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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저녁 시간. 노래방에서 나온 현애와 세훈, 주리는 이제 사리역 지하상가로 향한다. 더 놀려는 건 아니다.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다. 지하상가로 들어가기 전, 현애는 뒤를 한번 돌아본다. 낮보다 더 많은 인파가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다. 거리의 가게들에는 하나둘씩 조명이 들어오고 있다.
그 웃음소리. 기분 나쁜 웃음소리는 안 들린다. 일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가슴 한쪽이 편치 않다. 그 히히히- 거리는 소리를 완전히 치워 버려야 그나마 조금은 안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일단 내일모레 다시 생각해 보자니... 마치 시험 칠 때 문제를 풀다 말고 그냥 나온 느낌이다. 하지만 일단 세훈의 말을 믿어 보기로 한다. 뭔가 좀 내키지는 않아도, 작전이 다 있다니까.
“뭐 해? 빨리 와.”
세훈과 주리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알았어! 갈게!”
현애는 얼른 뒤돌아서 세훈과 주리를 따라간다.
전철 안. 주말임에도 전철 안은 사람들로 꽉꽉 차 있거나 하지는 않다. 하지만 좌석에는 모두 사람들이 앉아 있다. 현애와 세훈, 주리는 한쪽 벽에 등을 기대고 있다.
역과 역 사이를 지나갈 때면, 뭔가 음산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신경을 안 쓴다고 했음에도 자꾸 신경이 쓰여서 그런 걸까. ‘히히히-’하고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자꾸 앉아 있는 사람들을 한 번씩 돌아본다. 혹시 저 중에 범인이 있을까 하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왜 그래?”
세훈이 현애를 보고 묻는다.
“그 웃음소리가 자꾸 들려?”
“시... 신경 안 써도 돼!”
현애는 애써 세훈의 눈을 피한다.
“그냥 이상하게 들리는 것뿐이니까...”
“지금 네가 그러고 있는 게 자꾸 신경이 쓰인다는 증거야.”
세훈의 말에 현애는 일단 기분을 조금 누그러뜨린다. 하지만 여전히 신경이 쓰인다.
“내 말 믿으라니까. 다 방법이 있을 거야. 월요일이 되면 찾을 수 있을 테니까, 자! 얼굴 풀고, 고개 들어. 혹시 이 안에 그 녀석이 있다고 해도, 녀석한테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돼. 알겠지?”
“으... 응.”
현애는 조금은 찜찜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좋아. 그럼 이제 메이링 씨한테 이야기해 봐도 되겠지?”
주리의 말에, 현애, 세훈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그날 밤 9시. 미린중앙공원. 미린호 북측의 잔디광장은, 늦은 시간임에도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인다. 아니, 오히려 초저녁보다도 사람이 더 많아졌다. 대부분은 돗자리를 깔고 앉아 홀로그램으로 축구경기, 야구경기, 영화 등을 본다든가, 아니면 음악을 틀어 놓고 맥주 파티를 즐기고 있다. 여느 주말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잔디광장 구석진 곳에 있는, 조명을 잘 못 받아 약간은 어둑어둑한 산책로를, 한 후드 쓴 남자가 배회하고 있다. 조금은 키가 크고, 골프가방같이 긴 가방을 메고서, 뭔가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주로 혼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
한명 한명 지나다닐 때마다, 길가의 나무 뒤에 숨어서, 유심히 그 지나가는 사람을 본다.
“흠... 저 사람은 아니야. ‘선물’을 줄 그릇이 못 된단 말이지...”
지나가는 사람을 보며, 후드 쓴 남자는 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모두 후드 쓴 남자의 마음에는 들지가 않는다.
모두, 그의 눈에는 실격이다.
그렇게 아무 소득도 얻지 못한 채로, 으슥한 산책길을 털레털레 걷고 있던 차...
“엇?”
누군가가 다가온다. 키는 자신보다는 조금 작은 것 같다.
후드 쓴 남자는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확신한다. 이 사람이다! 선물을 줄 사람은!
조금 더 가까이.
몸의 두께가, 다른 사람의 2배는 넘어 보인다.
후드 쓴 남자에게 느낌이 온다.
마치 갑자기 쏟아져 오는 홍수가, 또는 바다에서 갑자기 오는 쓰나미가 밀려오는 것과 같이!
이제 더 가까이 온다.
보인다.
얼굴의 윤곽이!
13세에서 17세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의 얼굴이다.
틀림없이, 저 얼굴은, 저 얼굴은! 그렇다, 아는 얼굴이다!
남자는, 대뜸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선다.
“선물을 주도록 하지.”
입을 열면서, 남자는 뒤에 메고 있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낸다.
“나는 네가 누군지, 잘 알고 있다. 미린...”
남자가 막 본격적으로 말을 꺼내려 할 즈음.
“뭐야, 너?”
“그건 당장은 알 것 없다. 왜냐면...”
“당장 저리 안 꺼져?”
“진정해라. 네게 서... 선물을 주어, 더더더... 더 새로운 차원의 너로 거듭나게 하려는 것뿐이니까.”
남자는 사격 태세를 취하지만, 당황했는지 말이 헛나온다.
“무슨 고양이 뼈다귀 씹어먹는 소리를 하고 있어? 당장 안 꺼져?”
“그... 그러니까...”
남자는 당황했는지, 그 여자에게 선물 주기를 포기하고, 그대로 달아나려 한다.
하지만.
손이 삐끗했다.
아차!
탄이 발사됐다! 두 발씩이나!
“뭐, 뭐야, 이거!”
남자는 황급히 총을 가방 안에 집어넣고 냅다 뛰기 시작한다.
“야, 야! 거기 안 서? 서! 서!”
부리나케 내달리는 남자의 등 뒤로는, 그 여자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그것도 바로 등 뒤에서. 덩치도 덩치인데, 뭐 저렇게 체력이 좋지? 그건 그렇고, 내가 준 선물을 거부하다니, 이런 적은 처음이다! 이런 적은 전에는 없었는데!
아무튼,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새 남자는 미린호 맞은편 남광장 쪽에 서 있다. 더 이상 뒤에 누군가가 쫓아오는 것 같지는 않다. 시계를 보니, 벌써 10시가 가까워지고 있다.
“하... 이럴 줄은 몰랐는데.”
남자는 허탈한 듯 자꾸 한숨을 퍽퍽 내쉰다.
“아무래도 오늘은 포기해야겠어. 이만 돌아가야지.”
일요일, 5월 11일. 갈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금발의 남자가 조깅을 하고 있다. 다른 조깅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그는 주위를 자꾸 두리번거리며 달리고 있다.
“음?”
한참 달리던 남자의 눈에, 뭔가 들어온다. 그 즉시 달리기를 멈추고, 옆의 잔디밭으로 다가간다. 뭔가가 있다. 주워 본다. 손가락보다 조금 작은 두께의 투명한 캡슐이다. 남자는 바로 전화를 꺼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자비에, 웬일이야, 또?”
“변호사님, 또 찾았어요.”
“너, 또 아침부터 그거 찾아다니는 거야?”
전화 너머의 메이링은 자비에에게 거의 역정을 낼 듯하며 말한다.
“제발, 쉬는 날에는 너도 좀 즐기라고!”
“하지만, 점점 가속도가 올라가는 것 같아요. 풀기 전까지는 결코 멈추지 못할 것 같아서요.”
“휴... 일단은, 알겠어.”
메이링의 전화가 끊기고, 자비에는 조심스럽게 그 캡슐을 집어, 미리 준비해 온 봉투에 집어넣는다.
월요일, 5월 12일 아침. 조금은 흐린 아침이다. 각양각색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걸음걸이도, 조금은 힘이 없고 흐느적거린다.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거리에 다니는 정장 입은 사람들 대부분이 그렇기는 하지만.
여기 미린고등학교 옆 주택가를 걷는 미린고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현애도 그렇고, 세훈도 그렇다. 아니, 현애는 정확히 말하자면 흐느적거린다기보다는, 잔뜩 긴장을 탄 것이지만.
히히히-
“또... 또 그 웃음소리야!”
세훈은 현애가 감지하는 이 웃음소리를 듣지는 못했지만, 뭔가 알 수 있을 것 같다. 여기서 먼 거리에 있지 않다, 그 웃음소리의 장본인은! 하지만, 아직도 알 수 없다. 저 많은 동급생들과 선배들 사이에서,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찾아낸단 말인가! 무턱대고 아무나 잡고 범인이라고 우겼다가는, 진짜 범인은 숨어 버릴 것이고, 상황은 이상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 반드시 잡는다고 장담했는데, 안 잡을 수도 없고...
세훈이 자꾸 먼 산만 보자, 현애가 세훈을 잡아끈다.
“뭐 해? 그 이상한 웃음소리를 듣는 건 난데, 왜 네가 그러는 거야?”
“가만 있어 봐. 뭔가 좋은 방법이 생각나려고 하니까.”
“무슨 방법?”
흐흐흐히히히히히히히-
또 그 웃음소리다! 조금 전보다 확실히 선명히 들리는, 기분 나쁜, 남학생의 웃음소리다. 하지만,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가, 저 수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내가 잘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잠시 후, 세훈이 다시 현애를 돌아보며 말한다.
“지금은 일단 들어가자고.”
“뭐야, 그게 방법이야? 네가 말한 방법이라는 건 안 내놓고, 힘 빠지게 말이야!”
순간, 세훈의 바로 눈앞에 미세하게 서리가 맺힐 정도로 차가워진다.
“좀 진정하고 말이야, 내 말 좀 들어봐.”
“뭔데.”
“반드시 오늘 잡아내겠다는 약속을 지킬 테니까 말이지. 그것도 빼도박도 못하게 말이야.”
“어떻게?”
현애는 일단 분출하려던 것을 누그러뜨린다.
“말해 봐.”
“한 8시 50분 정도에 말이지, 아주 멋지게 잡아낼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현애는 시계를 본다. 지금 시간은 8시 38분. 그러고 보니까, 어느새 교문 앞이다.
“좋아, 그럼, 알았어. 네 말대로, 이 녀석을 아주 멋지게 잡아낼 수 있을지, 기대할게. 만약에 안 되면, 어떻게 할 거야?”
세훈은 잠시 말없이 하늘만 바라보다가, 다시 말한다.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반드시 잡아낼 테니.”
세훈의 호언장담에, 현애는 잠시 놀라는 듯하다가, 이내 세훈을 다시 보고 말한다.
“좋아. 네 말대로, 잡아낼 수 있을지 보자고. 일단, 들어가자.”
교문 안에 들어선 현애와 세훈은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운동장의 중간쯤 갔을 때, 다시 그 기분나쁜 웃음소리가 들린다.
히히히- 흐히히히히- 히히히-
점점 더 커지고, 선명해지는 그 웃음소리. 누구란 말인가? 도대체 누구? 현애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교실로 향한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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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0-06-03 14:21:19
계속 경박한 웃음소리가 주변을 배회하네요. 확실히 기분나쁜 상황이고, 쉽사리 떨쳐낼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니겠죠.
후드 쓴 남자의 행태도 반갑지가 않아요. 혼자 외출할 경우에 누군가가 접근하는 것도 정말 기분나쁜 일. 특히 선교를 한답시고 그러는 것도 싫은데다, 예전에 일본에서 일본국유철도노조의 노조원 중의 한 사람이 저에게 대뜸 시비를 걸던 것도 같이 생각이 나서...
12분 남았네요. 세훈의 복안이 과연 어떻게 드러날지...
시어하트어택
2020-06-04 23:58:47
저런 일 정말 많이 겪어봤습니다. 2월까지만 해도 제가 사는 곳 근처의 역에 사이비 집단이 그렇게 포교를 하던데, 2월이 지나니까 싹 사라지더군요. 어찌나 시원한지.
그 '12분 후'의 일은 내일 공개될 것입니다.
SiteOwner
2020-06-03 19:03:27
아름다운 목소리라도 영문모르게 주변을 맴돈다면 충분히 기분나쁘고 불안할 수 있을 것인데, 기분나쁘고 경박한 웃음소리라면 더욱 싫을 것 같습니다. 특히, 누군가가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타겟이 된 사람의 속을 헤집어 놓기에는 절대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정체를 철저히 숨기는 범인도 결국 중대한 증거를 남기기 마련입니다. 그 투명캡슐이 큰 단서가 될 것 같군요.
세훈이 어떤 함정을 파놨을지도 기대됩니다. 이제 12분 뒤가 쇼타임이 되겠군요. 기대하겠습니다.
시어하트어택
2020-06-04 23:58:57
확실히 그렇죠. 나는 보이지 않는데 상대방은 내가 보이고, 또 깊이 파고들어 있다는 것은. 이렇게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심리가, 사람을 더욱 움츠러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12분 후, 기대하셔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