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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세훈과 주리, 앨런을 돌아본다. *소피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메이링 님, 혹시 이 ‘계기’라는 건 앨런 씨도 잘 모르는 건가요?”
“맞아, *소피아. 그간 이건 아무한테도 말 안 해줬어.”
“그 계기라는 게 뭔데요?”
세훈과 주리보다도 먼저, 앨런이 입을 연다.
“한번 들어 보자고요, 변호사님!”
“그러니까... 내가 VP재단 법무팀 사무실에서 일하다 말고 잠깐 앉아 있었는데...”
“아, 혹시 그냥 일하다 말고 노는 때가 많았나요?”
“어... 음... 맞아.”
메이링의 대답은 시원치가 못하다.
“아... 그 대답은, 많이 놀았다는 소리군요!”
메이링의 시원치 못한 대답에 비해 *소피아의 목소리는 마치 범인을 알아낸 탐정처럼 확신에 가득 차 있다. 메이링은 조금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말한다.
“아... 그래, 맞아. 좀 놀았지. 검사 생활이 조금 팍팍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VP재단 법무팀 변호사라면 어느 정도 명성도 얻으면서도, 조금 시간을 편하게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실제로 좀 그랬고.”
메이링은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책상에 있는 물을 마신다. 그러고 나서 잠시 벽 한쪽을 바라본다. 세훈과 주리도 메이링이 보는 방향을 돌아본다. 사진이 하나 걸려 있는데, 머리 모양으로 보아 메이링과 동기들의 사진인 듯하다. 사진 속 메이링은 지금의 자유분방한 모습과는 정반대로, 정장을 아주 말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이다. 세훈은 그 사진이 조금은 신기한 듯, 몇 번이나 사진 속 메이링의 모습을 유심히 본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지.”
메이링은 다시 말을 잇는다.
“하루는 VP재단의 직원 중 한 명이 법무팀에 와서는 나만 따로 부르는 거야.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직원을 따라갔지. 법무팀의 다른 동료 변호사들은 드디어 내가 좀 피곤해지겠구나 하고 위로하는 분위기였고. 나름 큰 사건을 맡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그 직원을 따라서 어느 큰 회의실로 들어갔는데, 뜻밖에도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었어.”
“네? 연구원들이요? 연구원들이 변호사를 부를 일도 있나요?”
“그러니까. 보통 연구원들은 연구에 집중하느라 법무팀을 만날 일도 별로 없거든. 법무팀은 대부분 재단 경영진이나 행정직원들과 접촉하지. 그런데 내가 그 회의실에 들어갔을 때 나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세 명이었는데, 모두 나이가 지긋한 연구원들이었어. 그것도 꽤 높은 위치에 있는 연구원들이었지. 이름도 다 기억나. ‘스티븐 사이먼 엘더’, ‘라헬 레비’, ‘장주원’이었어. 그중에 엘더라는 연구원이 나를 한 번 보더니 이렇게 말하더라.”
“뭐라고 하던데요?”
“그 사람은, ‘나 정도면 초능력에 소질이 있어 보인다’고 했어. 처음에는 깜짝 놀랐지. 그간 공부만 하고 살아왔는데 나한테 무슨 초능력의 재능 같은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이상한 거잖아. 무슨 근거로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아니에요, 아니겠죠’라고는 했어도 무의식적인 동의감이 들더라.”
“혹시 그 사람은... 초능력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었나요?”
“아니. 그건 또 아니라고 하더라. 그저 VP재단에서 오래 있다 보니까 초능력에 대해서 좀 알 것 같다고 한다는 거야.”
“그럼 원래는 뭘 연구하는 사람인데요?”
“아, 엘더 박사님은 말이죠...”
*소피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원래 재료공학을 전공한 사람이에요. 박사학위도 신물질 연구로 받았고요. 그 뒤로 대학하고 연구소 여러 군데에 있다가 VP재단에 정착하게 된 거고요, 그리고 연구 활동 외에도 강연활동으로 수입이 많은 편이지요.”
“원래 초능력을 연구한다거나 하지는 않는 분인데, VP재단에 오래 있다 보니 초능력에 대해 좀 알 것 같다라... 그분 참 많이 기묘하네요.”
주리가 눈을 빛내며 말한다.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어요?”
“그 세 분이 한입으로 말하기를, 이제 법무팀에서 근무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라. 그 대신 재단 밖에서 초능력자들을 조사해 달라는 거야. 그래서 그 날로 표면적으로는 VP재단 법무팀을 그만두고 개인 법률사무소를 차리게 됐어. 물론 지금은 보는 것처럼 개인 사무소를 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계속 VP재단과 연락하면서 수시로 드나들면서 법률 자문, 그리고 초능력자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정보 조사원 역할을 맡고 있지.”
“사실 저는 말이죠, 변호사님...”
앨런이 입을 연다.
“변호사님하고 같이 일을 하다 보니 저도 초능력자 조사를 같이 맡아서 하고 또 몸으로 뛸 일도 많은데...”
“맞아.”
“그러다 보니까 변호사님이 초능력자라고 짐짓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네요.”
“맞아. 그런데 꼭 초능력자만 초능력자 조사를 하고 그런 건 아니잖아.”
“하긴... 그렇죠. 닭이 아니라고 상한 알을 못 알아보는 것도 아니니.”
“아무튼, 지금까지 말한 게 내가 VP재단의 정보 조사원으로 일하게 된 계기야. 정말로 우연한 계기였지.”
세훈과 주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궁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메이링의 말을 듣고 나서도 마치 나무에서 가지가 나와 뻗어가듯 의문점들이 하나하나 생겨 나가는 것이다. 메이링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의문점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구나? 어차피 지금은 말해 줘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게 많을 거야. 나도 그때 처음 그 말을 들을 때는 그랬어.”
메이링은 말하면서 벽 한쪽에 홀로그램 또 하나를 띄운다.
“아참, 그리고 주리하고 세훈이한테 보여 줄 게 또 있어.”
홀로그램으로 나타난 건 미린구 지도. 빨간 점의 전체적인 분포는 미린 지역만 확대해 놓고 보니 일반적인 인구 분포와 비슷하다. 다른 건 이곳의 초능력자 분포가 다른 곳의 10배 정도라는 사실뿐.
“어? 이렇게만 놓고 보면 별 차이 없어 보이는데요?”
“맞아. 그렇지. 이제 좀 다르게 한번 볼까?”
메이링이 컴퓨터 자판을 몇 번 두드리자, 이제 홀로그램의 점의 분포가 바뀐다. 미린역 쪽의 업무지구나 학교에 빨간 점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 봐서는 해당 초능력자의 직장이나 학교를 분석한 지도인 듯하다. 그런데...
“어? 잠깐만요... 여기...”
세훈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킨다. 빨간 점이 유독 눈에 띄게 모인 한 곳.
“우리 학교잖아! 그것도, 미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까지 다!”
“우... 우리 학교에... 초능력자가 뭐가 이렇게 많아?”
주리 역시 자기 학교에 모여 있는 빨간 점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더듬거리며 말한다.
“무슨... 초능력자만 모아 놓고 양성하는 학교도 아니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우리 학교의 이미지는 그저 ‘공부 잘 하는 학교’일 뿐인데!”
“그러게 말이지. VP재단에서도 우리 학교의 사례는 미스터리 중 하나라더라.”
“‘우리 학교’요? 아...아참, 메이링 씨도 우리 학교 나왔다고 했지.”
“그런데 말이죠...”
세훈이 메이링에게 묻는다.
“우리 학교에만 유독 그렇게 초능력자가 모인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음... 잘은 모르겠어.”
메이링은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아직은 VP재단에서도 여기에 관해서 연구하고 있고, 나는 그저 조사원일 뿐 전문가는 아니니까. 다만... 이건 내 감인데... 그냥 느낌일 뿐이야. 내 생각에는... 우리 학교에 초능력자를 끌어들이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것도 매우 강력한 초능력자 말이지.”
“잠깐... ‘초능력자를 끌어들이는 누군가’라고요?”
세훈의 머릿속에는 바로 짚이는 누군가 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설마... 제가 말한 그 선배가 아닐까요?”
“아니야.”
메이링은 바로 고개를 젓는다.
“그렇게 약한 능력은 다른 초능력자들을 끌어들일 만한 것도 되지 못해.”
“그러면요? 어느 정도는 되어야 ‘강력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요?”
“그럴 정도라면... 바로 생각나는 건 염동력이나, 시간 조작 능력 정도지. 그에 걸맞거나 더 강한 능력은 되어야 다른 초능력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겠지. 아니면 그런 능력이 아직은 없어도 그만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든가.”
“그렇다면... 혹시 VP재단에서 파악하고 있는 정보에는 아직 그런 정도의 초능력자는 없나요?”
“자세한 정보는 알려 줄 수 없어. VP재단에서 가지고 있는 초능력자 개개인에 대한 상세한 자료는 기밀 정보거든. 다만 사람들의 제보나 증언, 그리고 목격담 등 여러 가지 정보를 취합해 그 사람의 능력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알 수 있지.”
“그 말은...”
“알아서 조심하라...는 거네요.”
“그래. 웬만한 일반인이라면 초능력자와 엮일 일은 별로 없겠지만, 아무래도 사는 곳이 사는 곳이고 또 학교가 그렇고 그런 곳이니까, 너희들의 경우는 특히 주의해야겠지. 그중에 자기 능력을 나쁜 쪽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테니까. 세훈이 네가 아까 겪었다는 그 선배도 그렇고 말이야.”
“......”
세훈은 말없이 그냥 메이링의 말만 조용히 듣는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의문점이 해소될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메이링의 말이 맞다. 지금은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말들뿐이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차차 알게 되겠지만...
“다들 표정을 보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들이네.”
“......”
“그래. 그게 당연한 거라니까.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고 했잖아. 재단에서 좀 일하고 여러 유형의 초능력자들과 접촉하면서 조금이나마 알게 된 거야. 그러니까 지금 모른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긴다거나 하면...”
“언제든지 나한테 연락 주기만 하면 돼. 나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변호사 본연의 업무도 해야 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저희 연락을 받고 조사하고 할 시간은 많이 부족할 것 같은데...”
“아... 그건 그렇구나. 어쨌든,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연락해 줘. 내가 바빠서 연락을 못 받는다거나 하면, 여기 앨런 씨한테 연락을 줘도 돼. 알았지?”
“뭐... 보통은 제가 연락을 받게 되겠죠. 변호사님은 법정에 나가랴, 사건 맡으랴, 그런 걸로도 좀 바쁘니까요.”
세훈은 시계를 본다. 시계는 오후 4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어? 저 이제 가 볼 시간이에요. 오늘 집에 일찍 가기로 했거든요.”
“벌써 가?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그냥 천천히 알려고요.”
“그래? 그럼 나도 같이 가자.”
“주리 넌 왜? 너는 메이링 씨와 이야기 더 하다 가도 되지 않아?”
“우리 엄마는 시간 같은 거 좀 많이 따지거든.”
“음... 하긴, 너희 어머니는 시간에 좀 철저하시지.”
메이링은 이런 일이 익숙한 듯하다.
“세희도 그래서 나하고 어디 놀러 가거나 할 때 일찍 집에 가거나 하는 일이 많았지.”
“그게 좀 아쉽겠네요.”
“그래, 그런데 어머니가 그런 분이시니까 좀 이해는 가. 어쨌든, 또 보자. 내가 아까 한 이야기 잊지 말고!”
세훈과 주리는 지하철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다. 그냥 평범하게 보일 뿐인 오피스 거리다.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오갈 뿐인... 그저 평범하게 분주한 거리일 뿐이다.
“혹시... 우리가 조금 전까지 헛소리를 들은 건... 아니겠지?”
“왜?”
“이렇게나 평범한 풍경인데 말이야...”
“어떻게 초능력자가 많다고 상상할 수 있겠냐고? 그것도 다른 지역의 10배에서 100배나 되는?”
세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야, 그런 걸 가지고 뭘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냐. 그런 건 천천히 생각하자고. 자, 집에 가야지.”
주리가 걸음을 재촉하고, 세훈도 주리의 뒤를 따라간다. 지하철역 출입구로 들어가면서도, 세훈은 자꾸 머리를 흔든다. 그냥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잊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이다. 게다가 이렇게나 평범한 곳인데...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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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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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1 23:46:51
"닭이 아니라고 상한 알을 못 알아보는 것도 아니니."
정말 멋진 표현입니다.
그렇습니다. 물론 초능력자라면 초능력자에 대해서 더 잘 알아보고 보다 연구를 깊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겠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충분조건일 따름이지 필요조건으로 승격되지는 못합니다. 역시 변호사인 메이링의 논리력이 돋보입니다.
평범하게 매일 이어지는 일상도, 잠복해 있는 특정요소에 눈을 뜨게 되는 이상은 똑같이 보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도 없습니다.
마드리갈
2020-01-12 23:32:34
초능력이 실체로서 나타난다면 이렇게 상정하신 상황이 나오겠네요.
그런데 신기하거나 기대되기보다는 상당히 무서울 것 같네요. 특히 세훈이 전에 겪은 그 불량한 남학생과의 조우 같은 상황이 더 나쁜 목적을 위해서 쓰이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상정하신 상황을 인터넷에서 발생하는 갖은 사건사고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표면적으로는 대부분 멀쩡하고 평범하지만, 인터넷 세계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알 길이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