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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카디널 호텔 1312호실. 푸른 머리의 이레시아인 남성은 얼굴에 붉은빛을 가득 띠고 있다. 눈으로는 앞에 꿇어앉은 갈색 슈트를 입은 금발의 남성을 못마땅하다는 듯 노려보고 있고, AI폰을 든 손에는 핏줄이 서 있고, 입은 툭 튀어나와 있다.
“제임스와 야마모토가 실패했다는군.”
“......”
이반은 아무 말 없이 보스의 눈치만 보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분이 차오르는데, 도대체 네놈은 왜, 왜!”
“죄송합니다.”
“내가 혼자서 그렇게 행동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나!”
“죄송합니다!”
“죄송한 짓은 아예 하지를 말란 말이야!”
“네... 네!”
이반은 금방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보스를 보고 벌별 떨며, 그저 고개를 조아릴 뿐이다. 예전에 보스의 명령을 무시하고 몇 번 제멋대로 행동할 때도, 이렇게까지는 안 했는데... 이런 생각만 들 뿐이다.
“그리고 말이야.”
보스의 목소리가 갑자기 누그러진다.
“네... 말씀만... 말씀만 하십시오.”
이반은 놀람 반, 의심 반으로 말한다.
“카르토라는 살테이로인의 방에 있으면서, 뭐 좀 알아낸 것 있나?”
“예, 있습니다!”
“호오... 있다고? 역시나. 뭔지 한번 말해 봐.”
“그게... 그 조직에 접선해 오는 사람이 또 한 명 있습니다.”
“접선? 누가 접선하는데?”
“저도 자세한 건 잘 모르고,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 알게 되었습니다.”
이반의 말을 듣고 있던 이레시아인 남성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진다.
“호오, 네가 그런 정보도 다 얻었어? 매번 허탕만 치던 네가?”
이레시아인 남성의 말은 놀람 반, 의심 반이다.
“화장실에 갇혀 있었는데, 그 살테이로인이 통화하는 걸 엿듣다 보니 그런 게 나오더군요.”
“그래, 알겠다. 그 김수민이라는 자의 조직에 접선하려는 그 자를 막아야 한다. 그는 언제쯤이면 온다고 하나?”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 될 겁니다.”
“좋다. 곧 모두에게 전파하겠지만, 섣불리 행동하지 마라. 그리고 이반, 너는 내 명령 없이는 행동하지 마라. 알겠나?”
“알겠습니다.”
이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최대한 머리를 숙이며 대답한다.
“그럼 가 봐.”
그날 저녁. 수민 일행은 호텔에 돌아와 각자 방에 짐을 내려놓고, 1층에 있는 레스토랑 야외 테라스의 테이블에 앉아 있다. 테라스를 가로지르는, 마치 조그만 개울과도 같은 분수대가 있고, 그 위로 다리도 놓여 있다. 테이블에 앉아서 해가 막 넘어가려는 하늘을 보고, 분수대와 어우러진 테라스를 보면, 그 누구라도 이곳에 앉아서 친구, 가족 등과 함께 저녁을 즐기고 싶은 욕구가 저절로 들 것이다.
“여기 오기를 정말 잘했지 뭐야.”
“그러게. 일주일만 더 있으면 좋을 텐데...”
수민과 호렌이 해가 지는 광경을 바라보며 무의식중에 내뱉는다.
“너희들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카르토가 호렌에게 핀잔을 준다.
“어제 그 뭐냐... 그 ‘이반’이라는 녀석 때문에 그 30년 전의 나쁜 기억이 다시 떠올랐어. 덕분에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아침에도 직원에게 방을 바꿔 달라고 하려다가 말았어. 아무리 여기가 관광하기 좋은 곳이라도, 이런 사건을 겪으면 하루도 있고 싶지 않다고.”
카르토의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살짝 격앙된다.
“거 심정은 이해하겠는데, 여기 왔으면 좀 즐기자고. 우리가 그런 사건 겪은 게 한두 번도 아니잖아.”
수민이 카르토가 들고 있는 잔에 와인을 따라 주며 말한다.
“너답지 않아. 그리고 즐길 때는 즐기자고. 거래가 무사히 끝나고 나서의 그 후련함을 상상하라고.”
“고마워. 너밖에 없는 것 같다.”
카르토는 잔을 비우려다가 바로 앞에서 뿜어 나오는 분수를 본다. 석양과 어우러진, 분수대에서 솟아나오는 수십 발의 분수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수민, 아이샤 모두 잔을 든 채로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본다.
“잠깐만.”
호렌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아니, 좀 있으면 식사가 올 텐데 갑자기 왜?”
“금방 갔다 올 테니까...”
“알았어. 빨리 갔다 와.”
호렌이 똥 씹은 표정을 하자, 수민은 손짓을 하며 호렌을 재촉한다.
호렌의 화장실 가는 길은, 마치 수많은 나무가 심어진 숲을 헤치고 가는 것처럼, 멀고도 험하다. 그새 사람들이 많아졌다. 조금 전까지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그럭저럭 사람들 사이를 헤쳐 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호텔 건물을 향해 가고 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영 다른 곳이다.
고개를 두리번거려 주위를 본다. 여기는 숲속... 그것도 호텔 출입문 근처에 있는 숲이다. 아까 레스토랑과는 호텔 건물을 사이에 두고 거의 정반대에 가까운 곳이다. 어떻게 된 거지... 방향 감각이 이상해진 건가? 아닌데, 그건 아닐 텐데...
“누구냐! 이런 수작을 쓴 녀석은! 당장 나와라!”
호렌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버럭버럭 소리 지른다. 알 수 없는 누군가를 향해.
“나오지 않으면...”
“이제 알아챘나? 역시 굼뜨군그래.”
숲 깊은 곳 한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바람에 묻어가는 그 목소리가 음산하다. 호렌의 이마, 목, 등, 손바닥, 여기저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심장을 누군가가 손으로 쥐어짜는 듯하다. 온몸의 털이 서는 듯하다. 누구인가, 이 공포의 근원은! 대체... 대체!
“오랜만이군, 호렌.”
많이 들어본 목소리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인데... 익숙한데 누구인지 생각이 안 난다... 누구인가,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나를 본 적이 있지?”
“그래... 너로군.”
그가 호렌의 앞에 얼굴을 드러낸다. 자신과 어딘가 많이 닮았지만 미묘하게 다르게 생긴 그 얼굴... 그제야 생각난다. 이 자의 이름은, ‘에제타노 라센’. 호렌은 기억해낸다. 그의 어린 시절을. 마치 눈앞에서 영화를 틀어주는 듯, 생생하게 떠오른다. 신관의 아들인 호렌에게, 하층민들의 삶은 머리로는 알 수 있어도 가슴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다른 세계’의 것이었다.
어느 날인가, 우연히 슬럼가를 지나갈 때, 그와 상당히 비슷하게 생긴 어린아이가 있었다. 푸른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 오똑 솟은 코까지. 쌍둥이라고 해도 믿어도 될 정도였다. 그 어린아이가 바로 에제타노였다. 그를 다시 만난 건 학교 입학식에서. 대신관 정도는 아니라도 신관의 아들인 호렌과 슬럼가 출신의 에제타노는 너무나도 비교되었다. 아이들은 호렌과 친해지려고 하고 에제타노는 따돌렸다. 아마 그때부터 에제타노는 호렌에게 일종의 열등감 같은 감정이 들었을 것이다. 특히 얼굴도 비슷하게 생겼으니 더더욱. 이후 에제타노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였기에 자세한 소식은 못 들었지만, 암흑가에서 살고 있다더라, 폭력조직에 몸담고 있다더라 하는 소문은 지인들에게서 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만난 건, 처음이다. 그것도 호렌의 앞을 가로막는 포지션을 맡을 줄이야.
“만나서 반갑군.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는 게 썩 유쾌하지는 않을 텐데.”
한편 그 시간, 레스토랑 야외 테라스. 수민 일행의 테이블에는 벌써 각양각색의 에피타이저가 차려져 있다. 호렌의 자리는 아직 그대로 비워져 있다.
“호렌 녀석은 왜 안 오지? 식사가 왔는데 말이야.”
“그러게. 한번 전화를 해 볼까?”
“전화? 됐어. 금방 오겠지.”
수민은 전화를 하려는 카르토를 제지하며 말한다.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수민은 앞에 있는 에피타이저를 놔두고 물만 마신다. 아이샤가 뭔가 생각났는지 문득 수민에게 말한다.
“그건 그렇고 말이야, 브라운 씨와 로렌 씨는 아직 연락이 없는 건가?”
“예정보다 빨리 온다더라. 한 내일 오후면 도착한다고 하던데...”
“그럼 약속 장소를 빨리 정해야지.”
“내일 아침에 다시 알려 준대.”
바로 그때, 수민 앞의 분수가 살짝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어? 뭐야. 왜 분수가 갑자기...”
“분수가 왜?”
“방금 뭔가 좀 이상하게 보였는데...”
“설마 그 녀석인가?”
“그 녀석이라니, 누구?”
“어젯밤에 내 방에 몰래 들어와서 투명 슈트 입고 있던 놈 말이야.”
수민은 문득 뒤에서 뭔가 위화감 같은 것을 느낀다. 문득 뒤를 돌아본다. 뒤에 보이는 호텔이, 조금 흔들리는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그 약간의 위화감마저, 금방 풍경에 녹아들어 버린다. 수민은 고개를 갸우뚱거리지만, 곧 다시 카르토와 아이샤를 향해 돌아앉는다. 이상하다는 느낌은 그대로인 채로.
“누구는 아닐 줄 알고?”
호렌의 목소리가 끓어오른다.?
“갑자기 여기에 나타나서 나한테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뭐야?”
“옛 인연이 있으니까 특별히 이렇게 나타나 준 거야. 네 다른 일행들이 내 부하들을 만난 것과는 다르게 말이지.”
“부하들이라니, 그럼 설마...”
“맞아. 나와 내 부하들은 의뢰를 받았지. 베라네를 운반하는 자들이 있으면 그것을 훔쳐서 전달해 달라는 의뢰를 말이야. 그런데 마침 딱 타겟이 생겼군. 이런 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재미있군.”
에제타노의 눈빛, 말투, 몸짓, 호렌이 보는 모든 것에 비웃음이 섞여 있다.
“내가 가만 둘 것 같으냐! 당장 그들에게 말할...”
“오, 그건 안돼.”
에제타노가 호렌의 말을 가로막는다.
“너는 말할 수 없어. 내가 누군지, 그리고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그게 말이나 될 것 같냐!”
“하지만 내 능력으로는 가능하지. 네 일행이 지금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더라도, 너는 동문서답을 하거나, 아니면 빙빙 돌려서만 말하게 될 거야.”
“에제타노! 너 말 다 했냐아아아!”
“아, 중요한 걸 까먹었군그래. 너한테만 특별히 말해 주지.”
호렌이 금방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듯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휘두르고 있음에도, 에제타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오히려 호기롭게 두 팔까지 벌리며 말한다.
“조금 전에 내 부하들은, 너희의 의뢰인이 누군지, 그리고 너희와 접선할 사람이 누군지 알아냈지. 우리는 내일, 너희와 접선할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든 너희와 만나지 못하게 할 거야. 그리고 베라네를 숨긴 위치를 끝까지 추궁해 낼 것이고.”
“참 고맙군. 반드시, 어떻게라도 알릴 테니까.”
호렌은 AI폰을 꺼내 든다. AI폰은 녹음이 되고 있는 상태다. 그걸 보고도 에제타노는 태연히 웃기만 한다.
“하하하하... 준비를 잘 해 왔는데? 하지만 부질없는 짓이야. 네 일행을 만날 때, 무엇을 알려 주어야 하고 무엇을 들려주어야 하는지 생각이 안 날 테니까.”
“그렇게 놔둘 것 같으냐!”
“이제 가 봐. 내 능력은 이제부터 발현될 테니.”
에제타노는 비웃음이 가득 섞인 웃음을 흘린다.
“말 다 했냐!”
호렌이 주먹을 쥐고 달려들지만, 에제타노는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상하게도 어두웠던 숲이 에제타노가 사라지고 나서 금세 다시 빛이 조금이나마 들어오기 시작한다. 정말 이상하다. 이상하다... 호렌은 그렇게 생각한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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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SiteOwner
2019-10-09 18:51:36
군복무 경험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근무지가 있는 곳은 다시 가기도 싫고, 심지어는 그 방향으로는 오줌도 누기 싫다고. 그 정도로, 원치 않은 경험을 한 사람들은 그 장소 자체를 기피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객실에서 한바탕 소동을 겪었고, 게다가 이번이 처음이 아닌 카르토의 심정이 절실하게 공감됩니다. 저 또한 몇몇 장소를 기피하는데, 예전에 의료사고를 겪었던 병원(현재는 폐업)이 있었던 자리는 아예 지나가는 길로조차 채택하고 싶지 않을 정도입니다.
에제타노 라센과의 원하지 않은 해후, 역시 불길함의 시작입니다.
마드리갈
2019-10-10 12:42:37
인간의 행동이란 역시 뜻대로 통제할 수 없는 경우가 많죠.
사실 작품 내에 한정해 보더라도,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베라네 밀수를 감행한 수민 일행의 결정부터, 임의의 장소로 이동하는 능력으로 여러 소동을 만드는 아이샤, 그리고 멋대로 행동하여 일을 그르치게 된 이반에까지 다양하기 이를 데 없어요. 게다가 같은 것을 접하더라도 모두 반응이 같을 수 없는 게, 이미 30년 전에도 악연이 있었고 방금 전에도 소동을 겪은 카르토만 봐도 명백하기 마련이죠.
이번에는 호렌이 사건에 말려드네요. 신분차이가 큰 에제타노 라센과의 뜻하지 않은 해후...
약간 기억이 애매하기는 한데, 알베르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의 전기에 나오는 그의 유년기 때에 만났던 소년 게오르크가 생각나고 있어요. 유복한 집안 출신의 슈바이처, 그리고 빈민가 출신의 거친 소년 게오르크의 만남이 그의 일생의 많은 부분을 좌우했다는 게 기억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