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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과 고증의 경계에 관해서

앨매리, 2019-04-15 17:59:44

조회 수
221

마지막으로 대강당에 글을 쓴 게 작년 11월의 일이군요. 사실 대강당에 글을 여러 번 쓰려고 했었지만, 쓰다가 중간에 막히면 '지금은 내용이 생각 안 나니 나중에 쓰자'면서 미뤄뒀다가 자동저장본을 보고도 '그래서 내가 뭘 쓰려고 했지?'라고 머리 싸매다 결국 포기했던 적이 종종 있었거든요... 허허허.


지금은 잠깐 휴식기에 접어들었습니다만, 근세나 그보다 이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의 팬픽 설정을 구상하거나 특정 시대를 모티브로 한 소설을 구상할 경우 고증과 상상의 비율을 얼마로 맞춰야 할지 고민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사소한 부분도 설정하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서 설정을 구상하다 보면 '이 시대 사람들은 이때 뭘 어떻게 하고 지냈지?' 하는 생각이 들고 그 시대 사람들의 의, 식, 주 및 당시의 언어나 역사적인 사건과 그 시대 사람들의 보편적인 가치관까지 고려해서 설정을 짜는 등 점차 범위가 느는 것을 보면, 설정을 구상하는 건지 아니면 역사를 공부하는 건지 하는 자괴감이 들더군요. 한국에서는 자료가 없어가지고 그 나라의 언어(라고 해봤자 영어 아니면 번역기를 사용한 일본어 뿐입니다만)를 사용해 검색하며 자료를 찾다 보면, '이렇게 열심히 찾아보며 설정 구상할 시간에 공부 안 하고 뭐하니!'하는 자책감도 들어 양심이 매우 찔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특정 시대를 모티브로 했지만, 해당 시대의 대표적인 요소 몇 가지만 따오고 나머지는 상상의 요소나 현대적인 요소를 채워넣으면서 위화감이 들지 않게 잘 묘사하는 사람들을 보면 매우 부럽습니다. 저도 비슷한 방법을 써서 설정을 구상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그걸 보면 어떻게 봐도 옛날에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방영될 때 스태프들의 실수로 크리넥스를 안 치우는 바람에 유명해진 '불멸의 크리넥스' 같은 느낌만 들더라구요.

앨매리

원환과 법희와 기적의 이름으로, 마멘!

8 댓글

마키

2019-04-15 19:07:26

고증을 지키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죠. 아예 고증 면에서 찍소리 안나오게 만들던지, 고증에 적당히 픽션을 섞던지, 아니면 처음부터 고증을 무시하는 것도 방법이죠.


가령 제로의 사역마에서는 구 일본군의 영식함상전투기(제로센)가 등장하는데, 근현대 항공병기, 그리고 제로센의 특장점인 공중선회기동을 십분 살려서 (주인공이 에이스 파일럿 급의 능력치임을 감안하더래도) 용을 상대로 우위를 갖지만 역으로 기본 방어력이 형편없다는 단점 또한 명확시 하죠(본문 내에서 직접 상대가 풍룡이 아니라 화룡이었다면 죽었을 거라고 자평할정도).


걸즈 앤 판처의 경우엔 주행능력과 방어력 등은 스포츠라는 특성을 살려서 의도적으로 무시하되, 전차 자체의 기본적인 카탈로그 스펙이나 실제 고증상의 운용은 상당히 충실하게 묘사되죠.


역으로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경우엔 그 자체는 판타지 오락 영화이지만 대항해시대 뱃사람의 삶을 의외로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고 반지의 제왕은 이미 그 자체가 현대 중세 판타지의 아버지이자 교과서구요.

앨매리

2019-04-17 17:33:01

오호... 예시들 중에서 본 작품은 캐리비안의 해적뿐이지만 그런 방법도 있었군요. 참고가 되었습니다.

마드리갈

2019-04-16 10:40:11

오랜만에 글을 써 주신 점에 감사드려요.

게다가, 이번에 다루어 주신 주제가 상당히 흥미롭다 보니 드리고 싶은 말씀도 많아요.

사실, 어제 쓰려다가 어이없는 실수로 내용이 소실된 불상사가 있다 보니 마음을 추스리고 다시 쓰는 것이지만요.


모범이나 반면교사가 될만한 대표적인 작품을 거명해 볼께요.

첫번째로는 마기. 이것은 "중동 판타지" 로 약칭가능하며, 실제로 원작자가 아라비안 나이트를 많이 참조한 판타지 작품인데, 창작물의 스토리라인과 설정의 균형이 상당히 잘 잡힌 작품이기도 해요.

마기에는 공화주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해요. 사회구성원 전체가 통치자인 동시에 피치자인 공화주의의 원리가. 하지만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는 서양정치사를 본격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어요. 전개된 상황에서 왜 공화주의가 대두되었는가의 당위성이 도출되거든요. 물론 서양정치사를 알면 더 깊이 들어가는 데에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요.

두번째로는 귀멸의 칼날. 사실 어느 시대인지 정확히 알 수 있는 단서는 많지 않아요. 탄지로 집안의 직업이나 사는 곳 등을 보면 전근대사회같고, 토미오카 기유의 복장을 보면 일단 메이지 시대나 그 이후같고, 원작자는 타이쇼 시대라고 밝혔고...하지만 이것보다는 탄지로와 네즈코가 맞이한 험난한 운명과의 싸움에 집중되어 있고, 시대구분이 불명료한 특유의 분위기가 오히려 근대와 전근대가 뒤섞여 혼란스럽고 예측힘든 상황에 개연성을 아주 강하게 부여하고 있어서 여러모로 주목되어요.

세번째로는 니시무라 쿄타로(西村京太郎, 1930년생)의 철도관련 추리소설. 일단 니시무라 쿄타로라는 소설가 자체가 국내에서는 상당히 낯선데다 그의 철도관련 추리소설은 일본의 실재하는 철도시스템을 바탕으로 전개되니까 일단 진입장벽이 상당히 높아요. 교통시스템이 정교하고 시스템 전반 및 여러 방면에 대해서 이해도가 높은 일본을 제외하면 타국에서 인기를 끌만한 요소 면에서는 약점이 없지 않아서 그 점에서는 한계를 보이죠.

네번째로는 마츠모토 세이쵸(松本清張, 1909-1992)의 소설. 일례로 검은 가죽수첩, 지방신문을 사는 여자 등이 있어요. 꽤 오래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시대배경을 바꾸어 가면서 드라마로 리메이크되는 등의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데, 스토리라인 자체는 그대로면서 각 시대판의 개성을 반영할 여지가 주어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죠.


여러 작품을 통해 먼 길을 돌아온 감이 없지 않는데,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거예요.

결국 창작물에 쓰일 설정은 창작물에 맞아야 할 것이 전제되고, 그 비중은 의외로 높지 않은 경우가 많으며, 비중이 높아질 경우 역으로 진입장벽이 높아질 수도 있다는 것.


대략적인 사회상 등을 가늠할 수 있도록 참조가능한 국내자료도 소개해 드릴께요.

우선은 경제사 관련으로. 경제사(김종현 저/경문사 발행), 20세기 경제사(양동휴 저/일조각 발행).

그리고 정치사 관련으로. 정치사상사(앨런 라이언 저/남경태, 이광일 번역/문학동네 발행).

모두 분량이 꽤 되는 책이지만, 이 정도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을 거예요.

앨매리

2019-04-17 17:34:00

먼저 좋은 자료 소개 감사합니다!

예시로 들어주신 작품 중 본 것들은 마기랑 귀멸의 칼날 뿐이지만, 생각해보면 둘 다 고증에는 그리 많은 비중을 할애하지 않는 편이었죠. 너무 고증에 얽매이는 것도 좋은 방향은 아니었군요. 참고가 많이 되었습니다.

SiteOwner

2019-04-18 21:35:50

안녕하십니까, 앨매리님. 다시 와 주셔서 글을 써 주신 데에 깊은 감사를 먼저 드리겠습니다.


고증 문제라는 것은 늘 있는 것인데, 사실 엄밀히 따지면 정밀한 고증도 결국 작품의 창작시점에서 알려진 사항에 충실한 것입니다. 그리고 고증 문제가 적용되는 분야 또한 제한되어 있습니다. 어차피 현실과 다른 역사가 전개되었다는 전제가 주어진 마당에 현실세계의 역사를 대입해 봤자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언제나 전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현재 주어진 상황에 얼마나 정보가 있는가, 그리고 만드는 창작물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의 이 둘을.


위에서 마키님이 좋은 말씀을 해 주셨고 동생이 일본산 창작물 4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했으니 저는 좀 다른 분야에서 말씀드릴까 싶습니다.

클래식 음악에서 정격연주(Authentic Performance)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것 또한 역사고증 문제가 얽혀 있는데,  크게 두 부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철저한 시대고증에 주력하는 입장. 이를테면 1790년대의 음악작품은 1790년대의 악기 실물 또는 그 악기들의 복제품, 연주법, 공연관행 등을 철저히 재현하는 것. 영국의 지휘자 크리스토퍼 호그우드(Christopher Hogwood, 1941-2014)가 이러한 스타일로, 연주단원들이 작품이 쓰여졌던 시대의 복장을 입기까지 합니다.

반대로, 시대고증보다는 음악이 현재의 사람들을 위한 현재의 재현예술인 점에 주목하는 입장. 오스트리아의 지휘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Nikolaus Harnoncourt, 1929-2016)가 이 스타일을 유지합니다. 물론 그가 시대고증을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으며, 정격연주 분야의 권위자인 것도 사실이고 호그우드처럼 집착하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음악 그 자체이고 음악은 재현하는 매 순간이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음악 자체에 집중하여 작곡가의 창작 당시 의도에 접근해 간다는 것이지요. 호그우드 스타일과 아르농쿠르 스타일은 모두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선택은 청중의 몫입니다.


이것들을 비교감상해 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영국의 작곡가 헨리 퍼셀(Henry Purcell, 1659-1695)의 오페라 디도와 에네아스(Dido and Aeneas). 연주시간은 1시간 내외입니다.

첫째 녹음은 1952년판. 이때는 갑자기 음악계에 퍼셀붐이 불었는데 그 이전 시대가 독일 낭만파 지휘자들이 주름잡는 시대이다 보니 바로크 음악을 독일 낭만주의 해석방법으로 연주하고 있습니다.

둘째 녹음은 1984년판. 이 시대는 정격연주 붐이 본격화되던 시대의 녹음입니다. 게다가 독일 낭만파 지휘자들은 모두 과거의 인물이 되었고, 영국 바로크 음악인데 프랑스 바로크 음악의 연주기법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마키

2019-04-20 13:08:14

가령 쥬라기 공원 같은 경우에는 1편에 등장했던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모델이 된 브란카이 종은 영화가 개봉된 몇년 후에 발표된 최신 학설에 따라 기라파티탄이라는 별개의 종으로 재분류되었고 벨로키랍토르는 원작 소설이 집필되던 때만 해도 모델이 된 데이노니쿠스가 현재의 데이노니쿠스 속이 아니라 벨로키랍토르 속에 소속되어 있었기에 그쪽 혈통이라고 만들어진게 학설 변동에 따라 데이노니쿠스가 별개의 속으로 재분류되면서 벨로키랍토르 원종과는 이름만 같은 완전히 별개의 가상종이 되어버렸죠. 골격도 자체가 완전히 별개의 존재가 되어버린 스피노사우루스는 이미 고증오류를 따질 수준이 아니니 논외로 친다 하더라도요.


그러는 반면 꼬리를 땅에 끌며 3족 보행에 가깝게 걸어다니는 것으로 묘사되었던 수각류 공룡(가상 매체의 가장 대표적인 예시로는 고지라.)은 마침 새로운 학설이 등장한 과도기적이었던 시절이라 최신 학설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극중에 등장하는 티라노사우루스는 지금의 수각류 공룡이 취하는 머리와 꼬리를 수평으로 하여 두 다리로 보행하는 모습으로 고증되었죠.


영화의 설정에 크게 관심이 없거나 특히 고생물학자들의 경우엔 올바른 지식을 가르쳐줘야 한다는 점에서 항상 고증을 가지고 문제삼지만, 처음부터 쥬라기 공원 시리즈에 등장하는 공룡들은 유전자 합성 괴물이라는 당위성을 갖고있기 때문에 팬들은 원종하고 좀 다를지언정 크게 상관없어하는 분위기죠.




은혼의 작가는 에도시대 고증이 안맞는다는 팬에게 "에도시대에 외계인은 없었어! 너나 공부해 멍청아!"라고 받아쳤다고...

SiteOwner

2019-04-20 22:37:49

마키님께서 언급해 주신 쥬라기공원의 사례도, 역시 고증이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그리고, 은혼의 작가가 팬에게 받아친 것은 정말 통쾌합니다.

그렇습니다. 에도시대에 외계인이 있었다는 기록 자체가 없었으니 이런 데에서 고증 어쩌고 하는 게 백약무효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도 고증의 상대성이 증명됩니다.

앨매리

2019-04-23 23:14:39

그 시점에서는 맞다고 알려졌지만 나중에 가서 추가적인 유물이나 논문이 발견되어 학계의 정설이 뒤집어지는 일도 종종 있었으니 너무 얽매이기만 하는 것도 좋지는 않겠죠. 좋은 예시와 음악 감사합니다.

은혼 작가가 고증을 따지는 독자에게 한 촌천살인의 한 마디는 두고두고 봐도 명언입니다. 저 문장 보고 낄낄댔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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