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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클라인과 마주보고 선 세훈의 눈앞에는... 클라인의 손에 쥐어진 잘려나간 와이어가 보인다! 그것도, 손에 한 움큼, 무더기로 들고 있는!
“봐라! 네 부질없는 수작은 간파되었다. 한 번은 속아 줄 수 있어도 두 번, 세 번 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오산이다!”
클라인은 와이어 조각들을 멀리 던져 버린다. 세훈은 그렇지 않아도 입안에 얼마 남지 않은 침을, 자기도 모르게 꿀꺽하고 삼킨다. 클라인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세훈의 눈앞으로 가져간다. 곧이어, 세훈의 눈이 뜨거워질 정도의, 아니 세훈의 온몸을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듯한, 저 땅 밑에서 스며나오는 마그마와도 같은, 그런 기운이 세훈의 온몸을 휘감는다.
“나는 충분히 네게 기회를 주었다. 그 기회를, 줘도 못 찾아 먹으니 어쩔 수 없군. 몇 번을 망설였지만, 역시 너는 처리해야 하겠다!”
클라인이 막 오른손을 뒤로 젖히고 세훈을 향해 조준하는 그때.
“흐흐흐흐... 흐하하하하하...”
세훈은 갑자기 정신 나간 사람 마냥 미소를 지어 가며 웃기 시작한다. 클라인은 세훈의 갑작스러운 웃음에 잠시 세훈을 노려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김빠진 목소리로 세훈에게 말한다.
“드디어 머리가 어떻게 됐군그래? 패배를 인정하랬는데, 왜 웃고 그러는 거지? 설마, 정신이 나가 버린 건 아니겠지?”
“착각하지 말라고. 나는 네가 생각하는, 절대 그런 뜻에서 웃는 게 아니니까.”
“그러면 뭐지? 나는 네 웃음의 뜻을 도저히 모르겠는데.”
“뭐냐고? 너는 절대 자만하지 않았어야 했어.”
“뭐야?”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거든!”
세훈이 일갈하는 그 순간, 클라인은 손 밑에 뭔가 이상한 감촉을 느낀다. 가느다랗고 탱탱한 느낌! 분명 와이어! 방금 잘랐을 텐데... 어째서?
“혼란스러운가 보군. ‘내가 와이어를 방금 잘랐을 텐데’ 분명 이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클라인의 얼굴은 흙빛이 된다. 어떻게... 어떻게 생각을 읽어낸 거지? 도대체 어떻게... 설마... 조세훈 저 녀석의 초능력이 저런 식으로 발현된 건가? 아닌데... 분명히... 분명히... ‘그 느낌’은 없었는데...
이상하다...
이상하다...
이상하다...
턱-
그 와이어... 와이어의 느낌... 손목을 둘러서 전해져 온다! 양 손목에 모두! 조여 온다! 급히 손목에 힘을 주어 손을 빼 보려고 하지만... 이미 늦었다! 와이어는 이미, 클라인의 양 손목을 옭아매었다. 빼려야 뺄 수 없을 정도로.
“네... 네놈이... 네놈이 감히 이런 짓을...”
“너를 만나기 직전에 나무에 묶어 놨지. 다른 와이어들을 다 잘랐을 때, 이건 안 잘랐더군. 뭐, 꼭꼭 숨겨 놔서 알아볼 수도 없었을 테지만 말이야.”
세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한다.
“어디 한 번 그것도 끊어 보시지. 조금 전에도 잘만 했잖아?”
클라인은 다시 한번, 공간을 끊어내는 그 능력을 발동해 보려 한다. 손을 벌린다... 그러나 거기까지. 손이 와이어에 묶여 버렸으니 어떻게 해 볼 방도가 없다...?
“이... 여우 같은 자식... 네가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클라인은 다시 한번, 손에서 능력을 발동해 보려고 한다. 호흡을 바로 하고, 다시 한번, 천천히. 세훈이 있는 곳을 베어내 버린다고 생각한다. 그거면 된다. 그거면 될 텐데...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분명히 능력이 발동해야 할 텐데...?
“너... 너... 무슨... 무슨 수작을!”
“나는 아무 짓도 안 했어. 네 정신이 흐트러져서 그런 거겠지.”
“말해라... 무슨 속임수를 쓴 거냐!”
클라인은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아무 짓도 안 했다니까? 분명히 말해 두지. 네놈의 패인은 결코 나나 네 부하 같은 다른 데 있지 않아. 심지어 네가 내 친구를 해친 데 대한 분노도, 네 패인은 될 수 없어. 네놈의 패인은 다름 아닌 너 자신에게 있다고. 알겠어?”
“좋아...”
클라인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힌다. 그것도 세훈의 바로 앞에서. 세훈은 머리를 한 번 흔들고는, 여전히 의심을 풀지 못한 얼굴을 한다.
“왜 그래? 네놈답지 않은 행동을 다 하고.”
“이건 쇼가 아니다. 나는 네놈에게 지금...”
“지금 뭐?”
“경외심을 느끼고, 무릎을...”
“무릎을 뭐? 말해 봐.”
“꿇을 줄 알았냐! 하하하하하하...”
클라인은 마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더니, 주위를 둘러보고 말한다.
“거기! 뭣들 하는 거냐? 어서 이 녀석을 끝장내지 않고!”
그런데 세훈은 클라인의 발악에 찬 말을 듣고도 전혀 요동하지 않는다.
“너 이 자식... 뭣 때문에 이렇게도 태연하지? 내 부하들이 지금 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니까? 허세 그만 부리라니까!”
“아니... 지금 상황은, 그 반대야.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던 거야.”
“뭐... 뭐라고?”
그 순간, 아모르 숲이 마치 야외 콘서트장처럼 환하게 밝아진다. 세훈은 손목에 찬 AI시계를 본다.
“역시나. 아까부터 내가 조작하지도 않았는데, 왜 계속 깜박이고 있나 했어.”
세훈과 클라인은 동시에, 불빛이 반짝이는 곳 중 각각 다른 한쪽을 본다. 익숙한 얼굴의 사람들과, 익숙하지 않은 얼굴의 사람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 그 뒤로는 VP재단의 로고가 있는 차도 한 대 와 있다. 세훈은 그 사람들을 보고 안도하는 얼굴로 다가가지만, 클라인은 그 사람들이 가까이 올 때마다 한 발 한 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난다. 그것도 얼굴은 울상이 되기 직전에다, 와이어에 묶인 손은 풀지도 못하고 어떻게든 뭐라도 하려다 보니, 눈물 콧물 다 흘리며 싹싹 비는 꼴이 되었다.
“호오. 자네가 빈센트 로스 클라인 군이구만.”
클라인의 뒤에서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 누구야... 누군데 이런 수작을 거는 거야!”
클라인은 울며불며 소리 지른다. 그와 동시에, 클라인의 어깨를 누군가 뒤에서 슬며시 짚는다.
“나는 VP재단의 스티븐 사이먼 엘더 박사라고 하네. 자네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자네와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따라와 주겠나?”
“다... 당신이 뭔데... 뭔데 그래! 당신...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기에...”
클라인이 신경질적으로 엘더 박사에게 소리 지르려는 찰나, 양옆에서 정장 입은 사람들이 클라인의 팔을 잡는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따가 하겠네. 따라와 주게.”
클라인은 몸을 배배 꼬고 이리저리 비트는 등 나름 저항해 보지만, 정장 입은 사람들에게 그대로 어디론가 끌려간다.
클라인이 숲 저편으로 사라지자, 세훈의 귀에 어디선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조심스럽게 걸어 그쪽으로 가 본다.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진다. 걸음을 재촉한다. 마침내, 세훈의 눈앞에는 어두컴컴한 나무들 대신, 검푸른 비단 위에 보석을 수놓은 듯한 밤하늘, 그리고 도시의 야경이 환하게 비치는 호수가 펼쳐진다. 야경 정도야 밤이면 흔하게 보는 것이지만, 지금 세훈에게는 이것보다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게 없다.
“어딜 그렇게 헤매?”
익숙한, 아니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세훈은 고개를 두리번거린다. 그런데, 잘 보이지 않는다. 어디지? 분명히 목소리는 들렸는데...
“여기 있어, 여기.”
목소리가 들린 곳은 세훈의 바로 옆. 곧이어 누군가 세훈의 어깨를 짚는다. 그쪽을 돌아보니...
“어? 메이링 씨잖아요!”
“왜 그렇게 놀라고 그래.”
메이링은 아무 것도 안 했다는 듯 태연히 말한다.
“아까부터 쭉 여기 있었는데.”
“아까부터... 라니요?”
“주리가 다들 여기로 오라고 했어. 변호사님하고 나한테 말이지.”
이번에는 앨런이 세훈의 앞으로 나와서 말한다.
“그러고 나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연락했지.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주리의 연락을 받고 온 거야.”
“이야, 너 다친 데는 없는 거야?”
파라의 목소리도 들린다.
“이걸로 한 걸음 더 나아간 거지, 안 그래?”
그러고 보니, 어느새 세훈의 앞에는 반가운 얼굴들이 한군데 모여 있다.
“서언이 형... 맞지?”
서언이 고개를 끄덕인다.
“거기에... 레아, 사이, 나타샤, 그리고... 하야토도... 다들 와 줘서 고마워.”
“그러니까, 말했잖아요?”
사이가 이를 드러내 웃으며 말한다.
“뭉치면 강하다고요.”
“아, 그래. 내가 그걸 잊고 있었네. 그런데... 주리는 어디 있어?”
“응? 내가 여기 있는지 아직도 몰라?”
주리가 세훈의 뒤에서 나타나자, 모두 깔깔대며 웃는다. 세훈은 뒤를 돌아본다. 주리가 얼굴 가득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 있다.
세훈의 머릿속에, 그때가 떠오른다.
어린 시절, 세훈을 지독히도 괴롭히던 그 패거리가 빈 교실에서 세훈을 한껏 괴롭히고 나간 후, 혼자서 울먹이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그때를. 해가 질 때까지 교실에서 나가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누군가의 기척이 들리자, 세훈은 뒤를 돌아봤다. 교문 앞에 서 있는 사람, 다름 아닌 주리였다. 주리는 울먹이고 있던 세훈에게 말없이 미소를 지어 주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것 같았던 세훈에게는, 그것이야말로 구원이었다. 몇 년도 전의 일이지만, 세훈은 그때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지금 와서 보니, 꼭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다. 차이점이라면, 지금은 세훈 스스로 그 상황을 이겨냈다는 것이지만. 다시 한번, 세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모여 준 사람들, 특히 주리를 향해 감사의 인사를 한다.?
“저... 세훈 님?”
AI시계에서 *나라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큰일날 뻔했어.”
“천만에요. 감사는 *하나한테 하셔야죠.”
“*하나라니?”
“*하나가 저한테 빨리 사람들한테 연락하라고 아주 닦달을 하더라고요.”
“아... 그래?”
세훈은 밤하늘을 본다. 이토록 밤하늘이 아름다웠던 적이 없었다. 어쩌면, 몇 년 전 그날보다도 더욱 잊지 못할 날이 되리라. 세훈은 그렇게 생각한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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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마드리갈
2020-04-01 22:26:34
결국 클라인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깊고 어두운 아모르 숲에 숨었다지만, 사실은 중인환시하(衆人環視下)에 온갖 추태를 보인 거였네요. 게다가 좌중이 그냥 행인들도 아니고, 초능력자 관련 연구도 수행하고 있는 VP재단의 관계자들도 있으니, 클라인은 이름 그대로 클라인의 항아리에 갇히고 말았어요.
그리고, 정말 뭉치면 강했어요. 게다가 주리야말로 좋은 친구였어요.
주리의 도움을 받은 타력본원(他力本願), 그리고 세훈 스스로의 자력본원(自力本願)은 이렇게 실현되었어요.
SiteOwner
2020-04-02 22:44:57
타인을 조종하여 세훈을 지배하려 했던 클라인이 왜 본인의 힘을 쓰지 않았는지 이유가 알 것 같군요.
결국 자기가 할 수는 없었으니까 타인의 힘을 빌렸어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타인들을 일시적으로 굴복시킬 수는 있었지만, 그 중 제대로 목적을 달성한 사람은 없었는데 클라인 본인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 결과는 저렇게 추한 모습만 연출할 뿐입니다.
요즘은 볼 수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것이지만, 1980년대에만 해도 검은색에 앞문에 흰 글씨로 "공무수행 정부" 라고만 적힌 코란도 롱바디에서 체격이 건장한 남자들이 내릴 때가 가장 무서웠습니다. 클라인에게는 VP재단 사람들이 예의 그 남자들로 보일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