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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 2시. 미린 고등학교의 정문은 하교하는 학생들로 북적인다.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하는 이야기는 제각각 다르지만, 그들의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하나같이 밝다.
그런데, 여기 근심어린 얼굴을 하고 교문을 나서는 학생이 한 명 있다. 그는 바로 다름 아닌 세훈이다. 마치 망망대해 속의 무인도처럼, 세훈은 그렇게 외롭게 교문을 나서고 있다. 아무리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고등학생처럼 보여도 항상 옆에 친구가 적어도 한두 명씩 있었는데, 오늘 세훈 옆에는 아무도 없다. 하다못해 주리마저도 오늘은 세훈 곁에 보이지 않는다. 세훈은 대로변으로 걸어 나가서, 그대로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마침 선선하게 바람이 불고 있다. 화단의 꽃들과 나뭇잎들이 바람에 흩날린다. 그러나 나무들마저도 마치 세훈에게서 고개를 돌리는 듯 보인다.
지하철역에 들어가서, 개찰구를 지나고, 승강장에 선다. 잠시 후 승강장에 열차가 들어서고, 세훈은 그 열차에 탄다. 빈자리에 앉아, 세훈은 AI폰을 꺼내 메시지를 본다.
‘오후 2시까지, 지하철 아체토역 2번 출구에서 100m 서쪽에 있는 폐건물로 올 것. 다른 사람들은 같이 오지 말 것이며 너 혼자 와야 함.’
다름 아닌, 수요일에 전화 온 그 선배의 메시지다. 세훈의 눈동자는 파르르 떨지만, 이내 세훈은 주먹을 한 번 꼭 쥔다. 어차피 그저께 그 선배의 전화를 받고 나서부터 각오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체토라면... 세훈의 머릿속 퍼즐이 또 하나 맞춰진다. 이윽고 열차는 미린역에 도착한다. 열차에서 내린 세훈은, 7호선 ‘동부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환승통로로 향한다.
미린역에서 환승한 세훈은 잠시 AI폰을 본다. 어제 받은 피에르 모랭이라는 사람은 자신과 관련된 사람과 연락을 주고받을 때는 일반적인 메신저가 아닌, ‘키타사톡’이라는 이름의 보안기능이 강화된 메신저 프로그램을 사용하라는 당부를 주었다. 키타사톡의 연락처로 메시지를 남겼더니, 모랭이라는 사람은 답장을 통해 VP재단 동료 몇 명의 연락처를 추가로 주었다. 세훈은 그 사람들 중 ‘빅터 로스’라는 사람의 계정으로 조금 전에 그 선배가 보낸 메시지의 원문을 보내 준다. 그로부터 약 1분 후. 그 사람으로부터 잘 확인했다는 메시지가 온다.
미린역에서 다섯 정거장. 세훈은 아체토역 2번 출구로 나온다. 아체토역은 지하철 동부선과 ‘아체토 트램’의 환승역으로, 주변은 주거지 위주의 지역으로 동구의 주요 번화가 역할을 하고 있다. 저번에 앤드루의 병문안을 위해 갔던 메트로폴리스 병원 역시 이 역에서 멀지 않다. 동쪽 방향이 메트로폴리스 병원이 있는 방향으로, 주로 아파트나 오피스텔이 보인다. 그 반대쪽인 서쪽은 그렇게 높은 빌딩은 없어 보인다. 즉, 단독주택이나 빌라 위주의 지역이다. 그대로 그 선배가 알려 준 대로 서쪽 방향으로 걷는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 세훈과 눈을 마주치는 사람은 없다. 세훈은 개의치 않고 그대로 걷는다. 어느덧, 선배가 말한 100m 지점에 다다른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폐건물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세훈은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대로변 안쪽에 18층 높이의, 짓다 만 건물 하나가 보인다. 아체토역 동쪽에서는 그냥 평범한 정도의 건물이지만 서쪽에서는 꽤 두드러져 보인다. 17층까지는 그래도 외벽도 덮어 놨지만 18층은 뼈대가 드러나 보인다. 그나마 덮어 놓은 외벽도 색이 다 벗겨졌다. 어쩌다 저렇게 버려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왜 그 선배가 저 건물로 불렀는지 알 것 같다. 세훈은 곧장 폐건물로 향한다. 그 폐건물로 가는 길 역시 대부분이 3~4층 정도의 오래된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폐건물까지 가는 길에 세훈은 또 몇 명의 지나가는 사람들을 마주친다. 아까 대로변에서 본 사람들과 다른 점은, 여기서 만난 사람들은 세훈을 한 번씩 흘겨보고 지나간다는 점이다. 차라리 무관심이 나을 정도로, 그들의 눈빛은 별로 반갑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적대적인 눈빛은 ‘서곡’일 뿐.
문제의 폐건물에 다다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건물 앞에는 몇 명의 남녀 학생들이 대기하고 있다. 모두 동급생들로, 익숙한 느낌이 있는 얼굴들이다. 자주 본 얼굴들은 아닐지라도, 지나다니면서 한두 번씩 마주치는 얼굴들이다. 거기에다가 항상 세훈과 마주칠 때면 기분 나쁜 웃음을 짓는 건 덤이다. 세훈은 일단 그 폐건물 앞에 멈춰 선다.
“너.”
그 학생들 중 한 명이 세훈을 보고 말한다. 평소에도 세훈을 보면 비웃는 웃음을 흘리던, 그 여학생 2명 중 한 명이다.
“시간이 없는데 여기서 얼쩡거리지 마.”
세훈은 그 여학생을 살짝 보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선배님은 건물 안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빨리 들어가.”
세훈은 애써 그 동급생들의 얼굴을 피하며 폐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폐건물 안에 들어서자, 으스스한 느낌이 피부에서부터 차차 스며들기 시작한다. 오들오들 떨리는 이 느낌. 단순히 추운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거의 없다시피 한 조명과 그 틈새로 비쳐오는 햇빛, 그리고 퀴퀴한 짓다 만 건물의 냄새, 메스꺼운 공사장의 공기까지. 이 모든 것들이 으스스한 느낌을 더욱 북돋우고 있다.
세훈은 우선 1층을 둘러본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로비가 나오는데, 여기저기 공사 자재가 널브러져 있고, 엘리베이터가 있어야 할 곳에는 텅 빈 공간만 덩그러니 있다. 이 방 저 방에 들어가 본다. 하지만 그 선배의 모습은커녕, 사람의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로비로 나와서, 계단을 올라간다. 폐건물 특유의 냄새가 더 진하게 난다. 2층에 다다른다. 그 특유의 폐건물 냄새는 여전하다. 2층에 올라가서도, 1층에서 했던 것처럼 주변을 둘러본다. 역시나, 그 선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3층으로 올라가 본다. 3층도 마찬가지. 4층으로 올라가 본다. 폐건물 냄새가 한층 더 진하게 난다. 세훈은 4층을 두러본다. 4층은 다른 층들과는 달리, 방들이 좁고 많다. 또 다른 층들과는 달리 창문 하나 없다. 로비 쪽을 빼놓고서는. 한층 더 으스스한 기분이 든다. 그 방들도 하나하나 들어가 본다. 역시나, 그 선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5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계단으로 향하려는 그 때...
“어딜 그렇게 헤매나?”
세훈의 등 뒤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금방 떠오르지는 않는다.
“누구신지...”
세훈은 뒤를 돌아보며 볼멘소리로 말한다. 검은 후드티를 입고 덩치가 큰 한 남자가 서 있다. 등 뒤에 서 있는 사람은...?
“인마.”
그 사람이 다시 입을 연다. 세훈보다 머리 반 정도는 더 커 보이는 키, 잘 정돈된 머리, 그리고 싸늘한 눈빛. 이제 알았다. 그저께 통화한, 그 목소리... 그 목소리다!
“선배를 봤으면 인사를 해야 할 거 아니야.”
“선배? 선배...라고요?”
세훈은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태연히 말한다.
“정말 우리 학교 선배님, 맞으신가요?”
“우리 학교가 아니면 너를 이렇게 알아볼 리가 없잖아, 엉?”
그 선배는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 건 기본적으로 머리에 넣고 다녀야 할 것 아니야!”
한껏 목소리를 높여 놓고 제풀에 지쳤는지, 그 선배는 숨을 몰아쉬고는 다시 말을 이어 간다.
“똑똑히 기억해 둬라. 한 번만 말한다. 내 이름은 김예준이다. 미린 고등학교 2학년이지. 할아버지는 메트로폴리스 의료재단 이사장이시고, 아버지 역시 의사를 하고 계시지. 나 역시 의사가 될 것이고.”
잠깐... 메트로폴리스 의료재단? 바로 떠오르는 건 메트로폴리스 병원, 그것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왜 비숍이나 앤드루가 미린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거기 입원했는지 알 것 같다. 세훈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하나 맞춰진다.
“네 녀석이 아는지 모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지... 빈센트와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친구였지. 서로 의기투합이 잘 되었고, 그래서 부족한 건 서로 도와 가면서 지냈지. 자연히 클라인이 보살펴 주는 후배들은 내 말도 잘 듣게 되고 말이야.”
세훈은 자세는 바로 했으나, 머리는 삐딱하게 하고 듣고 있다. 예준은 계속 말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며칠 전에 빈센트가 내게 특별히 부탁을 하더군. 조세훈이라는 1학년생이 있는데, 설득을 해서든 힘을 동원해서든 어떻게든 자기 앞에 무릎을 꿇게 해 달라는 거야. 왜 하필 너를 콕 집어 말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둘도 없는 친구의 부탁이니 들어 주지 않을 수가 없더군. 그래서 후배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가 직접 너를 만나 보겠다고 했지.”
“하, 그랬군요.”
“말 똑바로 해라. 내가 시간이 남아 돌아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니니까. 잘 생각해라. 선택의 기회는 한 번뿐이다. 안 그러면 네 앞길이 어떻게 될 건지는 네가 더 잘 알 거다.”
예준의 말에 세훈은 잠시 생각하는 척한다. 애써 머리를 굴려 본다. 이 선배도 분명 초능력자일 가능성이 높은데... 어떻게 대처하지? 어떻게 해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지?
1분이 지나도 대답이 없자 예준은 버럭 화를 내며 소리 높여 말한다.
“뭘 꾸물거리는 거야?”
“선배, 설마, 제가 그렇게 순순히 무릎을 꿇을 거라고 생각했나요?”
세훈의 그 말을 듣자마자 예준의 이마에 즉각적으로 혈관이 드러나고 눈은 벌겋게 충혈된다.
“이 자식이! 선배의 말이 말같지 않지?”
예준의 목소리는 또 아까처럼 올라간다. 세훈은 미동도 없다.
“좋아. 너의 그 건방진 생각, 내가 직접 고쳐 주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조금이나마 웃음기가 남아 있던 예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진다. 동시에, 세훈은 예준에게서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낀다. 썩 이상한 느낌이지만, 이미 겪어 본 적 있는 느낌이다. 세훈은 그 느낌이 어디서 온 건지를 즉시 알아차린다. 클라인을 처음 만났을 때, 바로 그 때다! 에너지가 발산되고 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상한 느낌만큼은 확실히 클라인을 만났을 때의 것과 유사하다.
“내 능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지.”
예준이 말함과 동시에, 그 느낌은 더 강해진다. 예준은 오른손에 주먹을 쥐고, 목에 일부러 더욱 힘을 주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다!”
그 말과 동시에, 예준은 옆에 있는 벽을 오른손으로 강하게 내려친다.
쾅!
둔탁하게 울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 자리에는 희뿌연 먼지가 피어오른다. 뿌옇게 그곳을 덮은 먼지는 천장으로 올라가 세훈의 시야를 덮어 버릴 정도로 피어오른다. 세훈은 그 먼지가 피어오르는 자리를 유심히 본다. 잠시 후, 먼지가 걷히고, 예준이 내려친 벽이 드러난다. 믿지 못할 광경이 펼쳐져 있다. 세훈은 눈을 한 번 비비고 눈을 깜박인 다음 그곳을 다시 본다. 벽에 구멍이 나 있다! 그것도 둥그런 형태로!
세훈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대해 나름대로 추리를 해 본다. 먼저 이것이 단순한 ‘블러핑’에 불과한 경우... 이건 아닌 것 같다. 뭔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확실히 가능성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민하고 있군. 안 그래?”
예준이 비웃는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너는 분명히 이렇게 생각하겠지. 지금 내가 손으로 이 벽을 쳐서 부순 게, 단순히 속임수일 거라고 말이지. 예를 들자면, 일부러 사전에 벽을 약하게 만들어 놓은 다음, 네가 여기에 왔을 때, 딱 적당히 여기를 쳐서 구멍을 내 보인 거라고 말이지. 안 그래?”
“......”
“하지만 말이지!”
예준이 이렇게 말할 때, 예준은 어느새 왼손에 주먹을 쥐고 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예준은 주먹을 쥔 왼손으로 벽을 힘껏 때린다.
쾅!
또 한 번 둔탁한 굉음이 울린다. 그리고 또 먼지가 걷히자, 이번에도, 역시나, 벽에 구멍이 뚫려 있다. 그것도 더 크게!
“확실히 깨달았나? 바로 이게 내 능력이다. 내 신체를 일시적으로 단단하게 만들어서, 여기 있는 콘크리트 벽뿐만이 아니라, 바위, 강철, 심지어 강철보다 더 단단한 금속이라도, 그 무엇도 부술 수 있는, 그것이 내 능력이다.”
“......”
세훈은 아무 말도 없이 예준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다.
“왜 말이 없나? 겁먹었나 보군.”
“......”
“표정을 보니, 확실히 겁먹었는데?”
예준은 확신에 가득 찬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좋아, 좋아. 그런데, 입으로 직접 말을 해야 한다고? ‘앞으로 절대 덤비지 않겠습니다’ 하고 말이지.”
“착각 말라고.”
세훈이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연다.
“뭐?”
황당했는지, 예준의 얼굴은 순식간에 일그러진다. 세훈은 표정의 변화 없이 가만히 예준을 지켜보기만 한다. 예준은 머리를 두어 번 갸우뚱하더니,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 웃음을 가득 지으며 말한다.
“하하하, 설마,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아니면, 네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닌가? 당연히 나는 전자였으면 좋겠는데...”
“아니.”
“뭐... 뭐라고?”
“아니라고. 그쪽은 똑바로 들었어.”
예준의 얼굴이 다시 한 번 일그러진다. 조금 전보다 더욱 심하게, 그리고 얼굴색까지 붉어진다.
“이... 이게 어디 뚫린 입이라고 건방지게!”
예준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다. 세훈은 그런 예준을 보고도 태연한 척하며 한 마디 한다.
“해 보라고. 그 쪽은 나를 절대 때릴 수 없으니까.”
이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세훈은 속으로부터 밀려오는 초조함 때문에 심장이 빨리 뛰고, 숨도 불규칙해지고 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헤쳐 나갈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세훈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쉰다.
“말은 그렇게 해도, 목소리는 떨고 있군. 안 그래?”
예준은 애써 태연한 척하고 목에 더욱 힘을 준다.
“허세 그만 부리고! 얼른 무릎을 꿇으란 말이다! 애써 태연한 척 할수록! 네 고등학교 생활은 더욱 비참해질 거란 말이다!”
“허... 그렇게 말씀하시면 무릎을 잘-도 꿇겠습니다.”
“말 똑바로 해라!”
이 말과 동시에 예준은 세훈을 향해 주먹을 날린다. 세훈은 재빨리 몸을 피해 뒤쪽으로 구른다.
“이 자식이! 피해?”
예준은 마치 분화를 앞둔 화산처럼 마구 화를 내며 소리 지른다. 얼굴은 마치 용암처럼 빨갛게 되어 있다.
“후... 그렇다고 진짜로 패려고 할 줄은 몰랐군.”
세훈이 조그맣게 말한다. 교복 여기저기에는 건물 바닥의 시멘트 가루가 묻어 있고, 머리에도 듬성듬성 묻어 있다.
“너 이 자식, ‘진짜로 패려고 할 줄은 몰랐다’고?”
예준은 세훈이 소곤거리듯 하는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더욱 꼭지가 돌아서는, 세훈을 금방이라도 밟아 버릴 듯 마구 발을 구르고, 주먹 쥔 손을 허공으로 휘두른다.
“너 이 자식, 내 진면목을 아직 보지를 못해서 그렇구나.”
“뭐... 뭐라고?”
“중학교 이래로 지금껏, 나한테 대항하려는 얼빠진 녀석들은, 모두 내가 능력만 보여 줬다 하면 알아서 무릎을 꿇었지.”
“하... 그거야, 겉으로만 무릎을 꿇고 속으로는 아닐 가능성이 높지. 안 그래?”
“그런데, 너는 그런 멍청이들과는 급이 다르군. 너한테 비추어 보면, 그 멍청이들은 그야말로 ‘현자’지. 내가 볼 때, 너는 머리에 뇌 대신에 똥이 들어차 있다. 무슨 말인지 아나?”
“모르겠는데.”
“그래서, 네놈이 그 멍청이들과는 급이 다르다는 거다! 한 번 말하면 좀 알아들으란 말이다!”
예준은 또다시 발을 구르고, 주먹 쥔 손을 허공으로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미안, 나는 머리가 하도 나빠서, 들어 줄 생각이 없거든.”
세훈의 빈정거리는 대답에 예준은 머릿속 화산이 폭발하고야 만다.
“너는 오늘 여기서 못 나갈 줄 알아라! 네 머릿속에 있는 그 똥들을 다 치우기 전까지는 말이다!”
“치워 보시지. 그쪽의 빗자루가 먼저 부러지겠지만.”
“너어어어어어어어!”
예준은 또다시 세훈을 향해 주먹을 휘두른다. 세훈은 다시 재빨리 피해서 벽 뒤로 숨는다. 크게, 그러나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위험했다... 이번에는 하마터면 제대로 맞을 뻔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큰소리는 쳤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지 빠져나간단 말인가! 방금까지 예준에게 한 말들 역시 절반쯤은 허세가 섞인 말들이었다. 그냥 있는 대로 내뱉어 본 말도 있었다는 것이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쾅!
별안간, 세훈의 등 뒤에서 굉음이 울린다. 그리고 그 순간, 세훈은 벽 앞쪽으로 나가떨어진다. 털썩! 하고 그대로 세훈은 바닥에 널브러진다.?
“으... 으...”
쓰러진 세훈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절로 나온다. 머리가 띵 하고 울린다. 온몸이 쑤신다. 세훈의 뒤에서, 누군가 저벅저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 소리는 세훈의 왼쪽으로 향한 얼굴 바로 앞에서 멈춘다.
“이 자식이...”
세훈은 목소리가 들린 쪽을 올려다본다. 예준의 신발이, 세훈의 눈 바로 앞에 있다.
“그러니까 네놈이 뇌 대신에 똥만 들어찼다는 말이다. 말로 해도 도무지 들어먹지를 못하니까 이렇게 힘을 보여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예준은 발을 들어 바닥에 쿵쿵 하는 소리가 나도록 두어 번 구른다. 세훈은 순간적으로 판단이 선다. 예준의 능력은... 아마도... 손으로만 발동이 가능한 듯하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판단이 서자, 세훈은 힘을 짜내 재빨리 일어선다. 일어서고 나서도, 아까의 충격 때문인지 다리가 조금씩 후들거린다. 여전히 예준은 양손에 주먹을 쥐고 금방이라도 휘두를 듯 들어 보이고 있다. 저 손, 저 손만 피하면 된다!
“후...”
“아직도 말을 할 기운이 남은 거냐?”
“그럼, 있고말고. 그쪽은 나를 절대로 쓰러트릴 수 없을 거라는 것만 말해 두지.”
“이 자시이이익!”
또 한 번, 예준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온다. 세훈은 또다시 재빨리 피한다. 예준의 주먹을 피해서 숨을 몰아쉴 틈도 없이, 또다시 주먹이 날아온다. 그리고 그 속도도 점점 빨라진다.
“절대 놓치지 않는다!”
예준은 악에 받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세훈은 뒷걸음질치며 계속 피해 보지만, 예준의 주먹은 조금씩 점점 가까워진다. 예준이 어느 정도 가까워졌다고 생각하고 강타를 날리려는 바로 그 때.
“어...? 이 녀석, 어디 갔어?”
예준의 눈앞에 보이는 건 벽과 복도뿐. 그나마도 빛이 들어오지 않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감히... 또 도망갔겠다. 그래 봤자 멀리 못 갔겠지! 눈에 띄는 대로 그 머릿속 청소를 시작해 주겠다!”
한편 그 시간, 폐건물 4층의 한 방. 세훈은 벽을 등지고 서서 숨을 죽이고 가만히 서 있다.
“하... 진짜로 나를 패려고 들 줄은 몰랐는데.”
세훈은 소리를 죽이고 중얼거린다.
“무모한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둘 다겠지 뭐. 그런데 저 선배 같은 집안에서 저런 단순하고 무식한 머리가 나올 수도 있는... 건가?”
세훈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저 조심스럽게 예준이 오지나 않을까 하고 방 출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려 볼 뿐. 벽 저 너머에서 저벅, 저벅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멀어지는 것인가, 가까워져 오는 것인가? 도통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방에서 나가 볼 수도 없다. 나간다는 것은 곧 예준에게 세훈의 위치를 알려 주는 것과 같은 것이 되니까. 초조해진 세훈은 문득 시간이 궁금해 시계를 본다. 시간은 이제 오후 2시 20분. 폐건물에 들어선 지 한 2시간 정도 지난 것 같았는데 아직도 20분 정도밖에 안 지났다. 비슷한 상황이던 비숍과의 싸움 당시에는 이 정도로 시간이 느리게 간 것 같지는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 때는 옆에 친구들도 있었고, 또 그 때는 여기 같은 폐건물이 아닌 학교 건물이라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렇게 시간이 안 간 적은 처음이었다. 클라인과 처음 대면할 때도 이 정도로 시간이 안 가지는 않았는데...
오랫동안 한 자리에서 가만히 있자니, 발이 조금씩 저려 온다. 입도 말라 간다. 가슴도 답답하고, 마치 가뭄에 땅 갈라지듯 속에서부터 쩍쩍 말라 가는 느낌이다. 산 채로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누군가의 심정이 저절로 느껴진다.
생각 같아서는, 소리를 한 번 질러 봐야 이 답답한 느낌이 풀릴 것 같다. 한편으로는, 예준이 지금 어디쯤 있는지 밖에 직접 나가서 알아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예준과의 소리 없는 대치가 계속되는 한, 그런 건 모조리 희망사항일 뿐이다. 세훈은 생각한 끝에, AI폰을 꺼내서 NURI와의 대화를 시도한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너라면 어떻게 할래?
세훈은 이렇게 AI폰에 메시지를 남긴다. 그러고 나서 약 30초 후. 메시지 하나가 뜬다. 발신자는 NURI.
언제까지 그렇게 숨어만 있을 거예요?
NURI의 대답은 다분히 직설적이다. 세훈의 가슴을 마구 후벼팔 정도로. 세훈은 그 메시지를 보고는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한숨을 크게 내쉬고 싶지만, 소리를 낼 수 없으니 가만히 입술만 깨문다. 세훈은 NURI의 메시지에 이어서 적는다. 세훈의 얼굴이며 손 등, 여기저기에 핏대가 서 있다.
너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거야?
세훈은 입술을 어찌나 깨물었던지, 입 안에서 짠맛이 절로 날 정도다. 메시지를 보내 놓고서도, 화가 풀리지 않을 정도다. NURI가 지금껏 이런 대답을 한 적은 없었는데...
물론이죠. 지금 어떤 소리도 내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NURI의 메시지를 받은 세훈은 조금은 화를 누그러뜨리고, 다시 메시지를 보낸다. 하지만 손에 선 핏대는 여전히 가라앉지 않는다.
너라면 지금 내 상황에서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해?
세훈은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도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다. 소리를 낼 수 없으니 입술을 더욱 세게 깨문다. 입 안에 짠맛이 더 진하게 난다. NURI의 메시지가 도착한 건 세훈이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약 30초 후.
움직이세요. 움직여야 해요.
움직이라고? 지금 이 상황에? 세훈은 당장이라도 AI폰을 던져 버리고 싶은 기분이다. 거기에 NURI에게 느끼는 배신감은 덤이다. 잠시 후, NURI의 메시지가 다시 도착한다.
세훈 님이 무슨 생각 하시는지 알 것 같아요. 하지만 제 말을 들으셔야 해요. 안 그러면 영원히 지고 말아요.
세훈은 NURI의 메시지를 보고는 말없이 가만히 서 있다. 그렇다고 메시지를 쓰려고 하지도 않는다. 뭔가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다. 머릿속이 얼얼하고, 띵 하고 울리는, 그런 느낌이다. 잠시 후, 세훈은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적는다.
고마워, NURI. 이제 나는 숨지 않을 거야.
세훈은 메시지를 적고는 AI폰을 주머니에 넣는다. 몸 여기저기에 묻은 먼지를 털고, 머리 모양도 한 번 고친 다음, 벽에 기댔던 등을 벽에서 떼고 허리도 똑바로 한다. 그리고 발을 한 걸음 떼기 시작하려는 바로 그 때...
쾅!
갑자기 엄청난 굉음이 들려오고, 세훈의 몸은 그대로 방 한쪽으로 나가떨어진다.
“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세훈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팔을 바닥에 짚는다. 그러나 좀처럼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 안 그래도 몸 여기저기가 쑤셔 오는데, 몸을 일으켜 세우려니까 그 쑤신 곳들이 더 쑤셔 온다.
“이 녀석! 잘도 숨어 있었군!”
지금 들린 목소리... 분명, 예준의 목소리다!
“용케도 내 눈을 피해서 숨어 있었겠다...”
예준이 서 있는 자리, 그곳에는, 아까 전보다 훨씬 더 큰 구멍이 벽에 나 있다. 벽이 부서지다 못해, 천장과 바닥에까지 금이 가 있을 정도다. 주먹으로 부순 게, 저 정도로 컸던가? 아까는 저 정도 크기까지는 아니었을 텐데...
“너는 분명 내 능력을 손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
“으... 으...”
예준은 일어나지 못하는 세훈에게 다가와, 목에 더욱 힘을 주고 말한다.
“바로 그게! 네 머릿속에 똥만 차 있다는 증거다! 이 정도로 멍청할 줄이야! 손이 아니어도! 발, 몸통, 신체의 어느 부위로든 내 능력을 발동할 수 있단 말이다!”
“......”
“왜 그러나? 어디 내 말에 반박할 데가 있으면 해 봐라!”
“맞아...”
세훈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한다.
“나는... 선배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을 정도로 멍청한 놈이지. 그런데... 댁의 능력에 관한 건 또 별개의 문제야.”
“뭐... 뭐라고?”
“다시 한 번 말해... 줄까? 나는 말이지... 지독할 정도로 멍청해서 말이야... 댁의 말은 하나도 안 들어 줄 거거든.”
“뭐... 뭐라고? 다시 한 번 지껄여 봐라!”
예준의 목소리가 다시 올라가기 시작한다. 얼굴도 다시 붉어지기 시작한다. 아까보다 훨씬 더 붉어진 얼굴은, 대폭발을 일으키는 화산과도 같다. 세훈은 금방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듯 이글거리는 그의 표정에 잠시 가슴이 철렁거린다. 하지만, 침을 한 번 삼키고는 또박또박 말한다.
“댁의 말은 하나도 안 들어 줄 거라고. 그리고 그쪽의 능력이 얼마나 강하든, 그쪽은 절대로, 절대로! 날 쓰러트릴 수 없어.”
“이... 이... 이이이이이 자식이이이이이이!”
예준은 마침내 대폭발을 일으키고야 만다.
“네 놈이, 네까짓 게... 감히이이이이이!”
세훈은 그 사이 몸을 완전히 일으키고는, 예준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이제 빈센트가 내게 뭐라고 했는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오늘 너는 내 손에 쓰러진다!”
“어디... 쓰러트릴 수 있으면 쓰러트려 보시지.”
세훈은 예준을 도발하고는, 예준이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정거리 밖으로 벗어난다. 과연, 예준은 마치 눈에 모래가 들어가 보이지 않는 맹수처럼 주먹을 마구 휘둘러 대며 세훈을 쫓아온다. 벽 뒤로 숨고, 또 피하고, 어느 정도를 그렇게 쫓아왔을까.
“이 자시이이이익!”
세훈의 눈앞으로 예준의 주먹이 스쳐 지나간다. 마치 태풍이 직접 스쳐 지나가는 것같은 느낌이다. 주먹이 그저 눈앞을 스쳐 지나가기만 했는데! 위험하다. 정말로 위험하다! 어떻게든 예준을 막다른 곳으로 유도한 다음, 끝을 봐야 한다! 또다시 주먹이 날아온다. 세훈은 이번에는 고개를 숙여 피한다. 그리고 또 한 번 날아오는 주먹. 세훈은 땅바닥으로 미끄러져 사정거리에서 벗어난다.
“정말 눈에 뵈는 게 없군...”
그 방을 빠져나온 세훈은 중얼거리며 다른 방을 찾아 복도를 달린다. 계단을 타고, 몇 개 층을 올라간다. 그것도 쉴 틈도 없이. 평소 같았으면 한 개 층 뛰어 올라가도 숨이 금방 찼을 텐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잘만 올라가진다. 하지만... 한 9층쯤 올라갔을까. 잠깐 숨을 돌리니 가슴이 탁 막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쉴 틈도 없다. 뒤로는 예준이 세훈을 계속 쫓아오고 있다. 세훈이 살펴보니, 9층 로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방이 하나 있다. 세훈은 방으로 들어가기 전, 예준을 향해 한 번 돌아보고는, 예준이 보라는 듯, 최대한 과장된 동작으로 방으로 뛰어 들어가 벽 뒤쪽으로 숨는다.
쾅!
또 한 번 벽이 무너지고, 예준이 그 무너진 곳으로 들어온다. 하지만 세훈은 사정거리 밖으로 재빨리 피하고 나서, 방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 다음, 예준을 향해 손을 까딱거리며 도발한다.
“어디 또 한 번 그렇게 해 보시지.”
“이게에에에에에에에에에!”
예준은 금방이라도 다 부수어 버릴 기세로 소리를 한 번 내지르더니, 방 안을 한 번 둘러보고는, ‘후’ 하고 숨을 한 번 내쉬고는, 갑자기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한다.
“흐흐흐하하하하... 하하하하...”
“왜 그렇게 웃는 거야?”
“잘 봐라! 네 퇴로는 하나뿐이고, 그마저도 그곳은 내가 막고 있지! 그리고... 이렇게 하면!”
예준은 방 한쪽으로 가더니 발을 들어 힘껏 바닥을 밟는다.
쿵!
바닥에 먼지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바닥에 큰 구멍 하나가 나 있다. 세훈은 아까 예준의 설명을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지만, 어쨌든 무서운 능력인 건 맞기 때문에 잔뜩 긴장한다. 입에 침을 삼키려고 하는 순간.
“한 번 더!”
또 갑자기 쾅! 하는 소리가 들리고, 바닥에 먼지가 피어오른다. 그 구멍의 반대편에, 또 하나의 구멍이 나 있다. 이번 것은, 세훈에게서 불과 5m도 안 떨어져 있다. 방문으로 이어진 건 1m도 안 되는 좁은 폭의 통로가 있을 뿐이고, 문 앞에는 예준이 막고 있다. 주위를 둘러본다. 창문 없는 방은 이제 나갈 곳조차 막힌 상태다. 거기에다, 바닥 밑은 바로 2층으로 연결되는 구조다!
“너는 아까 내가 좋게 말했을 때 빌었어야 했지...”
예준은 두 손에 주먹을 꽉 쥐고 세훈에게 다가오며 말한다.
“하지만 너는 그 기회를 그 똥만 든 머리 때문에 다 날려먹었다. 그렇지 않나?”
“......”
“이제 네게 주어진 기회는 더 이상 없다. 너는 이제 끝이다!”
세훈은 아무 말도 않고, 자기 뒤의 벽에 딱 등을 밀착해서 기대선다.
“훗,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 주먹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자, 받아라!”
예준은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해서 세훈에게 달려든다. 오른손 주먹을 있는 대로 꽉 쥐어서 손등에 드러난 핏줄이 선명히 보일 정도이고, 그의 살기가 가득한 눈은 세훈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고, 이를 드러낸 입은 마치 맹수가 먹이를 향해 달려들 떄의 입 같다. 하지만 세훈은 그걸 보고도 피할 생각을 하지 않는 듯,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다. 예준은, 그 기세 그대로, 세훈을 향해 온 힘을 담아 주먹을 내지른다. 자신의 승리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은 채로. 그대로 예준의 주먹이 세훈에게 향하는 바로 그 때...
“어... 어?”
세훈은, 예준의 주먹이 막 닿으려는 그 순간, 본능적으로 몸을 왼쪽으로 피한다. 그것도 눈 깜짝할 새에... 어떻게 피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본능적으로 피했을 뿐...
“아... 이... 이런!”
하지만 예준은 이제 멈출 수 없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와도 같다! 이대로라면 예준의 주먹은 벽만을 뚫게 된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예준이 온 몸을 내던지다시피 해서 세훈에게 달려들었으므로...
“아... 안돼...”
하지만 이미 늦었다! 예준의 주먹은 그대로 벽에 닿고, 벽은 예준의 주먹에 닿자마자 주먹이 닿은 곳을 중심으로 갈라지면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안돼... 멈춰야 해... 멈춰야... 멈춰야...”
예준은 이제 세훈을 손보는 건 뒷전이고,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나만 생각한다. 본능적으로, 그는 주먹을 펴고 세훈 쪽으로 최대한 손을 뻗어 보려고 한다. 그러나 손은 세훈은 물론, 벽에도 닿지 않고, 허공만 휘젓는다. 머리에, 아니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머릿속은 점점 노랗게 물들어 간다.
“이... 이봐... 나... 나 좀...”
세훈은 예준이 낸 구멍 앞에 선다. 예준은 점점 떨어져 가고 있다. 불과 30초 전만 해도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승리를 확신하며 주먹을 내지르던 예준의 모습은 사라지고, 마치 날개 잃은 천사처럼 추락하는, 넋을 놓아 버린 얼굴의 예준만이 보일 뿐이다.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이보쇼.”
세훈은 중심을 잃고 점점 추락해 가는 예준을 보며 말한다.
“나는 아주 멍청하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머리 좋은 그쪽이 능력을 쓰든 뭘 어떻게 하든 알아서 하라고!”
“아... 안돼... 안돼...”
예준은 어떻게든 손을 뻗어 보지만 당연히 세훈의 발에도, 하다못해 건물 외벽에도, 그 어디에도 닿지 않는다. 예준의 눈에서 세훈이 점점 멀어져 간다. 세훈은 무심한 얼굴로 떨어져 가는 예준을 한 번 본 다음, 건물 안으로 몸을 돌린다.
쿵!
땅이 울리는 소리, 꽤 둔탁한 소리다. 밖은 굳이 보고 싶지 않다. 그대로 세훈은 벽에 등을 기대고 쭈그려 앉는다.
푸우-
예준과 대면할 때, 아니 폐건물에 들어서기 전부터 지금까지 쭉 참아 왔던, 아니 예준의 기세에 짓눌려 제대로 쉬지도 못한 숨이 마치 둑 터지듯 한 번에 터져 나온다. 아까부터 쭉 굳어 있던 얼굴도 비로소 조금이나마 펴진다. 하지만 세훈의 얼굴은 완전히 펴지지는 않는다.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걱정은, 오늘 거둔 승리의 기쁨을 눌러 버릴 만큼 크다. 이겼다는 기쁨보다도,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대한 막막함이 밀려온다. 오늘의 승부는 이렇게 끝났지만, 사실 오늘의 승부가 어떻게 되었든, 클라인의 패거리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내일은 어제보다 더욱더 거세게 세훈을 압박해 올 것은 자명하다.?
고개를 숙여 입은 옷을 본다. 여기저기 먼지가 묻은 것은 물론이고, 군데군데 긁히고 찢어진 곳까지 있다. 산 지 한 달도 안 된 교복인데, 벌써 이렇게 여기저기 흠이 나다니... 그렇게 격렬하게 싸운 것 같지는 않은데, 하고 세훈은 생각한다.
어찌됐건 간에, 세훈은 AI폰을 꺼내 키타사톡을 켠다. 빅터 로스의 계정에 연결해서, 메시지를 보낸다. 로스는 금방 가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이걸로 일단 뒤처리는 됐다. VP재단에서 알아서 다 해 줄 테니.?
AI폰을 주머니에 넣고, 세훈은 조심스럽게 걸어서 방을 나선다. 양쪽으로 난 구멍을 다시 본다. 바로 아래는 2층. 보는 것만으로도 까마득하다. 그리고 방을 나설 때, 방문 옆으로 난 큰 구멍과 그 아래 쌓인 벽의 잔해들과 부스러기들이 보인다. 자신과 싸운 예준의 능력이 얼마나 강한지를 다시 한 번 실감한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며, 세훈은 AI시계를 본다. 홀로그램 표시판에 NURI가 할 말이 있다고 나온다.
“NURI, 왜?”
“잘 했어요, 세훈 님.”
“아... 힘든 싸움이었어.”
“앞으로는 더 힘든 싸움이 될 거예요.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해요.”
“휴...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걱정되네.”
세훈의 한 마디는 마치 1시간짜리 말을 다 쏟아놓은 듯하다. 그 정도로 세훈의 머릿속은 심란하다.
“알겠어요, 세훈 님. 간결하면서도 도움이 되는 명쾌한 한 마디를 원하시는군요?”
“너... 매번 생각하지는 거지만 말이야, 어떻게 내 속을 그렇게 잘 아냐.”
“제가 누군데요.”
NURI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한다.
“세훈 님이 처한 상황을 헤쳐 나가는 데에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이 있지만, 아까 제가 말한 것 있죠? 멈추지 마세요. 움직이세요. 그럼 방법은 있어요.”
“고... 고마워.”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어느새 1층이다. AI폰을 꺼내 본다. 시간은 2시 50분을 가리키고 있다. 키타사톡에 메시지 하나가 와 있다는 알림이 있다. 키타사톡을 켜 본다. 로스의 메시지다.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지금부터 뒤처리는 우리에게 맡기고 가십시오. 인사는 안 하셔도 됩니다.
로비를 거쳐서 밖으로 나오니, 들어갈 때 봤던 그 동급생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건물 입구에 검은 트럭 한 대가 세워져 있다. 경찰은 아니다. 그렇다면... 아까 세훈의 연락을 받고 온 VP재단 직원들임이 확실하다. 과연, 검은 방탄복을 입은 사람들 몇 명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세훈은 로스가 한 말대로 그들에게 말로든, 손으로든 일절 인사를 하지 않고 조용히 지나간다. 직원들 역시, 세훈을 돌아보거나 하지 않고 조용히 폐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세훈은 다시 아체토역 쪽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발걸음을 옮기려다 보니, 눈앞의 길바닥이 조금 패어 있다. 아마도 예준이 거기로 떨어진 듯하다. 그런데, 예준은 어디에 있지? 조금 생각해 보니, 그 의문도 저절로 풀린다. 99% 확률로, 아마도 아까 본 그 검은 트럭 안에 있을 것이다. 세훈은 아체토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세훈의 발걸음은 폐건물에서 멀어질수록 점점 자연스럽게 바뀌어 간다. 대로변에 이르자, 세훈은 폐건물 쪽을 돌아본다. AI폰을 본다. 메시지 하나가 들어와 있다.
괜찮아? 혹시 다치거나 그러지는 않은 거야?
주리의 메시지다. 세훈은 곧장 답장을 보낸다.
괜찮아. 지금은.
세훈은 답장을 보내고는 다시 아체토역을 향해 걷는다. 발걸음은 좀 더 가벼워진다. 그러나 완전히 평상시의 발걸음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렇게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한 발걸음을 이끌고, 세훈은 아체토역 출입구로 들어간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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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마드리갈
2019-02-15 10:05:29
여기도 폐건물 관련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군요. 국내산라이츄님의 소설 괴담수사대에서도 폐건물을 배경으로 사건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고, 이전부터 철도폐선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해서 폐건물 관련의 정보에도 관심이 있다 보니 시선이 집중되고 있어요. 정작 폐건물에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지만...
호랑이는 아름다운 가죽을 이유로, 사슴은 아름다운 뿔을 이유로 사냥꾼의 화살에 꿰여 죽는다고 하죠. 세훈을 폐건물로 불러내서 굴복시키려고 했던 예준은 그의 능력을 과신했다보니 그것에 역으로...
이게 같이 생각났어요. 백발백중의 명사수, 그럭저럭 쏘는 총잡이, 그리고 서투른 총잡이가 결투를 하면 의외로 백발백중의 명사수가 가장 먼저 죽는 역설이 많이 생긴다고. 강력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주변에게 위험하다고 인식된다는 의미로도 통하기에 가장 먼저 노려지는 것이고 그 결과는 비극으로 귀결되기 마련이예요.
SiteOwner
2019-02-24 23:28:09
역시 방치된 폐건물은 우범지대...
시대가 달라져도 이것만큼은 여전한 것인가 봅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라는 말도 이렇게 시대를 관통하며 통용되는군요. 작중의 예준이라는 인물과 비슷한 사례를 고등학생 때 봐서 그렇게 느껴지고 있기도 합니다. 잘 생겼고 공부도 운동도 싸움도 잘 한다는 만능소년인 그는 결국 모종의 범죄의 주동자가 되어 유죄판결을 받게 되었고, 3학년 때에 국립대 입학자격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처절히 몰락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