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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금요일, 미린고등학교 1학년, 그녀는 자기네 아파트 단지 근처의 공원을 혼자 산책 중이었다. 며칠 전의 ‘그 일’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벗어나지 않아, 공부도 제대로 안 되고, 만화도, 게임도, 뭐 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심지어 남자친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 이럴 바에는 머리를 비우고 산책이나 좀 해 보자, 이렇게 생각하고서, 저녁식사를 하고 나서 혼자 집을 나서서 근처 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처음 몇 분간은 그럭저럭 분위기가 괜찮았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 은은한 공원의 조명, 그리고 주위로 보이는 야경까지. 산책하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그가 나타나기까지.
“방황하고 있군.”
뒤에서, 들렸다. 그 목소리였다. 후드 쓴, 그 남자의 목소리!
“방황이라니, 이건 산책인데...”
“물론 그것도 맞지. 하지만 마음속은 끝없이 이리저리 허우적거리고 있지 않나?”
다시 한번, 느꼈다. 위압감, 그리고 경외감!
“너는 아직 내 선물이 뭔지 확인을 안 해 본 것 같군. 하지만 금방 알게 될 것이다.”
5월 14일 수요일 아침, 미린고등학교 옆의 주택가. 길에는 하나둘씩,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길을 걸어가며 만화를 본다든가, 친구와 잡담을 한다든가, 주위를 구경한다든가, 다들 하는 건 달라도 향하는 곳은 학교다.
혼자서 걷는 현애의 옆에, 누군가 지나간다.
“여- 안녕!”
“어? 앙드레잖아!”
현애는 옆의 앙드레를 보고 반갑게 손을 흔든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앙드레는 손에 생수병을 들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다. 피곤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눈은 반쯤 감은 듯 뜬 듯 하고 있다.
“그렇게 운동하고 학교에 오면 안 피곤해?”
“피곤하긴! 얼마나 보람찬지 모르지?”
“아... 그래.”
현애가 잠시 딴 데를 보다 보니, 앙드레는 어느새 저 멀리 앞에 가고 있다.
누군가가, 현애의 두 어깨에 손을 짚는다. 그런데, 무게가 다르다. 오른쪽 어깨의 손이 미묘하게 더 무겁다. 이건, 2명이다!
돌아본다.
오른쪽에는, 세훈이 손을 흔들고 있다. 그리고 왼쪽에는, 같은 반의 레지나가 어색하게 웃고 있다.
“뭐야, 너희들.”
“으하하하하하...”
세훈과 레지나 모두 어색하게 웃음소리를 낸다.
“좀 한 번에 한 명씩만 해라.”
세훈과 레지나는 서로 짜기라도 한 건지, 말없이 웃기만 하다가 현애를 앞질러 간다.
다시 몇 걸음 더 간다.
“선배님, 안녕하세요!”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옆을 본다. 양옆으로 묶은, 핑크색과 하늘색 스타킹을 신은 안대를 한 중학생, 그리고 푸른 머리의 중학생. 사이와 레아다. 둘 다 만화부 소속이다.
“아, 그래. 좋은 아침이야.”
“어제는 누구한테 공격받거나 그런 거 없었죠?”
레아는 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물어본다.
“어제? 그런 건 없었어.”
현애는 태연히 대답한다.
“너희들, 그런데 같이 붙어 있는 게 꽤 많이 보인다?”
“당연하죠. 붙어 있으면, 따로따로 다니는 것보다 좋은 점이 많거든요.”
“무슨 좋은 점?”
“둘 다 같은 능력이 있거든요.”
“음, 그래? 같은 능력이 있다고?”
현애는 사이와 레아를 이리저리 훑어본다. 아무리 봐도, 둘은 공통점이랄 게 적어 보이는데... 하지만 꼭 사람마다 다른 초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뭐, 어쨌든, 알았어. 또 보자.”
현애는 사이와 레아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발걸음을 재촉해 교문으로 향한다.
어느덧, 정오. 학교 건물 1층에 있는 매점에는 줄이 제법 길게 늘어서 있다. 한두 명씩 매점에서 나오는 손마다, 과자나 음료수가 하나씩 들려 있다. 지금 막 매점에서 나오는 참인, 현애의 손에도 콜라 캔과 과자봉지가 하나씩 들려 있다.
“2,000리라에 이 정도 값이면, 가성비 최고인데?”
현애는 콜라와 과자를 차례대로 보며 싱글벙글한다. 보통 편의점에 가면 1,500리라에 과자 한 봉지, 1,300리라에 음료수 한 캔인데, 이렇게 싸게 맛있는 과자와 음료를 먹을 수 있다니, 이 정도면 몇 번이고 먹어도 아깝다는 생각은 안 들 것이다!
학교 건물 밖으로 나와, 잠시 이리저리 둘러본다. 역시나, 분수대 쪽에 세훈과 주리, 그리고 친구 몇 명이 모여 앉아 있다.
“여기야, 여기!”
세훈이 현애를 부른다. 곧장 그리로 간다.?
“왜 그렇게 헤매?”
“아, 아니야. 그저, 어디 앉을까 하고 고민했지.”
“고민이라니?”
세훈 옆에 앉은 알렉스가 장난스레 말한다.
“너 점심시간만 되면 항상 여기 앉아 있잖아? 그런 걸 다 고민하고 그래!”
“아, 아니, 오늘은 좀 다른 데 앉아 보려고 했지.”
“무슨 소리야? 내가 위에서 올려다보니까 항상 여기저기 돌아보다가, 결국은 여기로 오던데?”
“아... 하하하... 그러니까 말이지...”
현애는 장난스레 웃는다. 알렉스가 현애가 들고 있는 과자봉지를 본다.
“이야, 우리 주려고 과자까지 사 온 거야?”
“아... 아... 그러니까...”
“자, 뭐해? 어서 먹자고!”
알렉스 옆의 디아나도, 세훈도 과자봉지를 보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모두 현애의 과자봉지 든 손을 보고 있다. 현애가 과자봉지를 가볍게 뜯자, 부드럽게, 봉지의 위쪽만 뜯긴다. 봉지 안쪽이 보이지 않는 이 묘한 상태. 궁금증은 더욱 커진다.
“도대체 얼마나 맛있길래 이렇게 묘하게 뜯긴 거지?”
알렉스가 과자봉지를 향해 손을 뻗는다.
“확인해 보지 않고는 못 배기겠어!”
집는다.
반반한 느낌의 과자가 손에 잡힌다.
“오, 예감이 좋은걸.”
알렉스는 봉지에서 손을 빼자마자, 1초도 안 되는 순간에 과자를 입으로 가져간다.
“어디... 이 과자의 맛은...”
그런데.
“음?”
과자가 꺠물어지지가 않는다. 오히려, 알렉스의 이가 아프다.
“뭐... 뭐야, 이게!”
알렉스는 재빨리 그 과자를 뱉는다. 알렉스의 얼굴은, 몇 초 전까지 싱글벙글 웃으며 장난을 떨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심하게 일그러져 있다. 세훈은 알렉스가 뱉은 과자를 본다. 모양이 하나도 안 변했다. 그건 그렇고, 어딘가 빛나는 것 같기도 하다.
“야! 빨리 봉지를 뜯어!”
세훈의 말을 듣자마자, 현애는 재빨리 봉지를 찢는다. 과자가 모두 벤치 위에 쏟아진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건, 과자의 소리가 아니다! 원래 누런 빛을 띠었어야 할 과자가, 전부 은빛으로 바뀌었다!
“다들 음료수를 바닥에 쏟아!”
현애가 큰 소리로 친구들을 돌아보며 말한다. 하지만 다들 주저한다. 세훈도. 눈은 흔들리면서도, 행동으로는 옮기지 못한다. 현애는 대뜸, 디아나가 들고 있던 캔을 뺏는다. 자기가 들고 있던 콜라 캔과 함께, 쏟는다. 바닥에.
콜라가 아닌, 은빛의 뭔가가 쏟아진다.
“뭐야, 이건...”
“수은 아니야?”
바닥에 쏟아진, 음료가 아닌 금속을 보는 친구들은, 또 한 번 경악을 금치 못한다. 분명, 캔을 딴 것일 텐데! 과자만 그랬다면 속임수라고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이건, 틀림없다! 누군가의 공격이다!
세훈은 주위를 한번 둘러본다. 하지만 주위에는, 평온한 점심시간을 즐기는 동급생이나 선배들뿐, 의심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알렉스가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현애와 세훈에게 묻는다.
“너희, 알렉스하고, 디아나는 우리한테서 멀리 떨어져.”
현애가 알렉스를 보고 말한다.
“괜히 상관없는 사람들 말려들게 하기는 싫으니까.”
“아... 알겠어.”
12시 50분, 동관 근처의 계단. 다른 친구들을 먼저 올라가라고 한 다음, 세훈은 분수대 주위를 살피다가, 이제 교실로 올라가는 길이다. 이쪽 동관 근처의 계단은 조금 외진 곳에 있어서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천천히 계단을 올라간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를 때마다,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만 같다. 기분 탓이겠지. 기분 나쁜 일을 겪어서 그런 거겠지...
뭔가 다리에 점점 힘이 빠지는 것 같기도 하다. 뻘밭으로 된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것 같기도 하다. 손도 점점 미끄럽고, 땀이 맺히는 것 같다.
잠깐, 손은 분명 난간을 잡고 올라가고 있을 텐데, 땀이 맺히는 느낌이라니? 나무로 되어 있을 난간이... 미끄러울 리가...
“이... 이게 뭐야!”
손에 잡혀 있는 난간은, 어느새 금속으로 바뀌어 있다. 세훈은 아래쪽도 내려다본다. 돌로 되어 있을 계단도, 전부, 금속으로 되어 있다. 그것도, 아주 매끈매끈하고 반반한!
순간 놀랐는지, 발을 삐끗한다. 이런, 미끄러진다!
세훈은 다시 한번 난간을 꽉 잡아 본다. 하지만, 하지만!
마치 빙판 위에 선 듯, 1층으로 미끄러지기 직전이다. 그것도, 중간층까지는 두 단만 올라가면 되는데!
“애쓴다, 애써.”
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학생의 목소리다.
낯선 목소리는 아니다. 세훈은 이 목소리를 이미 몇 번 들은 적 있다. 가장 최근에는, 저번주 토요일에도.
“외제니, 너 맞지!”
세훈은 필사적으로 미끄러지는 난간을 잡으며 위를 올려다보려고 하지만, 잘 안 된다. 겨우겨우 위를 올려다봤을 때, 세훈의 눈에 바로 들어오는 건, 손 두 뼘도 안 되는 거리에서, 세훈 자신을 내려다보며 낄낄거리는 외제니의 얼굴이다.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들어온다!
세훈과 다시 한번 눈이 마주치자, 외제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진다.
“그때 내가 느꼈던 굴욕을 한번 느껴 보라고.”
외제니의 눈을 본 순간, 마치 온몸의 피가 철렁이는 듯한 충격이 온몸에 느껴진다. 예전에 예준, 아니면 클라인과 싸울 때 느꼈던, 그런 살기다.
“생각 같아서는 여기를 완전히 미끄럼틀처럼 만들어 버리고 싶은데 말이야. 조제가 느꼈던 굴욕도 같이 느껴 보라고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시간이 안 되니까 그것까지는 못 하겠던데.”
외제니의 피부에 순간, 느껴진다. 세훈이 능력을 사용하려고 한다.
“뭐 하는 거야? 헛짓거리하기는! 네 능력은 이미 뭔지 알고 있다고!”
“그래, 내 능력은 네 능력을 강화해 주겠지. 이 계단을 미끄럼틀처럼 만들어 버릴 수도 있을 거야.”
세훈은 다시 한번 난간을 고쳐잡으며 말한다.
“하지만! 그러니까 더 좋은 거다! 네 능력이 말이야!”
“무슨...”
외제니가 뭐라고 말해 보려는 사이, 세훈은 몸에 반동을 준 다음, 발을 최대한 앞으로 뻗는다. 그리고 난간을 잡은 채로, 팔이 꺾일 듯, 한 바퀴 돈다.
퍽-
뭔가가 세훈의 발에 닿는다!
“윽... 이게...”
다음 순간, 세훈도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다. 다행이다. 중간층이다!
바닥이 아직 미끄럽고, 엉덩이가 욱신거리기는 하지만, 세훈은 애써 2층 쪽을 올려다본다. 외제니가 계단 한가운데 넘어져 있다.
“너... 이 자식... 이따가 보자...”
외제니는 그대로 계단을 올라가 자기 교실로 가 버린다. 세훈은 주위를 돌아본다. 계단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다.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뭔가 찜찜하다. 분명 이기기는 했는데...
머리를 긁으며 세훈은 계단을 올라, 교실로 향한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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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0-06-21 16:34:25
익숙하던 사물 속에 작은 불순물이 섞이는 것도 반갑지가 않은데, 원래의 것과 다른 갑자기 완전히 다른 물질로 바뀌어 버리거나 한다면 정말 당혹스럽고 싫을 거예요. 과자가 금속 조각으로, 음료가 수은으로 변했다니, 정말 싫은 상황이네요.
외제니도 초능력자였군요. 이게 이번의 사물의 금속화 능력으로 나타난 것이고...
본문중에 수의 표시단위가 일관적이지 않은 게 있어요.
자리수의 표현이 그러니까 확인 후 수정을 부탁드릴께요.
시어하트어택
2020-06-21 20:57:06
저렇게 봉지 속에서 뭘 꺼내먹다가 돌 같은 걸 씹는 기분 있지요. 밥을 먹다가 돌을 씹는 건 많이 느껴 봤습니다. 이번 회차는 그런 걸 상상하며 썼습니다.?
외제니 같은 경우는 중간보스 캐릭터로 설정해 봤습니다. 앞으로 전개에 따라 그냥 평범한 적 정도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일단 설정해 둔 건 그렇습니다.
해당 단위는 수정했습니다.
SiteOwner
2020-06-24 23:39:52
정말 반갑지 않은 상황이군요. 창밖에 비가 내리는데 날씨가 유독 더 차게 느껴집니다.
이상할 정도로 딱딱한 식품도 역시 꺼려지기 마련입니다.
일본에서 먹었던 과자 중에 상당히 딱딱한 전병이 있는데, 이걸 왜 먹나 싶었습니다. 특별한 맛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대체 먹는 게 맞나 싶을 정도의 경도를 자랑하는...그래서 이건 한번 먹어본 이후로는 다시 먹지 않고 있습니다. 그때가 생각나서 턱이 아파오는 것 같기도 합니다. 기분 탓이지만...시어하트어택
2020-06-28 21:48:07
뭔가를 먹을 때 딱딱한 걸 씹을 때를 떠올리면서 쓴 장면이라 좀더 실감이 날 겁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