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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 사람은 도서관 밖에 있는 거지?”
“맞다니까...”
세훈과 주리는 도서관 문을 나선다. 세훈이 도서관 밖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머릿속에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 때문에 안 그래도 아팠던 머리는 이제는 정말로 머리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이 아파 온다. 그리고... 그 강도는 점점 더 강해진다.
“아... 멀지 않아. 바로 여기서 10m도 안 되는 것 같아...”
“어느 쪽인데? 지금 여기 기준으로... 오른쪽, 왼쪽? 어디야?”
“아... 오른쪽... 오른쪽이야!”
“오른쪽?”
세훈과 주리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세훈이 발걸음을 옮길수록 그 목소리가 더 선명해지고 머리를 찌르는 듯한 고통도 더 강해진다. 이제는 서 있기도 힘든지, 자꾸 다리가 후들거린다.
“괜찮아?”
“괜찮아... 계속 가! 찾아야만 해!”
“그런데... 여기는 그냥 복도밖에 안 보이는데...”
“좀 더 자세히 찾아봐!”
주리는 주변을 둘러본다. 과연, 오른쪽에 보니 화장실이 보인다. 그 사람이 있을 곳이라고는... 화장실뿐. 화장실로 들어가 본다.
“그런데...”
세훈이 신음 소리를 흘리며 말한다.
“그 사람은... 아마 여자 화장실에 있을 것 같은데...”
“누군지 알 것 같아... 그럼 내가 들어가서 확인해 볼게.”
“알았어. 부탁해.”
주리가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고, 세훈은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서 조용히 숨죽이고 기다린다. 이제 머리의 통증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진다. 도저히 일어설 수 없을 정도다. 벽에 등을 기대 본다. 그래도 버틸 수 없을 정도다. 자연스럽게 바닥에 쪼그려 앉는다. 목소리는 아주 선명해진다.
“저항은 무의미한 짓이야... 부질없는 짓이야... 네가 이렇게 저항해 봤자 네 고통만 더 심해질 뿐이야... 이제 무릎을 꿇으라니까... 어서 무릎을 꿇어!”
“그건 안 되지...”
“빨리... 무릎을 꿇어!”
이제 눈조차 뜨기 힘든 상황. 이 와중에도 세훈은 한 번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입을 연다.
“네가 아무리 나를 괴롭힌다고 해도, 너는 절대 나를 무릎 꿇릴 수 없어...”
이제 머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하고, 벽에 기대 있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다. 어떻게든 힘을 쥐어 짜내서, 세훈은 더욱 힘을 주어 말한다.
“그래, 절대 무릎을 꿇릴 수 없다고... 절대... 절대... 절대. 절대!”
놀라운 건 다음 순간. 세훈의 머릿속을 울려오던 그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서서히, 마치 먹구름이 걷히듯, 서서히 사라져 간다. 먹구름 사이로 다시 햇살이 찾아오는 듯, 세훈의 머릿속도 그렇게 맑아지고, 세훈에게도 다시 힘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이윽고, 머릿속에서 완전히 그 목소리가 사라진다. 초원 위에 홀로 서서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가득 맞는 느낌. 이렇게 상쾌한 기분은 이제껏 느낄 수 없었다. 세훈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온다.
주리는 어떻게 되었으려나... 문득 궁금해진 세훈은 화장실에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나가는 길에 거울을 한 번 본다. 다른 건 몰라도, 머리가 많이 헝클어져 있다. 머리를 만져서 다듬어 본다. 아까 전의 머리 모양으로 되돌려 놓기는 했지만, 어째 미묘하게 다른 것 같기도 하다.
바로 그 때, 옆에서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라고 하는지 자세히 들리지는 않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한 명이 아니다. 두 명이다! 높은 목소리 하나와, 그것보다는 조금 낮은 목소리 하나. 잠시 후, 여자 화장실에서 주리가 나온다. 그리고... 주리의 손에 끌려 나오는 또 한 명의 여학생. 붉은 머리를 두 갈래로 묶은 보라색 눈의 여학생이다. 그 여학생은 주리에게 끌려 나오면서도 세훈을 쏘아본다. 얼굴 한가득, 분하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너...”
“첼시 오쇼네시, 맞지.”
그 여학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감사한 줄 알아. 험한 꼴 안 보고 끝났잖아.”
“거, 참 다행이네.”
첼시는 퉁명스럽게 말한다.
“아까 일은 어떻게 된 거야?”
“......”
첼시는 말이 없다. 아니, 말을 하려 하지 않는다.
“주리야, 어떻게 된 거야?”
“변기 칸 하나에 문을 잠그고 숨어 있더라.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뭔가를 계속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래서 금방 알아봤지. 호스를 하나 들고 와서, 당장 능력을 해제하지 않으면 물을 뿌려 버리겠다고 하니까, 알았다고 하면서 나오더라.”
“아, 아니야! 훨씬 더 심한 말이었어! 막 소리도 지르고, 죽여 버린다고도 하고...”
“주리야, 정말이야?”
세훈은 주리에게 장난스러운 말투로 묻는다. 아까의 고통에 시달리던 건 언제 잊어버렸냐는 듯이.
“아, 아니! 전혀.”
“봐봐! 아니라잖아.”
“......”
“그건 그렇고, 물어 볼 게 하나 있어.”
“뭘 물어 볼 건데?”
“너... 내일 모레 캠핑 가지?”
“마... 맞아. 내일 모레 캠핑 가. 나 캠핑부거든.”
“잠깐... 캠핑부라고?”
첼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네 패거리한테도, 내가 캠핑에 간다는 걸 알렸겠네?”
“맞아, 알렸지.”
세훈은 잠시 말이 없다. 주리는 세훈과 첼시를 번갈아 보고는, 입을 연다.
“세훈아, 이제 어떡하려고?”
“피할 수 없잖아, 어차피...”
세훈은 첼시를 보며, 단호하게 말한다.
“그래서, 네가 좀 나를 도와 줘야겠다.”
“뭐? 하하하...”
첼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한다.
“지금 나보고... 너를 도와 달라고? 참... 어이가 없어서. 나는 빈센트 선배님을 따르고 있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아... 그래?”
세훈은 태연하게 말한다.
“그러면... 거래를 하나 제안하지.”
“거... 거래라니?”
“네가 이중간첩 역할을 좀 해 줘야겠다.”
“이... 이중간첩이라니? 지금 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그랬다가는... 내가 선배님한테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아이고... 그러면 처음부터 클라인 밑에 들어가지를 말았어야지?”
주리가 첼시에게 불쌍하다는 듯 핀잔을 준다.
“아버지는 우주군 장군이시고, 어머니도 음대 교수씩이나 하는데, 네가 이런 걸 하고 있으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겠냐, 응?”
“너... 너 내가 그 선배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하는 이야기야?”
“뭐, 알고말고. 네 신변은 내가 아는 곳에다가 연락해서 잘 보호해 줄 테니까, 그런 건 걱정 말라고.”
“뭐? 그게 말이나 돼? 기껏해야 평범한 학생밖에 안 되는 네가!”
“뭐, 네가 하고 싶으면 하지 않아도 돼.”
세훈은, 전에 예준과 클라인에게 들었던 말투를 그대로 따라하며 말한다.
“그런데, 네가 나를 처치하지 못했으면, 어차피 그 선배한테 찍힌 거잖아? 지금 이건 기회야. 너한테 둘도 없는 기회. 그러니까, 잘 생각해 보라고. 알았지?”
“야... 너, 말 다 한 거야?”
“현명한 판단을 기다릴게!”
이 말을 하며 세훈과 주리는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간다. 첼시는 세훈과 주리의 뒷모습과 반대편 복도를 번갈아 본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첼시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그건 그렇고, 조세훈 저 녀석의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지? 어차피 빈센트 선배님한테 찍혔고, 무릎 꿇거나 아니면 병원에 실려 가거나 둘 중 하나의 운명일 텐데 말이야... 그런 운명에 처한 사람들같이 보이지 않아... 어째서지? 저 자신감은 도대체... 저 당당함은 도대체...”
첼시가 그러든 말든, 세훈과 주리는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이틀 후 금요일. 세훈은 긴장과 경계심으로 하루를 보낸다. 아직 클라인과 그의 패거리, 또 첼시에게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다. 게다가 오늘은 클라인이 말한 일주일이 되기 바로 전날. 캠핑에서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더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다.
오후 3시 반. 세훈과 주리는 학교 근처의 주택가를 조용히 걷고 있다. 금요일 하교길의 즐거움에 가득 찬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몇몇 학생들은 오늘 갈 캠핑 이야기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세훈과 주리도 마찬가지로 오늘 갈 캠핑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들떠 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세훈과 주리의 표정에는 그런 기대감이나 즐거움 같은 건 많이 느껴지지 않는다.
“혹시 메이링 씨하고 앨런 씨한테 이야기는 해 봤어?”
주리에게 질문하는 세훈의 표정은 캠핑 가는 사람의 얼굴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진지하다.
“아... 맞아. 내가 이야기해 보기는 했는데... 오늘 올지 안 올지는 모르겠대. 오늘 저녁에 법정에 나가 볼 일이 있어서 그렇다고 하더라. 대신 만약 무슨 일이 있으면 빅터 로스 씨한테 연락해 달라는 거야. 그리고...”
“그리고?”
“우리 학교 안의 정보원들이 취합한 정보에 따르면, 오늘 메이링 씨가 말한 그 ‘강력한 초능력자’가 올 가능성이 크다더라.”
“하... 정말? 또 피곤하게 되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제발 그 강력한 초능력자가 그쪽 패거리만 아니면 좋겠는데.”
세훈과 주리가 한참 캠핑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바로 그 때.
“어... 거기!”
“세훈이하고 주리 아냐?”
어디서 많이 들은 목소리다. 세훈과 주리가 목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니, 미셸과 디아나가 세훈과 주리 쪽으로 오고 있다.
“그런데... 세훈이 넌 표정이 왜 그렇게 심각해? 캠핑 간다면서?”
“아... 아무것도 아니야.”
“하긴, 왜 그런지 이해는 가.”
미셸이 세훈의 어깨를 손으로 짚으며 말한다.
“나 같으면 이런 상황이었으면 쉽게 무너졌을 텐데, 너를 보면 말이지... 존경심마저 들 때가 있어.
“존경심이라니 너도 참, 하하하...”
세훈은 헛웃음 비슷하게 웃고는, 미셸과 디아나 쪽으로 몸을 돌려 미셸과 디아나를 보고 말한다.
“걱정하지 마. 내게 있는 벽은 내가 뚫고 나가는 거니까.”
“물론 네 말도 맞지만 말이야...”
디아나가 세훈을 보고 씨익 웃으며 말한다.
“한 명보다는 두 명, 두 명보다는 세 명이 벽을 뚫는 게 더 낫지 않겠어?”
“아... 물론 그렇지.”
세훈은 잠시 다른 곳을 보다가 미셸과 디아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너희도 혹시 오늘 캠핑 가?”
“아니. 우리는 안 가.”
“그래... 아쉽게 됐네. 그럼 다음 주에 보자.”
“그래. 잘 다녀와.”
미셸, 디아나와 헤어지고 나서, 세훈과 주리는 다시 앞을 향해 걷는다. 한참 걷다 보니, 이번에는 대로변에 세워져 있는 순찰차 한 대가 보인다. 세훈과 주리가 순찰차 바로 앞으로 오자, 경찰관 한 명이 경찰차에서 내린다. 그 경찰관은 다름 아닌 진언.
“아... 난 또 누군가 했네.”
세훈은 진언을 보고 반갑게 웃으며 인사한다.
“의외로 표정이 밝구나.”
“어... 그건 왜?”
“나는 또, 요즘 네가 그 녀석들한테 시달리고 있다기에, 얼굴에 먹구름이 잔뜩 껴 있는 줄 알았지.”
“아...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왜 걱정을 하지 말라는 거야.”
옆에서 주리가 한 마디 한다.
“진언이 오빠, 세훈이 걱정이라도 좀 많이 해 줘! 같은 걱정도 두 사람이 해 주면 무게가 반으로 줄잖아?”
“그래... 맞아. 내가 나서야 하는 일인데, 힘을 많이 보태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참, 그리고 있지...”
진언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나하고 서언이가 말했던 그 삼촌하고 고모 중에 한 명 있잖아... 오늘 볼 수 있을 거야.”
오늘이라고? 어떻게 그렇게 딱 특정해서 말할 수 있는 걸까? 시간대를 생각해 보면... 그것뿐이다! 그 사람은 오늘 캠핑장에 온다는 말 아닌가!
“저... 정말? 그런데... 형이 어떻게 오늘 우리 학교에서 캠핑을 가고 그런 걸 다 알아?”
“야, 내가 정보를 입수하는 루트가 의외로 많아.”
“아... 그래?”
“참... 너희 빨리 가 봐야 되지 않아? 이것저것 준비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잖아. 나도 순찰 돌아야 하고...”
“그래... 알았어. 나중에 또 봐!”
진언은 멀어져 가는 세훈과 주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경찰차에 다시 올라탄다. 잠시 후, 순찰차는 세훈과 주리의 반대 방향으로 향한다.
세라토시 북부, 아이린구에 있는 아이린산은 1000m 정도 높이의 산으로, 도심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는 장점으로 인해 세라토 시민들의 자연 속의 휴식지로 널리 사랑받는 곳이다. 등산객들이 끊이지 않는 아이린산 정상 및 기타 봉우리들부터 시작해서, 휴양림, 계곡 등이 있고, 오늘 미린 초·중·고등학교의 캠핑 행사가 열릴 아이린산 캠핑장 또한 이곳에 있다.
이런 자연풍광 덕분에 아이린산에는 이런저런 마을이나 시설이 많이 있기도 하다. 우선, 부유층과 고위 관료, 정치인, 예술인 등의 저택과 별장이 많이 있는 부촌 ‘아이린타운’이 있고, 또한 아이린산 밑에는 세라토 공과대학을 중심으로 하여, 수백 개의 민간 연구소와 스타트업 기업들이 모여 있는 ‘아이린 연구단지’가 있으며, VP재단 본부도 여기에 있다. 그리고 아이린산 기슭에 세워진 천문대 또한 나름 유명한 곳이다.
금요일 저녁, 아이린산 캠핑장은 캠핑 행사에 온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다. 한때 캠핑부원들이 이반 저반 돌아다니며 인원을 충원할 정도로 인원이 미달되었지만, 캠핑장 텐트들의 불빛은 언제 그렇게 인원이 미달되었냐는 듯, 밝게 빛난다.
그 중에서도 캠핑장 한쪽에 있는 텐트. 텐트 옆에는 오토바이 한 대가 주차되어 있고, 핸들 위에는 헬멧 하나가 걸려 있다. 텐트 안에는 네 명이 있는데, 남학생 두 명과 여학생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주리, 한 명은 세훈. 그리고 금발의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여학생과 투블럭 머리에 패딩 조끼를 입은 다른 세 명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남학생 한 명. 이렇게 네 명이 한 텐트 안에 있다. 텐트 안에는 큰 돗자리가 깔려 있고, 조리기구, 간이침대, 간이서랍장, 옷걸이 같은 물건들이 한구석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 중 투블럭 머리의 남학생과 주리는 저녁식사 준비를 하고 있고, 금발의 여학생과 세훈은 잠시 쉬면서 텐트 한쪽에 홀로그램 TV를 켜 놓고 TV에서 나오는 토크쇼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주리는 고기를 썰며 혼잣말하듯 말한다.
“하... 여기 오는 것도 벌써 몇 번째야... 세 번째 와 보네.”
“세 번째라고? 아... 한 번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캠핑해서 같이 온 거고, 또 한 번은... 언제지? 나는 기억이 없는데...”
세훈이 기억을 더듬어 보려는 때, 주리가 얼른 대답한다.
“가족끼리 온 거야, 그건.”
“아... 난 또 뭐라고.”
세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텐트 입구에 서서 텐트 밖의 경치를 둘러본다. 과연, 산 속은 도심과는 전혀 느낌이 다르다. 조명이 없고 별이 빛나는 까만 밤하늘을, 세훈은 참으로 오랜만에 본다. 그리고 산 밑으로는 세라토 시내의 야경이 내려다보인다. 참으로 묘한 밤하늘이 아닐 수 없다.
“야, 너도 한 번 나와서 밖에 좀 봐.”
“아니, 나 지금 저녁식사 준비하고 있는데...”
세훈은 텐트 안에 있는 주리의 팔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온다.
“야, 너도 많이 못 보던 광경이잖아. 이럴 때 좀 많이 봐 둬야지?”
“그래... 확실히 장관이네.”
“그나저나 걱정이야.”
“뭐가?”
“우리 말고도 우리 텐트 안에 있는 두 사람은 일단 그 패거리는 아닌 것 같은데...”
“당연하지. 나타샤하고 하야토 둘 다 그쪽 패거리는 아니잖아?”
“그러면, 다른 텐트에 누가 있는지 알아봐야겠는데... 어떻게 하지...”
세훈은 고민이다. 다른 텐트에 누가 있는지 강제로 열고 들어가서 알아보거나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러자니 그 패거리는 또 따로 모여서 세훈을 노릴 것이 분명하므로 걱정은 되고... 한 가지 변수라면 그저께 세훈을 습격했던 첼시가 세훈의 요청에 따라 줄지 여부인데...
“응? 세훈아, 저기 저 사람...”
“왜?”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잖아?”
“누구... 아.”
세훈과 주리의 눈에는 체크무늬의 셔츠에 갈색 조끼를 입은 백발의 노신사가 서 있는 모습이 들어온다. 그 노신사는, 마치 세훈과 주리를 전부터 알던 사람인 것처럼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 세...”
세훈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네려 하자, 그 노신사가 바로 인사한다.
“아, 조세훈 군이로군. 먼저 인사부터 하지. 나는 VP재단의 선임 연구원, 스티븐 사이먼 엘더 박사일세. 만나서 반갑네.”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저를... 아세요?”
세훈은 엘더 박사가 마치 세훈을 오래 알던 사람처럼 대하고 인사하는 것, 그리고 보자마자 자신의 이름을 바로 알고 말한 것에 적잖이 당황한다.
“분명 처음 봤을 텐데...”
“물론 자네를 직접 만나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아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지. 메이링 변호사와 에반스 사무장한테서 이야기는 들었네. 전에부터 만나고 싶어 했는데, 오늘 뜻밖에도 이렇게 만나니 참 반갑군 그래.”
“아... 그렇군요...”
세훈은 엘더 박사가 자신의 사정에 대해 잘 안다니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은근히 걱정되기도 한다.
“저... 그런데...”
이번에는 주리가 묻는다.
“여기는 혹시 어떻게 오셨나요? 혹시... 알고 오신 건가요?”
“하하하, 아닐세. 오늘은 금요일이잖나. 마침 주말이고 하니까 일이 좀 일찍 끝나서, 산책하다가 잠깐 길을 잘못 들었을 뿐이네.”
“응? 그러면... 연구실이 여기서 멀지 않군요!”
“아, 그렇기는 하지. VP재단 본부도 연구단지 안에 있기는 한데, 서로 거리는 좀 떨어져 있네.”
엘더 박사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미소를 짓는 듯, 근심스러운 듯, 묘한 표정을 짓는다. 세훈은 옆에서 엘더 박사를 조용히 본다. 그 표정은 어딘가 조금 무거워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굉장히 어색해 보인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는 저 기묘한 표정...
잠시 후, 엘더 박사는 어깨를 몇 번 돌리고, 목도 몇 번 돌리고는, 세훈과 주리를 보고 말한다.
“아... 시간이 됐네. 나는 이만 가 봐야겠군.”
엘더 박사의 얼굴은, 방금 전의 그 기묘한 표정은 사라지고. 다시 아까 세훈, 주리와 만날 때의 그 얼굴로 돌아와 있다.
“그럼, 언제 또 한 번 보겠네. 잘들 놀게.”
“아... 네... 조심히 돌아가세요.”
세훈과 주리는 어색하게 인사를 한다. 엘더 박사는 손을 한 번 더 흔들고는, 그대로 앞으로 걸어서 캠핑장을 떠난다.
“하... 엘더 박사님을 이런 데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세훈은 엘더 박사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자, 크게 숨을 내뱉으며 말한다.
“그건 그렇고... 이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산책을 올 일이 있나?”
“에이, 낮에 산 좀 타다가 내려오는 길이겠지.”
주리는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요즘 산에 올라가 보면 저런 나이 드신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
“뭐... 그럴 수도 있겠네.”
세훈은 주머니 속에서 뭔가 울리는 것을 느낀다.
“아... 뭐지? 전화가 오는 것 같은데...”
세훈은 침을 한 번 삼키고는, AI폰을 꺼내 전화를 받아 본다.
“아... 여보세요.”
“선배님? 저 하야토예요. 류젠리츠인 하야토.”
아... 다행이다. 클라인의 패거리로부터 온 전화가 아니다... 세훈은 안도감에 자기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내쉰다.
“여보세요? 선배님?”
“아... 그래. 무슨 일인데?”
“지금 두 사람 다 빨리 오세요. 나타샤 선배님이 찾아요.”
“나타샤가 우리를 왜 찾는데.”
“저녁식사 준비하다 말고 어디 가냐고... 빨리 오세요. 빨리.”
“알았어. 금방 갈게.”
세훈은 전화를 끊고, 그 길로 텐트로 돌아간다. 텐트를 보니 텐트 앞에는 간이 테이블이 하나 놓여 있고, 거기에 저녁식사가 차려져 있다. 나타샤가 뾰로통한 얼굴로 테이블 앞에 서서 세훈과 주리를 맞이하고, 하야토는 세훈과 주리를 어색하게 멀뚱거리며 바라보고 있다.
“너희, 어디 갔다 온 거야?”
나타샤가 볼멘 소리로 말한다.
“아... 근처에 좀.”
“연애하고 오는 길이야?”
“아... 아니야!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
“알았어... 식사 준비는 너희 없는 사이에 다 끝났으니까, 먹자고.”
나타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씨익 미소를 지으며 세훈과 주리가 앉을 의자를 빼 준다.
“고... 고마워.”
세훈과 주리는 테이블에 앉는다. 테이블에 차려진 저녁 식사는 돼지고기를 넣은 야채볶음밥. 벌써부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과 풍미가 세훈과 주리의 오감을 사로잡는다. 먹기도 전에, 벌써부터 입 안에는 군침이 돌고, 혀는 저 앞에 있는 음식들을 하나라도 먼저 입에 넣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고 입 안에서 움직인다.
볶음밥을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어 본다. 입 안에 볶음밥이 들어가자,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느낌이 온 몸에 전해진다. 이렇게 맛있을 수가! 거기다가 직접 해 먹으니, 그 맛은 돈을 주고도 사 먹을 수 없는 맛이리라. 그 달콤하고도 담백한 맛은, 모든 걱정과 고민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줄 정도다.
주리가 밥을 먹다가 TV를 보니, 한참 화장품 광고가 나오고 있다. 화장품 광고 다음은 오디션 광고. 약 1분여 동안 그렇게 광고만 나온다.
“아... 뭐야, 광고 하잖아. 딴 데 좀 틀어 보자.”
주리는 TV 채널을 돌려 본다.
“...오늘의 간추린 뉴스입니다. 먼저 경제 소식입니다. 이지스 마이닝은 2분기 산하 제철소 및 공장들의 생산 계획과 시설 증설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특히 이번 발표회는 고토 노리코 회장이 직접 진행해 화제가 되었습니다. 한편 이지스 마이닝의 오늘 발표는 고토 회장의 남편인 독고우진 의원에게도 관심이 쏠리고 있으나, 독고 의원은 본인의 의정활동과는 무관하다며 선을 그었습니다. RZ그룹 류젠리츠인 미키토 회장은 오늘 RZ그룹 160주년 기업 비전 선포식을 열었습니다. 류젠리츠인 미키토 회장이 직접 주관한 이번 행사는 류젠리츠인 켄지 전임 회장으로부터의 계승 작업에 방점을 찍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날 행사에서는...”
“휴...”
이번에는 하야토가 한숨을 쉬며 말한다.
“이런 데 와서까지 우리 집안 이야기는 듣기 좀 그런데...”
“너희 집안 이야기라고?”
주리가 TV 채널을 고르며 말한다.
“너네 아버지인가 할아버지가... RZ그룹 회장이랬나? 맞지?”
“아니오. 지금 회장은 저희 형인데요.”
“어? 형이라고? 정말이야? 나이차가 그렇게 심하게는 안 날 텐데...?”
“이복형제죠. 저는 나이 터울이 엄청난 늦둥이고요. 제 손자뻘인데 저하고 나이가 비슷한 사람도 있는데요. 뭐 그래도 제 아래에 동생이 한 명 있어서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어... 그래? 동생은 몇 살인데?”
“아, 오늘 왔으니까, 보면 알 거예요.”
주리는 하야토의 말에 애써 태연한 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놀란다. 누가 봐도 할아버지와 손자뻘 정도 되어 보이는데, 형제라고? 참... 재벌들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라고 주리는 혼자 생각한다.
어느새 그릇 안에 가득했던 밥은 절반 정도 비워져 간다. 세훈이 문득 TV를 보니, 주리는 아직도 TV 채널을 돌리고 있다.
“너 아직도 못 정했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줘 봐, 내가 고를 테니까.”
세훈은 주리에게서 리모컨을 뺏어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린다. 잠시 후.
“요즘 하는 다큐멘터리가 재미있는 것 같은데, 다큐멘터리나 보자.”
“아... 알았어.”
세훈은 채널을 그대로 다큐멘터리 채널에 고정한다. 제목은 ‘권력의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니 암녹색 피부에 마치 거북과도 같아 보이는 두상을 한 외계 종족들이 화려한 의복을 갖춰 입은 지도자를 향해 절을 올리는 영상이 나온다.
“...살테이로족의 부족들은 많게는 수십억, 적게는 수백 명에 이르는 인원으로 구성됩니다. 이들은 모두 반쯤 신격화된 지도자를 모십니다...”
신격화된 지도자라... 역시... ‘살테이로족’은 몇 번을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세훈은 이 생각이 절로 든다.
“저렇게 지내는 것도 참 재미있겠단 말이지...”
“맞아. 거의 신으로 모시다시피 하는 거잖아?”
“너희들 말이야...”
나타샤가 불쑥 말을 꺼낸다.
“왜?”
“황궁에 한 일주일만 있어 볼래?”
“황... 궁?”
“황궁은 왜?”
“저렇게 사는 게 좋아 보이지? 황궁에 일주일만 있으면, 환상은 다 깨져.”
나타샤는 말에 무게를 실어 말한다. 나타샤의 얼굴에도, 그 말의 무게와 같은 무게가 실려 있다.
“황족으로 사는 게 말이야, 겉으로는 화려해 보일지 몰라도,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데. 거기에다가 스트레스는 장난이 아니게 크지. 실제 권력은 없다시피 해도, 품위유지니 뭐니 해서 스트레스 받을 만한 게 많아. 그래서 선대 황제 중에는 못 하겠다고 뛰쳐나온 사람도 있다고. 우리 큰오빠도 그랬고.”
“너... 그래서 캠핑부를 하는 거구나?”
“맞아. 자취방도 학교 근처에 따로 잡았고. 황궁을 나와서 사니까, 이렇게 마음이 놓일 수가 없더라.”
세훈은 나타샤의 얼굴을 옆에서 조용히 바라본다. 지금 이곳에 있는 나타샤의 모습을 보니, 부럽기까지 하다. 나타샤가 황족이라서, 아니면 부자라서 느끼는 부러움이 아니다. 그 표정이며 행동, 말투가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다. 그런 자유함은, 세훈에게서는 어느새 저 멀리 떠나 있다. 최근 들어서 그걸 더욱 절실하게 느낀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고, 어디서 세훈을 압박해 올지 모르는 그 불안감. 하지만, 그런 세훈을 꽉 잡고 있는 것들로부터, 도망치기는 싫다. 아니 도망칠 수 없다. 세훈은 이미 도망치지 않겠다고 맹세했을 뿐더러, 도망치면 그들에게 영원히 지고 만다는 것을 잘 아니까.?
“응... 뭐지?”
세훈은 뭔가 텐트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한다.?
“이상한데...”
“세훈아, 왜 그래?”
“아... 아니야, 아니야.”
세훈은 주리의 말에 바로 고개를 내젓는다. 잘못 들었겠지... 잘못 들었을 거야. 다시 TV를 본다. 애써서 TV에 집중하려 해 본다. 그런데 또 바로 그 때...
바스락- 슥- 슥-
이번에는 확실히 소리가 들린다! 텐트 안에서다! 뭔지는 몰라도 텐트 안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지금 텐트 안에서 무슨 소리 안 들려?”
“아니... 잘 모르겠는데.”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아... 아니야.”
주리와 나타샤는 못 들은 것 같다. 하야토 역시 아예 소리를 못 들은 듯, TV에만 열중하고 있다. 세훈은 불안감에 신경이 온통 텐트 쪽에만 쏠린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
사그락- 사각-
뭔가 심상치 않다... 위험하다!
“다들 잠깐 다른 텐트에 좀 가 있어 봐.”
“다른 텐트에 가 있으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주리와 나타샤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갑자기 앞뒤 설명도 없이 그렇게 이야기하면 어떻게 하라는 거야?”
“아니, 선배님...”
이번에는 하야토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주리와 나타샤에 맞장구친다.
“텐트에 도대체 뭐가 문제가 있다고요. 아까 전까지 우리는 텐트 안에서 웃고 떠들고 그랬잖아요. 이상한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도, 일단은 이상하니까 들어가지 말아 봐.”
“선배님.”
“아니, 하야토. 지금 나 때문에 그렇다는 게 아니고...”
“텐트 안은 안 이상하다니까요?”
“그래도... 일단은...”
“선배님, 오늘 좀 이상한 것 같아요.”
하야토는 이 말을 하며, 세훈을 한 번 쏘아보고는, 텐트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 바로 다음 순간.
“어...”
하야토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나 부자연스럽게 끊겨 버린다. 순식간에, 마치 촛불이 강풍에 그대로 꺼져 버리듯이. 그렇게 텐트 안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건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텐트 안에서는. 마치 뭔가가 끊기듯, 부자연스럽게. 그렇게 하야토는 일행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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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SiteOwner
2019-03-15 21:15:47
이번 회차에도 주리가 큰 활약을 해 주는군요.
문제의 첼시 오쇼네시의 집안은 아주 굉장하군요. 그런데 고작 하는 일이 집안에 먹칠하는 짓 그 자체...물론 자녀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라지만 그런 처신은 정말 꼴사납기 짝없습니다.
류젠리츠인 하야토의 경우는 현실세계의 일본으로 치면 재벌가 내지는 구화족(?華族) 정도이고 나타샤의 경우는 황족...역시 지위가 높다고 하더라도 여러 고민은 있기 마련이고 그래서 그것도 큰 스트레스로 이어질 것 같습니다.
텐트 안이 뭔가 이상한 사건의 발단이 되어 버렸군요. 불상사로 이어지지 않으면 좋겠습니다만...
마드리갈
2019-03-16 23:16:08
배경이 어딘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친근하게 느껴지네요.
구미의 금오산 근처가 묘사해 주신 아이린산 인근과 꽤 유사하거든요. 구미시내에서 멀지 않고, 캠핑장, 고급주택, 각종 연수원 등이 있다 보니 그 금오산 근처를 상상하면서 이미지를 겹쳐보고 있어요. 가장 최근에 가 본 게 이미 수년 전이라서 요즘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져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학생들의 백그라운드가 참 다양하네요. 그런데 뭔가 안전장치가 부실해 보이네요. 빈센트 클라인의 패거리같은 위험한 조직도 있고, 안전이, 확실하지 않은 타인의 선의에 의존하는 상태...그리고 결국 텐트 안에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으로...잘 수습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따름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