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현안의 의외의 접점 - 1. 게임과 공시생과 사교육
이번 이야기는 20년도 더 전 서울의 대학가 경양식집에서의 추억으로 시작합니다.
요즘에야 국내외 각종 패밀리 레스토랑 체인이 많이 보급되어 있다 보니 경양식집이라는 개념의 식당 자체는 별로 특이할 게 없습니다만 20년도 더 전에 대학생으로서의 삶을 시작했을 당시에는 이야기가 꽤 달랐습니다.
그런데 이런 곳을 여럿이 가면 주문을 받으면서 여자가 몇 명인지를 확인하는 게 자주 보였습니다. 대놓고 "여자 몇 분?" 하는 식으로 나타난 그런 행동의 이유가 음식의 양을 적게 주기 위한 일종의 꼼수였다는 것에서 기가 막히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다고 음식값을 적게 받는 것도 아니었으니 여성고객에 대해서는 그런 식으로 희한하게 폭리(?)를 챙기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이런 관습은 전역 후 복학 때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동생이 대학이 진학한 이후로는 완전히 없어진 듯 합니다.
일단 대학가 경양식집의 저런 영업방식이 사라진 것은 다행입니다만, 과연 이것만으로 안심할 수 있을까는 솔직히 의문입니다. 이런 논리가 의외로 많은 분야에 남아 있다 보니 기우인 것도 아닙니다. 당장 제목에 있는 최근 유행어인 "열정페이" 로 대표되는, 정당한 급여를 지급하지 않는 세태가 비공식적으로도, 그리고 공식적으로도 횡행하고 있다 보니 그 시대 경양식집의 접객관행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더군요.
사실 여성의 식사량이 마냥 적을 것이라는 생각은 마냥 옳지만도 않습니다. 그건 일단 주변의 사례를 확인하더라도 확인가능하며 평균적으로 여성의 식사량이 남성의 그것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여성에게 적은 양의 메뉴를 같은 가격에 제공해도 된다는 당위성으로는 이어지지 못합니다. 같은 메뉴를 주문하고 같은 금액을 내면 당연히 성별이 어떻든 간에 차별받지 않고 제시된 메뉴대로 음식을 제공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것이고 남는 음식 문제가 걱정된다면 그것은 작은 사이즈의 메뉴 등으로 해결할 문제이지 여성에게 적은 양의 식사를 제공하는 것으로 해결할 문제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니 20년 전 대학가 경양식집에 있었던 악관행은 성역할 고정에 의한 부당한 차별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말하는 열정페이라는 것도 이런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열정페이는 거칠게 요약해서, "열정이 있으니 돈은 덜 줘도 되겠네?" 라고 하면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주지 않으려는 구실을 정당화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악관행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꾸며대고 하더라도 위에서 언급한 20년 전 대학가 경양식집에서 횡행하던 행태와 본질이 다를 바가 없고 치사한 수법이라는 점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속은 것을 알면 누구든지 그러한 사업장에 충성하지 않으려고 하고 자신이 명백히 손해를 입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낮은 보상에 맞는 결과물만 내다가, 기회가 되면 미련없이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열정페이라는 것이 결코 개별 사업장 단위의 문제인 것만도 아니라서 그게 문제입니다.
제도적으로 열정페이가 있었거나 유지되는 분야가 있으니까 그게 진짜 문제이고 이것들이 선결되기 전에는 아무래도 근본적인 해결은 어림없을 것 같군요.
과거의 범죄피해자구조법에서는 범죄의 피해를 당한 당사자 또는 그의 가족이 국가에 지원을 청구하기에 온갖 제약이 많았습니다. 특히 가해자가 무자력자일 것을 요하거나, 사회통념상 구조금 지급이 부당하다면 일부 또는 전부를 지급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정된 것은 말이 좋아 명문의 법이지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행사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문제로 형법학계에서도 비판이 많았습니다. 결국 예의 법을 대체하는 범죄피해자 보호법이 제정되면서 가해자 무자력 요건은 삭제되었지만 불분명하기 짝이 없는 사회통념에 의지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정당방위나 긴급피난이나 정당행위 같은 위법성 조각사유도 극히 좁게 인정하고 국가가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도 애매모호한 개념으로 철회될 수 있는 이런 상태인데 대한민국 국민이니까 보호를 덜 받아도 된다고 법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라면 제 생각이 너무 비뚤어진 것일까요.
더 큰 문제는 법률 차원이 아니라 헌법에 있습니다.
헌법을 보겠습니다. 구체적인 부분은 제29조 제2항.
현행헌법에서는 이중배상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국가배상청구권 요건은 충족시키지만 다른 법령에 의한 별도의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경우에는 그 청구권은 소멸하게 됩니다. 대법원은 절대적 소멸을, 헌법재판소는 상대적 소멸을 주장하지만 사실상 소멸을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터라 실질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이것의 함의는 무엇일까요?
문제의 "다른 법령" 에서 아주 형편없는 수준으로 군인과 군무원의 공무수행중 피해에 대한 배상수준이 정해져도 이것을 군인이나 군무원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가 단위에서 열정페이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면 이게 뭐겠습니까? 몰지각한 어떤 자의 비하 표현같이 군인이 그런 대우를 받아도 된다는 것밖에 더 되겠습니까?
여성고객에게 식사량으로 장난질을 치는 경양식집은 사라졌지만 이렇게 헌법적 차원으로 국방의 최일선에 선 사람들은 아예 헌법적 차원에서 열정페이를 강요당하는 이런 현실. 정치권에서 개헌을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국가 단위의 열정페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정치인은 없어 보입니다. 나라의 법도가 이런데 개별 사업장에서 어지간히도 열정페이가 없어지겠습니다.
상탁하부정(上濁下不浄)!!
20년 전 대학가 경양식집에 있었던 이상한 관행을 떠올리다 보니 결국 이 다섯 글자의 성어로 귀결됩니다.
특정 속성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렇게 편견을 적용해도 된다고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으니 결국 이 나라가 차별과 혐오의 자유를 보장하는 세상으로 이행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떨떠름합니다. 더군다나 이런 현실을 인식하는 저는 정책입안자가 아니고 현재의 정책입안자들은 이 점에 무지하니 그것도 문제라면 문제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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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키
2017-07-19 00:35:07
그러고보니 생각난게 논산 같은 훈련소 앞 식당들은 입소날 한탕 뛰는걸로 1년 먹고살 정도로 벌 수 있는데다 손님들이 어차피 두번 다시 올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보니 상식적으로 이런걸 예비 입소자에게 먹인다고? 싶은 음식과 가격으로 배짱장사중이죠...
SiteOwner
2017-07-19 18:50:50
말씀하신 그것, 경험자이다 보니 이 더위에 한기까지 느껴집니다.
정말 끔찍했죠, 논산 제2훈련소(현 육군훈련소) 입소대대 앞의 식당들. 게다가 택시운전수들과 업무제휴를 했다 보니 택시를 타면 자동으로 그 식당 앞으로 인도되는 터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고 이러니 답이 없습니다.
악덕상혼이 여전히 구조적으로 건재하는 것에 비애를 느끼고, 이것에 사회지도층이 별 관심을 안 보이는 것에 그 비애가 가중됩니다.
대왕고래
2017-07-20 20:28:55
손님 등쳐먹으면서 장사해서 좋은 게 뭘까요.
심지어 지금도 계속되고 있죠. 마트에 파는 과자는 그 양이 점점 줄고 있고 아이스크림의 양도 마찬가지에요.
광범위한 등쳐먹기인 셈이죠. 그런데 당하고만 있네요...
SiteOwner
2017-07-20 20:37:12
그러고 보니, 과거 대학가 경양식집의 그 접객관행이 사라진 대신 요즘은 제과류에서 아주 광범위하게 과대포장, 정량을 속이는 부정상품 등이 횡행하고 있군요. 역시 구조적인 문제이니 어쩔 수 없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이런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이 사회는 누군가가 필연적으로 손해를 입어야 잘 돌아가는 그런 사회가 아닌가...만일 정말 그렇다면, 이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낸 돈의 가치를 제대로 누리기보다는 영원한 폭탄돌리기 속에서 희생양이 되지 않은 것에 하루하루 감사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절망적인 상상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