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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4시. 미린역 남쪽 카페거리. 수변 산책로가 보이는 카페 ‘커피하우스 미토’에는 미린고 학생 몇 명이 삼삼오오 앉아 스무디, 주스 등을 마시고 있다.
“세훈아, 아까 너 습격당했다는 거, 어떻게 됐어?”
“아, 그거? 또 그 후드 쓴 녀석이 시켜서 그런 거라더라.”
“하, 정말? A반에 주웨이린이랬지? 그 녀석, 그렇게 안 생겼는데 말이야.”
테이블 중 하나에는, 현애, 세훈, 주리가 둘러앉아서 스무디를 하나씩 마시고 있다.
“웨이린이 또 무슨 말을 하던데?”
“그 녀석이 말이지...”
이번에는 현애가 말을 꺼낸다.
“후드 쓴 녀석을 자세히 봤는데, 본 적 있는 얼굴 같았다고 그러더라. 확실한 건 아니지만.”
“잠깐, ‘본 적 있는 얼굴’이라고?”
“맞아. 나는 봤다고 해도 아는 사람은 아니겠지만.”
세훈과 주리의 눈이 잠시 흔들린다. 본 적 있는 얼굴이라니, 그럼 이 동네 사람일 가능성이 크지 않은가? 아니면 미린고 학생이라든가.
“그건 그렇고, 메이링 씨한테 연락은 했어?”
“아... 맞다. 해야겠네.”
주리의 말에 세훈은 손뼉을 딱 치며 AI폰을 꺼낸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수변공원의 반대쪽 산책길. 후드를 푹 눌러쓴 한 남자가 잰걸음으로 산책로를 걷고 있다. 한참 걷던 그가, 별안간 멈춰선다. 메고 있던 가방을 풀어서, 뭔가를 꺼낸다. 쌍안경이다. 그 남자는 가만히 개울 반대편을 응시한다. 그가 응시하는 곳, 다름 아닌 커피하우스 미토다.
쌍안경 너머로, 개울 반대쪽의 산책길 너머로, 보인다. 현애와 세훈, 주리가 테이블에 둘러앉아 스무디를 마시고 있는 모습이.
“남궁현애, 조세훈, 공주리였지...”
후드 쓴 남자는 혼자서 중얼거린다.
“그나저나 ‘그분’의 말대로, 역시 잠재력이 꽤 크군. 니라차 아리야눈타카, 슬레인 콘리, 주웨이린 모두 실패했다니 말이야.”
후드 쓴 남자는 조금 더 현애를 유심히 보더니, 이내 쌍안경을 가방 안에 다시 넣는다. 가방 안에, 사람 팔뚝 길이 정도의 짧은 소총이 얼핏 보인다.
“하지만 안심은 마라. 네 주변인들에게 숙청당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개울 너머를 보며 중얼거린다.
“만일 다른 사람들도 다 쓰러지면, 그때는 내가 나설 수밖에 없지.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군. 자! 다음은 또 누구한테 내 ‘선물’을 줄까나...”
후드 쓴 남자는, 그 길로 다시 잰걸음으로 걸어서 상가 쪽으로 사라진다.
그 시간, 수변공원 서쪽 산책길 옆에 있는 카페 ‘리틀 팔란티르’. 테가 큰 안경을 쓴, 금발 머리를 잘 빗어 넘긴, 체크무늬 셔츠에 조끼를 받쳐 입은 남자 한 명이 혼자 창가에 앉아서, 창밖을 향한 시선을 풀지 않고 있다. 마치 먹이를 노리고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짐승처럼, 아니면 저격 대상을 노리고 숨죽이고 있는 저격수처럼. 앞에 놓인 비엔나커피가 상당히 식었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옆자리에서는 대학생 몇 명이 끼리끼리 앉아 자기들끼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음에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가 창밖을 뚫어져라 지켜본 지, 얼마가 지났을 때.
“어?”
남자는 재빨리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AI폰을 집어서 창밖의 뭔가를 찍기 시작한다.
“저... 저 녀석...”
남자가 주목한 건 창밖의 산책로에 가만히 서 있는, 베이지색 후드티를 입고 자주색 바지를 입은 남자. 남자의 심장이 두근거린다. AI폰을 든 두 손이 떨린다.
“맞지? 그 녀석, 맞지?”
남자가 AI폰을 들고 촬영을 시작한 지 30초 정도 되었을 때, 후드 쓴 남자는 가방을 메더니 빠르게 걸어서 남자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맞아... 분명히 저 녀석이야! 세훈이하고 현애가 말한, 그 녀석이라고!”
남자는 재빨리 전화를 건다.
♩♪♬♩♪♬♩♪♬
“여... 여보세요? 변호사님?”
“왜 그래, 자비에?”
“그 후드 쓴 녀석을 봤어요. 여기... 미린역 남쪽 수변공원에서요!”
“좀 헉헉대지 말고 천천히 좀 이야기해 봐, 자비에.”
“그러니까요, 변호사님. 제가 여기 ‘리틀 팔란티르’ 카페에서 잠복하고서 다른 초능력자들 조사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창밖에 그 후드 쓴 녀석이 지나갔다니까요?”
자비에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려다가, 주위 사람들이 힐끗힐끗 보는 시선을 느끼고, 황급히 입을 틀어막는다.
“하, 그래? 그러면,.. 음...”
“어떡할까요, 변호사님?”
전화 너머의 메이링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한다.
“일단 그 후드 쓴 녀석은 지금 당장은 쫓지 않는 게 좋겠어. 자비에 네가 지금 거기서 하는 초능력자 조사나 좀 계속해 줘.”
“알겠어요, 변호사님.”
자비에는 전화를 끊고 의자에 등을 기댄 다음, 노트북을 켠다. 하지만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오른손은 주먹을 꽉 쥐고, 몸을 떨며, 혼자서 중얼댄다.
“하... 그 녀석... 그 후드 쓴 녀석... 꼭 잡아야 하는데... 꼭...”
5월 9일 금요일 아침. 어느덧 현애가 전학 온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오늘은 일주일 전과 마찬가지로, 현애와 주리가 나란히 걷고 있다.
“그래, 너는 혹시 방학 되면 어디 가 보고 싶어?”
“응? 나는...”
현애가 뭔가 말하려는 그때. 현애 앞으로 한 명의 남학생이 지나간다.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큰 가방을 메고, 한 손에는 생수병을 들고, 다른 사람들보다 1.5배 정도 빠르게 걷는 남학생. 누군지 한눈에 봐도 알 것 같다. 같은 G반의 남학생 앙드레다. 보고 또 봐도 인상은 참 괜찮다. 왜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안녕, 오늘도 좋은 아침이야.”
“아, 안녕.”
현애와 앙드레가 서로 인사를 건넨다. 현애가 앙드레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다시 말을 건넨다.
“어? 너, 무슨 일 있었어?”
“응? 별거 아니야. 왜?”
“아니, 네가 얼굴이 벌겋고, 숨을 좀 헐떡이는 것 같아서.”
“하하하, 뭐긴 뭐겠어! 운동하고 오느라 그래.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동네 한 바퀴 뛰고 와서 학교에 가면 그 가는 길에 마시는 공기 맛이 얼마나 상쾌한지 알기나 해?”
현애가 부러움의 눈을 하고 앙드레를 보자, 앙드레는 만족했다는 듯 얼굴이 벌게져서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아, 나는 또 갈 길이 멀다. 그럼, 이따가 보자고!”
말을 마치고는, 앙드레는 또다시 빠른 걸음으로 교문을 향한다. 앙드레가 멀어져 가자, 현애와 주리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
“자, 우리가 어디까지 했더라?”
잠깐의 침묵을 깨고, 주리가 먼저 말을 꺼내자, 현애가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왜... 그러니까, 여름에 여행 어디로 갈 거냐는 거였지. 내가 한번 보니까 그 ‘마토로’라는 행성에 있는 ‘사카타폴리스’라는 도시가 볼 만하던데.”
“응? 왜 하필이면 거기야? 우주선 타고 이틀은 가야 하는 행성이고, 거기에다가 외국인데.”
“뭐, 외국이라면 좀 더 볼 거리가 많지... 않을까?”
“여, 너희들 말이야!”
뒤에서 또 누군가가 부른다. 현애와 주리가 돌아보니, 모자를 푹 눌러쓰고 선글라스를 쓴 금발의 여학생이다.
“어? 나타샤잖아.”
주리는 금방 알아보고 장난스럽게 손을 흔든다.
“여름에 뭐 어디 놀러 간다며?”
“맞아. 너도 우리하고 같이 가려고?”
“나 말이지...”
나타샤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눈을 빛내며 말한다.
“너희들하고 같이 놀러 갔으면 해서 말이야.”
“야! 장난 좀 작작 해라. 너는 너희 가족 전용으로 여기저기에 휴양시설도 많잖아?”
“응? 나타샤네 가족 전용이라니?”
현애는 잠깐 머리를 갸우뚱하다가 이내 손뼉을 치며 말한다.
“아... 맞다! 공주였지.”
“그런 데는 확실히 우리 가족만 쓰는 데니까 관리도 잘 되어 있고, 편리하기도 하지. 그런데, 오빠나 언니, 동생은 모를까, 솔직히 나로서는 약간은 숨이 막히기도 하고, 그래서 나름 명분을 만들어서 친구들끼리 같이 놀러 가면 어떨까 하는 건데.”
현애와 주리가 나타샤를 보니, 나타샤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없어지고 꽤 진지해 보인다. 나름대로 뭔가 품은 게 많은 듯하다.
“알았어. 생각해 볼게.”
주리가 무게를 실어서 하는 말에 나타샤는 좋았는지 웃는다.
계속 걷자, 어느새 교문 바로 앞이다. 현애와 주리는 교문 앞에 멈춰선다. 주리가 시계를 본다. 오전 8시 48분.
“아, 세훈이는 왜 안 와? 시간이 50분이 다 되어 가는데.”
주리가 볼멘소리로 시계를 흘긋흘긋 보며 말한다. 눈은 자꾸 교문 반대 방향을 향한다.
“어, 저기...”
현애가 운동장 쪽을 가리킨다.
“응? 왜?”
“운동장에 가는 사람, 앙드레 아니야?”
“아, 맞지. 그런데 가방이 다른 것 같다?”
주리는 자신의 눈이 잘못된 건 아닌가 하고 다시 본다. 분명히 아까는 검은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고동색 가방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고동색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에이, 우리가 잘못 본 거겠지.”
바로 그때, 현애와 주리의 등 뒤에서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하- 안녕-”
“참 빨리도 온다.”
“또 저기 종점까지 전철 잘못 타고 온 거 아니야?”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진언이 형 만나고 오느라 그랬는데...”
“진언이 오빠는 왜?”
“조심해야 할 사람이 하나 있다고 해서...”
세훈은 조금 다급하게 말한다.
“조심할 사람이라... 그 후드 쓴 녀석?”
“아니, 그 사람하고는 다른 사람이라는데.”
“뭐, 됐고, 지금은 시간이 이렇게 됐으니까, 일단 교실부터 들어가자고.”
현애와 세훈, 주리는 잰걸음으로 교문 안으로 들어가 교실로 향한다.
어느덧 점심시간. 오늘도 현애는 분수대 앞 벤치에 가만히 앉아서 AI폰을 보고 있다. 적당히 들어오는 햇빛에, 적당한 소음, 그리고 아늑한 장소. 역시, 분수대는 시간을 보내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지금 보는 건, 한창 인기를 끄는 만화 <라리의 모험>. 전형적인 ‘중세 판타지’임에도 10대와 20대에게 인기를 끄는 작품이다. 세훈과 주리가 모두 추천해 준 만화인데, 특히 빙하에서 뛰쳐나왔다는 주인공 ‘라리’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보고 있다.
한참 만화 감상에 빠져 있을 즈음.
“여- 안녕-”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남학생 목소리다. 세훈은 아니다. 주위를 한번 돌아본다. 남학생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남자 교사조차도.
“여기라고- 여기-”
다시 한번 그 목소리가 들린다. 돌아본다. 역시 남학생은 아무도 없다. 스피커 같은 것도, 역시 없다. 그럼 누구란 말인가, 누구?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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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0-05-20 15:47:03
문제의 후드를 쓴 남자가 굉장히 가까이에 왔네요.
오늘 날씨가 서늘해서 그런가 더욱 무섭네 느껴지는 감을 피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목적에만 사로잡힌 것인지 자신의 실체를 은폐하려고 갖춘 복장 등이 오히려 더욱 띌 수밖에 없는 역설적인 상황이 보이네요. 쌍안경 사용이라든지, 열린 가방 안에 들어 있는 소총이라든지...
역시 클래스가 다른 게 간혹 보여서, "아, 이 세계는 굉장하다" 라는 것도 읽혀요.
해외여행 감각으로 성간여행에, 왕족이다 보니 신분에 따른 빛과 그림자...
갑자기 들리는, 말하는 사람이 없는 목소리, 상상만 해도 끔찍해지고 있어요.시어하트어택
2020-05-21 07:57:21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라고, 저 남자도 언젠가는 정체가 드러나겠지요. 그런데 그 시기를 언제로 잡을지 참 고민입니다.
일단 재미를 위해서는 좀더 회차가 진행되어야 하고, 또 '메인 빌런'으로서의 신비감도 어느 정도는 보여야 하기에, 당장으로서는 이렇게 정체를 숨기고 다니는 상황이 이어질 듯합니다.
SiteOwner
2020-05-23 20:18:16
공포영화 같은 영상물에서는, 빌런 캐릭터의 시점에서 주연 캐릭터의 일상에 접근하는 듯한 카메라워크가 잘 구사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면 분명 수많은 시점의 하나에 불과한데도 빌런의 시점에서 사안이 새로이 재구성되는 것이 느껴져서 오싹해지기 마련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잘 느껴지는, 일상도 얼마든지 무섭게 보일 뿐이고 단지 사건이 일어나기 전의 잠시간의 평화로 인식되는 구성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문제의 후드 쓴 남자에게는 혹시 이런 능력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색이나 형태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게 해서 혹시 들키더라도 목격자 증언의 신빙성을 훼손해 버리는 등의...
시어하트어택
2020-05-24 23:37:38
일부러 그걸 노리고 저렇게 장면을 구성한 것까지는 아닌데, 그런 게 느껴지셨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후드 쓴 남자의 능력은, 아직 비밀입니다. 그게 밝혀질 때까지는 상상에 맡겨 두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