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생활의 여러 분야에서 완곡어법을 많이 접하다 보니 이런 의문이 들고 있습니다.
과연 완곡어법은 정말 상대를 배려하는 화법일까, 정말 배려한다면 오히려 정확한 정보를 제시하고 확실히 한계를 명시하는 편이 더욱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아서입니다. 특히, 문을 열고 닫는 것과 같이 행동의 중간값이 없는 경우에 완곡어법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들기 마련입니다.
물론, 완곡어법이 완전히 불필요하니 전면 폐기해야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순기능을 부정할 의도도 없습니다. 문제는 이게 남발되는데다 함의가 불순한 경우가 있으니 이런 것은 조심해야 한다는 점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성격에 해당하는 것.
예시를 한 가지 보겠습니다.
철도의 경우, 24시간 내내 선로에 열차가 달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선로보수작업에 정기적으로 할애하는 시간대가 있으니 그 시간대는 선로를 비워두고 작업인원과 장비가 선로를 차지해서 진단 및 공사를 담당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열차가 여객, 화물 등을 취급하거나 신호대기중이라서 선로를 점유하는 중이라면 같은 선로에 다른 열차가 진입해서는 안되기에 당연히 이 경우에도 신호제어를 하여 통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선로에 열차가 달린다/달리지 못한다의 선택지만 존재합니다. 영어로 하면 On/Off, 독일어로 하면 Ein/Aus, 한자로 쓰면 入/切이고. 게다가 선택지 내의 두 행동은 상호 모순관계에 있어서 중간 단계는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상황에서 진입불가를 진입이 어렵다고 말하면?
분명히 이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그러면 잘만 궁리하면, 어렵더라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완전히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대감을 가지는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요. 그런데 이것이 불가능한 것을 빙빙 돌려서 말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실망감과 배신감은 말도 못할 뿐더러, 결과가 이렇다면 처음부터 확실히 말해 줬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원망도 하게 됩니다. 그 낮은 기대에 들어간 시간과 노력이 결국 허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선택지 내의 사항이 상호 모순관계에 있는 상황을 완곡어법으로 말해 봤자 의미가 없고, 하지 않은 것보다 결과적으로 더 안 좋게 됩니다.
요즘 별별 이유로 분쟁이 많다 보니 자기방어적 본능 등이 강해져서 완곡어법이 유행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하겠지만, 오히려 완곡어법이 상황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 역효과를 내는 경우도 있다 보니 이것도 어느 정도는 제한이 필요합니다. 또한 남발하면 계속 둔감해지기에 완곡어법이 결국은 완곡어법이 아니게 될 날도 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의사결정이나 유통 등의 단계는 간소화로 혁신을 꾀한다는데, 이런 언어생활에서는 오히려 완곡어법의 남발로 비효율과 부정확이 나날이 늘어가니, 이런 역설에 대처하는 것도 앞으로의 생활에 관건이 될 것 같습니다. 지금은 기우같아 보이더라도.
나중에 교육에서 이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곱셈에서는 아무리 큰 수라도 0을 곱하는 순간 결과값이 0이 되고, 나눗셈에서는 0으로 나누게 되면 결과값을 도출할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을 0을 곱하면 0이 나올 수 있다, 0으로 나누면 답이 나오기 어렵다 하는 식으로 가르치는 날이 오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설마 싶겠지만, 이것 또한 확실히 반박하기는 어렵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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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댓글
마키
2017-11-30 01:21:46
때로는 직설직언이나 강경책이 필요할때도 있는 법이죠.
사실 한자 라는게 어제오늘 쓰인 것도 아니고 적어도 동아시아권 대부분이 과거부터 취급해오기에 우리도 순우리말로 풀어쓰기보단 그냥 한문이나 한문 축약어를 쓰는게 취급하기 더 간편한 경우가 부지기수죠. 일전에 언급해주신 늘찬배달-퀵서비스와 같은 의미이자 음절도 두 글자인 속달 이라던가.
SiteOwner
2017-11-30 23:39:15
그렇습니다. 남발하면 확실히 좋지 않고, 분명한 사안은 명확히 말해 두는 편이 더 좋은 경우도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완곡어법을 배려하는 화법의 동의어로 여기면 크게 잘못하는 것입니다.
언어의 경제성 측면에서도, 의미의 명확성 및 전달력에서도, 한자축약어가 좋은 경우가 있으니 딱히 그것들을 피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쓰지도 않을 것이면서 이상한 신조어를 만들어 두는 것보다 기존의 간결한 어휘를 살려 쓰는 게 더 좋다는 데에는 재론의 필요성조차 없지 않을까요.
Lester
2017-12-01 09:28:54
탄생의 의도는 좋았는데 갈수록 안 좋아지는 사례 중에 하나네요. 얼핏 보면 동서양 간의 차이 같다 싶으면서도(서양이라고 모두 면전에 대고 쏘아붙이진 않지만요), 한편으로는 일본처럼 '우리끼리 싸워봤자 남는 건 없으니까 최대한 낮추고 살아야지' 같은 영향의 발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랬던 것이 어느 순간 내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해서 사용하는 거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마치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는 것처럼요.
SiteOwner
2017-12-01 20:14:39
그렇습니다. 말 한마디, 글 한줄 모두 생사여탈의 근거가 되었던 시대에, 어떻게든지 빠져나갈 여지를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서도 완곡어법이 발달한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사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러 문화권에 존재하는 것이긴 합니다. 그런데 한자문화권의 경우, 특히 성리학이 주도사상으로 등극한 이후에는 사화, 당쟁, 문체반정 등 과거의 기록을 문제삼아 자행하는 필주가 횡행했다 보니 특히 더 두드러져 보이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중간값이 없는 사안에서는 완곡어법을 사용하는 게 도리어 안 좋은데, 완곡어법을 남발하다 보니 이제는 생각조차 잊어버린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씁쓸하지요.
Papillon
2017-12-01 15:28:47
SiteOwner
2017-12-01 20:22:51
완곡어법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상황에 맞는 화법을 구사하지 못하는 게 문제라는 것이군요. 저도 그 관점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이미 완곡어법의 전면부정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이것에 순기능이 있음을 인정하였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수사학은 필요합니다. 상황에 맞는 화법의 구사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이상 떼놓을 수 없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고대 그리스 문명 등에서도 수사학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체계적인 발전이 이루어져 온 것입니다. 그런데 국내 교육의 경우 그에 대한 고려가 없다 보니 제대로 된 의사소통은 없고, 대화 대신 일방적인 상대방 때리기가 좋은 화법인 양 하는 풍조가 횡행해도 이에 대해 실질적인 대책은 전혀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다 보니, 완곡어법이 배려하는 말이니까 어느 상황에서 써도 된다는 잘못된 인식이 고착되기 쉬운 것이고, 결국 그것을 써서는 안되는 상황에서도 남발하는 행태가 횡행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