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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민은 AI폰을 집어들고 통화 버튼을 누른다.
“여보세요.”
“아, 수민아. 삼촌이다.”
AI폰 너머에서 수민의 삼촌, 주경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잘 있는 거지?”
“네. 걱정 마세요, 삼촌.”
수민은 주경을 안심시키려 태연히 말한다.
“아, 그래, 네가 걱정 말라니 다행인데...”
주경은 목소리를 조금 낮추고 말한다.
“네가 있는 곳에 관세청 직원이 단속을 나갔다고 하던데, 혹시 얼리버드 호에는 들어오지 않았니?”
“얼리버드요? 네... 여기에도 들어왔죠. 안 들어왔을 리가 없잖아요?”
“요즘 그런 검문검색 같은 게 꽤 강화되었다고 들어서 걱정했는데,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아무 일 없는 거지?”
“아... 네, 별일이야 없었죠.”
“없었다고? 네 목소리를 들어 보니, 별일이 있었는데?”
“네... 사실 좀 있기는 했죠.”
수민은 아까의 일을 떠올리며 말한다.
“그 직원, 눈빛이 범상치 않았어요. 뭐라고 할까... 먹이를 노리는 맹수? 아니면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 아무튼, 그런 눈빛이었어요.”
“만만치 않은 사람을 만났구나.”
“아무튼... 여기저기 샅샅이 뒤지더군요. 저를 못 움직이게 한 다음 화물칸에 들어가서 스캔까지 하고... 그래도 제 친구 덕에 별 탈 없이 그냥 넘어갔지 뭐예요.”
수민은 아까의 일을 말하자니 자꾸만 온몸이 차가워지는 듯하고, 손끝과 발끝이 찌릿해 오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말해야 한다. 삼촌은 분명 수민 자신보다 경험이 풍부하고, 설령 대처법을 말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이런저런 조언을 해 줄 테니.
“다행이구나. 하지만 조심해라. 당분간 검문검색이 많이 강화될 테니. 물론 삼촌도 조심하고 있기는 하지만...”
“에이, 그런 건 걱정 마세요.”
“마침 점심 식사 시간이 다 되어 가는구나. 시내로 오거라. 식사나 같이 하자꾸나.”
“네, 삼촌.”
수민은 조종석 한쪽에 있는 시계를 본다. 시계는 오후 1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라보’라는 도시의 풍경을 묘사하자면 이렇다. 차도와 인도가 확실하게 분별되지 않는 포장이 덜된 거리, 3~4층 건물 위주의 중심가, 정육면체를 여러 개 겹쳐 놓은 듯한, 금속제의 일명 ‘식민지형 표준주택’들, 그리고 가끔 입 속에 씹히는 모래까지. 그야말로 세온 행성 초기의 개척 시대라고 해도 믿을 만한 풍경이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행인들은 대부분 인간들이다. 물론 군데군데 다른 종족들도 눈에 띈다. 암녹색 피부의 파충류같은 외모의 살테이로족, 조금 더 창백한 피부와 옅은 머리색 말고는 인간과 별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이레시아족, 한눈에 봐도 미끌거려 보이는 연청색 피부를 지니고, 눈이 큰, 평균 2m 정도 되는 키의 루비도족, 한눈에 봐도 다른 종족과는 확 달라 보이는, 큰 머리와 수십 개의 팔다리를 지닌, 마치 오징어처럼 생긴 헤토스족 등. 이들이 섞여 있으면서도 큰 위화감 없이 어울리는 곳이 바로 라보 시내다. 물론 세오네 제국의 세라토, 네토라타니아의 카라미아 같은 거대 도시에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작은 도시이지만, 그래도 그런 거대 도시에 못지않게 활기가 넘친다고 자부할 수 있는 곳이다.
수민과 카르토는, 한낮이라 햇빛이 쨍쨍한 라보 시내를 걷고 있다.
“아... 배고파.”
“조금만 참자고. 너희 삼촌이 있는 식당까지 얼마 안 남았잖아.”
몇몇 사람들이 수민과 카르토에게 인사를 건넨다. 대부분은 지인이거나 거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냥 아는 척하는 사람들도 몇 명 있기는 하다. 수민은 손만 흔들거나, 아니면 고개만 까딱까딱하며 마치 인형극의 인형처럼 인사한다. 귀찮기도 하고,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아까 얼리버드 호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조금 피곤하다.
“너무 그렇게 티 내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카르토가 핀잔을 준다.
“아... 알았다고.”
수민은 건성건성 말한다. 시선은 땅바닥을 향하고 있다.
“너 삼촌 앞에서도 그럴 거냐?”
“아니지... 그건 아니야.”
“그럼 어깨 쭉 펴. 고개 들고.”
수민이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들려는 바로 그때.
“야야! 이게 누구야!”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 수민은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재빨리 고개를 든다.
“호렌 아냐! 그런데 빨리 왔네? 오늘 늦게나 내일쯤 온다더니...”
수민과 카르토 앞에 선, 푸른 머리에 창백한 피부를 하고 있고, 품이 큰 가운 같은 풀색 의복을 입은 키가 큰 이레시아인 남자의 이름은 ‘호렌 아레안 레노’. 얼굴에는 웃음을 가득 띠고 있다.
“아, 예상외로 좀 빨리 끝났지 뭐야.”
“계약은 잘 된 거야?”
“아! 잘 됐고말고.”
호렌은 수민과 카르토의 말에 호기롭게 대답한다.
“이제까지 맺은 계약 중에 제일 큰 건수일걸.”
“무슨 계약인데?”
“그건 내가 조금 있다가 설명해 줄게.”
“이야... 고맙다. 역시 연줄의 힘은 크구나.”
한참 웃고 떠든다. 마치 오래 못 만난 사이 좋은 친구처럼. 좀 시간이 지나자 수민이 손목시계를 본다. 오후 1시 25분.
“아 참, 삼촌이 기다리시겠어. 어서 식당으로 들어가자고.”
라보 중심가에 있는 식당 ‘만자’. 퓨전식 레시피와 2, 3층의 넓은 테라스로 라보 주변에서는 유명한 식당이다. 단체석을 위한 방이 20개 넘게 있고, 또 2층과 3층 중앙에는 커다란 원탁 테이블도 있어서 만남의 장소로도 자주 사용되는 곳이다.
3층 테라스 한쪽에 줄무늬 반팔 셔츠를 입은, 파마머리에 선글라스를 쓴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다. 그는 때때로 테라스 아래의 거리를 내려다보며, 앞에 놓인 물을 마시거나, AI폰으로 뭔가를 보거나 한다. 테이블에는 3개의 컵이 더 놓여 있다. 남자는 벽에 걸린 시계를 한 번 보고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아... 여보세요.”
“어디쯤 오니? 만자 3층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 삼촌. 금방 가요.”
“알았다.”
남자는 전화를 끊는다. 이 중년의 남자가 바로 수민의 삼촌 주경.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행성간 무역업에 뛰어들었으며, 그의 형이자 수민의 아버지 ‘주명’과 동업하며 사업을 키워 나갔다. 관세 당국의 감시를 피해 사업을 하다 보니, 어느새 밀무역이 주력 사업이 되었고, 위험도가 크면 클수록 돈다발이 쏟아져 들어왔다. 밀수에 관한 노하우도 축적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연줄도 최대한 활용했으며, 밀수선을 연구선으로 위장하거나, 대부분의 거래가 무사히 성사된 것은 모두 그가 쌓은 인적 네트워크 덕분이었다.
물론 잃은 것도 없지는 않았다. 그중 가장 큰 아픔은 그의 형 주명의 죽음이었다. 21년 전, ‘에스토’라는 종족의 행성에서 거래를 마치고 돌아오다가 금품을 노린 자들의 함정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주명은 그 자신을 미끼 삼아 주경과 다른 일행을 무사히 탈출하게 하고 자신은 죽음을 맞이했다. 주경은 이후 죄책감에 한동안 일을 못 하다가,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다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조카 수민을 맡아 키우면서도 주명에 대한 죄책감은 늘 가슴 한편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수민이 아버지를 따라 무역 일을 하겠다고 할 때도 처음에는 반대했다. 물론 소질이 보이자 자신 밑에 두고 일을 배우게 했지만, 그래도 혹시 수민이 아버지처럼 될까 걱정스러운 건 없지 않았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수민을 철저히 교육시켰다. 그래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주경은 계단 쪽에서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를 듣는다. 여러 명의 발소리다. 자세를 바로 한다. 그중 가장 먼저 올라오는, 키 180cm 정도 되어 보이는 가죽점퍼를 입은 남자. 주경은 그가 누군지 한 번에 알아 본다.
“수민이 왔구나.”
“삼촌, 많이 기다렸죠?”
“아니, 오기만 하면 되지. 혹시 네 친구들도 왔니?”
“아, 왔죠.”
“그럴 줄 알고 자리를 더 마련해 놨지.”
수민의 뒤를 따라 카르토와 호렌이 들어온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호렌 아레안 레노, 인사드립니다!”
“아, 자네들 왔군. 어서 앉게.”
수민은 주경과 마주보고 앉고, 그 옆에 카르토와 호렌이 각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아, 이제 다들 왔으니 주문해야지. 뭐 먹을 건가?”
“아, 저희요? 저희는... 언제나처럼 먹던 거 먹죠.”
카르토와 호렌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말한다.
“너희들은 항상 한결같단 말이야. 늘 이 식당에서는 먹는 것만 먹고.”
“아니, 그게 맛있는 걸 어떡해.”
이윽고 주경과 수민도 메뉴판에서 뭔가를 고르고, 수민이 메뉴판에 있는 확인 버튼을 누른다.
“이걸로 주문도 끝났고...”
“수민아.”
주경은 마주앉은 수민을 바로 보며 말한다.
“네... 삼촌.”
“삼촌이 몇 번이고 강조했지만, 첫째도, 둘째도 네 안전이 우선이다. 알겠지?”
“네... 알고 있죠.”
“그래... 그러면 더 말은 하지 않으마.”
주경은 그렇게 말은 했지만, 여전히 걱정 섞인 눈빛으로 수민을 바라본다.
“참...”
이번에는 수민이 옆에 앉은 호렌을 보고 말을 꺼낸다.
“너.. 혹시 아까 새로 계약을 했다고 한 것, 지금 말할 수 있어?”
“아, 그 계약? 안 그래도 지금 말해 주려고 했는데.”
호렌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낸다.
”다들, 베라네 알지?“
주경, 수민, 카르토가 일제히 호렌을 바라본다. 마치 호렌이 뭔가 엄청나게 값이 나가는 보물, 아니면 꺼내서는 안 될 물건을 꺼낸 것처럼.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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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마드리갈
2019-07-02 14:37:43
배경이 되는 도시 라보는 서부영화에서 잘 묘사되는 정착촌의 SF판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그런데 이 라보의 어원이 노동 관련의 라틴어 Labor에서 온 것인지 러시아어, 체코어 등의 슬라브 언어에서 노동을 의미하고 로봇의 어원이 된 라보타(Робота/Robota)인지, 아니면 제3의 어원인지가 궁금해져요.
가끔 입 속에 모래가 씹힌다는 데에서 흠칫하게 되네요. 얼마나 건조한 기후이면...이것도 서부영화 감각.
삽화가 채색이 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SiteOwner
2019-07-02 20:55:23
1925년에 김동환이 발표한 근대서사시 국경의 밤이 생각나는 장면이군요.
게다가 인간이 느끼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인가도 드러납니다. 밀수업자의 삶은 분명 법을 지키고 사는 일반인이나 법이 잘 지켜지는지를 감시해야 하는 일선기관의 삶과는 다른, 범죄행위에 의존하다보니 불안이 일상인 것. 그러니 가치의 기준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베라네" 가 뇌관이 될 것 같군요. 현 시점에서는 무엇을 지칭하는지도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