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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아체토역 2번 출구. 막 지하철을 타러 들어가려던 중, 현애가 뒤를 한번 돌아본다.
“왜 그래? 뭐 두고 온 거라도 있어?”
“아니, 두고 온 건 아닌데...”
현애가 무겁게 말한다.
“자비에 씨, 별 일 없겠지?”
“에이, 걱정 마. 그런 걱정은 집어치우고, 들어가자고.”
“하...”
망설인다.
현애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하지 못하고 자꾸 이리저리 흔들린다. 재개발지구 방향과 세훈, 그리고 아체토역 출구 사이에서. 그러면서도 세훈을 볼 때는 은근히 눈살을 찌푸린다.
“아니, 나는 왜 그렇게 봐. 내가 무슨 나쁜 말이라도 했냐.”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자꾸만 신경 쓰이는 거 아냐.”
“왜 아무데나 끼워맞추고 그래.”
그렇게 말하자, 세훈에게 또다시 초겨울의 느낌이 밀려온다. 마치 금방이라도 칼바람이 불 것만 같은 느낌 말이다. 하지만 그런 느낌은 얼마 가지 않는다.
“하... 그래.”
현애가 다시 세훈을 보며 말한다.
“별일 없겠지. 가자. 시간이 많이 늦었네.”
현애와 세훈은 그 길로 계단을 내려간다.
그로부터 30분 후, 폐건물 3층.
자비에는 AI폰의 플래시를 켜고 방안을 찬찬히 둘러보고 있다. 플래시가 아니면 빛도 거의 들어오지 않는 이 공간은, 2층보다도 더 지저분하다. 창문은 버려진 가구들에 완전히 가려졌고, 바닥은 각종 쓰레기, 먼지, 그리고 이리저리 흩어진 발자국들로 어지럽다. 거기에다가, 퀴퀴한 냄새는 2층보다도 더 강하게 풍긴다.
그러고 보니, 앙드레가 정체불명의 사나이(VP재단에서 ‘남자 Z’라는 임시 분류명을 붙였다)에게서 처음 탄환을 받은 곳도 여기였다. 앙드레의 진술로는, 4월 중순쯤 여러 가지 운동기구들을 사느라 돈이 쪼들렸는데, 남자 Z가 접근해서는 여기 폐건물로 데려간 다음, 돈을 미끼로 앙드레에게 베라네가 든 탄환을 주고 공격을 사주했다고 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자비에의 머릿속에서 퍼즐이 또 하나 맞추어진다. 남자 Z는 틀림없이 이곳의 지리를 잘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면, 남자 Z는 이 근방에 흔적을 많이 남겼을 것이고, 그것을 토대로 추적하면 남자 Z의 정체도 알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던 때.
저벅- 저벅-
들린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발소리가 말이다!
일어선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경계한다.
“어떤 녀석이냐... 도대체 어떤 녀석인 거야!”
하지만 답이 없다. 발소리는 점점 더 분명해지고, 가까워진다. 드디어 발소리가 3층 입구에까지 다다랐다.
“어떤 녀석이냐... 어떤 녀석이냔 말이다!”
자비에의 온몸을 감싸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기시감, 불길함, 거기에다가...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공포’까지!
급히 출입구 쪽으로 가 본다.
하지만...
이미 누군가 서 있다. 누군가가 출입문을 막고 서 있다.
“누구야, 당신...”
자비에의 말은, 덜덜 떨리는 나머지 잘 나오지 못한다.
“누군데, 누군데 도대체 여기...”
“하하하, 왜 그러시나.”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익숙한 목소리다. 잔잔하고, 중후하면서도, 동시에 가볍게도 들리는 목소리. 많이 들은 목소리다. 온화한 웃음소리... 알 것 같다.
“당신은, 설마!”
보인다. 익숙한 얼굴이. 꽤 주름지고, 조금 짙은 눈썹에, 약간은 각져 보이는 턱, 그리고 무테의 안경.
“여기서 뭐 하고 계시나, 프랑수아 자비에 라크루아 씨.”
장주원 박사다!
하지만 그 온화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차가워진다.
장 박사가 말한다.
아주 차갑게.
“어디 있었나 했더니, 여기 있었군그래. 아주 열심히 일하고 있어.”
“장 박사님, 도대체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자비에는 장 박사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장 박사를 보고 묻는다.
“이런 데까지, 왜 굳이 혼자서...”
“아, 내가 왜 왔나 궁금하군.”
장 박사의 목소리가 더 차가워진다. 그리고 미세하게 들리는 기분나쁜 웃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온화한 웃음을 보이던 장 박사는 어디 가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서 있는 것만 같은 이 음산함.
장 박사가 조심스럽게 목덜미와 뒤통수를 만진다.
스슥- 스슥-
잠시 후, 장 박사의 얼굴이 벗겨진다. 천천히, 장 박사가 그의 ‘얼굴’을 벗어 옆에 내려놓는다. 그리고 드러난다. 분명히 기본적인 토대는 장 박사의 얼굴이되, 20대 초반 정도로 반반한, 매우 젊어 보이는 청년의 얼굴이다.
“너... 도대체 누구냐.”
“보면 모르나. 틀림없는 장주원 박사다.”
“당신, 베라네를 마신 건가. 거기에다가, 신분을 속이려고!”
“뭐, 그렇게 됐지. 하지만 적어도 나는 아직 신분을 속인다든가 하지는 않았거든. 얼굴은 숨겼지만 말이야.”
“아, 그래. 좋은 발견이야. 하지만 이걸 아나?”
자비에는 젊은 얼굴의 장 박사를 노려보며 말한다.
“지금 여기서 당신이 하는 말과 행동은, 모두 빠짐없이 기록되고 있어. 무슨 말인지 아나?”
“......”
장 박사는 조용히 자비에를 노려볼 뿐이다.
“그리고 기대하라고. 장 박사, 당신의 추한 진실은 내가 조만간 다 뿌려 버릴 테니.”
“당신의 계획은 잘 들었어, 자비에 씨. 꽤 치밀하군.”
장 박사의 얼굴, 목소리, 모두 여유롭다. 그리고 ‘자비에 씨’ 대목에서 굵어지는 목소리.
“하지만 이 방 안에서는 그런 건 기대할 수 없지.”
“무슨 말이냐, 당신!”
“내가 이 폐건물 안에 전파 방해를 걸어 놨거든. 이 방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외부에 알릴 수 없고, 또 반대로 바깥에서 들어오는 전화나 인터넷 등은 이 안에서 받거나 할 수도 없지.”
자비에는 온몸을 부들부들 떤다. 함정이었다니, 이것이 함정이었다니! 온몸의 털들이 곤두서고, 머리에는 피가 마구 올라오는 듯하고, 손끝과 발끝은 찌릿 거리는 듯하다. 알려야만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을 빠져나가, 반드시 알려야 한다.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장 박사와 끝을 보아야 한다!
“생각해 보니, 한 가지 아쉬운 게 있군.”
장 박사는 너저분한 방을 한번 돌아보며 말한다.
“원래는 여기 오는 녀석들을 모두 일망타진할 생각이었거든.”
“조각이 맞춰지는군. 당신이 나를 여기로 부른 이유가 다 있었고.”
“맞아. 가장 중요한 녀석을 놓쳐 버렸지만 말이야.”
“중요하다는 건...”
순간, 자비에의 머릿속이 꽉 막히는 듯한 느낌이 온다.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장 박사가... 어째서? 앙드레의 배후도... 최근 벌어지는 사태의 배후도... 모두...
“그래.”
장 박사의 한마디를 듣자, 자비에의 퍼즐이 또 하나 짜 맞춰진다.
“말해라.”
자비에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게 깐다. 어느새 자비에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장 박사에게까지 닿는다.
“네 녀석이 부리는 수작의 진짜 목적을 말이야.”
“호오, 그렇게는 안 되겠는데.”
장 박사가 팔을 들고는, 자비에의 얼굴을 향해 오른손을 펼친다.
“성가신 녀석은 살려 둘 수 없지. 특히 네놈은 말이야. 네놈이 누군지를 생각하면, 더더욱 살려 둘 수 없단 말이다!”
그게, 자비에가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호오, 좋아. 방해꾼 녀석을 하나 해치웠군.”
다시 아까처럼 늙은 얼굴의 가면을 쓴 장 박사는 폐건물 3층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한번 뒤를 돌아보고는, 버버리 코트를 걸치고 모자를 쓰고 계단을 내려간다.
“눈엣가시였던 녀석도 하나 제거했으니, 앞으로는 좀 더 수월하겠어.”
다음 날 5월 23일 금요일 아침, 미린경찰서 1층 휴게실.
“팀장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진언이 마주 앉은 경찰관에게 의아한 얼굴을 하고 묻고 있다.
“할아버지가 실종되셨다니요?”
“아, 맞아. 한 달도 더 됐지.”
진언과 마주앉은 경찰관의 이름은 ‘테렌스 엘더’. 신임 경위로, 미린경찰서 순찰3팀장이다. 진언의 직속 상관이기도 하다.
“VP재단에 오래 근무하신 분이신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셨어. 어떤 단서도 남기지 않고 말이야.”
“처음 듣는군요. 왜 그런 걸 이제까지...”
“사실 우리 가족은 진작에 할아버지의 실종신고를 하고 행방을 찾고 있었지. 하도 진전이 안 되다 보니까, 좀 알 만한 사람한테만 살짝 말해 보는 거야.”
“제가... 어째서요?”
“전에 한번 듣기로... 너희 친척 중에... VP재단하고 관련이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지?”
엘더 팀장이 말하는 그 사람이라면... 분명 메이링이다.
“네, 맞습니다만...”
“그래... 다행이야. 시간이 되면, 그 사람에게 한번 물어봐야겠어.”
다행이라고는 하지만, 엘더 팀장의 얼굴에는 짙은 근심이 배어, 꽤나 무겁게 느껴진다. 보고 있자니, 진언 역시 왠지 모르게 울적해진다.
오후 4시, 미린고 근처 주택가.? 얼핏 보기에는 여느 금요일의 등교 풍경과 다를 게 없지만, 한가운데서 걷고 있는 세훈의 표정은 은근히 밝지가 않다.
“너희들, 혹시 메이링 씨한테 메시지 받았냐?”
“메이링 씨한테?”
현애와 주리가 되묻는다.
“그런 건 아직 못 봤는데.”
세훈은 홀로그램에 메이링의 메시지를 띄워 보여 준다.
[학교 끝나고, 내 사무실에 잠깐 와 주겠어? 친구들 데리고]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중요한 이야기라니 도대체 뭐지?”
주리가 메시지를 보자마자 말한다.
“굳이 ‘중요한 이야기’라고 하는 걸 보면 말이야...”
“글쎄, 우리를 직접 불러서 하는 이야기라니까...”
“예감이 안 좋은데.”
주리는 그렇게 말하고는, 곧바로 전화를 들어 메이링에게 전화를 걸어 본다.
“여보세요, 메이링 씨?”
“아, 주리야, 이 시간부터 전화는 왜?”
“메시지를 보내셨는데, 혹시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실 수...”
“안돼, 그건 전화로는 말하기가 곤란해.”
주리에게 들리는 메이링의 목소리는, 단번에 들어도 알 것 같다. 어딘가가 울먹이고 있기까지 하다. 안 그러려고 이를 꽉 다물며 애써 참는 것까지 알 수 있다. 주리의 머릿속에 불길한 예감이 더욱 강해진다.
“그건 직접 와야 말해 줄 거야.”
직감한다. 주리가 들은 메이링의 목소리는, 평소의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가 아니다. 알 것 같다. 어딘가 텅 빈 것 같은, 뭔가를 잃은 사람들의 목소리다. 그렇게 들린다.
“아... 일단 알겠어요. 이따가 봐요.”
“이따가 보자.”
“휴...”
주리가 전화를 끊고 말한다.
“무슨 일이 있는지는 몰라도, 왠지 너무 불길한데.”
“그러니까. 또 이상한 녀석들이 나타난 건 아닌가 걱정되네.”
세훈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한다.
“제발 요즘 출몰하는 폭탄마나 도깨비불 같은 녀석들에서 그쳤으면 좋겠는데.”
“그랬으면 좋겠어. 나도.”
현애는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지만, 그 음성은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말하는 것만 같다. 마치 빙하지대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과도 같은 한숨이 들리고, 일행은 계속 걷는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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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SiteOwner
2020-09-30 21:59:17
장주원 박사가...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완전히 예상 밖이라서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이렇게까지 혼란스러운 건 처음입니다. 게다가 역시 탄환 속에 든 물질은 전작 밀수업자에서 나왔던 베라네...여러모로 논란의 중심에 선 물질이군요.
진짜 읽고 있다가 머리를 맞은 것 같습니다...
시어하트어택
2020-10-01 23:25:14
사건은 이제 시작됐습니다. 독자들에게는 장 박사의 대략적인 실체가 알려졌으되, 작중 인물들은 아직 모르는 상황입니다.
앞으로의 전개를 계속 따라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드리갈
2020-10-01 19:04:32
읽고 나서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건가...
글에서 읽히는 악취의 감각 속에서 드러나는 진실이 너무도 끔찍하네요. 대체 장주원 박사가 왜...
메이링의 어조도 평소의 것이 아니고, 아마 저 자신이 작중의 인물이라도 그럴 것 같아요.
이게 이제 시작이라는 게 더 무서워지고 있어요.
시어하트어택
2020-10-01 23:33:39
장주원 박사의 실체는 아직 등장인물들은 모릅니다. 그 실체를 파헤치는 과정이 2부의 줄거리가 될 수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