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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에 국어교과서에서 읽었던 전통예술 담론은 접했던 그때도 확실히 이상하게 여겨졌으며, 이미 4반세기가 넘은 시점인 지금도 선명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안입니다. 이번에는 이 이야기를 간단히 해 보고 싶었습니다.
껄끄럽게 여긴 논점은 다음의 2가지.
첫째는, 공연자와 향유자가 분리된 서양예술보다도 공연자와 향유자가 일체화된 한국전통예술이 보다 바람직하다.
둘째는, 직접적이고 기계적이고 인위적인 서양음악에 비해 한국음악은 간접적이고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장점이 있다.
첫째 논점은 일단 그런 이분법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데에서 반박됩니다.
사실 공연자와 향유자가 일체화된 예술은 한국전통예술만의 고유한 특징이 아니며, 이것은 여러 문화권의 초창기에 많이 나타나는 원시종합예술(Ballad Dance)에도 얼마든지 있을 뿐더러 현대예술에서도 서양예술에서 제4의 벽 개념이 이미 정의되어서 이에 따라 각종 담론이 파생됩니다. 또한, 한국예술 중에서도 공연자와 향유자가 일체화된 것은 마당놀이 같은 것으로 한정되어 있으며 종묘제례악 같은 것은 향유자가 공연자들 사이에 섞여서 공연을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첫째 논점은 반례가 많아서 바로 논파됩니다.
둘째 논점은 서양음악도 한국음악도 모르는 자의 헛소리에 불과합니다.
당시 국어교과서에 나온 표현을 좀 요약하자면 서양의 현악기는 직접적이고 기계적이고 인위적인 특성상 금속제 현을 걸게 되었고 소리가 날카롭고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데에 반해 한국의 현악기는 간접적이고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특성에 기인하여 식물성 섬유로 만든 현을 걸게 되었고 그래서 바로 앞에서 들어도 마치 옆방에서 들리는 것처럼 은은하고 간접적으로 들린다고 했습니다만...
서양의 현악기가 반드시 금속제 현을 쓰는 것도 아니고 한국의 전통현악기도 금속제 현을 쓰는 게 있습니다. 바로크 시대 및 그 이전의 비올족 현악기나 근현대의 바이올린족 현악기는 동물의 창자를 가공하여 만든 현을 쓰기도 하지만 이것이 비싸고 내구성이 낮다 보니 대체품으로서 대량생산에 적합하여 가격이 낮으면서 내구성이 좋은 금속제 현이 많이 쓰인다는 사정을 알면 저런 말은 못합니다. 게다가 국악기 중에 양금(洋琴)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러면 양금은 국악기가 아닌 것일까요?
그리고 다시 첫번째 논점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공연자와 향유자가 분리되어 있다고 해서 그게 나쁘다는 증거는 없고 반드시 양자가 일체화되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만일 첫번째 관점에 동의할 경우 독서는 무의미해집니다. 책의 저자와 독자가 직접 만날 수도 없고 고전의 경우는 아예 독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저자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보니 고전을 읽는 가치가 부정됩니다. 고전을 읽거나, 좋은 음악에 귀를 기울이거나, 멋진 그림을 보면서 조용히 상상하는 게 왜 부정당해야 할까요? 또한, 예술을 접하면서 매번 공연에 참여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둘째 논점과 결합할 경우 더욱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러분의 주위에서 국악기를 즐겨 연주하는 지인이나 국악기를 가르치는 학원이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많이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서양악기를 즐겨 연주하는 지인이나 서양악기를 가르치는 학원이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많이 알고 있습니까?
후자의 쪽이 아무래도 더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의 두 논점들을 결합하면 역으로 한국전통예술의 열등성이 증명되어 버립니다. 서양악기를 즐겨 연주하는 사람이나 교습소 등이 더 많다면 공연자와 향유자가 일체화되어 있는 확률은 서양악기 쪽이 높아지고 따라서 서양음악 쪽이 더욱 바람직한 예술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어, 한국전통예술을 옹호하려 했던 두 논점이 결과적으로 한국전통예술을 모욕합니다. 이런 결론을 수용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국어교과서 속 전통예술 담론을 간단히 비판해 봤습니다.
전통예술을 재조명하는 건 좋습니다만, 그게 무리수에 기반하고 서양예술에의 폄하를 전제하고 있다면 큰 실수가 됨은 물론 이렇게 역효과까지 나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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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대왕고래
2019-01-20 15:47:15
교과서의 두 주장 모두 "무조건 우리 게 최고"라는 사상이 보이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옳지 않은데...
어느 게 더 낫다는 식으로 주장을 해서는 안 될 일이죠. 당장 논리적으로 쉽게 반박되고, 논리적으로 분석했을 때 스스로를 해치는 허술한 주장을, 단순히 우리 게 좋다고 주장하고 싶어서 끌고 온다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SiteOwner
2019-01-21 19:07:26
건전하지 못한 논리의 끝이 참담하기 그지없지요. 그래서 예의 주장은 비판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논리 중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하다가 갑자기 한국어의 우수성으로 비약하는 것. 사실 한글의 창제원리나 낮은 학습난이도 등은 우수한 게 맞습니다. 그런데 문자체계인 한글과 언어체계인 한국어를 혼동하는 국내환경에서, 갑자기 한국어의 우수성 운운하는 말이 나와 버리니 이게 곤란합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는 별 비판이 없으니 문제입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애국심은 무뢰한에게 최후의 보루라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