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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점심시간. 여느 때처럼 세훈과 주리는 운동장이 보이는 분수대 옆에 앉아 각자 싸온 도시락을 먹고 있다.
“뭐 싸왔어?”
밥을 먹던 중 주리가 세훈을 보고 묻는다.
“아... 그냥 계란말이하고 돼지고기 볶은 거.”
“에이... 뭐 특별한 거 있으면 하나 먹어 보려고 했더니...”
주리는 실망 섞인 말투로 말하고는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말한다.
“그럼, 내가 싸 온 캘리포니아 롤 하나 먹어 봐.”
“아, 고마워.”
주리는 세훈에게 자기가 싸 온 캘리포니아 롤 하나를 준다.
“이거... 너희 어머니가 하신 거야?”
주리는 입안에 캘리포니아 롤을 가득 넣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음...”
세훈은 캘리포니아 롤을 한입 베어 물어 먹어 본다. 부드러운 촉감이 입 안 전체에 퍼지고, 혀에서는 연어 알이 그대로 느껴진다.
“맛있는데, 이거?”
“당연하지. 우리 엄마 손맛이 좋으니까.”
세훈은 천천히 캘리포니아 롤을 씹으며 맛을 음미한다. 주리는 세훈이 먹는 모습을 보다가 자기 AI폰을 본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세훈을 보고 말한다.
“너...”
“아, 왜?”
“아까 문학 시간에 너무 감정 이입해서 본 거 아냐?”
“아니... 왜?”
“그거 뻔한 내용이던데... 아까 옆에서 너 보니까 주인공이 외로움 타고 그러는 장면에서 넋을 놓고 보고 있더라.”
“......”
“왜 그래? 너 요즘 외로움 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런 게 아니라...”
세훈은 대답하는 데 애를 먹는다.
“아니면, 어제 그 전화 때문에 불안해서 그러는 거야? 지금의 너라면 그럴 가능성이 더 크겠네.”
이럴 때마다 세훈은 주리가 마치 자기 위에서 놀고 있는 신적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다. 아마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랬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도 쭉. 어쩌면 그렇게도 세훈의 생각을 잘 읽어내는지!
“아... 맞아.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세훈은 감탄 반, 탄식 반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한다.
“네 마음 잘 알지.”
“고... 고마워.”
“아마 혼자서 큰 짐을 짊어진 것 같아서 고민이겠지.”
“......”
“그런데 네가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짐은 네가 생각했던 것만큼 큰 게 아닐 수도 있어. 그들이 아무리 무섭게 보여도 말이야.”
“그렇겠지. 그럴 가능성이 커.”
세훈은 눈빛을 똑바로 한 다음 말을 잇는다.
“하지만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짐이 될 수도 있겠지. 만약 여기서 내가 잘못 대처한다면 이 짐은 3년 내내 짊어지고 가게 될 수도 있어.”
바로 그때.
“여!”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세훈과 주리는 뒤를 돌아본다. 돌아보니 벤치 바로 뒤에 운동부원 후지타가 서 있다.
“뭘 그렇게 고민하고 그래?”
후지타는 장난스럽게 말한다.
“아... 아니야.”
“무슨 짐을 진다고 그런 것 같은데...”
“아... 아니... 내가 무슨 짐을 진다고...”
세훈이 얼버무리자, 후지타는 장난기를 빼고 말한다.
“방금 전에 확실히 들었다니까. 무슨 짐을 진다고 그랬잖아?”
“......”
“여기서 말하기는 좀 그런 건가?”
“으...음...”
“뭐, 굳이 강요는 안 할게. 누구나 비밀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테니까.”
세훈은 속으로 끙끙 앓는다. 그게, 혼자만의 비밀이 아니라, 모두가 위험하니까 그런 건데!
“그런데, 이거 옛날 속담이기는 한데, ‘철벽을 깨트릴 수 없으면 뛰어서 넘어라’라는 말 있잖아? 그 말, 딱 지금의 너한테 맞는 말인 것 같은데.”
“어... 그런가? 뭐, 그런지도...”
“아, 내가 지금까지 한 말은 그냥 헛소리라고 생각해 줘. 그럼 나는 운동부 스케줄이 잡혀 있어서 이만 가 볼게. 내가 한 말 잘 생각해 보고!”
“어... 이따가 봐.”
세훈이 어색하게 인사하자 후지타는 손을 흔들고는 체육관 쪽으로 간다. 후지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세훈은 크게 한숨을 내쉰다. 후지타의 말을 들으니 한순간은 고민이 해결될 것만 같았는데, 오히려 더 많은 걱정거리가 썩은 나무에 버섯 피어 올라오듯 세훈의 머릿속에서 고개를 내민다. 주리는 세훈의 근심으로 가득 찬 얼굴을 보더니, 젓가락으로 롤 하나를 집어 들고는 말한다.
“내 거 하나 더 먹을래?”
“아니... 괜찮아.”
세훈은 애써 주리에게서 얼굴을 돌린다. 주리가 안쓰럽다는 얼굴로 세훈을 보며 말한다.
“그렇게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려고 하지 말라니까.”
하루의 모든 수업이 끝나고, 세훈은 교내 도서관에 들어선다. 독서부 활동이 있어서다.
“어, 세훈이구나.”
도서관 입구에서 금발의 남학생 한 명이 세훈을 반갑게 맞아 준다.
“아, 네, 안녕하세요, 선배님.”
세훈을 반갑게 맞아주는 이 2학년 남학생의 이름은 리하르트 폰 라이첸슈타인. 세훈이 부 활동을 할 때 자주 만나게 되는 관계로 믿고 따르는 선배이기도 하다.
“왜 그렇게 또 얼굴이 똥 씹은 상이야?”
“아... 아니...”
“또, 그 녀석들 때문이겠지 뭐.”
“아... 그게...”
“다 알아 인마.”
세훈은 겉으로는 애써 어색하게 웃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안도와 걱정과 불안감이 한데 섞인 한숨을 깊게 내쉰다. 곧장 소설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으로 간다. 세훈은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고른다. 제목은 ‘어둠을 가로지르는 기사’. 요즘 인터넷상에 연재 중인 판타지 소설 중 10대~20대 기준으로 상위 10위 안에 든다. 물론 읽고 싶어서 고른 건 아니다. 오늘은 책을 읽고 싶어도 읽힐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세훈은 책을 들고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 앉는다. 책은 펼쳐만 놓고 보는 척만 한다. 그리고 창문 너머를 본다. 가까이는 정원 딸린 주택가가 보이고 멀게는 공원과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물론 그 풍경을 보려는 건 아니다. 세훈은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 그러나 그 생각에 잠긴다는 건 감상에 잠긴다는 것이 아니다. 그의 머릿속은 마치 벌집처럼 들쑤셔져 있다. 진언이 형이나 후지타가 한 말이... 정말 도움이 될까? 그러고 보니, 어제 서언도 그런 말을 했다. 상대방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라고. 그런데, 상대방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지 않은가? 초능력자라고 하면 어떤 능력을 사용하는지조차 알 수 없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하란 말인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 시간 앞에서, 그 말들은 너무나도 원론적일 뿐이다. 또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러만 간다.
저녁 5시. 세훈과 주리는 나란히 지하철역을 향해 걷고 있다.
“이야... 해 지는 것 좀 봐.”
“해 지는 게 왜? 그냥 평소하고 다를 게 없는데.”
“네가 요즘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래. 저렇게 구름 너머로 비치는 저녁 햇살 같은 것도 보면서 네 머리도 좀 쉬게 하라고.”
“그게 말은 쉽지...”
세훈은 그렇게 말하며 주리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붉은색 귀걸이가 햇빛을 받아 더 붉게 빛나고 있다. 잠시 넋놓고 그것을 보는 세훈이지만, 이내 수많은 걱정이 세훈의 머릿속을 엄습한다.
“그건 그렇고...”
주리 역시 고개를 돌려 세훈을 보고는 말한다.
“왜?”
“못 도와줘서 미안해.”
“에이, 왜 그래? 걱정 마. 헤쳐나갈 수 있으니까.”
세훈은 애써 웃어 보인다. 하지만 주리는 못 믿겠다는 얼굴을 한다.
“걱정스러운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그러네! 몇 번을 말해?”
세훈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인다.
“그래, 스스로 헤쳐나가는 게 중요하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 세훈을 보고, 주리는 차분히 말한다.
“하지만 적절한 때의 적절한 도움은 필요한 법이야.”
“그 ‘적절한 때’하고 ‘적절한 도움’이란 게 뭔데.”
“안 그래도 여기 모셔 왔지.”
어느새, 세훈과 주리의 앞에 한 여성이 서 있다. 밤색 머리에 베이지색의 캐주얼 의상을 입은 여성인데... 세훈의 눈에 익다. 처음 보는 사람이 아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세훈의 머릿속에 들어오는 건, 며칠 전의 그때다. 맞다. 메이링과 레아 옆에서 다니던...
“마... 맞아!”
“그래. 한 번 봤지. 그때는 바빠서 소개를 못 했는데, 해야겠네.”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내 이름은 ‘파라 사라고사’라고 해. 저번 2월에 미린대를 졸업했지.”
“어? 정말요? 그럼 우리 학교에도 아는 사람들이 좀 많겠네요?”
파라는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좀 있지. 그건 그렇고, 네가 어떤 상황인지는 주리한테 들었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도와줄 테니, 거기에 대해 걱정은 하지 마.”
파라가 처음부터 자신 있게 말하자, 세훈은 머리를 갸우뚱하며 말한다.
“하지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거죠?”
“내일 되면 알게 돼. 그럼, 내일 보자!”
파라는 손을 흔들며 세훈, 주리와 헤어진다. 세훈은 허탈한 눈으로 한 번 뒤를 돌아본다. 파라가 멀어지자, 주리는 다시 세훈을 걱정스럽게 돌아본다.
“내가 다시 한 번 말하는데, 혼자 모든 걸 짊어지면 안 돼. 알았어?”
“아... 알았어. 알았다고.”
세훈은 건성으로 대답하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 누구보다 더 중압감을 느끼는 사람은 바로 세훈 자신이기에.
그날 저녁, 세훈의 집.
“다녀왔습니다.”
세훈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힘빠지는 목소리로 말한다. 이진과 세훈의 아버지 우현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다가 세훈을 돌아보며 말한다.
“어, 왔니?”
“네.”
“역시, 무슨 일이 있나 보구나.”
“에이,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러면 왜 말에 힘이 다 빠지고 그래.”
“그런 거 아니에요.”
세훈은 이진과 우현을 한 번 돌아보고는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간다. 세훈이 방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우현이 이진에게 묻는다.
“세훈이, 오늘 왜 저러지? 어제도 잠을 잘 못 자더니.”
“모르겠네. 뭔가 말하기 어려운 게 있는 것 같은데,,,”
“놔둬. 나도 세훈이만한 나이에 저랬으니까.”
“그런데 놔둔다고 해결되는 문제일까.”
그 시간, 세훈의 방. 세훈은 방 안을 한 번 둘러보고는 컴퓨터를 켠 다음, 침대 위에 털썩 앉는다.
“세훈 님.”
컴퓨터 메인 화면이 켜지자 *나라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 *나라, 왜?”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미안해요.”
“아니야.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해 줬어. 이제 내일의 일에 대처하는 건 나의 몫이야.”
“그럼, 저는...”
“이따가 잘 때, 잠 잘 오는 곡이나 하나 틀어 줘.”
“네, 그럼 오늘은 전에 틀어 드렸던 바이올린 독주곡 하나 틀어 드릴게요.”
“고마워.”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2 댓글
마드리갈
2020-02-08 21:38:42
철벽을 깨트릴 수 없으면 뛰어서 넘어라...멋있는 말이예요.
그렇죠. 사실 어느 한 가치에 매몰되다 보면 한계에 부딪치기 마련이고, 다른 면을 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어요. 죠죠의 기묘한 모험 2부의 죠셉 죠스타와 완전생물 카즈의 대결 같은 것이 바로 그것. 사실 카즈를 정공법으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카즈가 우주 밖으로 튕겨나가서 극저온에 얼어버려 생각을 그만두게 된 상황이 일어났다 보니 결국 승자는 죠셉으로 결착났어요. 즉 강해서 이기는 게 아니라 이겼으니 강한 것.
그렇죠. 결단의 순간이 왔어요.
Lacta alea est(주사위는 던져졌다).
SiteOwner
2020-02-14 20:06:24
아무리 태연한 척을 하려 해도 근심이 있거나 뭔가가 마음에 걸리면 부지불식간에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표정으로든, 눈빛으로든, 그리고 다른 형태로든.
예전에 읽은 글 중에 일본의 문인 이노우에 히사시(井上ひさし, 1934-2010)가 쓴 칼럼이 있습니다.
그 글에는, 열차의 신임 차장이 차내방송을 하다가 실수를 해서 아주 민망한 상황을 연출한 게 나옵니다. "주의해 주십시오(ご注意ください, 발음 고츄-이 쿠다사이)' 라고 할 것을, "50엔 주십시오(50円ください, 발음 고쥬-엔 쿠다사이)" 라고 잘못 발음한 것. 그 문인은 그 신임 차장의 실수를, 그 차장이 뭔가 50엔 관련에 마음을 쓰고 있다가, 발음이 비슷한 말을 해야 할 상황에 혼동해 버린 것이 아닐까 하고 추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