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성격상 일을 어떻게든 해놓고 나중에 가서 '이러이러했으면 좋았을걸' 하고 후회하는 일이 많은데, 가장 최근에 연재한 에피소드(A4 - Assassination)도 마찬가지입니다. 본편을 쓸 때의 목적이었던 '기존 작품들의 패러디로 구성하되, 최대한 가볍게'는 둘 다 지키지 못하고, 무거운 내용에 패러디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사실 이 내용도 나쁘지는 않지만, 이제 와서 보니 썩 좋다는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하나씩 짚어보면 그렇습니다. 해당 에피소드를 쓸 무렵엔 심리적으로 굉장히 몰려있다 보니 그 때의 스트레스가 그대로 글에 녹아든 모양이더군요. 일단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것도 그렇고, 과거 시점에서 의뢰를 받는데 주인공 존부터 시작해서 브로커 파보리토, 목표물 애쉬까지 정상인 인물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지막까지도 빗속에서 저격으로 목표물을 처형하고 자리를 뜨는 것이 썩 상쾌하지도 않고요. 쓰면서 제 화풀이엔 도움이 됐습니다만, 지금 와서 읽어본 제 기분이 복잡한데 하물며 읽는 사람의 기분이야 어떻겠습니까. 그래서 후술하겠지만 이 에피소드는 지우고 다시 쓰되 좀 더 밝게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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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저 스스로도 왜 이렇게 패러디에 집착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옛날에는 말도 안 되는 이름에 폭력으로만 점철된 내용을 쓰면서도 유쾌상쾌통쾌하게 막 속칭 '싸질러' 댔는데, 지금은 신중해진건지 심약해진건지 문장 하나 쓰는 것도 많이 힘듭니다. (이런 글은 예외에요. 징징대는 넋두리라서 그런 듯) 굳이 이유를 따져보면 예전에는 GTA 시리즈라는 완성된 틀 안에서 해나가니 리소스가 많이 준비되어 있어 편했지만, 지금은 하나부터 열까지 제가 세계관을 만들고 채워나가야 하다 보니 지쳐서 다시 완성된 틀을 찾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뭣한 비유이지만 게임 개발도 그렇거든요. 보통 인디게임에서 특수효과 같은 건 대부분 에셋스토어에서 사다 채워 넣는다던데.
그렇다고 표절은 당연히 안 될 말이니 출처는 밝히는데, 여기서 욕심과 고민이 끝없이 퍼져나간다는 게 문제죠. 원본이 원래 내용이 빈약한데 그대로 활용할 것인가, 내 멋대로 부풀릴 것인가? 우리 편인가, 적인가?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애초에 제가 이걸로 돈을 버는 게 아닌데다 (그럴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출판 단계에서 해당 부분들만 빼버리면 문제가 없는데,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민을 사서 하는지 저도 정말 모르겠습니다. 그냥 눈 감고 갖다 써야지, 어차피 재미로 쓰는 거니까 하면서도 계속 죄책감인지 뭔지 모를 근심이 끊이지를 않습니다.
고민과 별개로 독자적인 아이디어가 쏟아져 나오지 않는 한, 연재는 계속 해야 하니까 패러디는 어떻게든 쓸 생각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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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뭐 현재로서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분위기'인 것 같아요. 분명히 연재 이전부터 레스터와 존이 엎치락뒤치락하면서도 사건을 해결하는 반쯤은 코믹한 버디 수사물을 생각했는데, 그날그날의 심정이 개입해서 들쭉날쭉하게 되어버리니... 실생활의 저와 작가로서의 저를 분리해서 활동해야 하나 싶은데 지금의 저에겐 그럴 여유가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직장도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지만요)
뭐가 됐든 정리하자면, 가장 최근의 에피소드는 삭제하되 해당 내용을 좀 더 가볍게 바꿔서 쓸 생각입니다. 목표물부터 당초 기획했던 패러디로 바뀌고, 의뢰를 받게 되는 과정도 좀 더 그럴 듯하게 바꿀 겁니다. 그와 별개로 마피아 소속의 중개인인 프레도 파보리토는 성격이 잡힌 것 같아 일단 뺐다가 나중에 재등장시켜야겠네요.
뭐... 그렇습니다. 그냥 이대로 잘 고쳤으면 좋겠네요.
그거 알아?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유야 어쨌든 고독을 즐겨서 그러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계속 실망해서 먼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는 거야. - 조디 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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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0-09-28 22:52:18
그런가요? 저는 해당회차를 읽는 데에 딱히 문제가 없었는데요...
여러모로 생생한 묘사, 그리고 역설적으로 증명되는 인간성, 위기상황에서 드러나는 사람의 속마음 등을 읽는 게 좋았어요. 그래서 지울 것까지도 없다고 봐요. 대안적으로, 해당 회차를 외전이나 if 스토리 등으로 돌리고, 다른 회차를 시리즈의 정식회차로 명명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독자로서도, 운영진으로서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재고를 부탁드릴께요. 갑자기 게시물이 없어져 버린다든지 하는 상황은 별로 반갑지 않으니까요.
패러디란 어디까지나 충분조건이죠. 즉 있으면 좋고, 없어도 결격사유는 되지 않는.
그러니 너무 무겁게 생각하시지 않으시는 게 좋겠어요.
Lester
2020-10-01 01:36:01
(댓글을 이상한 곳에 달아서 다시 답니다.)
문제가 없으셨다니 다행이네요. 하지만 쓰고 보니 제 기분이 썩 좋지 않아서 말이죠. 마드리갈님의 답변을 보니 좀 더 과감한 묘사도 괜찮겠다 싶지만, 그것과 별개로 분위기가 우중충한 건 뒷내용 이어가기도 꿀꿀하니 자제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해당 에피소드는 정식 연재를 하기 전의 내용처럼 Pilot으로 돌리기로 했습니다. 존의 과거사는 나중에, 혹은 아예 풀지 않아도 괜찮겠다 싶어서요. 롤모델(?)인 시티헌터도 완결 직전에서야 어찌된 내막인지 밝혀졌으니 말이죠.
그래도 어딘가에 의지하고 싶어하는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준비된 내용을 바탕으로 쓰는 게 쉬우니... 자립하려면 예전에 게임카페에 썼던 글도 참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옛날의 저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디서 그렇게 힘이 나서 그렇게 써댔는지 정말 궁금해지네요. 진심으로.
SiteOwner
2020-10-05 23:26:29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작가는 작품의 세계를 지배하는 제왕이 되어야 합니다.
즉, 주제의식 등의 각종 목적에 부합하게 작중 세계 및 캐릭터들을 과감하게 조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이것들이 주종이 되어야 하고 나머지는 부차적으로 하면 됩니다.
물론 기존작에 대한 패러디나 오마쥬 등이 있으면 그것대로 좋겠지만, 그게 없어도 얼마든지 좋은 것은 만들 수 있습니다.
Lester
2020-10-06 09:38:51
이제는 소설로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는 지경까지 점점 흘러가고 있네요. 유희 목적으로 썼던 게 화풀이가 되지 않나, 쓸데없는 부분은 대충 짚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패러디에 목을 매면서 쓸데없이 정교해지고 있지 않나... 다른 작품의 요소 하나하나를 가져오기보단 공통적인 특징 하나만을 가져오거나, 인물 하나에서 여러 사건이나 요소가 뻗어나가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구심점이 없이 막 이것저것 늘어놓다 보니 정리가 안 된 건 확실하네요. 구심점이 인물이 되든 건물이 되든 한 '묶음'을 온전히 마무리짓고 다른 '묶음'으로 넘어가는 구성을 취해봐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