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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산 창작물의 영어제목이 이상한 경우가 꽤 있어요.
영어
네이티브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말 이래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로 영어제목이 엉망인 경우를 목도하면서, 나름대로
개선안을 만들어 봤어요. 업계의 종사자이거나 미디어업계에 영향력을 끼칠만한 인물도 아니고, 게다가 이렇게 개선안을 만들어도 이미
정착된 영어명이 바뀌지는 않아서 무슨 보람이 있을까 싶겠지만, 이 글을 읽어 주시는 분들께 "보다 영어답게 영어를 구사하는 방법"
이 전달된다면 그래도 보람이 아주 없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음을 밝혀 드려야겠어요.
몇 가지 사례를 볼께요.
스포일러가 될 사안도 있으니, 이 점은 각별히 주의해 주세요. 포럼에서는 스포일러 여부에 대한 어떠한 명시적, 묵시적 규제도 없으니까요.
명탐정 코난(名探偵コナン) - Detective Conan
탐정은 Detective, 그래서 일본어 원제의 순서대로 쓴 것 같은데, 이렇게 되어 버리면 "탐정 코난" 이 아니라 "탐지용으로 쓰이는 코난" 같이 읽혀 버리게 되어요. 이것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Conan the Detective 가 맞아요.
울려라 유포니엄(響け! ユーフォニアム) - Sound! Euphonium
원제에서 동사가 저렇게 앞에 나와 있다고 해서 그 문형대로 영역할 이유는 전혀 없어요. 그러니 아예 문형 자체를 재구성하는 편이 좋아요. 동사 Sound는 3형식 문장에도 쓰이고, 따라서 Sound the Euphonium! 쪽이 더욱 자연스럽죠.
실제로
위의 제안을 뒷받침하는 사례도 있어요. 영국의 작곡가 헨리 퍼셀(Henry Purcell, 1659-1695)의 작품 오라 내
예술의 아들들아(Come, ye sons of art away)에 포함된 음악에는 Sound the trumpet, Strike
the viol 등의 제목의 악곡이 있어요.
다이아몬드는 부서지지 않는다(ダイヤモンドは砕けない) - Diamond is unbreakable
죠죠의
기묘한 모험 3부 다이아몬드는 부서지지 않는다는 실제로 잘못된 영어제목으로 문제가 생겼던 사례. 당초에는 Diamond is
not crash로, 명백히 잘못되어서 이후 Diamond is unbreakable로 바뀌었지만, 문법적으로는 맞더라도
사견으로는 이것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아요. 주인공 히가시카타 죠스케가 모리오쵸를 평화롭게 지키고 싶은 마음이 반영되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네요. Diamond keeps unbroken이라면.
어서오세요 실력지상주의교실에(ようこそ実力至上主義の教室へ) - Classroom of the Elite
상당히 모호한 번역인데, 일본어 원문을 전혀 살리고 있지 않아요.
원문을 살리자면 Welcome to the Elitist Classroom. 좋은 교육과정을 이수하여 양성된 엘리트와 실력이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사고방식인 엘리트주의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고,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은 엘리트주의에 입각한 스쿨 카스트의 정당화니까요.
1학년
D반의 사실상의 핵심인물이자 작중 최강의 책사인 아야노코지 키요타카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저 번역의 타당성이 그나마 좀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작품의 성격을 명확히 보여주지는 않아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소재는 스쿨 카스트 패권전쟁이다 보니, 아야노코지
키요타카 및 그가 상대하는 여러 인물들과의 지략배틀을 잘 나타낸다면 Who rules this school caste here? 가 더욱 좋은 번역일 거예요.
요괴아파트의 우아한 일상(妖怪アパートの幽雅な日常) - Elegant Yokai Apartment Life
영어권 화자에게 Yokai라는 말을 보여줘 봤자 대체 무슨 의미가 통할까요? 이런 번역은 무의미해요.
요괴가 사는 주거공간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어휘는 haunted. 그러니 이게 좋아요. Haunted life here goes on elegantly.
이세계식당(異世界食堂) - Restaurant to Another World
상당히 성의없이 지어진 영어제목에 한숨이 나오게 되는 사례로, 이세계식당을 거론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작중에서 이세계인들이 양식당 네코야에 접근하는 계기는, 이세계의 공간 이곳저곳에 7일마다 한번씩 열리는 문. 이것을 제대로 살리려면 이렇게 번역하는 게 좋아요. A Restaurant, next to, a different World로 지을 경우, 양식당 네코야와 이세계는 상술한 문을 매개체로 이어진다는 게 보일 거예요. 그것을 보이는 장치가 next to 어구.
오타쿠에게 사랑은 어려워(ヲタクに恋は難しい) - Wotakoi: Love is Hard for Otaku
오타쿠(お宅)라는
어휘는 원래 2인칭 대명사였는데, 이것에 서브컬쳐 컨텐츠 소비자로도 의미가 확대되었어요. 그 점을 노려서 지어진 제목이다 보니
"오타쿠에게 사랑은 어려워" 라는 제목은 단지 오타쿠라서 연애가 힘들거라는 말에만 한정되지 않고, "네까짓게 무슨 연애야" 하는
조소의 의미도 담고 있어요. 그러니 그걸 반영하려면 Your love goes hard, Otaku!가 더 적합해요.
스노하라장의 관리인씨(すのはら荘の管理人さん) - Miss Caretaker of Sunohara-sou
제목을
충실히 영역한 것처럼 보이지만, 일단 Sunohara-sou가 뭔지를 알 수 없으니 의미있는 번역으로 볼 수는 없어요. 영어로
되었으면 영어권 화자를 위해 만들어져야 하는 건 상식인데, 이 영어제목은 알 수 없는 어휘가 등장한 데에서 바로 실격.
제목에서 지칭되는 인물은 하숙집 스노하라장의 관리인인 스노하라 아야카. 그녀는 결혼에 관심이 있는 미혼여성으로 스노하라장의 관리인으로 일하고 있는 스노하라 성씨의 인물이니까 이렇게 해야죠. Miss Sunohara the Landlady.
5등분의 신부(五等分の花嫁) - The Quintessential Quintuplets
일본어 원제를 보면 뭔가 신부를 토막살인하는 건가 싶은 고어물같고, 영어제목은 단어 자체에서 거부감이 드네요. 제가 편집장이라면 작가에게 제목이 뭐 이따위냐고 한소리 했을 듯한...
이것의 내용은, 어느 우등생 남자아이가 동급생이지만 낙제생인 5자매의 과외교사를 맡게 되면서 벌어지는 러브코미디로, 주인공이 5자매 중 누군가와 결혼하고 그렇게 결혼한 5자매 중 1명이 과거를 회상한다는 내용인데...
그렇다면 이게 더욱 간결하고 읽기 쉽죠. Who, in the quintuplets, married him? 이렇게. 이 작품이 과연 누가 신부가 되었는지를 맞추도록 독자에게 묻고 있다 보니 이 편이 보다 전달력이 좋겠어요.
우리는 공부를 못해(ぼくたちは勉強ができない) - We Never Learn
일본어 원제도 영어제목도 최악인 이것을 보면서, 진짜 작가에게 가서 따져보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 작품.
주인공이, 한 분야에서는 천재이지만 다른 분야가 백지인 여학생들을 지도하면서 그들의 대입수험을 성공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그 과정에서 연애관계로도 발전한다는 내용의 학원러브코미디인데...
사실 저런 제목은 주제의식 자체를 부정하는 최악의 날림제목이죠.
차라리,
勉強(べんきょう, 벤쿄)라는 말을 비튼 신조어인 勉弱(べんじゃく, 벤쟈쿠)를 제목에 쓰는 게 나을 뻔 했어요. 벤쿄는 한자
자체를 보면 열심히 노력해서 강해진다는 의미가 떠오르는데, 벤쟈쿠는 열심히 하는데 지망분야에는 약하다는 함의를 담을 수 있거든요.
그러니 아예 일본어 원제를 彼女たちの勉弱, 영어제목을 A university hopes what she despairs로 하는게 더 좋았어요. 지망하는 대학은 그녀가 취약한 분야라는 의미.
이렇게 일본산 창작물의 영어제목 문제를 짚어봤어요.
고급자료를 제외하면 대체로 영어표현에 문제가 일상화된 이런 상태가 과거의 추억이 되기를 아울러 바라고 있기도 해요.Co-founder and administrator of Polyphonic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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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앨매리
2018-09-17 10:30:45
마드리갈
2018-09-17 15:00:32
일본이 서구문명을 받아들인 역사가 긴데다 번역 또한 상당히 발달했는데, 이 성과가 그렇게 대중화되지 못한 것 같이 보여요. 특히 애니, 게임 등의 분야에서는 특히 그게 두드러져 보이죠.
게다가, 일본의 언어문화에서 돌려 말하기, 수식어 동원 등이 발달해 있긴 한데 이게 오히려 언어생활에서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욱 두드러지죠. 간결하게 핵심을 말하기보다는 길게 나오는 수식어에 집착하다 보니 정작 뒤에 나오는 말이 뭔지 헤매거나 문장의 호응이 맞지 않다든지 하는 문제는 이 경우 피할 수가 없어요. 자국어로도 이런 문제가 발생하기 쉬운데 외국어를 그 방식으로 쓰려니 제대로 써질 리가 없는 거예요.
일본의 영어강사이자 저술가인 나카야마 유키코(中山裕木子)는 저서 영어는 3단어로(원제 会話もメ?ルも英語は3語で伝わります)에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어요. 일본인이 구사하는 영어가 전달력이 안 좋은 것은 결론이 바로 나오지 않는 점, 구사도중에 걸리는 큰 부하로 인해 중간에 틀릴 위험이 높은 점, 그리고 단어가 많아져서 커뮤니케이션이 늦어지는 점의 세 가지로 요약가능하다고(일본어 원서만 읽었기에 국내번역판의 구체적인 표현은 다를 수 있는 점을 밝혀 둘께요).
다이아몬드는 부서지지 않는다의 첫 영어제목은 정말 뭐하는 건가 싶었어요.
이렇게까지 따지면 좀 뭐하지만, 바뀐 영어제목에 쓰인 unbreakable조차도 문제가 있어요. 사실 다이아몬드도 부서지죠. 다이아몬드가 상징하는 영원함, 그리고 주인공 히가시카타 죠스케가 모리오쵸를 지키고 어머니와 함께 평온한 생활을 추구하려는 의지를 반영하려면 결국 영어제목은 Diamond keeps unbroken이 적합하겠죠.
대왕고래
2018-09-21 23:06:09
문법은 맞추면서 제목을 짓는 게 좋겠죠, 무엇보다 요즘은 내수용으로 끝나는 시대가 아니니까요.
외부에서 봐도 이상하지 않게 양식을 맞추는 것은 그렇기에 중요하고, 이렇게 틀린 영어를 제대로 잡는 것도 좋은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마드리갈
2018-09-21 23:24:15
제목이라는 건 참 중요하죠. 짧은 언어 속에 주제의식을 담아서 흥미와 구매력을 창출시키는 것이니...
일본의 문학사를 보면, 글자수 5/7/5의 하이쿠, 5/7/5/7/7의 와카처럼 다른 나라의 문학에 비해 특히 짧은 시문학이 유행해서 간결하고 함축적이고 아름다운 글쓰기에 능하면 능했지 결코 허술하지는 않을텐데, 그리고, 번역문학의 전통도 결코 만만찮은데, 요즘 나오는 창작물의 영어제목은 조잡한 것들이 난립하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어요.
제 취지를 이해해 주시는 점에 진심으로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