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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애가 한참 그림자를 피해 다니고 있는 그 시간, 바로 옆 건물에 있는 오락실. 보라색 야구모자를 쓴 누군가가, 사람들이 한참 오락기 앞에 앉아서 열심히 게임을 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거나 하지도 않고, 줄곧 한 자리에 서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한 곳만 뚫어져라 보는 건 아니다. 수시로 그는 흘끗흘끗,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 쪽을 본다.
그러다가, 그의 시선이 거리 쪽으로 고정된다. 진홍색 베레모, 노란 티셔츠, 검은 핫팬츠, 그리고 갈색의 웨이브 머리.
“딱 지나가는구만?”
목표다. 그가 찾은 목표. 기회는 지금이다. 말없이 가만히, 거리 쪽으로 손을 내민다. 건물의 그림자가 비정상적으로 커지더니, 한순간 그 갈색 머리의 여자를 완전히 덮는다. 그림자가 자신을 덮자마자, 그녀는 재빨리 그 자리에서 마치 토끼처럼 폴짝 뛰어, 그림자가 닿지 않는 곳으로 벗어난다. 바닥에 닿은 한쪽 무릎을 감싸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먼지를 털고 다시 일어난다.
“호오, 제법인데? 내 능력이 뭔지를 대강 파악하고는 있단 말이지?”
보라색 모자를 쓴 그는, 마치 먹잇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맹수가 된 것처럼 말한다.
“그래 봤자 소용없을 거야. 지금은 오후 3시, 그림자가 선명한 시간이지! 즉, 너는, 내 손바닥 안에 있단 말이다!”
그는 곧장, 오락실을 나와, 그 갈색 머리의 여자를 바짝 뒤쫓는다. 옥상정원을 거니는 연인들,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 사이에, 그는 태연히 섞여서, 조금 빠른 걸음으로, 그 갈색 머리의 여자를 쫓는다.
“이 속도로 쫓아가기만 해도 알 수 있지. 네가 어디로 가는지 말이야!”
뒷모습이 훤히 보인다. 그 갈색 머리 여자가, 그림자를 피해 도망가는 모습이. 거기에, 그림자가 닿을 때마다, 손을 움켜쥐고, 다리를 어루만지는 모습까지. 그렇게 그림자를 피해 도망가지만, 그림자가 더 빠르다. 여자를 쫓으면서, 보라색 모자의 그는 만족스럽게 말한다.
“그래, 그래! 이대로면 돼. 이제 쓰러뜨리는 건 시간 문제란 말이지!”
그렇게 한 3분 정도를 쫓았을 때.
보인다. 갈색 머리의 여자의 걸음걸이가, 현저히 느려진 모습이. 그 여자는 바로 앞에 보이는 코너를 돌아, 먹거리가 밀집한 골목길로 빠진다.
“놓칠까 보냐!”
크게 소리지르며, 그는 골목길로 돈다. 여자의 걸음걸이가 점점 둔해진다. 사람들은 무심한 듯 지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여자가 온몸을 벌벌 떤다. 땅 위에 버티고 서 보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그것도 잠시, 여자는 땅바닥에 풀썩, 힘없이 쓰러지고 만다. 주위의 사람들은 무심하게도, 쓰러진 여자를 보고도 그냥 지나가고 있다.
“좋았어, 좋았어! 제대로 들어갔군!”
그는 웃음을 흘리며, 성큼성큼 쓰러진 여자에게로 다가간다. 이렇게 쉽게 쓰러지다니. 그는 자신의 능력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허탈함도 없잖아 있다. 아무튼, 그는 쓰러진 여자 앞에 선다. 그리고 살며시 허리를 숙인다.
“흐흐흐... 이제 됐다. 내가 이 녀석을 굴복시킨 거다!”
그 여자를 일으켜 세우려는데...
“응? 뭐야...?”
없다.
그 자리에.
분명, 쓰러져 있어야 할 여자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도!
“이... 이게 뭐야...”
이상하다. 분명 5초 전까지만 해도 쓰러져 있었다. 그 갈색 머리, 붉은 베레모의 그 여자 말이다!
“어디 갔어... 어디 간 거야? 어디?”
보라색 모자를 쓴 그가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당황스러워하는 눈으로 그 여자를 열심히 찾고 있는데...
“딱 걸렸어, 딱 걸렸어.”
그의 뒤에서, 모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뭐... 뭐야?”
뒤돌아본다. 푸른 단발머리의 이레시아인 남자가 서 있다.
“당신, 당신 뭐야!”
“너,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이레시아인 남자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에게 묻는다.
“그... 그건, 그건 내가... 내가 물을 말이야!”
그는 당황스러웠는지 더듬거리며 소리 지른다.
“이봐, 외계인! 당신이야말로... 당신이야말로 뭔데!”
“나? 나 말하는 건가?”
이레시아인 남자가 잠시 뭔가를 말하려 뜸을 들이는 사이.
“흐흐흐흐흐... 그림자 속에 들어왔다고!”
보라색 모자를 쓴 그가, 이레시아인 남자의 발을 가리키며, 웃는 건지 당황한 건지 알 수 없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지른다.
“한 발짝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 외계인! 움직이면... 당장에 내 초능력으로 사지를 마비시켜 버릴 테니!”
이레시아인 남자가 순간 당황한 나머지 그 자리에 얼어버린 것처럼 멀뚱멀뚱 서 있는 사이, 보라색 모자를 쓴 그는 잽싸게 뛰어, 그 자리를 벗어나 버린다. 이레시아인 남자는 분했는지 주먹을 허공을 향해 휘두른다.
“저 자식! 나를 감히 속이려 들어! 나를 뭘로 보고! 응!”
분해하는 이레시아인 남자 뒤쪽에서, 누군가가 나타난다. 진홍색 베레모를 쓴 갈색 웨이브 머리... 다름아닌 현애다.
“저기, 호렌 씨! 그 녀석, 어떻게 됐어요?”
“에이... 놓쳐 버렸어.”
“저... 정말요?”
“내가 방심하는 사이를 놓치지 않고 멀리 도망쳐 버렸네.”
“하, 그건 그렇고...”
현애가 안도와 불안이 반반 섞인 한숨을 뱉으며 말한다.
“어떻게 된 거죠?”
“아,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지...”
레아와 호렌이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는데, 호렌의 눈에 뭔가 들어왔다. 진홍색 베레모를 쓴 갈색 머리의 여자가 뭔가를 피해서 뛰어다니는 모습, 그리고 이상하게 그 여자만 쫓아오는 그림자. 호렌은 순간 직감했다. 현애가 위험하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호렌은 자기 능력을 발동했다. 거리 위에 환각을 덮어씌워, 현애를 추격하는 그자에게 거짓된 모습을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꽤 어려웠다. 움직이는 사람의 위에 환각을 겹친 다음, 다른 쪽으로 가는 것처럼 만들고, 그림자 또한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처럼 만든다는 것은. 하지만, 그 보라색 모자를 쓴 녀석은 환각이 유도한 대로, 현애를 쫓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갔다.
“하... 정말이지 떨렸어요.”
현애가 몸을 떨며 말한다.
“그림자가 더 빨리 쫓아와서 이대로 온몸이 마비되나 했는데, 갑자기 그 녀석이 딴데로 가 버리니까 많이 놀랐죠. 환각 능력이 이 정도로 유용할 줄은 몰랐어요.”
“그러니까요.”
골목길 한쪽에서, 레아가 나타나며 맞장구를 친다.
“뭐야, 너도 안 가고 있었냐.”
현애가 김빠지는 목소리로 말한다.
“걱정되잖아요.”
“고마워.”
“에이, 뭘요.”
“저 모자 쓴 녀석, 십중팔구 후드 쓴 녀석이 시켜서 저랬을 거야. 안 그래?”
“맞아요.”
레아가 현애의 말에 맞장구친다. 창백한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한다.
“저는 왜 VP재단이 그 후드 쓴 녀석을 안 쫓나 모르겠어요. 한 사람을 집요하게 쫓고, 거기에다가 민폐도 끼치는데 말이죠. 무엇보다도, 그 녀석이 베라네를 가지고 있는 게 유력한 이상, 빨리 그 녀석을 잡아서 회수해야 해요. 아무리 다른 사건도 많다고는 하지만, 멀쩡히 하던 걸 하지 말라고 하면 허탈하죠. 물론 자비에 씨도 빨리 쉬게 해 줘야 하고요.”
“그러게. 그 녀석, 빨리 내 앞에 나타나기나 할 것이지...”
현애는 분한 듯 주먹을 꽉 쥐며 말한다.
그날 저녁, 동구 아체토역 근처에 있는 자비에의 원룸.
“뭔가 좀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자비에는 방 안의 불도 안 켜고, 어두운 방 안에서, 3개의 홀로그램 모니터에 눈을 고정하고 있다. 지도에 나와 있는 건 세라토시 지도와 미린구 지도. 그리고 다른 모니터에는 후드 쓴 남자가 미나코를 만났을 당시에 찍힌 CCTV 사진이 있다. 얼굴은 잘 나오지 않았지만, 그가 바로 모두가 쫓는 그 자임을 확인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이제 CCTV에 나온 시간대별 행적, 그리고 패턴 분석을 통해, 그가 누구인지 특정할 수 있으면 된다.
미린구 지도에, 빨간 점으로 보인다. 그의 시간대별 행적이. 주로 두드러져 보이는 곳은, 미린중앙공원, 수변공원, 그리고... 미린역과 미린대역 사이에 있는 주택가 일대. 그리고 매일 7시 30분에서 8시 30분 사이에는, 미린역 남쪽의 카페거리와 수변공원에서 움직인다. 그것도, 빠른 속도로 말이다.
“알았다... 패턴을 말이야. 네 녀석의 패턴을 말이지!”
자비에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또 하나가 맞추어진다. 그의 흥분한 목소리가 높아진다.
“내일, 반드시 밝혀 주겠다. 네놈이 누군지, 그리고 네놈 뒤에 숨은 녀석은 누군지 말이야!”
얼굴을 붉히며 소리 지른 자비에는, 한숨을 푹 하고 내쉬고, 모니터를 모두 끄고, 잠시 눈을 감고 의자에 몸을 푹 기댄다.
그리고 한 10분쯤 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방 안의 불이 다시 켜진다.
“하...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이제 오늘은 사건 자료 취합이나 해 볼까...”
지도가 나왔던 홀로그램 화면이, 금세 미디어 재생 및 녹취 정리 화면으로 바뀐다. 자비에가 물 한 잔을 가져오고, 의자에 다시 앉자, 방 안의 조명은 다시 어두워진다.
다음날, 5월 19일 월요일 아침 8시. 매그넘 골드 빌딩 1층 로비는 출근하는 변호사들과 법률사무소 직원들로 인산인해다.
로비 한쪽에, 흰 정장을 잘 차려입은 은발의 남자 한 명, 그리고 캐릭터가 그려진 민소매 셔츠를 입은 여자 한 명이 나란히 서서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고 있다.
“아, 우리 아파트에서 또 도깨비불 나왔어. 좀 도와줘, 메이링 씨. VP재단에 좀 연락해 봐!”
듀폰은 주위를 돌아보며,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말한다.
“알았어, 알았어. 그건 내가 한번 알아볼게. 그런데 요즘 재단이 초능력자 조사를 좀 많이 축소하고 있어서, 내가 그걸 찾아낸다고 장담은 못 해.”
“하, 고마워.”
메이링의 대수롭지 않은 말에도 듀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건 그렇고, 오늘 메이링 씨네 사무실에 직원 2명 새로 온다며?”
“아, 맞아.”
“부럽네. 나도 밑에 사무원 좀 많았으면 좋겠는데.”
“어차피 인공지능도 있잖아.”
“그건 그런데...”
그때다. 메이링의 AI폰에 메시지 도착음이 울린다. 메시지를 보자...
[변호사님, 저 오늘 좀 늦을 것 같아요.]
“아니, 자비에! 후배도 새로 오는 날인데 왜 늦게 온다는 거야?”
“자비에 씨는 또 왜? 일도 충실히 잘 하는 것 같은데.”
“아, 그런 게 있어.”
그 시간, 미린역 남쪽 수변공원.
키가 큰 남자 한 명이, 초록색 후드티를 입고서 열심히 산책로를 달리고 있다. 그리고 또다른 누군가가, 카페거리에서 수변공원으로 내려가는 지점에 있는 계단 위에 서서, 그 달리기하는 남자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맞지... 확실해. 시간대도 거의 같고, 경로도 같다고.”
후드 쓴 남자를 지켜보는 남자는 자비에. 이윽고, 그 후드 쓴 남자가 운동을 마치고, 계단을 올라가기 전, 계단 옆으로 가서 가방을 챙긴다. 확실하다. 며칠 전 카페에서 봤던, 그 큰 가방, 확실하다!
하지만 아직 확신하기는 이르다. 증거! 증거가 필요하다!
자비에는 곧장 카메라를 꺼내, 찍는다. 그리고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숨을 죽이고 보기 시작한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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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0-08-08 23:44:07
자신이 남다른 능력이 있다면 보통 자신만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죠.
그리고, 역시 그 남다른 능력이 자신의 시야를 좁힐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그 끝이 좋을 리가 없을 거예요. 문제의 모자 쓴 그 사람은 아주 운좋게 잡히는 것은 면했지만, 그건 위기를 모면한 게 아니라 위기의 재발시기를 늦춘 것에 불과한 것이죠. 게다가 행동패턴을 파악하고 신원을 특정해 가는 자비에의 노력도 성과를 보이려 하고, 이제 전말이 드러날 것만 남았네요.
역시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달해도 강점을 보이는 분야는 한정되어 있는가 보네요.
최근 드라마 중에 13년만에 시즌2가 방영된 일본드라마 파견의 품격(ハケンの品格)이 있는데, 거기서는 인공지능의 도입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식품대기업 S&F가 인공지능으로 패착을 겪는 경우가 나오고 있기도 해요. 그런 것도 같이 생각나다 보니 역시 사람이 직접 해야 할 것은 있다는 게 다행으로 여겨지고 있어요.
시어하트어택
2020-08-09 23:17:55
이제 금방 자비에의 노력이 빛을 발할 때가 옵니다. 그때로부터 1부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니 놓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모자 쓴 그 사람도 조만간 정체를 드러낼 겁니다.
어디선가 본 것 중에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직업이 있는데 그 중에 정치인, 변호사 같은 게 있더군요. 재미있게 봤습니다.
SiteOwner
2020-08-10 23:00:18
호렌의 능력에서는 스타크래프트에서의 하이템플러의 할루시네이션(Hallucination)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위험할뻔 했던 현애를 보고 호렌이 환각능력을 발동시켜 도와주고, 이런 것이야말로 멋진 것입니다. 불순한 모종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주종관계와는 아예 차원이 다른 아름다움. 이런 가치로 뭉친 사람들이 이기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분명 잘못된 사회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다음 회차가 기대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시어하트어택
2020-08-11 23:24:48
그렇지요. 물론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종족부터가 다른데 이렇게 처음부터 좋은 관계가 되기는 쉽지 않죠. 물론 이런 예가 아예 없으리라고는 장담하지는 못합니다만...
다음 화에는 이 모자 쓴 사람의 정체가 드러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