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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건 알아.”
세훈의 대답은 단호하다.
“하지만, 부탁이야. 오지 않았으면 해. 오늘과 같은 상황에 말려들기에 너희들은 아직 어려. 그리고 나는 원래 아무도 나 때문에 고통받는 건 원하지 않아. 그러니까...”
“고통받는다니?”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요즘 내게 자꾸 벌어지고 있는 일들 때문에, 괜히 내 주변에 있다가는 나 때문에 또 누군가가 애꿎은 피해를 보게 될까 두려워.”
“......”
세훈은 잠시 말없이 자리에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리를 나서는 세훈의 등 뒤로, 민이 말한다.
“잘 갔다 와.”
세훈은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고는, 그대로 사람들 속으로 사라진다. 세훈이 사람들 속으로 사라진 걸 확인한 민과 유는, 쟁반을 들고 빵을 고르러 간다.
저녁 8시, 미린 중앙공원. 세훈은 호숫가에서 아모르 숲을 향해 걷고 있다. 문득 주위를 돌아본다. 주위는 초고층 아파트, 그리고 RZ타워를 위시한 초고층 빌딩들의 조명으로 환하다. 하지만 세훈이 있는 공원은 가로등만 길가를 은은히 비출 뿐이다. 호숫가는 그래도 낫다. 빌딩과 아파트의 조명이 호숫가에 비치니까. 하지만 세훈의 눈에 보이는 숲은, 뭐가 나올지 모르는, 그야말로 판타지 소설이나 다큐멘터리 같은 데 나올 법한,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어둠만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가장 즐겨 읽는, ‘어둠을 가로지르는 기사’의 장면이 자꾸만 떠오른다.
문득, 전에 병원에서 만났던 앤드루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앤드루가 클라인에게 당했던 아모르 숲은... 낮에는 연인들의 사랑 약속 장소로 유명하지만... 밤에는 그런 게 생각나지도 않을 정도로 공포스러운 어둠만이 가득한 장소였다고 했다. 지금 세훈 역시 거기로 향하고 있다. 친구가 두려움 속에서 처절하게 당해야만 했던, 바로 그 장소로.
문득, 전화벨이 울린다. 세훈의 주머니 속에서.?
“어... 여보세요? 엄마?”
“세훈아, 너 너무 늦는 거 아니지?”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이진의 목소리에, 세훈은 아무 일 없다는 듯한, 그러면서도 조금씩은 떠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 걱정 마요. 모처럼 나가는 건데, 제가 어디 엄마 속을 썩인 적 있나요.”
“그래... 네가 걱정을 말라니까 다행이네.”
그렇게는 말하지만, 이진의 목소리는 아직 마음이 안 놓이는 듯하다.
“너무 늦지 말고.”
“네... 알았어요.”
세훈의 목소리는 살짝 떨린다.
“걱정 마요.”
세훈은 전화를 끊는다. 잠시 뒤를 돌아본다. 길가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지금 세훈이 가는 아모르 숲이 공원에서도 조금 외진 곳이어서 그럴까. 주말이라 공원에 놀러 나온 사람도 많을 텐데...?
바로 그때, 세훈은 오른쪽 어깨가 살짝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뭐지... 방금 그 이상한 느낌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본다. 아무것도 없다. 이상하다. 뭔가 이상한데...
또다시, 어깨가 무거워진다. 이번에는 왼쪽 어깨. 어깨에 느껴지는 건 책 하나 정도의 무게. 확실하다. 이건 누군가의 습격. 그러나, 클라인은 아니다!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본다. 실루엣이 보인다. 사람 한 명. 그런데 하늘 높이 떠 있다!
“알아채는 게 빠르군.”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세훈의 머리 위에서!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 분명, 며칠 전에 들었던 그 목소리다. 기분 좋게 등교하던 세훈의 뒤에 나타나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던 그 목소리. 알 것 같다. 이 목소리는...
“앤서니 탤리!”
“흐흐흐... 그래, 맞아. 분명, 너는 빈센트 선배님의 호출을 받고 여기에 온 거지.”
“너... 원하는 게 뭐냐?”
“너는 빈센트 선배님께 갈 수 없다. 네가 선배님께 가기 전, 너는 내게 쓰러진다.”
탤리는 한껏 호기롭게 말한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세훈의 두 어깨에 책 3권의 무게가 전해져 온다. 세훈의 다리가 잠시 흔들린다. 세훈이 하늘 위를 올려다보려는 때, 탤리는 금세 또다시 높이 뛰어오른다.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하나? 잡아 볼 수 있으면 잡아 보라고.”
“이게 네 능력이냐?”
“맞아. 나는 수십 미터든 수백 미터든 높이 뛰어오를 수 있고, 발을 내디딜 때도 거기에 가해지는 무게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지. 그래, 이게 바로 내 능력이다!”
“허... 대단하신 능력이로군.”
세훈은 비꼬듯 말한다.
“너 이 자식!”
탤리의 목소리가 올라간다. 동시에 세훈의 어깨에 10kg짜리 아령 두 개가 떨어지는 듯한 무게가 전해져 온다. 세훈의 다리가 순간 휘청거린다. 몸이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린다.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찰나, 손으로 땅을 짚는다. 세훈이 머리 위를 올려다본 순간, 탤리는 어느새 약 수십 미터 정도로 높이 뛰어올랐다.
“흔들리고 있군. 안 그래?”
세훈의 머리 위에서, 탤리는 한껏 비웃음을 섞어 가며 말한다.
“왜 그렇게 일어서려고 하는 거지? 무릎을 꿇으면 편할 텐데!”
어디선가 ‘탁’ 하는 소리가 들린다. 세훈의 어깨 위는 아니다... 돌아본다. 분명 나무 위쪽... 그러나 어두운 탓에 잘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 위이기에, 실루엣 같은 것조차 보이지 않는다.
“너는 말이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나무 위에서 탤리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나는 빈센트 선배님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선배님의 능력을 알고 난 그 순간부터, 존경심과 복종심이 저절로 들었는데 말이야... 너는 그 반대라니... 참으로 한심하고, 어리석다고도 할 수 있군.”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이지?”
“역시나 머리가 안 돌아가는군.”
탤리는 웃음을 흘리며 말한다.
“선배님의 능력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지. 과연 선배님이 너를 처음 만났을 때 자기 능력을 다 보여 주었을 거라고 생각하나?”
“......”
탤리는 한심하다는 듯, 나무 아래 길에 서 있는 세훈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나한테 무릎을 꿇으라고. 선배님은 말 잘 듣는 사람을 좋아하시니까.”
“하하하하하하...”
세훈은 탤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웃기 시작한다.
“머리가 돌았나. 왜 웃어?”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건 바로 너로군.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설마 무릎을 꿇으려고? 착각은 자유라지만.”
“너 이 자식...”
세훈의 옆에 있는 나무가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한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니...”
바로 그 순간, 세훈 옆으로 나뭇가지 하나가 턱 하고, 힘없이 떨어진다. 그 위로, 나뭇잎들이 이불 덮듯 나뭇가지 위에 덮인다. 세훈은 서둘러 하늘 위를 올려다본다. 조그맣게, 사람의 그림자가 하늘 위에 보인다. 조금씩, 그 그림자가 점점 커진다. 세훈 쪽으로, 빠르게 다가온다!
“그 썩어빠진 머리, 지금 폐기처분을 해 주겠다!”
탤리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들려 온 그 순간, 세훈은 확실히 본다. 탤리의 두 발이 세훈을 바로 향하고 있는 것을. 탤리가 운동에너지를 한데 끌어모아 세훈에게 바로 낙하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세훈과 격돌하기까지 채 3초도 안 남았다는 것을!
바로 그 순간, 세훈은 본능적으로 몸을 어딘가로 날린다. 그리고 약 2초 후... 동시에 두 곳에서 ‘펑’ 하는 충격음이 들린다.
잠시 후, 한 사람이 나무 밑에서 몸을 비틀며 일어선다. 거친 숨을 내쉬며 길가로 조심스럽게 걸어간다. 또 한 사람이 거기 쓰러져 있다. 쓰러진 사람은 입에서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
“이봐.”
쓰러진 사람의 앞으로, 나무 밑에서 일어선 사람이 다가가며 말한다.
“내 머리가 썩어빠졌다더니, 썩은 건 네 머리였군 그래.”
“이... 이 자식...”
“왜 그래? 어디 잡을 수 있으면 잡아 보라고.”
세훈의 말에 발끈한 탤리는 몸이 쑤셔 오고 다리가 욱신거림에도 일어서려 한다. 그런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다리를 움직이려 하는 순간, 다리의 욱신거림은 극심한 고통으로 바뀐다!
“으... 윽... 너... 이 자식...”
“아, 정정하지. 어디 한 번 잡아 봐. 썩은 나뭇가지처럼 부러진 네 다리로 일어설 수 있다면 말이야.”
세훈은 일어서지 못하는 탤리를 뒤로 한 채 계속 아모르 숲을 향해 걸어간다.
걷는 중에도, 세훈의 머릿속에 탤리가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선배님의 능력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라...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세훈이 겪은 클라인의 능력은, 분명 메이링의 말에 따르면 그냥 그렇고 그런 능력이었다. 하지만 앤드루가 그렇게 잔인하게 당한 걸 생각해 보면 또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탤리는 그런 말을 한 걸까...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세훈은 주위를 돌아본다.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아모르 숲에 이제 막 발을 들여놨기는 하지만, 아직은 길가에서 멀지 않다. 가로등의 불빛도 아직은 세훈이 서 있는 곳까지는 닿는다.
“너, 분명히 조세훈 맞지.”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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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마드리갈
2020-03-23 21:09:40
역시 알 수 없는 것과 싸우는 건 그 자체가 무섭고 벅차기 마련이예요.
게다가 이전 회차에서 언급된 아모르 숲은 연인들이 잘 이용한다는데, 역시 깊고 어두워서 노골적인 애정행각이 타인에게 잘 보이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는만큼 숲 속의 누군가를 미리 알아보기도 지극히 곤란하다는 문제가 있어요. 메이링이 "그냥 그렇고 그런 능력" 이라고 언급했지만 실체를 알 수 없는데다 장소가 장소인만큼 곤란...
사실 어린이라도, 내려가는 계단 앞에 무방비하게 서 있는 어른을 있는 힘껏 떠밀면 그 어른을 추락사시킬 수 있어요. 그러니 방심할 수가 없어요.
이제 문제의 빈센트 클라인 본인이 등판하는 걸까요.
SiteOwner
2020-03-27 23:03:38
자신은 바로 자기 자신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 누군가의 수족으로 살아서는 곤란합니다.
그리고, 본 순간부터 자신의 주체성을 포기한 것은 그다지 현명한 선택이 아닙니다. 모실 주군을 잘못 고른 범증의 어리석음은 고전의 사례로 충분하지, 현재나 미래에 반복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앤서니 탤리, 등장은 화려했지만 퇴장은 처참했습니다. 자업자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