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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을 앞둔 때면 으레 어문정책 관련으로 이것저것 기사가 나오기 마련인데, 보다가 정말 헛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일단 기사를 보고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누리터쪽그림? 똑똑전화? 늘찬배달? 어른왕자? 쌈지무선망?
솔직히 이런 말이 있다는 것도 오늘 기사를 보고 처음 알았는데다 순화어라고 만들어낸 것들도 졸작이라는 평이 아까울 정도이고 차라리 처음부터 없었던 게 나을 뻔 했다 싶은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언어의 경제성도 무시하고, 직관적이지도 않고, 내용이 충실하지도 않은 저런 어휘는 언어학을 본격적으로 전공해 본 적이 없는 일반인들조차도 대체 저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보같습니다. 대체 저런 어휘를 누구에게 쓰라고 만든 것일까요.
기사에 나오는 5개 어휘를 간단하게 비판해 보겠습니다.
- 누리터쪽그림 - 웹툰의 순화어
- 웹툰은 2음절, 누리터쪽그림은 6음절로 너무 길어져서 언어의 경제성에서 이미 실패.
- 누리+터+쪽+그림 4단어의 합성어로 의미의 초점이 분산되어 의미의 함축적인 전달에서 실패.
- 웹툰은 단편 일러스트가 아니라 스토리라인이 있는 만화작품인만큼 그림으로만 의미가 제한될 수 없음.
- 똑똑전화 - 스마트폰의 순화어
- 어두에서부터 초성에 된소리가 반복되는 조어방식이 조악함.
- 반의어의 문제가 발생. 이를테면 멍청전화, 바보전화 등의 반의어는 비하의 의미가, 일반전화는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인해 스마트폰이 일반화되어 있는 이상 부적절함이 노정되고 있어서 채택할 수 없음.
- 자연어 처리에서의 문제가 발생. "똑똑. 전화가 울림과 동시에 노크 소리가 났다." 라는 문장의 해석은?
- 늘찬배달 - 퀵서비스의 순화어
- "늘차다" 는 손에 익어 솜씨가 좋고 빠르다는 의미이고, 퀵서비스는 기존의 물류망을 통하지 않는, 모터사이클 등을 이용한 발신인과 수신인을 직접적으로 잇는 배송수단이므로, "늘찬" 과 "퀵" 은 정확히 의미가 대응되지 않음.
- 늘찬은 언제나 차가운(kept cold), 또는 언제나 꽉 차있는(always full) 등으로 오해되기 쉬움.
- 정 영어계 외래어를 쓰지 않아야겠다면 속달(速達)이라는 기존용어로도 얼마든지 대체가능하고 오히려 이 편이 정확한 역어이고 게다가 짧기까지 하여 유리함.
- 속도가 세일즈포인트인 서비스의 이름이 "늘" 로 시작하면 느리거나 늘어진다는 오해가 생기기 쉬움.
- 어른왕자 - 키덜트의 순화어
- 도대체 어디에서 온 발상?
- 어른인 왕자는 동서고금에 얼마든지 있으며 왕자라는 어휘 자체에 미성년일 것을 요하는 전제 자체가 없음.
- 순화어가 더 길어서 언어의 경제성에서 불리.
- 쌈지무선망 - 블루투스의 순화어
- 블루투스는 스웨덴의 통신회사 에릭슨이 개발한 기술규격으로 현재 Bluetooth Special Interest Group이 기술연구개발 및 배포 등을 담당하고 있는 등록상표명이므로 번역의 필요성 자체가 불필요.
- 순화어가 더 길어서 언어의 경제성에서 불리.
딱 이 정도만 보더라도, 국립국어원이 만든 순화어가 아예 처음부터 없는 것보다 못할 정도로 조악하기 짝없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첨부파일에 순화어 목록이 있으니 그 실태를 직접 확인해 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다음주부터는 개별 순화어 어휘에 대한 비평을 연재해 볼까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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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댓글
OBiN
2017-10-08 23:23:52
기사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이게 순화어야 문화어야..."였습니다. 본문에 제시된 것 같은 억지 순화어가 제 생각에는 북한에서나 볼 법한 무리한 언어순화를 떠올리게 했던 거죠.
그리고 4번은 아마 <어린 왕자>를 변형한 것 같은데, 저렇게 만들어 놓으니 무슨 말장난 같네요...
SiteOwner
2017-10-08 23:31:07
역시 그런 인상을 받으셔도 전혀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저도 그 생각을 했으니까요.
언어의 사회성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으니까 순화어랍시고 저렇게 조악하기 짝없는 어휘를 들이밀어봤자 뭐가 통하겠습니까. 그나마 조선시대 초기에 어용문학으로 등장했다 소멸한 악장은 독자적인 세련미가 있어서 후세에도 국문학 유산으로 중요시되는데, 저런 억지 순화어는 그냥 언어로 만든 허접쓰레기라고 봅니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를 차용해서 어른왕자...동심을 가진 어른이라는 의미일까요. 확실히 억지스럽습니다. 차라리 항간에 떠도는 어휘인 "어른이" 를 차용하는 게 나을 뻔 했습니다.
마키
2017-10-09 12:14:54
한글날 하니, 포털사이트 네이버는 한글을 가지고?다양한 무늬 같은걸?만들 수 있는 이벤트를 하고 있던데, 한글날을 기념하고 싶으면 차라리 이런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나올때마다 하는 소리지만, 아무리 의도가 좋다고 하더라도 직접 언어를 쓰는 대중에게 먹히지 않으면 아무 짝에 쓸모 없을 뿐이죠. 링크해주신 뉴스 본문의 의원분 말씀이 정답일지도. "낮선 외래어를 우리말로 다듬는 노력이 있기에 무분별한 외래어 범람을 막을 수 있었지만, 국민의 공감을 바탕으로 순화어를 만들어야 한다."
SiteOwner
2017-10-09 12:36:55
말씀하신 네이버의 사례가 확실히 더 적합하고 잘 어울립니다. 한글날은 글자 그대로 한글이라는 문자의 창제를 기념하는 날이니까요.
언어의 사회성을 망각한 억지조어는 절대로 통용되지 못하고 사멸하거나 잊혀져 버립니다. 마개뽑이라는 어휘가 정착되지 못하던 때에 병따개라는 어휘가 고안되어 완벽하게 자리잡은 것이라든지, 언론에서 베이글녀 운운하지만 일부 기자들 이외에는 거의 쓰지 않는데다 거부감까지 일으키고 마는 것처럼 사례는 수없이 많은데, 국립국어원에게만은 저런 것들이 전혀 안 보이는가 봅니다.
저 국회의원의 발언은, 그나마 국립국어원을 배려해서 정제한 발언인데, 아마 제가 저 위치에 있었다면 좋은 말은 전혀 못 해 줄 것 같습니다.
Papillon
2017-10-09 20:15:29
SiteOwner
2017-10-09 22:01:19
일을 해서 좋은 성과를 내는 게 아니라, 일을 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
확실히 그런 관점도 가능하겠군요. 하긴 보충수업이다 야간자습이다 이런 것을 시키는 것도 실제 효율이 어떻든간에 그냥 학생들을 교내에 잡아두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관리를 잘 했다는 것으로 간주되니, 설득력이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국립국어원의 행태는 자원낭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그러니 어문정책을 그따위로 집행하는가 봅니다.
말씀하신 한식홍보사업과 비슷한 사례를 좀 알고 있기에 이것 또한 추가로 언급해 봐야겠습니다.
1980년대에는 오후 9시가 임박하면 방송에서 어린이들은 이제 자야 할 시간이라고 안내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직전에 우유 광고가 잘 나왔었지요. 사실 우유의 주소비자를 생각하면 그 시간대의 광고는 그리 효과가 좋지 않았지만, 당시 우유회사에서는 광고를 방영할 때 중역들이 집에서 퇴근 후 TV를 볼 때 자사 광고가 보이는 것을 선호해서 그렇게 광고가 나갔다는 후일담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전에 월드컵 유치를 위한 프리젠테이션이 방송에 공개된 적이 있어서 봤는데, Papillon님께서 말씀하신 그것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한국이 이렇게 열심히 발전했으니 월드컵 개최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 하는 게 그냥 보였죠. 반면에 카타르는 동네 꼬마들의 축구에 대한 일상 속의 로망으로 프리젠테이션을 열어 나갔고, 이미 거기에서 답이 보였습니다. 2022년 월드컵 개최국은 카타르로 낙점되었습니다.
대왕고래
2017-10-14 02:45:40
읽고 있으니, 순화작업을 한다면서 그게 받아들여질 생각은 전혀 안 하고 하는 게 보이네요.
그냥... 했다는 거에 만족하는 그런 거?
했다는 것에만 만족한다면 그건 취미의 영역이고, 거기에 국가가 도와줄 이유는 없어보이는데 말이죠...
아니면 어떤 사명감일 수도 있겠죠. 근데 사명감이라고 해도, 순화된 언어가 사람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무소용인데 말이죠...?
SiteOwner
2017-10-16 18:54:16
이전부터 제가 포럼에서 밝혔던 지론 중의 하나인 "언어는 문화이자 습관" 을 역설계해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즉 습관화되지 않거나 문화 속에 녹아들지 않는 어휘는 언어생활에 반영되지 못하고 언어에 편입되지 못합니다. 지금 국립국어원은 이런 것조차 생각하지 않고, 그냥 "아름다운 축구 했잖아" 하는 넋두리만 늘어놓고 있는데, 정말 할 말이 없어집니다. 아니, 취미나 사명감 레벨에 견주기도 솔직히 민망한 수준이라서 기대 자체를 완전히 포기해야겠군요.
죠죠의 기묘한 모험 3부의 누케사쿠는 그나마 주먹으로 칠 수라도 있는데 이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