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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주가 지난 후, 미린고등학교의 점심시간. 햇살은 따스하게 내리쬐고, 바람은 선선하게 분다. 어느덧, 교정의 화단, 정원, 분수대는 푸른 빛으로 가득 차 있다.
점심시간의 미린고등학교는,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매우 활기차다. 교실 안과 복도 할 것 없이,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자기들끼리 재잘거린다.
1학년 G반 교실. 창가에, 세훈이 서 있다. 세훈은 친구들이 떠드는 소리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듯, 조용히 창가에 기대서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축구나 농구를 하는 모습, 몇 명씩 모여서 웃고 떠드는 모습, 간식거리를 사러 매점에 줄 서 있는 모습... 참 보기 좋다. 세훈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짓는다. 이런 여유가 생긴 게, 도대체 얼마 만인가!
“너 또 왜 그러고 있어.”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목소리는 분명 주리의 목소리.
“설마, 또 너한테 무슨 일이 생겨서 걱정하고 그런 건 아니겠지.”
“에이, 아니라니까.”
세훈은 실실 웃으며 말한다.
“그럼 뭔데.”
“그냥. 밖에 좀 구경하면 안 돼?”
그러고 보니,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어쩌면, 세훈 정도 되는 연령대가 아니라 산전수전 다 겪은 성인일지라도 좀처럼 겪기 힘든 일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긴 터널을 지나온 듯한 경험들이, 지금의 세훈을 있게 해 주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세훈을 강하게 성장시켜 주었다는 건, 동의할 수밖에 없다. 클라인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그 ‘위화감’도, 지금은 세훈 자신의 것이라도 된 것처럼 익숙하다. 거기에다 몸도 약간 가벼워진 것 같다. 느낌이겠지만... 이 모든 게, 두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일어났다는 게 세훈으로서는 놀랍기 그지없다.
“그러고 보니까...”
주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네 옆에만 가면 뭐라고 할까... 내 능력이 좀 세지는 것 같다고나 할까... 아무튼 느낌이 그래.”
“아, 그래? 레아하고 사이도 그러던데. 내가 옆에 가기만 하면, 쇠붙이가 꽉 달라붙어서 떨어지지를 않는다고.”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야, 세훈아.”
누군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린다. 세훈이 뒤를 돌아보니, 미셸과 디아나가 서 있다.
“누가 너 보러 왔는데.”
“교실 뒷문 앞에 있어.”
세훈은 몸을 돌려 교실 뒷문으로 간다.
“아, 왔구나.”
“첼시? 네가 여긴 웬일이야.”
“빈센트 선배가 너 보고 싶다고 해서.”
“아니, 그러면 그 녀석이 직접 오라고 해야지. 안 그래? 몇 주 동안 안 보여서 버릇을 좀 고쳐서 오나 했는데, 버릇을 아직도 못 고쳤네.”
세훈은 첼시를 한심하다는 듯 보며 말한다.
“너는 왜 아직도 그 녀석의 전령이나 하는 거야?”
“아니, 전령이 아니고, 사실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
“무슨 이유? 말해 봐.”
“아! 바로 왔네.”
첼시는 옆으로 비켜선다. 세훈의 눈앞에는, 클라인이 서 있다. 처음 만났을 적에는 키가 세훈의 머리 하나 정도는 더 크게 보였는데, 지금 다시 보니 세훈보다 더 작아 보인다. 분명 실제 키는 더 크기는 하지만. 클라인은, 세훈의 눈을 살살 피하고 있다.
“왜 부른 거야?”
“아... 다른 건 아니고... 그간 많이 힘들었어.”
“힘들었다니? 그게 네가 할 소리냐?”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네게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괴롭힘당하고 했는지 생각해 보면, 네가 겪는 고통은 쌀 한 톨만큼도 되지 않아. 속죄한다고 생각해.”
“아... 아니... 그게 아닌데... 내가 하려는 말은...”
세훈은 더 듣지도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교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 이봐! 잠깐만... 내 이야기 좀...”
클라인은 다급하게 세훈을 불러 보지만, 세훈은 이미 교실 문을 닫아 버린 뒤. 클라인은 큰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자기 교실로 돌아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해는 이제 서서히 하늘 저편으로 내려가고, 햇빛은 점점 금빛을 띤다. 길거리는 하교하는 학생들로 활기가 가득하다. 세훈, 주리, 미셸, 디아나 네 명은 교문을 나와, 나란히 주택가를 걷고 있다.
“아까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세훈이 입을 연다.
“클라인 그 녀석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3주 동안 안 나온 거지? 크게 다치거나 한 것도 아니고, 탤리도 저번 주부터 목발 짚고 걸어 다니는데 말이야.”
“글쎄. 무슨 일이 있었나?”
“그러게. 나를 보고 눈을 맞추기를 꺼리는 듯한 것도 있고...”
“너를 보고 눈 맞추기를 꺼린다고?”
세훈은 주리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세훈은 생각에 잠긴다. 클라인이 아까 왜 저렇게 저자세로 나온 건지, 궁금하다. 진짜로 사과하려고 했다면 자기가 직접 와서 무릎을 꿇고 그랬을 것이고, 흉내만 내는 것이라고 해도 직접 문 앞에 서서 미안하다고 한다거나 했을 텐데... 그런데 세훈을 보자마자 살살 피하려고 한 걸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아무리 생각해도 클라인이 왜 그랬는지, 세훈은 궁금하다. 아까 클라인이 자기 이야기 들어 보라고 했을 때 들어줄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아, 그리고 참, 들었어?”
디아나가 목소리를 낮추며 장난스럽게 말한다.
“뭐?”
“우리 반에 내일 전학생이 온다는데...”
“전학생? 전학생이야 뭐, 올 수도 있는 거지.”
“뭘 그런 걸 가지고 새삼스럽게...”
바로 그때, 세훈은 주리를 돌아본다. 주리는 세훈이 돌아보자, 얼른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린다.
“응? 너 왜 그래?”
“아, 아니야, 아니야.”
“그 전학생에 대해 알고 있어, 혹시?”
“아... 아니라니까! 내일 온다는 전학생을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럼... 내가 방금 눈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건 뭐야?”
“야, 눈에 무슨 엔진이 달렸냐? 눈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게.”
“참, 그건 그렇네.”
네 명 모두 큰 소리로 깔깔깔 웃는다. 세훈은 흐뭇하게 웃는다. 마치, 하늘에 뜬 황금빛 해의, 따스한 손결 같은, 부드러운 햇살과도 같이.
?- <초능력에, 눈뜨다> 完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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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마드리갈
2019-04-19 22:52:43
평온함이라는 것이 당연한 것 같아도 절대 당연하지만은 않죠.
지금의 평온한 생활이란 여러 기적들이 동시에 일어나고 이어지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고, 누군가의 작은 행동 하나로도 얼마든지 쉽게 깨질 수 있고, 깨지는 것은 쉬워도 회복되기는 어려우니까요.
2개월도 못되는 시간 동안 세훈에게는 많은 일이 일어났고, 일상생활의 소중함은 물론 소중한 사람들의 존재까지 확실히 인식하게 되었어요. 이것이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경험하는 타력본원(他力本願)이 아닐까 싶네요.
그런데 클라인의 저자세와 탤리의 몸 상황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네요. 이게 또 다른 사건으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네요. 방심하는 것보다는 조심하는 편이 좋다는 건 재론의 여지도 없겠지만요.
완결을 축하드려요.
덕분에 매회차를 읽으면서 다음 회차를 기다리고 하면서 포럼 생활을 더욱 재미있게 영위할 수 있었어요. 이것에 대해서도 깊이 감사드릴께요.
SiteOwner
2019-04-22 22:39:50
이전 회차에서 세훈에게 역전패를 당한 클라인의 꼴이 말이 아니군요.
거구의 사람이 풀죽어 있으면 역으로 더욱 초라하게 보이기 마련인데, 그 사례가 바로 클라인의 대화를 구걸하는 처량한 모습이군요. 자업자득이라서 동정은 가지 않습니다.
저 또한 세훈과 비슷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클라인같은 학생이 학교 수업 시간 전에 저에게 폭력을 가했습니다. 저는 그 길로 당장 무단조퇴한 뒤에, 그 학생의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서, "당신네들 아들에게 맞았으니까 사과하지 않으면 학교 교장실에도 알리고 경찰에도 교육청에도 안기부에도 다 신고할 거니 그렇게 아세요." 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학교는 뒤집어졌습니다. 무단조퇴한 원인을 찾는다고 학교에서 전화오고, 직접 교사가 오고 그렇게 난리법석을 떤 뒤에야 그 학생이 다음날에 "그렇게도 사과를 받고 싶다면 할거다." 라고 해서 마무리되었고, 그 뒤로는 일절 저에게 접근하지 못했습니다. 졸업 후에 우연히 마주치긴 했는데 저를 피했고, 그 뒤로 20년 넘게 전혀 소식이 없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가 다시 싹틀것같은 여지도 있고, 기대됩니다.
완결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