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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자 H] 8화 - 질척거리고 불쾌한 녀석(1)

시어하트어택, 2020-05-01 19:29:40

조회 수
132

5월 6일 화요일 정오, 미린고등학교 1학년 G반 교실. G반 학생들이 여기저기 모여 앉아 자기들끼리 잡담을 하거나, 만화를 보고 있거나, 동영상을 보고 있거나 하고 있다. 복도 밖에는 가끔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장난스럽게 복도를 뛰어가다가, 키라 선생과 마주치자마자 바로 꾸벅 인사를 한 다음, 언제 예의 바른 사람이었냐는 듯 곧바로 다시 방정맞게 복도를 뛰어다니는 남학생도 있다.
이제 창밖 너머, 운동장으로 나가 보자. 운동장을 중심으로, 학교 건물 앞에는 조그만 분수대와 정원이 있고, 담벼락 쪽으로는 나무를 심은 산책길이 있고, 조그만 조각공원도 있다. 농구나 축구를 하는 사람들도 보이고, 벤치 같은 데에 모여앉은 사람도 있고, 아니면 교문 밖으로 놀러 나가기도 한다. 여느 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점심시간이다.
분수대 앞 벤치. 현애가 혼자 앉아서 AI폰으로 뭔가를 보고 있다. 그 근처의 다른 벤치에는 세훈이 또 혼자 앉아서 가만히 먼 곳을 응시하고 있고, 또 다른 벤치에는 다른 학급의 남학생과 여학생 각각 2명씩 총 4명이 앉아 끼리끼리 재잘대고 있다.
현애는 AI폰을 보다 말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여기 미린고등학교로 전학을 오고 나서 두 번째 맞는 점심시간이다. 어제는 월요일이지만, 공휴일이었던 관계로 오늘이 미린고에서의 두 번째 날이다.
“여기-”
맞은편 벤치 쪽에서 누군가가 현애에게 말을 건다. 돌아보니, 4명씩 앉은 벤치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맨 왼쪽에 앉은 금발의 야구모자를 눌러쓴 여학생이 손을 흔들며 말한다.
“남궁현애랬지? 반가워!”
여학생은 모자를 벗는다. 딱히 적대적이지는 않은 것 같다. 현애도 바로 손을 흔들고 이를 보이며 웃는다. 금발의 여학생의 친구들도 손을 흔든다.
“아, 내 이름은 ‘나타샤 로젠가르텐’이야. 일단은... 이 나라의 공주고. 다른 애들은 공주라고 부럽다고 뭐라 그러는데, 나는 영 아니야.”
공주라니! 실물을 보는 것도 놀랍지만, 공주라고는 할 법하지 않은 말을 하니 그것도 더 신기하다.?
“저... 정말? 너, 공주가 맞기는 해?”
“에이, 맞다니까! 하긴, 이렇게 다니는데 누가 공주를 연상해내겠어.”
나타샤는 바로 옆에 앉은, 산발한 은색 머리의 남학생을 쿡쿡 찔러댄다.
“내 순서야? 에... 내 이름은 ‘키릴 카라카차노프’고...”
키릴이라는 남학생은 조금 졸린 듯 말한다.
“우리 반에 한번 놀러 와. 재미있으니까.”
“알았어, 알았어.”
키릴은 자기 옆의 친구들을 돌아본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지, 자기들끼리 보고 계속 재잘대고 있다.
“방해하는 건 예절에 안 맞겠지?”
현애의 말에 나타샤와 키릴은 고개를 끄덕인다.
“뭐, 그러면 나도 방법이 있지.”
현애는 들고 있던 AI폰에 대고 말한다.
“*프로도, 여기 정보 좀 띄워 줄래?”
“알았어!”
현애의 인공지능 *프로도의 말이 떨어지고 나서 얼마 후, 홀로그램이 나타나고 재잘거리는 두 명 위에 각각 신상정보가 나타난다.

[이재경, 남자, 984년 4월 6일생]
[미린고등학교 1학년 C반]

[아일라 무스타파, 여자, 984년 7월 18일생]
[미린고등학교 1학년 B반]

“호오-”
현애가 한참 신상정보를 보고 있을 때, 재경과 아일라가 당황스러워하는 얼굴을 하며 현애를 돌아보고 손을 흔든다.
“왜 그래, 하던 거 마저 해.”
“아니, 그런 거 아니고... 우리도 반갑다고!”
재경과 아일라는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그래, 모두 잘 알았어.”
현애는 나타샤와 친구들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이쪽도, 잘 부탁할게.”
“언제든 놀러 와. 언제든 환영이니까.”
현애는 손을 흔들고는 자리를 뜬다. 이왕 이렇게 일어섰으니, 문득 여기저기 둘러보고 싶어졌다. 우선, 세훈이 추천해 준 산책 코스로 가 보기로 한다. 학교 본관 뒤편으로 이어지는 산책길인데, 미린중학교 연결통로를 가로질러 동관까지 산책길을 잘 꾸며 놨다고 한다. 기대감을 품고 발걸음을 옮긴다. 학교 본관 뒤편으로. 현애가 자리를 뜨는 것을 보자, 그때까지 가만히 앉아 있던 세훈도 바지를 털고 일어나 걸음을 옮긴다.

학교 본관 서쪽에서부터 시작되는 산책길. 울타리 너머로는 정원 딸린 큰 주택들과 조그만 공원이 보인다. 발아래를 본다. 반듯반듯한 블록으로 포장된 구간이 끝나고, 조금은 울퉁불퉁하고 모양도 불규칙한 산책로가 시작되는 지점을 보니 약간의 이질감도 든다. 눈앞을 보니, 양옆으로 늘어선 나무들, 그 밑으로 늘어선 화단, 그리고 군데군데 배치된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보인다.?
이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한 발이 앞의 울퉁불퉁한 돌에 닿는다. 의외로, 평평하게 느껴진다. 다시 또 한 걸음을 뗀다. 닿는다. 잔디가 살짝 덮인 곳에 닿아서 그런지, 오히려 사뿐사뿐 걸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양옆을 한 번씩 돌아본다. 이름 모를 꽃들로 알록달록하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여러 가지 색깔의 이상하게 생긴 돌들은 적절한 곳에서 자기들의 특이한 생김새를 뽐내고 있다. 가끔씩 불어오는 살랑거리는 바람이, 이 낯설면서도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에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시원한 바람을 맞을 때마다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마치 온몸이 풀어지는 듯하다.
하지만, 시원한 바람이라? 꽃이 만개하고, 살짝살짝 땀도 나고, 나뭇잎과 풀잎은 완연히 푸른색을 띠는 이런 날에 시원한 바람이라? 뭔가 맞지 않는다. 따뜻한 바람이라면 몰라도, 시원한 바람이라... 하지만 현애는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뭘까, 이 이상한 예감은... 전에도 느꼈던, 이 좋지 않은 예감은...
그 예감은, 눈앞에 보이는, 꺾어진 산책로에서부터 온다. 마치 누군가가 따라오고 있는 듯하다. 아니면, 바로 앞에서 버티고 서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대체, 무어란 말인가?
점점 이쪽으로 오고 있다.
벽 너머로, 발끝부터 보인다. 천천히 다가오는 남학생의 윤곽이, 나무 너머로 보인다.
현애는 침을 삼킨다. 살짝 찬 기운이 서린 침을 삼킨다.
잠시 후, 나무에 가려졌던 그 남학생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얼굴을 본 순간...
모르는 얼굴이다. 한 번은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분명 1학년인데, 다른 반인 듯하다.
“응? 여긴 웬일이야?”
그 남학생이 먼저 현애 쪽을 보고 말을 걸자, 현애는 짐짓 여유롭다는 듯 말한다.
“뭐긴 뭐야, 산책 중이지.”
현애는 하지만 긴장의 끈은 놓지 않는다.
“그런데 말이야, 너 G반 아니지? 내가 아는 얼굴은 아닌데.”
“맞아. 내 소개를 먼저 하지.”
조금 익숙한 느낌이다. 꽤 불쾌하면서도 절대 현애를 놔 주려 하지 않는 이 느낌. 남학생은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연다.
“내 이름은 슬레인 콘리, 1학년 B반이야. 일단은, 만나서 반갑고.”
반갑다고는 했지만, 전혀 반가운 것 같지 않다. 은근히 비웃는 것 같으면서도, 차가운 목소리다. 마치 커터칼로 살살 찌르는 것만 같다.
“여기서 마주친 이상, 그냥 지나갈 수는 없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현애는 코웃음을 치며 말한다.
“여기는 모두가 걸어 다닐 수 있는 산책로인데, 왜 네가 가라 말라 하는 거야? 헛소리 집어치우고, 네 갈 길이나 가.”
“그래. 네가 한 걸음이라도 옮길 수 있다면.”
이 예감, 익숙하면서도 불길한 이 예감.
틀리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움직일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거기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발이...
끈적끈적하다.
발을 지면에서 떼 보려고 하면,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단단히 달라붙은 껌처럼, 끈적끈적한 게 신발 밑창 전체를 뒤덮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괴물의 손이 땅 밑에서 나와서 두 발을 잡은 것만 같다.
“이게 도대체...”
현애의 눈이 불안정하게 이리저리 굴러간다. 뒤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슬레인은 여전히 선 자리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은 채로 웃음을 흘린다.
“흐흐흐, 발을 버둥거리는 게 마치 늪에 빠진 짐승과도 같군.”
“뭐, 뭐라고!”
현애가 주먹을 불끈 쥔다. 슬레인의 뺨에 닿는다. 눈보라가 밀려오는 듯한 한기가. 슬레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한다.
“가만히 있는 게 좋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점성은 더 강해지거든.”
슬레인의 말대로다. 발을 움직일수록, 끈적거리는 것이 점점 더 현애의 두 발을 강하게 사로잡는다.?
“당장 이걸 풀지 않으면...”
“아, 네 눈이 말하고 있네. 내가 왜 이러냐고. 알고 싶지?”
슬레인은 여전히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말한다.
“네가 더 잘 알 거야.”
현애의 머릿속에 바로 들어오는 사람 한 명이 있다. 금요일에도 본 적이 있는, 그 사람이다. 그 생각을 하자니, 발밑뿐만 아니라, 온몸이 끈적끈적해지는 것만 같다. 마치 판타지에 나오는 슬라임으로 덮였거나, 아니면 현애 자신이 슬라임이 되어 버린 것만 같다. 팔이나 다리의 맨살에 벌레 한 마리가 슬금슬금 기어오르는, 그런 불쾌함이 밀려온다.
“내가 어떻게 해 주기를 원하는데?”
현애는 조금 목소리를 깔고, 눈도 조금 깔고 말한다.
“흐흐흐히히히... 알잖아?”
슬레인은 이제 노골적으로 낄낄대며 말한다. 눈빛에서도 긴장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 말’을 해 줘야지. 안 그래?”
현애는 잠깐 발을 본다. 어느새, 지면에서부터 나온 끈적거리는 것은 신발 전체를 덮어버리려 하고 있다.?
“무슨 말?”
“알잖아! 히히히히히... 꼭 내가 말을 해 줘야 하겠어?”
자신이 이미 이겼다는 듯한, 미리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려는 듯한 이 웃음. 꼴사납다. 슬레인은 현애를 기대감 넘치는 눈으로 본다. 하지만...
“그럼 ‘앞으로 전학생으로서 예의를 잘 지키겠습니다’라고 할 줄 알았냐?”
“뭐?”
슬레인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진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현애는 허리를 살짝 숙여, 오른손을 두 발 가까이 가져간다. 두 발을 감싼 끈적끈적한 것이, 굳어가기 시작한다. 경악스럽게 지켜보던 슬레인의 발끝에도 느껴진다. 차가운 기운이. 그리고 수 초 되지 않아, 그 끈적끈적한 것은, 모래처럼 되어, 힘없이 땅바닥으로 녹아내린다.
“이... 이... 이런...”
“자, 내가 말을 해 줄까? 너나 잘해.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알겠어?”
선 자리에서 덜덜 떨며 제대로 말을 못 하는 슬레인을 놔두고, 현애는 계속 제 갈 길을 간다.
“야! 야!”
현애가 길을 간지 얼마 안 되어, 세훈이 달려온다.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아, 별거 아니니까, 걱정 마.”
현애는 세훈의 어깨를 탁 치고는 계속 자기 갈 길을 간다.
“그래. 네가 별일 아니라니까 다행인데...”

한편, 생기를 잃어가던 슬레인의 눈이, 다시 빛난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다. 현애 쪽이 아니다.
“흐흐흐... 조세훈 너... 빈센트 선배는 이겨도 나는 못 이길 거다.”
시어하트어택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0-05-01 22:24:23

부제가 왜 그런지, 역시 읽고 납득했어요. 정말 크리피(Creepy)하네요...

게다가, 앞부분의 평온한 배경묘사 뒤에 나타났다 보니 그 낙차가 더욱 크게 기분나쁘게 느껴지네요.

현애에게 말을 건 슬레인 콘리는 이름도 참 고약한 느낌. 슬레인이라는 이름에서 슬라임이 연상되기도 하였어요. 혹시 로마자 철자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게다가 세훈에게 또다시 시련이...평온한 삶을 얻은 지 얼마 되었다고...

시어하트어택

2020-05-02 21:33:29

슬레인 콘리의 철자는 Slaine Conley입니다. 아일랜드계 이름으로, 슬레인은 '건강'을 의미합니다. 이름에서 '슬라임'이 떠오르신다니, 잘 보셨습니다. 그걸 노리고 지었거든요.


세훈이 겪을 위기는 다음 화를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SiteOwner

2020-05-02 19:50:37

슬레인 콘리, 참으로 불쾌한 인물이군요.

특히나 이 작품을 읽으면서 여러모로 현애에 감정이입을 하고 있다 보니, 특히 더욱 기분나쁘게 여겨집니다.

중학생 때였는데, 상대가 원할만한 말을 하는 척 하다가 끝에 "라고 할 줄 알았니?" 라고 놀리는 화법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것이 다시 생각나다 보니 현애의 대응에 대한 슬레인의 당황하는 태도가 참으로 통쾌하게 여겨집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집요하게 세훈을 노리는 건지...

시어하트어택

2020-05-02 21:35:59

저도 그랬죠. 학창시절에(저는 초등학교 때였던 듯합니다) 몇 번이고 당했던 거니까요. 저 장면을 쓸 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화법이 떠오르더군요.


슬레인은 클라인 패거리의 잔당으로 설정되었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학교의 그녀석은 초능력자> 개정작업을 할 때 슬레인을 잠깐 비치게 할지도 생각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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