 이런 반응을 보였던걸까요?
사절이 가져온 서신은 바로 아풀리아와 칼리브리아, 캄파니아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사절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보낸 서신까지 들고 왔는데 그의 정치적 대립자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로마를 공성중이니 빨리 도와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적절한 타이밍에 기스카르가 병력을 다른곳으로 돌릴수밖에 없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나온 것일까요?
바로 그것은 비잔티움 전통의 외교책이었던 이이제이였습니다. 예로부터 비잔티움의 정치가들은 적대적이거나 위협적인 이민족이 나타날때 그들을 회유하거나, 내분을 일으키거나, 경쟁이민족을 끌어들여 견제하는 계책을 썼는데 이번에도 그런 경우였습니다. 우선 알렉시오스는 기스카르의 조카인 아벨라르를 끌어들여 그에게 자금을 쥐어준다음 남이탈리아에 반란을 획책하도록 도왔으며, 하인히리 4세에게는 노르만족을 견제해달라고 부탁하면서 금괴 36만개와 진주가 박힌 황금 가슴장식, 그외 수많은 귀중한 보물들을 선물해 그를 움직이게 하는데 성공합니다.
?
그러나 호부밑에 견자없다고 했나요, 기스카르가 남은 군대를 맡겼던 보에몽은 절대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알렉시오스는 그의 형이자 세바스토크라토르라는 관직에 있던 이사키오스가 교회의 재산을 몰수해서 겨우 군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지만, 야니냐와 아르타에서 비잔티움군은 보에몽에게 참패를 당하고 서그리스를 장악당합니다. 그러나 테살로니카로 진군하던 노르만군은 라리사에서 알렉시오스에게 참패를 당하고, 항복한 노르만 병사들에게 더많은 봉급을 주고 용병으로 재고용해주겠다고 알렉시오스가 소문을 퍼뜨리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연패를 거듭한 보에몽은 그리스에서 쫓겨납니다.
?
한편, 그때 남이탈리아에 있었던 기스카르는 1083년 여름안에 아벨라르와 그의 형제 에르망의 반란을 진압하고 산탄젤로성에서 외롭게 저항하던 교황을 구출하기 위해 새로운 군대를 모집한뒤, 이듬해 초여름에 로마로 향했습니다. 그는 5월 27일 밤에 병력을 거느리고 조용히 도시의 북쪽으로 돌아가,섀벽에 공격을 개시했고, 순식간에 돌격대의 선봉이 플라미니우스 성문을 뜷고 도시로 진입했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노르만군에게 격렬히 저항했지만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마르티우스 광장 전역이 불타는 지역으로 변하고, 노르만군은 도시를 약탈하고 방화했습니다... 격분한 로마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한때 군중들이 기스카르를 포위해 그대로 살해할뻔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차남인 로제르 보르사가 병력 1천명을 이끌고 그를 구원해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후 교황을 데리고 남이탈리아로 돌아간 기스카르는 비잔티움 제국에 대한 후속 원정을 준비했습니다.
?
그러나 기스카르는 아직도 자신만만했습니다. 초여름이 되자 그는 다시 병력을 이동시키기로 결정했고, 차남인 로제르에게 선발대를 맡겨 케팔로니아를 점령하도록 한뒤, 몇주뒤에는 그도 거기서 아들과 합류하러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남쪽으로 항해중 그역시 역병에 걸려버립니다. 함대가 섬의 북단에 있는 아테르 곶에 닿았을 무렵 그의 병세는 더더욱 심해졌고, 그의 배는 황급히 피스카르도만에 정박했습니다. 그리고 1085년 7월 17일에 거기서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끝마치죠.
그는 중세 성기 노르만족들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두 인물입니다.(나머지 한명은 영국의 '정복왕'윌리엄)
그가 살던 11세기 중~후반 시대 비잔티움은 쇠퇴기라 단언할 수 있고, 이에 따라 수많은 야심가가 동방제국의 관위를 얻어 그들의 야망을 만족시키려고 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전에 전술했던 로베르의 장남 보에몽과 사모스의 에미르인 차카 베이, 그리고 기스카르입니다. 그리고 그들중 그의 야망에 가장 근접한 자가 바로 그였습니다. 그는 동방황제를 격퇴하고 서방황제를 물러나게 했고, 성지를 불태우고 약탈했습니다. 교활함과 강인함, 전술,전략은 하늘을 찔렀으며 언제나 속에 비수를 품고 다닌 자였습니다. 심지어 장티푸스에 걸린 상황에서도 불굴의 정신으로 어떻게든 원정을 실시하려 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야심은 정반대로 동방제국과 서방제국의 협동을 불렀고, 아드리아 해의 공화국이 그들의 명목상의 주군과 협엽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수많은 '유능하지만 능력에 비해 너무 큰 야심을 지닌 인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이후 그와 그의 동생 로제르가 토대를 마련한 노르만 시칠리아는 비잔티움 제국에 위협이 되는 새로운 외부세력이 되기도 했고, 비잔티움은 이에 이들과 한때 협력하기도 하고(이사키오스 2세), 적대하기도 했습니다.(마누엘 1세.) 그러나 시칠리아 왕국은 신성로마제국의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에 의해 병합되면서(정확히는 모계상속권을 주장하면서 프리드리히가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를 시칠리아 왕으로 세웠습니다.) 국가적으로 쇠퇴기에 빠지는데, 독립적인 국가로 존속하기보단 타국가들(프랑스,아라곤 등등....)의 속국으로써 존속되는길에 빠져버립니다. 여러모로 기스카르에게 있어서는 원통하다고 할수도 있겠습니다.
도시가 무너져 가는데, 나는 여전히 살아있구나!-1453, 콘스탄티노플에서. 유언.
https://en.wikipedia.org/wiki/Constantine_XI_Palaiologos-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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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갈
2017-05-25 14:23:36
로베르 기스카르의 일생을 요약하자면, 야심찬 풍운아라고 하는 게 적절할까요?
그리고 부인 시켈가이타도 굉장하네요. 기스카르의 원정에 동반하여 지휘관으로서 군대를 통솔할 정도면...
그런데 여러모로 시대의 한계에 갇혔다는 게 확실히 보이고 있어요. 비잔티움의 이이제이 정책, 반란 시도, 제한된 정보력 속에서 혼란을 더욱 키우는 거짓 정보, 그리고 질병...제1차 세계대전 때만 하더라도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감염되어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기스카르의 활동시기에서는 정말 답이 없겠네요.
그나저나 코르푸 해협은 그 때나 지금이나 여러모로 문제가 되는 곳이군요.
1946년 그리스 내전 기간 동안,영국 해군의 군함들이 코르푸 해협을 항행하다 해당 해역에 부설된 기뢰에 대규모의 인명피해를 당했어요. 그리고 이 사건은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되어 알바니아가 영국에 배상을 해야 했지만 알바니아의 조치가 차일피일 미루어져서 결국 1991년이 되어서야 양국 외교관계가 정상화되고 배상조치 이행은 1996년에야 완료되었어요.
콘스탄티노스XI
2017-05-25 15:46:02
그의 자손들도 대체적으로 풍운아에 야심찬 인물이 많았었고, 그의 형들역시 그랬던거 보면 오트빌가문에 무슨 특별한 힘이 있는건가 싶습니다.
저시기면 의학이 그리 발달하지 못할때니깐요. 전염병하나로 도시하나가 풍비박산 난적도 있었죠.(콘스탄티노플라던가....)
아무래도 코르푸해협을 지나면 즉시 알바니아 인근으로 오고, 그곳을 통해서 세르비아나 그리스일대로 진출이 가능하니깐요.
SiteOwner
2017-05-28 19:12:11
로베르 기스카르(Robert Guiscard) 하니 현대 프랑스 정치사의 인물이자 대통령을 역임했던 지스카르 데스탱(Val?ry Giscard d'Estaing, 1926년생)이 같이 생각나고 있습니다. 철자는 근소히 다르지만요. 아무튼 Guiscard가 교활한, 여우같은 등의 의미를 지니니까 그 뜻에 맞게 지략으로 무장한 풍운아로서 살다 간 게 딱 어울린다고 봐야 할까요, 그런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욕심이 지나치면 그 역풍도 센 법일까요. 그의 야심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고, 그의 일생은 병에 걸려 객사하는 것으로 끝났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그 시대에 저만큼 살았으니 천수를 다한 거라면 다한 걸까 싶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인물사였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콘스탄티노스XI
2017-05-28 20:07:43
잘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