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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훈이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서 전화를 받은 다음 날의 아침. 창밖에 햇빛이 벌써 짙게 스며드는 시간.
♬♪♩♬♪♩♬♪♩
시간은 오전 7시 30분. 그러나 세훈은 곤히 잠들어 있다.
“세훈아.”
이진이 세훈의 방문을 열고 세훈을 부른다.
“일어나야지.”
“저, 세훈 님.”
*나라도 세훈을 부르려는 그 때, 세훈은 눈을 뜬다.
“아... 시간이 왜 이렇게 됐지.”
“너 어제도 잠을 못 자서 뒤척이더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니?”
“아... 아니, 그런 건 아니라니까요.”
“정말? 아닌 것 같은데. 혹시라도 있으면 말해 봐. 엄마가 다 들어 줄 테니까.”
“저... 정말이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세훈의 머릿속에는 어제의 그 전화 때문에 걱정이 한가득이다. 누구인지도 짐작조차 할 수 없고, 또 오라는 장소 또한 비밀로 감추는 등, 철저히 베일에 싸인 그 목소리. 클라인과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던 그 목소리. 정황으로 볼 때 클라인의 패거리 중 한 명인 것 같지만, 그 이상은 알 수 없다. 마치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어두운 방에 집어넣고 그 안에서 바늘 하나를 고르라는 것과도 같은 상황이다. 적어도 어제 전화한 그에 대해서는. 그나마 비숍은 동급생이어서 초조함이 조금은 덜했지만, 어제의 그 사람은 세훈을 다짜고짜 하대한 것으로 보아 선배일 가능성이 높다. 그 정도의 초조함 때문인지, *나라가 틀어 준 첼로 이중주곡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급히 옷을 갈아입는다. 다 갈아입고 나서 거울을 보니, 머리는 떡져 있고, 얼굴은 잠을 일주일은 안 잔 사람처럼 초췌하다. 교복만 아니면 완벽한 폐인의 모습이다.
“세훈아, 아침 식사해야지.”
이진의 말에 세훈은 허겁지겁 식탁에 가서 앉는다. 식탁 위에 있는 건 햄과 계란을 넣은 샌드위치 하나와 우유. 세훈은 얼른 샌드위치를 집어 들고 먹기 시작한다. 그런데... 평소라면 5분, 아니 3분 만에 다 먹었을 샌드위치가 목구멍에서 좀처럼 넘어가지를 않는다. 역시나, 긴장감 때문인 듯하다. 하기는, 이런 상황에서는 음식을 먹다가 목에 걸려 켁켁거리지 않는 것도 감사해야 할 지경이다.
식사를 다 한 다음, 세훈은 허겁지겁 화장실로 들어가, 입에 칫솔을 물고 나와서 TV를 켠다. 마침 TV에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경찰청에서는 외국인 및 타 종족 계열의 범죄조직에 대한 특별단속을 대도시를 중심으로 시행하기로 했습니다. 최근 10년 동안의 통계조사 결과에 의하면 내국인을 상대로 한 범죄 건수는 줄었지만, 외국인 및 종족 간의 범죄 건수가 1.5배 증가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경찰청은 각 지역 경찰본부와의 협조 아래 2개월간 특별단속을 시행하기로 했습니다. 다음은 과학계 소식입니다. 스틸레지드 소재의 제1 인공지능 연구소는 슈퍼컴퓨터 마하 펙타의 보안을 강화하기 위해 각계의 전문가들 및 보안 전문 인공지능들을 투입했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끝나게 되면 마하 펙타의 처리 능력이 한층 더 개선될 것이라고 제1 인공지능 연구소 관계자는 밝혔습니다. 이르면 다음 달 4월에 RZ전자의 새 AI폰 모델 ‘스텔라 AA’가 상용화될 전망입니다. RZ전자 관계자는 스텔라 AA가 현재 테스트 단계를 거치고 있으며 테스트를 마치는 대로 소비자들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RZ전자는 스텔라 AA의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는 즈베즈다 크리에이티브의 지적재산권 관련 소송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습니다. 문화계 소식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얼음공주 이야기’를 소재로 한 12번째 뮤지컬이 이번 주말에 초연됩니다...”
세훈은 뉴스가 나오건 말건, 양치질을 마치고 나서 바로 가방을 챙기고 문을 나선다. 시계를 보니 아침 8시 15분. 그래도 늦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그 발걸음은 전혀 가볍지 않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 마치 양쪽 발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걷는 느낌이다. 모처럼 하늘은 구름 없이 맑은데도, 세훈은 그 비치는 햇살 또한 피해 버리고만 싶다. 지하철을 타고 갈 때도 마찬가지다. 열차 안을 가득 채우고 서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데도, 마치 사람들이 모두 세훈을 피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지하철에서 같은 학교 교복을 보면 특히 더 그렇다. 미린역에 도착할 때는 일부러 시선을 반대쪽 출입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누가 오고 가는지 전혀 보이지 않으니까 속이 그나마 편했다.
미린대역에 내려서 개찰구를 통과하고 나서도 세훈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걷는다. 그냥 누가 인사하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앞만 보고 걷는다. 출구를 나와서도 시선을 피하려는 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세훈이니?”
뭐야, 많이 들어 보던 목소리인데? 세훈은 그러나 애써 피하며 계속 앞으로 걷는다.
“세훈이, 맞지?”
그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분명 세훈에게는 익숙한 목소리인데, 많이 듣던 목소리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목소리다. 좀 더 음조가 낮은 편이다. 그렇다면...
“어... 설마...”
세훈은 뒤를 돌아본다. 경찰관 제복을 입은 키가 큰 남자 한 명이 서 있다.
“아, 진언이 형이잖아.”
“아, 지금 순찰하다가 잠깐 쉬는 중이라서.”
“오, 오랜만이잖아. 언제 여기 온 거야?”
“배치받은 지는 이제 한 달 정도 됐어. 1지망을 미린경찰서로 써서 냈는데, 어떻게 여기에 딱 되더라.”
“어, 정말? 잘됐네. 일은 안 어려워?”
“아직 한 달밖에 안 됐으니까 잘 모르지. 그런데 역시 도시라서 그런지 출동이 많은 것 같아.”
“그래...”
바로 그때.
“어, 세훈아!”
지하철 출입구 쪽에서 주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세훈과 진언은 뒤쪽을 돌아본다. 세훈의 예상대로, 주리는 어제의 교복 그대로 입었지만, 귀에 있는 귀걸이는 또 바뀌었다. 어제는 분명 링 모양이었을 텐데, 오늘은 체리 모양의 붉은색 귀걸이다. 역시 주리답다고 세훈은 생각한다.
“어, 거기 진언이 오빠 맞지?”
“아, 주리구나! 오랜만이야.”
“그래. 작년 8월에 경찰학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에 본 이후로는 처음이지, 아마?”
세훈도 어렴풋이 작년에 주리와 함께 미린 중앙공원 근처의 한 카페에서 진언을 만난 일을 떠올린다. 이제 곧 경찰학교에 들어간다고 좋아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진언이 형을 서언이 형보다 더 많이 본 것 같은데...”
세훈이 입을 연다.
“최근 들어 서언이보다 자주 못 보는 것 같다고?”
진언이 세훈의 말을 가로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이제 곧 서언이만큼은 아니어도 자주 볼 수 있으니까 말이야.”
“하긴, 여기로 배치받았으니까.”
“어... 그런데 진언이 오빠.”
주리가 뭔가 생각이 난 듯 말을 꺼낸다.
“서언이 오빠가 그러던데...”
“응, 서언이가 왜?”
“삼촌인가 고모인가... 아무튼, 가족 중 한 명이 초능력자라는 게 사실이야?”
“아, 맞아. 그런데, 이 자리에서 말해 주기는 좀 그래.”
진언은 오묘한 미소를 띠며 말한다.
“그게 무슨 말이야.”
“겪어 봐야 안다니까.”
“에이...”
주리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진언을 실망 섞인 표정으로 바라본다. 진언은 세훈과 주리에게 그저 장난 섞인 웃음을 지을 뿐이다.
“아... 잠깐...”
주리가 손목에 찬 AI시계를 본다.
“어...? 벌써 8시 45분이네?”
“진짜?”
세훈이 주변을 둘러보니 길거리에는 세훈과 주리 말고 교복을 입은 사람들은 몇 명밖에 안 보인다.
“늦으면 안 되는데! 이만 가 볼게!”
세훈과 주리는 진언에게 겨우 인사만 하고는 그 길로 학교를 향해 뛰어간다. 진언은 뛰어가는 세훈과 주리의 뒤를 보며 혼잣말한다.
“세훈이, 그런데 왜 아까 나하고 마주칠 때 표정이 그렇게 어두웠지? 먼저 말을 해 봐야 했던 건데... 혹시 요즘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건가? 괜찮은 건지... 아, 나도 이제 슬슬 복귀해야겠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진언은 근처 길가에 주차된 순찰차를 향해 뛰어간다.
3교시의 문학 시간, 1학년 G반 교실.
“오늘은 ‘문학의 다양한 변용’이라는 주제로 수업을 진행해 볼 건데요, 아마 다음 주까지는 쭉 이 주제로 갈 것 같아요.”
키라 선생이 교실 전체를 한 번 둘러보며 말한다.
“마침, 바로 이번 주에 ‘얼음공주 이야기’를 소재로 한 뮤지컬이 상연된다고 해요. 우리가 배워 볼 내용도 바로 이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서 진행될 거예요.”
얼음공주 이야기라... 세훈은 탄식섞인 한숨을 내쉰다. 오래 전, 어른, 아이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오랜 시간 동안 전해져 내려온 것이라 친숙하고 익숙한 것이기는 하지만, 하도 여기저기서 많이 나오다 보니 이제는 교과서 같은 곳에서 이 이야기를 보면 저절로 지루한 느낌이 들기까지 할 정도다.
그런데, 키라 선생의 말에 따라 교과서를 펼친 순간, 세훈은 오늘은 어쩐지 이 시간을 지루하게 보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까지 문학 교과서에서 예문으로 나오는 것들은 내용은 다 달라도 모두 소설, 수필, 시, 극본, 시나리오 같은 활자를 사용한 작품들이었다. 다른 요소라고 해 봐야, 중간중간 삽입된 몇몇 삽화가 전부였다. 그런데... 교과서의 ‘문학의 다양한 변용’ 파트의 첫 페이지를 펴 보니... 첫 장부터 만화가 나온다! 그것도 풀 컬러로! 이 정도라면 지루하게 느껴질 만한 얼음공주 이야기라도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작가 이름을 보니 ‘MAX’라는 이름이 보인다. MAX라면... ‘오션 코믹스’에 여러 편의 작품을 연재하는 유명한 만화가 아닌가! 역시 이름값이 있으니 더 끌리게 된다.
세훈은 교과서에 있는 만화를 보며, 또 키라 선생의 말을 들으며 찬찬히 자신이 어린 시절에 봤던 얼음공주 이야기 동화를 떠올려 본다. 세훈이 기억하는 얼음공주 이야기의 원래 줄거리는, 여주인공이 마왕의 마법으로 얼음 속에 잠이 든 후, 먼 훗날 깨어나서 왕자, 용사, 마법사 등의 친구들을 만나, 겨울이 된 그 세계에서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나서 마왕을 쓰러트려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화를 보니, 분명 원작 동화에는 보이지 않았던 여전사 캐릭터, 남자 꼬마 캐릭터가 하나씩 추가되었고, 그 덕분에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이야기 또한 다양해졌다. 그림 또한 유명 만화가인 MAX답게, 세훈이 아는 동화 그림체가 아닌 판타지 게임에서 자주 보이는 그림체로 그려졌다. 또 주인공 이름도 ‘세라’로, 세훈이 기억하는 원래 이름은 아니다. 세훈은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하는 이런저런 대화나 행동들을 보며 웃음을 짓는다. 특히 글로는 보기 힘든 등장인물들의 개그 장면이라든지... 그런데, 역시나 주인공은 일행들 속에서도 외로움을 좀 많이 타는 듯하다. 혼자 먼 산을 바라보는 장면이나, 혼자 쪼그려 앉아 어딘가를 보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어쩌면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고 보니까, 어린 시절 읽던 동화에서도 여주인공은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많이 외로워했던 것 같다. 무서움도 많이 탔던 것 같다. 오늘따라 그런 주인공의 모습이 세훈의 눈에 더욱더 띈다. 기분 때문인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2 댓글
SiteOwner
2020-02-05 22:41:33
분명 어제 입춘을 맞았는데 오늘은 1월의 어느 때보다도 추운 날이 지속되고 있으니, "봄이 왔건만 봄 같지 않다[春?不似春]" 라는 옛 시의 한 구절이 그대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런 오늘에 이 회차를 읽으니, 세훈의 처지가 일상을 살면서 이것이 일상같지 않다는 것이 더욱 생생히, 그리고 기분나쁠 정도로 뼈애 사무치게 느껴집니다.
그런 비일상 속에서는 역시 일상이 새롭게 느껴지는 법. 작중의 사람들에게는 이미 잘 알려져 있어 식상하기까지 한 그 얼음공주 이야기가 새로이 보이는 것도 역시 비일상의 힘일 듯합니다.
마드리갈
2020-02-06 16:10:01
화엄경에 나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만고의 진리네요.
분명 다른 것은 모두 같을텐데, 문제의 이상한 협박전화를 받은 이래로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고, 일상도 일상이 아닌...
그런 세훈에게 대체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그게 문제예요. 주변 인물들이 앤드루 카슨과 비슷한 운명을 겪을 상황이 벌어진다는 예고가 이미 실제 사례까지 있으니...
역시 근심이 있으면 외부로 표출되는 건 인지상정인가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