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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번역의 사례를 모아 볼까요?

마드리갈, 2018-04-13 21:03:10

조회 수
187

해외산 창작물을 즐기는 방법은 여러 경로가 있지만, 보통 국내에서는 번역된 것을 받아들이기 마련이죠. 그 방법은 자막도 있고 더빙도 있고, 간혹 해외에서 만들어졌지만 오리지널 내용 그대로 더빙되는 게 아닌 완전 국내번안되는 방식도 있어요. 이렇게 번역되는 과정에서, 놀라운 센스가 발휘되어서 볼수록 감탄스럽게 여겨지는 것도 있어요. 그런 사례를 흔히 초월번역이라고 하죠. 여기서는 초월번역의 사례를 모아 보기로 해요.

먼저, 등장인물, 단체, 어구 등에 대한 초월번역부터.

달이 아름답군요
일본의 소설가이자 1984년에서 2007년까지 1000엔 지폐도안의 인물로도 채택되어 유명한 나츠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가 영어교사 시절 때 영어문장 I love you를 직접적으로 번역하는 건 일본인이 바로 입에 담기에는 뭐하니까 달이 아름답군요(月が綺麗ですね)라는 문장 정도로 둘러서 말하더라도 마음이 전해진다고 했다고 전해지는 어구.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해져 오는 이야기라서 확실하지는 않아요. 그래도 이 번역의 파급력은 꽤 넓은 편이라서 일본 내에서는 초월번역으로 여겨지고 있어요. 어서오세요 실력지상주의 교실에, 여동생만 있으면 돼 등의 애니에 예의 문장이 등장하거나, 제목으로 활용한 애니 달이 예쁘다(月がきれい)도 있을 정도.

그대의 눈동자에 건배
1942년에 개봉된 미국 영화 카사블랑카에서 릭 블레인 역의 배우 험프리 보가트(Humphrey Bogart, 1899-1957)가 말한 대사인 "Here's looking at you, kid." 가 일본에서는 "君の瞳に乾杯(키미노 히토미니 칸파이)" 로 번역되어서 명대사가 되었어요.

암흑패 (요리왕 비룡)
작중의 악의 조직으로서 정통요리계와 대립하는 이 암흑패의 원제는 裏料理界(우라료리카이), 직역하면 뒷요리계. 하지만 이 번역은 별로 와닿지 않아요. 뒷골목, 뒷세계 등의 단어를 통하여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직관적이지는 않다는 문제가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요. 하지만 암흑패의 목적이 요리로 인간을 지배하는 데에 있고,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온갖 야비하고 음험한 수단도 가리지 않으며 활동상 등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일단 드러나면 아주 폭력적인 것에서 어둡고 검은 패거리를 뜻하는 암흑패로 명명된 것은 다른 대체수단이 없을 정도의 훌륭한 초월번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예요.

꼬마짱 (논논비요리)
논논비요리의 등장인물 중 코시가야 코마리는 중학교 2학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의 단신으로 여동생 나츠미가 코마쨩이라고 부르는 것을 자신이 작다는 이유로 부른다고 여겨서 싫어하고 있어요(코마이는 작다는 뜻). 그런데 이 애니가 애니플러스에서 방영되면서, 그 코마쨩이 "꼬마짱" 으로 옮겨졌고, 더 이상의 설명 자체가 불필요한 훌륭한 초월번역이 되었어요. 글자 그대로 꼬마같다고 꼬마짱. 작중에서 여러모로 굴욕을 당하는데, 해수욕장에서 미아 취급을 당해서 실제의 키(140cm 미만)마저 공개적으로 폭로된 데에서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낭자애
일본어 男の娘(오토코노코)의 번역으로서 애니플러스에서 사용된 이래 대거 보급된 용어.
낭자가 젊은 여성을 가리키는 옛말인데다 남자와 발음이 비슷한 것이, 여성스러운 남자아이를 가리키는 男の娘의 속성을 나타내는 데에 적격이다 보니 다른 표현보다도 더욱 널리 퍼질 수 있었어요.

잉여신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
이 멋진 세계의 축복을, 또는 일본어 원제의 발음을 줄인 코노스바의 캐릭터인 아쿠아는 이름보다 잉여신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어요. 일단 아쿠아가 여신이긴 한데 시원찮은 점이 부각되다 보니 원판의 별명은 다메가미, 즉 다메(글러먹은)+메가미(여신)의 합성어가 되어 있어요. 잉여신은 이것을 잉여+여신의 합성어로 번역해 낸 것으로, 원판의 별명의 어감과 의미를 모두 다 살린 훌륭한 초월번역이죠. 저는 코노스바를 보다가 도중하차해서 자세한 이야기는 잘 모르지만, 잉여신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어둠의 학생회 (감옥학원)
위의 요리왕 비룡의 암흑패와 비슷한 경우로, 감옥학원의 배경 하치미츠 학원 내의 대립하는 두 학생회 중 뒷세계 학생회(裏生徒会, 우라세이토카이)는 이렇게 번역되고 있어요. 원래에는 정식 학생회가 있지만 실질적으로 학생사회 내부를 장악한 이 어둠의 학생회는 아예 정식 학생회를 실각시키고 표면적으로 나오면서, 여학교에서 공학으로 전환후 처음으로 입학한 5명의 남학생이 여자목욕탕 훔쳐보기를 시도한 사건을 일으키자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게 되어요. 


제목 자체가 초월번역인 경우 또한 존재하고 있어요.

마탄의 사수
독일의 작곡가 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86-1826)의 1821년작 오페라 Der Freischütz를 일본어로 번역한 魔弾の射手를 재번역한 것이 바로 마탄의 사수. 보통 이 번역이 일본식 번역제목의 중역제목으로 원어 그대로를 번역해서 자유의 사수(Frei는 자유, Freischütz는 사수)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근거에 의한 주장이예요. 제목에도 나오는 프라이쉬츠(Freischütz)는 독일의 민담에 나오는 그가 잡고 싶어하는 사냥감을 무조건 적중시키는 총알을 위해 악마와 계약한 포수를 말해요. 즉 자유로운 것은 포수 자신이 아니라는 의미. 그래서 마탄의 사수라는 번역이 타당하고 잘 된 번역.

춘희
이탈리아의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의 1853년작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가 일본에서 椿姫(츠바키히메)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이래, 우리나라에도 이 오페라의 제목은 일본식 번안제목을 한국식 한자발음으로 읽은 것이 통용되어 있어요. 원제의 의미는 타락한 여자라는 의미로, 과거 국내 언론에서도 잘 썼던 어휘인 윤락녀와 통하고, 주요 등장인물인 비올레타 또한 명색이 사교계의 여왕으로 포장되어 있을 뿐 실상은 그러해요. 이 작품이 일본에 소개되었을 때는, 비올레타가 동백꽃 장식을 하고 있는 것에서 유래해여 번역명이 츠바키히메가 되었고, 이 번역이 우리나라에도 한동안 그대로 정착했어요. 요즘은 원제 그대로 라 트라비아타라고 쓰기는 한데 완전 직역은 아직 본 적이 없어요.

요리왕 비룡
원제는 中華一番(츄카이치반)이지만, 이것의 한자를 그대로 읽어 중화일번이라고 해봤자 딱히 와닿지는 않죠. 하지만 작중에 용이 잘 등장하고, 애니판에서는 그 용이 날거나 작중 생존자로서는 요리 최강자인 주인공이 그 용을 타고 나는 모습도 구현되다 보니 요리왕 비룡이라는 완전히 새로이 만들어 붙인 제목 자체가 내용을 잘 요약하여 보여주고 있어요.

고독한 미식가
원제는 孤独のグルメ(코도쿠노 구루메)이고, 이것을 직역하면 "고독의 미식" 이 되어요. 그러나 이 직역은 내용에서는 충실하지만 실질적인 어감이나 공감도 면에서는 확실히 부족한 면이 있어요. 이것을,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마츠시게 유타카 담당)의 극중 식사를 중심으로 해석하여 보다 한국어답게 다듬은 결과가 고독한 미식가. 간단하게 만들었으면서도 잘 된 번역명이죠. 참고로 독일어판 제목은 Der Gourmet - Von der Kunst allein zu genießen으로, 예술적으로 혼자 즐기는 미식가라는 의미인데, 이건 일단 너무 길다 보니, 간단명료하면서도 함의가 잘 드러나는 한국어판 제목과 여러모로 대조되고 있어요.

식극의 소마
한국명은 일본어 원제인 食戟のソーマ(쇼쿠게키노 소마) 그대로를 직역하여 쓰고 있지만, 이것의 영어명은 Food Wars!: Shokugeki no Soma. 그래서 여기서는 영어명에 주목해 볼까 싶네요. 식극은 음식[食]을 상대를 꿰뚫어 죽이는 데에 쓰는 창[戟]으로 격돌시킨다는 의미의 한자로 구성된 작중 신조어로, 작중 배경인 토오츠키 학원 내의 요리배틀을 말해요. 이 요리배틀은 요리실력의 우열만을 판가름하는 게 아니라 사전에 상대에게 요구할 대가의 조율이 합의되어야 성립되어요. 게다가 많은 경우 식극에서 지게 되면 교내 자치조직이 해체당하거나, 심지어 퇴학을 당하는 경우까지 있을 정도로 대가가 무겁다 보니, 요리로 이루어지는 총력전의 연속이라는 게 보이죠. 그것을 선명히 나타내는 두 단어가 바로 Food Wars.

이 게임 폐인이 사는 법!
원제는 ネト充のススメ(네토쥬노 스스메), 직역하자면 "인터넷에 충실한 자에의 권유" 정도 되겠죠. 사실 이 제목의 기원은 케이오대학의 설립자이자 1만엔권 지폐도안으로도 유명한 학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 저서 학문의 권유(學問ノスヽメ)를 유용한 것이긴 한데, 일본의 근대 출판문화 관련의 배경지식이 필요한 제목이기도 하고 그래서 직역했을 때에 우리나라의 실정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아요. 주인공 모리오카 모리코를 필두로 한 여러 등장인물들의 활동이 인터넷 게임으로 연결되고, 이 계기가 주인공이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인터넷 게임에 다시 손을 댄 것이 되다 보니, 완전히 새롭게 지은 저 한국어 제목이 적합하고 간결해서 좋다고 여겨지고 있어요.


이렇게 초월번역의 사례를 몇 가지 알아보았어요.
다음에는, 이와 반대로 번역없이 원제가 통용되는 사례도 볼까 해요.
마드리갈

Co-founder and administrator of Polyphonic World

6 댓글

마키

2018-04-13 23:51:36

민중의 회초리(트랜스포머 실사영화)

경찰차 주제에 악역으로 나오는 바리케이드는 차체 측면에 로스앤젤레스 시경찰국(LAPD)의 모토인 "To protect and serve: 보호와 봉사"를 악역답게 정 반대 의미로 비튼 "To punish and enslave: 처벌과 지배" 레터링이 쓰여있는데, 국내 극장 자막에서 번역하길 "민중의 회초리". 경찰의 모토를 정 반대 의미로 비틀었다는 원어의 언어유희를 살리면서도 한국의 실정에 알맞게 바꿔놓고 뉘앙스까지 적절하죠.


박물관이 살아있다!

원제는 Night at the Museum, 곧 직역하면 박물관에서의 밤인데, 이쪽은 밤의 박물관에 뭔 일이 생기는지 그리 와닫지 않지만 국내 번안제목은 포스터와 맞물려서 박물관에서 소동이 벌어질거라는걸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뉘앙스가 됐죠.


살생님

원어는 殺せんせー(코로센세), 죽일 수 없다는 의미를 담은 殺せん(코로센)과 선생을 뜻하는 센세(せんせー의 합성어죠. 국내 정발본에서는 생물을 죽인다는 의미의 살생殺生을 붙여서 살생님이라 번역했는데, 원어의 묘한 뉘앙스를 살리면서도 어감도 적절하죠.



마인크래프트 Java 에디션 버전 1.11 이전 도전과제들도 한국어 번역 명칭이 상당히 희한하게 되어 있죠.


  • The Lie: 케이크를 만드는 도전과제. 제목도 내용도 게임 포털 시리즈의 패러디 이다보니 한국어 번역은 좀 더 직설적인 The Cake is a Lie로 번역.
  • Cow Tipper: 가죽을 획득하는 도전과제. 초창기 한국어 번역은 뼈와 살을 분리하세요(...)였다가 도축업자로 수정.
  • Delicious Fish: 물고기를 화로에 굽는 도전과제. 원문은 직역하면 '맛있는 물고기'지만 한국어 번역은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
  • Acquire Hardware: 철을 화로에서 제련하는 도전과제. 원문은 직역하면 '철물 획득' 정도의 뉘앙스이지만 한국어 번역은 최초의 철 -> 철기시대의 서막 -> 철이 철철 넘쳐 같이 좀 더 시적인(?) 느낌으로 번역.
  • Librarian: 책장 제작 도전과제. 원문은 직역하면 '사서'이지만 한국어 번역은 책과 관련되어 있으면서도 사서보다 좀 더 유머러스한 책벌레로 번역.
  • Return to Sender: 가스트의 화염구를 튕겨내서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도전과제. 원문은 직역하면 '보낸 이에게 반송' 정도의 뉘앙스이지만 한국어 번역은 전해지지 않은 러브레터.


마드리갈

2018-04-14 22:57:37

민중의 회초리,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역시 대체할 어휘가 없을 정도의 멋진 초월번역이라 할만해요.

그러고 보니, 글을 쓰면서 암살교실 관련을 왜 전혀 생각하지 못했나 싶었네요. 살생님이라는 그 번역명 또한 암살의 대상이자 선생님인 독특한 캐릭터성이 바로 보여요. 그것을 저 세 글자에 축약한 게 경이로울 따름이예요.

알려주신 점에 깊이 감사드려요.


마인크래프트 각 버전의 한국어 번역도 재미있네요.

뼈와 살을 분리하세요는 조금 많이 나간 감이 있고, 전해지지 않은 러브레터는 뭔가 아련한 애잔함이...

Papillon

2018-04-14 22:35:09

음, 다메가미를 잉여신으로 번역하던 것은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이 아닌 "초차원게임 넵튠" 시리즈가 원조라고 알고 있습니다. 다만, 해당 시리즈가 게임은 굉장히 매니악하고 애니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는지라 이를 보급시킨 건 "이 멋진 세계에 축복을"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만요.

마드리갈

2018-04-14 23:00:38

안녕하세요, Papillon님, 오랜만에 잘 오셨어요!!


그런 사정이 있었던 거군요. 초차원게임 넵튠 애니는 취향과 안 맞아서 아예 1화조차 다 못보고 도중하차한 이후로 완전히 잊고 있어서 아예 다메가미 자체가 나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좋은 정보제공에 깊이 감사드려요.

대왕고래

2018-04-15 00:15:58

암흑패나 어둠의 학생회는 직설적으로 다가와서 더욱 알기 쉬워졌고 그래서 좋은 거 같아요. 잉여신도 정말 기억에 남는 번역이죠. 다메+메가미니까 잉여+여신, 정말 훌륭한 번역 실력이에요.

제가 기억하는 초월번역이라면, 가면라이더 고스트의 변신 벨트의 변신 음성의 운율을 잘 살려서 번역을 해낸 걸 생각할 수 있겠어요. 예를 들자면 "에디슨 다마시"로 변할 때의 음성이 "エレ! ヒラメ! 発明王!(일렉! 번뜩힘! 발명왕!)"으로 보다시피 "キ"로 끝나는 음성이 되게 넣었는데, 국내 더빙판에서는 이것을 직역하기보단 운율이 들어간다는 점을 포인트로 삼아 "일렉트! 오토매! 발명의 대가!"로 번역했더라고요. 확실히 좋은 번역이죠.

그런데 문제점은, 변신 대기음의 번역은 직역으로 "확실히 봐라!"라고 했는데, 이게 아무리 들어도 욕하는 느낌이 든다는 거죠. '실히' 부분이 연결되어서 '시이'처럼 들리기 때문의 문제인데... 직접 읽어보시면 알 거에요;;; 심지어 발음조차도 고의적으로 "히"를 묵음으로 한 거 아닌가 싶은 느낌...

마드리갈

2018-04-15 01:15:50

가면라이더 고스트에서는 국내 더빙판에서 각운을 맞춘 거네요. 센스가 상당히 좋아요.

그런데 변신 대기음의 발음이 잘못하면 오해를 살 수도 있겠네요. 공공장소 등에서는 가동하지 않도록 해야겠어요. 사실 그 이전에 특촬물 관련상품을 공공장소에서 사용하는 행위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대왕고래님 덕분에 또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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