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원자력 연구에 대해 알게 되면 접하는 용어 중에 고속증식로(高速増殖炉, Fast Breeder Reactor)라는 것이 있어요.
이 원자로는 고속중성자로 핵분열연쇄반응을 일으켜, 투입한 핵연료보다 더욱 많은 핵연료를 생산하는 꿈의 원자로라고 할 수 있는데, 한때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지금은 여러 나라들이 연구에서 손을 뗀 경우가 많아요. 그 중에서 러시아만이 거의 유일하게 연구를 꾸준히 추진하고 있다 보니 여러모로 주목받고 있어요.
고속증식로는 원자력발전이나 원자력추진군함에 널리 쓰이는 일반적인 경수로와는 상당히 다른 특징을 갖고 있어요.
요약하면 대략 이런 것이죠. 증식비, 즉 투입한 핵연료 대비 생산하는 핵연료의 비율이 1을 넘을 것, 핵연료로서 우라늄 238(가장 흔한 동위원소) 및 플루토늄을 사용할 것, 감속재를 사용하지 않을 것, 노심이 컴팩트하여 물보다 냉각성능이 월등히 우수한 액체금속(일례로 액체나트륨) 등을 사용할 것이 고속증식로의 요건으로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게 여러모로 문제가 심각해서 실용화가 상당히 힘든 문제가 있어요. 감속재를 사용하지 않다 보니 노심에서의 연쇄반응이 폭주할 경우에 제어가 사실상 불가능한 점, 냉각재의 높은 부식성으로 인해 일어나는 사고 등 이런 것들이 있다 보니 한때 열의를 갖고 개발을 추진했던 여러 선진국들이 고속증식로 개발프로젝트를 포기했어요. 1990년대에는 미국, 독일, 영국이 손을 떼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일본의 죠요(常陽) 실험로가 손상되고 2010년대에는 이전부터 여러 사고에 시달려 가동중단과 재개를 반복해온 몬쥬(もんじゅ)가 2016년에 폐로되는 것으로 결정난 상태인데다 프랑스의 페닉스도 가동중단된 상태에 있어요. 일본은 앞으로도 고속증식로 연구에 손을 놓지는 않을 예정이지만 계획된 기술실증로가 2025년에야 재등장할 예정이고, 프랑스는 향후 계획이 사실상 없는 상태.
그런데 러시아는 상당히 의욕적으로 연구를 추진하고 있어서, 1986년 구소련시대에 착공된 BN-800 기술실증로가 2016년 11월부터 영업운전을 시작하였어요. 1990년에서 2001년에 걸쳐 이 BN-800이 공사중단 상태에 놓였음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진척도가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지난주 NHK 국제보도에서 언급된 BN-800 관련 보도를 대략 정리해 볼까 싶네요. 일단 요약해 보면, 업계의 엔지니어, 그리고 러시아 일반인들, 그리고 정책입안자들의 마음가짐에서 그 원인을 대략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일단 엔지니어들의 사고방식부터.
원자력 사고는 일단 광범위한 피해가 예상되기에 원자력 설비의 설계에서는 사고가 없을 것을 염두에 두기 마련이예요. 그런데 러시아의 경우는 이것에만 경도되지 않고, 오히려 사고는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대비하는 사고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고 하네요. BN-800의 경우만 하더라도 크고 작은 사고가 수십여건 일어났고, 소련시대에는 이미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해당지역은 현재 우크라이나) 같은 대형사고가 났는데다 마야크 재처리공장처럼 소련시대는 물론이고 현재에도 사고가 이어지는 지역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보니 분명 원자력 사고에 대한 트라우마가 엄청날 것 같은데, 현장 엔지니어들의 생각은 사고를 전제하면서 그 사고를 극복해 나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니...잠시 숙연해졌어요.
그리고, 러시아 일반인들의 사고방식도 꽤 성숙해 있다는 것이 보였어요.
1986년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현재도 그 발전소가 위치한 우크라이나는 물론, 러시아에서도 그 사고를 추모하고 있어요. 사고로 소중한 사람들을 잃은 경우도 많고, 그 사람들에게는 그 때의 그 사고가 두렵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 종사자들을 신뢰하고 있고, 그들이 현명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 데에서는, 이 점에서는 러시아가 성숙한 면이 확실히 있다는 게 보여요.
게다가 정책입안자들의 복안 또한 상당히 멀리 보고 있다는 것이 특징.
현재 개발중인 고속증식로 계획은 22세기를 위한 것이고, 그 때에는 러시아산 고속증식로 기술이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어떤 나라에도 수출되어 활용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이 말이 결코 빈말이 아닌 게, 이미 2009년에는 러시아가 예의 BN-800 기술을 중국에 수출하는 계약까지 체결했으니까요.
이렇게 온갖 난관을 뚫은 러시아의 고속증식로 기술은, 핵연료 취급 및 유지관리기술, 핵연료 폐쇄사이클을 실현하는 주요 구성요소의 기술실증, 보다 안전하고 신성 높은 고성능 고효율 기기 및 기술솔루션 실증, 차세대 원자로 구조재의 성능검증, 그리고 가장 트러블이 많았던 액체금속 냉각재 관련의 신기술 확보 등의 기술적 성과를 거두면서, 금세기 후반에는 세계의 에너지 판도를 바꿀 수도 있을 정도로 급성장할 예정이라고 하네요.
이런 러시아의 고속증식로 연구프로젝트를 보면,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배울 점이 많으며, 감정적 선동으로 휘둘리기 쉬운 여론이 지배하는 지금의 우리 환경이 과연 바람직하기만 한지 되돌아보는 기회도 생기게 되네요. 특히, 아무리 기술인들이 노력해도 정치인들의 말 몇 마디에 그 노고가 허사가 된다든지, 연구개발활동 도중의 시행착오 과정이 배상책임으로 이어지는 현실이라든지, 혼신의 힘을 다해 위독한 환자를 살려낸 의사를 인격테러범 운운하며 욕하는 행태를 보면 우리나라의 정책입안자들이 정말 미래를 대비하고 있는 것인지도 되묻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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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댓글
마키
2017-12-06 00:02:38
과거 소련 시절, 자존심 싸움이 극에 달했던 냉전시기에조차 인민을 굶길수는 없다는 이유만으로 자존심이고 뭐고 내던지고 적인 미국에게서 식량을 수입해 배급했었죠. 오죽하면 공산주의 유머 마저도?'미국이 멸망하면 안되는 이유: 그럼 우리는 어디서 식량을 사오나?'라고 풍자할 정도였으니...
단기적 성과보단 장기적인 결과를 목표로 느긋하게 달리고, 사고를 마냥 피하기보단 똑바로 직시하면서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면 정면으로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와 함께 지금 우리가 만드는 것이 언젠가 다른 이들의 도움이 될 거라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동시에 앞으로의 미래를 바라보는 모습은 확실히 여러모로 대국답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런 마음가짐이 대국이 되고 싶다면서 중국에 머물러있는 어느 나라와의 결정적인 차이일지도...
마드리갈
2017-12-06 13:21:59
러시아는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겨우 농노제가 혁파될 정도로 근대화가 늦었는데다 20세기의 대부분을 소련 시대로 보냈고, 현재에도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국가라서 사회의 신뢰수준이 그리 좋지는 않아요. 게다가 진영논리가 여전하다 보니 그런 점에서 거부감도 많이 들고 있고, 대숙청, 굴라그 등으로 대표되는 제도적인 인권침해는 어떤 이유로도 변호될 수 없는 만행임도 분명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인민을 굶기는 사태를 만들지 않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식량을 대거 수입해 왔다든지, 과학기술에의 신뢰가 사회적 공감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면 러시아를 마냥 낮잡아 볼 수만도 없죠. 그런 면에서는 러시아에서 배울 점이 상당히 많다는 게 느껴져요.
마드리갈
2023-05-03 16:06:47
2023년 5월 3일 업데이트
러시아의 꾸준한 원자력관련 연구가 빛을 보고 있어요. 또한 이것은 미국 및 유럽의 원자력발전에 대한 소극적 대응 및 우리나라의 문재인 정부 시절에 추진한 탈원전의 틈을 타서 러시아 및 중국이 원자력발전소 수출시장의 80%를 기록한 것이라서 러시아의 장기적인 안목의 성공이자 또한 제1세계의 뼈아픈 실패라고 할 수 있어요. 특히 러시아는 우라늄 농축시장에서 급성장하여 소련시대인 1985년에는 세계시장 점유율이 7%였지만 2015년에는 45%가 되었어요. 같은 기간의 미국의 점유율은 64%에서 8%로 급락한 것이었죠.
러시아를 결코 만만하게만 볼 수 없는 이유가 이렇게 하나 드러나 있어요. 여기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써봐야 할 듯해요.
관련보도를 하나 소개할께요.
우리가 탈원전하는 사이...러·中, 세계 원전 수출 80% 장악, 2023년 5월 3일 조선일보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