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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속 교토에서 다시 떠올린 라쇼몽(羅生門)

SiteOwner, 2020-03-18 22:19:18

조회 수
152

간혹 이전에 봤던 애니를 돌려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 그렇게 보는 것들은 암살교실, 울려라 유포니엄, 역시 내 청춘 러브코미디는 잘못되어 있다, 하이스쿨 DxD, 교토 테라마치 산죠의 홈즈, 타마코 마켓, 이나리 콩콩 사랑의 첫걸음, 방과후 주사위 클럽 등인데, 공통적으로 교토가 등장합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1927)의 1915년작 소설이자 쿠로사와 아키라(黒澤明, 1910-1998) 감독의 1950년작 영화 라쇼몽(羅生門)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특히 대학 때 도시개발 및 조경 관련으로 교토역 주변의 재개발 관련을 연구했다가 라쇼몽과의 접점이 생기게 되어 더욱 그렇습니다.

라쇼몽에서는 같은 사건을 두고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진술들이 엇갈립니다.
어느 나무꾼이 사무라이가 산에서 피살된 것을 발견하고 관청에 신고합니다.
사무라이를 죽인 자는 산적이고, 그 산적은 사무라이의 아내에 성폭력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모두 말이 다릅니다.
산적 왈, 성폭력은 화간이고 사무라이는 결투에 패해서 죽었다고 합니다.
사무라이의 아내는, 남편을 죽인 사람은 자신이며, 자신은 그냥 몹쓸 일을 당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무당의 주술을 통해 사무라이의 영혼이 진술한 것은 사무라이 자신이 자결했다는 것.
사건을 관청에 신고한 나무꾼은 두 남자의 결투는 그 여자가 사주한 것이며, 결국 산적이 이겼다는데 사실 그는 사무라이의 아내가 가진 단도를 훔친 자였습니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사무라이가 죽어 있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것인데, 살아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에 최대한 유리한 방향으로만 진술하여 자기합리화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라쇼몽 효과.
특히나, 보는 애니 중에서 사람이 이득을 관철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뭐라도 한다는 것이 유독 강하게 부각되는 것이 있어서 이게 또 씁쓸하게 느껴집니다. 암살교실에 등장하는 "엔드의 E반" 이라는 구조적인 학내차별의 정당화, 역시 내 청춘 러브코미디는 잘못되어 있다에서 주인공이 간파하고 있는 인간관계상의 암묵적인 금기, 하이스쿨 DxD에 나오는 인간과 타천사의 혼혈에 대한 차별, 교토 테라마치 산죠의 주된 소재인 미술품의 감정과 골동품 세계의 가장 큰 위협인 위작과의 전쟁, 이나리 콩콩 사랑의 첫걸음에서 좋아하는 이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다른 사람이 되었다가 곤경에 빠지는 상황 등을 보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인권을 말하고 해도 여전히 어두운 부분은 여전히 존재하고 언제든지 예측불허의 방향으로 발휘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됩니다.

도처에서 일어나는 온갖 궤변에서, 1세기도 더 전에 라쇼몽에 기술된 상황을 비웃기에는 현대가 하등의 변한 게 없다는 반향이 느껴지는 것은 저 혼자만의 사견인 건가 싶습니다.
SiteOwner

Founder and Owner of Polyphonic World

2 댓글

대왕고래

2020-03-29 22:48:48

요즘 애니들은 무슨 목적을 갖고 만들어도 이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만드는 것이니까, 당연히 이 세상의 모습이 반영되겠죠.

라쇼몽을 만든 사람도 그랬을 거에요. 작품이기에 이 세상을 반영하는 것이죠.

그래서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라쇼몽과 요즘 애니가 엮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묘하네요.


또 하나 당연한 걸 언급하자면... 라쇼몽과 요즘 애니에서 보이는 인간의 어두운 면.

사람의 이기적인 모습은 변할 수가 없으니 이는 당연하겠죠. 그럼에도 라쇼몽이나 요즘 애니나 그 시대의 차이에 무관히 사람의 어두운 면을 똑같이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은, 당연함에도 씁쓸하네요.

SiteOwner

2020-03-31 22:51:14

이전에 쓴 글인 운주주판과 시네마현, 그리고 그 후일담에서 드러났듯이 무관해 보였던 두 가지 사안이 한참 뒤에 의외의 실마리로 엮이기도 한 일이 있었는데다, 이번의 라쇼몽과 요즘의 애니가 이렇게 또 엮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일부러 만들어도 이렇게는 못할 것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가 싶기도 합니다.


인간의 여러 단면이 여전히 유지되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자 빛과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각 시대의 창작물에 달라집니다. 아마 미래의 사람들이 우리가 현재 즐기는 창작물을 보면 또 어떻게 해석할지, 그건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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