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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긴 어디일까?
자각인지 몽환인지 분별하기 힘든 뒤틀린 감각의 흐름에 올라타 나는 물안개가 흩날리는 원시림을 걷고 있었다.
숲에 있는 나무들은 꼭 기괴하게 뒤틀린 모양새였다. 본디 이 시기라면 초록으로 가득하여질 나뭇잎들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단풍이냐고 묻는다면 이 또한 아닌 것이 분명. 그도 그럴 것이 단풍나무의 적색은 자연의 생동감이 느껴지지만, 이곳의 잎은 꺼지기 전의 촛불이나 흐릿하게 지워진 물감 흔적처럼 위태롭게 보였다.
이윽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자, 다시 숲의 모양새가 바뀌었다.
조금 전에만 해도 불꽃의 잔영처럼 보이던 잎들은 실제로 흩어져 반딧불이 마냥 빛나며 안개 속으로 흩어져 나갔다. 그와 함께 줄기에는 새하얀 빙설의 꽃이 피며 숲을 표백한다. 시각으로 보기에는 겨울나무의 숲처럼 차갑고 쓰라린 바람이 불어와야 할 것 같지만, 역으로 따뜻한 선풍이 피부를 스치자 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 같은 편안함이 몰려왔다. 그리고 그 감각은 분명 나 스스로 처음 보는 숲에 와서 불안에 떨어야 함이 분명한데도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안정감을 선사해준다.
저벅저벅
약에 취한 것처럼 몸이 스스로 앞으로 나아간다. 고작 눈 한 번 깜빡이기 전에만 해도 녹음으로 뒤덮여 길 하나 없던 곳에는 신화 속 난쟁이들이 만들어낸 것처럼 잘 정비된 오솔길이 하나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인도받는 것처럼 내 몸은 그 오솔길을 향해 조금씩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 방향에 무엇이 있는지, 얼마나 먼 곳으로 가는 건지, 애초에 내가 왜 이 숲에서 걷고 있는 건지 무엇 하나 선명히 떠올리지 못하건만, 어째서인지 단 하나의 명료한 전제만이 내 머릿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녀를 만나야 한다.
이 숲의 주인에게 경배를 올리러 가야 한다.
‘그녀는 누구일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무의식은 이 질문을 강제로 내쫓았다.?
그런 질문 따위는 무의미하다. 그저 걸어라. 발을 옮기고 앞을 향해라.
최면술사에게 암시라도 걸린 듯, 내 의식은 철저히 타자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숲은 이제 겨울을 지나, 봄을 거쳐, 여름으로 돌아와 있었다. 녹음이 다시 전개되어 원시림을 활개를 되찾았고, 오솔길은 끝을 보였다. 그리고 그 끝에 도달했을 때, 거기에는 나무 하나 없는 잔디와 같은 짧은 풀로 뒤덮인 광장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저기에 그녀가 있어.
무의식이 다시 내게 속삭였고, 나는 그의 인도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내 눈은 그곳에 있을 존재를 찾기 시작했고, 오래지 않아 그곳에서 거대한 옥좌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름답다.
그것은 지상의 수많은 제왕이 앉는 것처럼 화려하진 않았다. 빛나는 보석들로 자신을 치장하지도 않았고, 금붙이로 애써 영원불멸을 상징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괜히 쓸데없는 장식을 덧붙여 장엄함을 돋보이는 행위 또한 무용하다는 듯 지양한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것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옥좌는 그저 평범한 의자와 비교해도 그리 다르게 생기진 않았다. 하지만 재질만큼은 인세의 그 무엇보다도 달랐다.
최초로 보이는 것은 환염(幻焰).
평범한 속세의 붉거나 푸른 화염과는 다른 백자(白紫)색의 화염이 하늘 높게 타올라 옥좌를 덮고 있었다. 분명 실제 화염이 그만큼 거대하게 불타오른다면 화상을 입을 만큼 공기가 뜨겁게 달궈지는 것을 느낄 터인데 오히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올 뿐 어떠한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후에 보이는 건 신목(神木).
옥좌를 구성한 것은 분명 목재지만, 그것은 속세의 인간 장인이 만든 대패질한 죽은 나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지상에 뿌리를 꽂고 살아 숨 쉬고 있었으며, 이파리 대신 그를 장식한 빛은 은은하게 빛나면서도 눈부시게 느껴지진 않았다.
마치 신화 속 신들을 위해 준비된 것 같은 자리.
그러나 그 무엇도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에 비하면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거기에는 그녀가 있었다.
전체적인 그녀의 형태는 그저 아름다운 인간 여인의 모습이었다. 살짝 웨이브가 들어간 그녀의 머리카락은 그녀의 가슴 위치까지 뻗어 있었으며 황금을 그대로 녹여낸 것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동시에 민들레 꽃씨처럼 부드럽게 바람에 휘날렸다. 피부는 남방인들 특유의 햇볕에 탄 구릿빛이었는데, 마치 기름을 바른 것처럼 윤기 있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또한 매우 아름다웠는데, 어째서인지 그 구체적인 형태를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가 인간이 아님을 그녀의 외형은 스스로 증명한다. 황금을 녹여낸 것 같은 모발은 자세히 보면 타오르며 끊임없이 색이 변한다. 황금색이라고 착각한 것은 그저 그렇게 빛나는 시기가 가장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피부 역시 남부인의 것과는 다르다. 아니, 정확히는 인간의 것과는 다르다. 가까이 가서 살펴본다면 더 자세히 볼 수 있겠지만, 사람의 것과는 달리 혈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인간을 모사해 칠해 놓은 조각상을 보는 것 같았다. 여기에 더해 그녀의 온몸에는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혈관처럼 맥동하며 빛의 입자가 흘러 다녀 그녀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참으로 긴 시간 만에 소여의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가 왔구나.]
자애가 묻어나는 목소리가 내 귓가를 스쳤다. 그 소리는 기이하게도 그녀에게서 직접 들려오지 않았는데, 숲 그 자체가 말하는 것처럼 공기가 떨리며 그녀의 목소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여는 포기한 것이냐? 아니면 그대가 소여에게 양도받은 것이냐?]
소여? 그게 누구였더라?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인데, 약에 취한 것 같은 지금 상태로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
[후후, 아무래도 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인 것 같구나.]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그녀는 내가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웃음을 흘렸다.
[좀 더 가까이 오너라.]
이어지는 그녀의 제안.
그런 그녀의 말에 내 몸이 복종하려는 순간, 나는 어느새인가 그녀 앞에 서 있었다.
숲이 움직였다.
꿈에 취한 것 같은 정신 상태라도 인지할 수 있는 이적. 맨정신이라면 분명 공포를 느낄 만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내 몸은 그녀의 존재에 경외감을 품었다.
아아, 위대하신 주인이시여.
서 있던 몸이 경배를 위해 무너져 절을 하는 자세로 바뀐다. 열리지 않던 입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찬양하는 노래를 읊는다. 마치 나 자신에게 각인된 본능과도 같이.
[그런 걸 보고 싶은 게 아니니 그대는 이만 일어나거라.]
그런 내 모습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일까?
명을 내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무언가 언짢게 느껴졌다.
[본녀는 이드라. 꿈의 마녀이자 몽환의 지배자. 그리고 그대가 지닌 신기(神器)의 원주인.]
신기?
내가 의문을 가지자마자 마치 목에 누군가가 손을 댄 것처럼 따스한 감각이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그녀가 내 목덜미를 잡아챈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녀의 손은 여전히 옥좌에서 평안히 놓여있을 뿐이다.
‘이건 초커 때문이다.’
문득 내가 오늘 받은 배달하기로 했던 초커를 벗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녀가 말하는 신기가 이 초커를 말하는 것이리라.
[흠. 그 상태로 대화를 하는 것은 어렵겠구나.]
여전히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무언가 깨달은 표정을 짓는 이드라.
[그대의 몽환에 끝을 고한다.]
그녀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과 함께 빠른 속도로 의식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부작용으로 평안함 속에 묻혀 있던 공포 역시 돌아왔지만.
저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본능과 이성이 동시에 내게 외치고 있었다. 심장은 긴장감 속에서 쿵쾅대면서 터질 것 같은 열기를 발산하지만, 백지장처럼 차갑게 변한 머릿속은 싸늘한 공포와 함께 온몸에 오한이 되어 전신을 타고 흘렀다.
[그리 겁먹을 필요는 없느니라. 본녀가 필멸자를 상대로 직접 힘을 쓰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니.]
내 마음을 읽은 건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내 온몸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보며 그런 망상을 끊어냈다. 이렇게 식은땀을 흘리는 이를 본다면 신이 아닌 누구라도 상태를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 말입니까?”
[우리 군주들 사이의 맹약이니라.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번거로운 짓을 하고 있지도 않았으리라.]
‘번거로운 짓?’
“저를 부른 것 말씀입니까?”
[본녀는 그대를 부른 적이 없느니라. 그대가 본녀를 찾아왔을 뿐.]
내가 이 존재를 찾아왔다고?
전혀 기억에 없는 일이다. 아니 애초에 내가 찾아온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곳은 내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장소. 내가 어떻게 오고 싶다고 올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아니, 그 이전에…….’
나는 분명 잠들었을 텐데?
그렇다면 이건 꿈이라는 건가? 하지만 꿈속에서 내가 만나본 적도 없는 신격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꿈이라는 것이 단순히 몽상이라고 생각하였느냐?]
“아닙니까?”
[꿈이라는 것은 영혼이 본질로 찾아가는 행위. 그리고 그 본질로 향하는 길에는 우리 불멸자들의 공간이 있으니. 그대는 그저 본질로 향하던 길에서 벗어나 본녀의 영지로 온 것에 불과하니라.]
그녀의 말에 대답하듯 내 목에 걸린 초커가 진동한다.
아무래도 그녀가 말했듯이 그녀의 신기인 이 초커가 잠든 나를 꿈의 세계에서 그녀의 땅으로 불러들인 모양이다.?
“돌아가 수는 없는 겁니까?”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느니라. 하지만 그대는 수백 년 만의 손님. 이대로 그냥 돌려보내기는 섭섭하구나.]
그녀가 팔을 휘젓자 내 앞에 자그마한 다과상이 차려졌다. 다과상에는 작은 쿠키와 처음 보는 차가 준비되어 있었는데,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와 같은 존재가 준비한 것인 이상 평범한 것일 리는 없을 것이다.
[먹거라.]
“인간이 먹어도 괜찮은 것입니까?”
[물론. 오히려 좋으면 좋았지 나쁜 것은 없는 물건이니라.]
좋다는 것도 신의 기준과 인간의 기준이 다를지도 모르는데 말이지.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먹지 않는 것 역시 실례라고 느낀지라 나는 조심스럽게 쿠키를 한 입 베어 물고 경탄했다.
“맛있어!”
내가 생각해도 실례라고 생각할 만큼 큰 감탄이 입 사이로 흘러나왔다. 우연히 보너스를 모아서 가장 비싼 제과점에서 쿠키를 사 먹었을 때도 이와 같은 진미를 느껴본 적은 없었다.
[세계수의 과실로 만든 다과이니라. 맛이 없을 리가 없겠지.]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입에도 어느새 쿠키가 물려 있었다.?
‘신 역시 인간이랑 똑같이 입으로 음식을 먹는구나.’
실없는 생각이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만으로 긴장된 몸이 안정되어 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야 좀 긴장이 풀린 것 같구나.]
“네, 감사합니다. 혹시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긴장이 풀린 건 풀린 거고 상황은 여전히 다를 게 없다.?
그녀는 신. 단순히 나에게 쿠키나 대접하려고 나를 붙잡아 둔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신화 속 존재에게 주어진 대업 같은 것을 요구할지도 모르지만, 나에게 그렇게 대단한 것을 시키지는 않겠지.
[본녀는 무료하다.]
“네?”
하지만 그녀가 요구한 것은 내 예상보다 더 사소한 것이었다.
[말 그대로. 본녀는 오랜 시간 영지에서 가끔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살아왔느니라. 그렇기에 이제는 손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이 본녀의 유일한 낙일지니.]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보라는 건가? 하지만 이런 존재들이 흥미 있어 할 만한 이야기는 전혀 모르는데…….
오드리에게 가끔 유머라고 말을 했다가 ‘하하, 선배. 맞고 싶지 않으시면 다신 그런 얘기하지 마세요.’라며 싸늘한 표정으로 노려봐진 일은 아직도 마음에 상처로 남아있다.
‘여기서는 정공법으로……,’
“혹시 듣고 싶은 이야기라도 있으십니까?”
[무엇이라도 좋다.]
하필이면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내용을 말하다니.
보통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까다롭다. 남에게 선택지를 맡겨서 타인의 센스를 시험하려는 못된 속셈이 도사리고 있는 탓이다.?
신이면 좀 관대하게 행동할 것이지…….
[무례한 생각을 하는 표정이구나.]
이크, 들켰나?
아니 오드리에게도 읽힐 만한 내 표정이니 그냥 척 보고 알아본 것일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너무 어려운 주문이십니다.”
[아무 이야기나 하라는 게 말이냐.]
“네. 조금만 구체적인 주제를 정해주십시오.”
[구체적이라. 하긴 그대들 인간들은 그런 걸 좋아했지. 그걸 잊고 있었구나.]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그녀는 무언가 결정했다는 뜻인지 손뼉을 짝 치더니 나를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대의 이야기를 해다오.]
“제 이야기 말씀입니까?”
[그래, 그대의 이야기 말이다.]
“제 이야기라면 어떤…….”
[흠,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굳이 하나를 먼저 꼽자면……,]
어려운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대의 꿈에 대해 듣고 싶구나.]
꿈? 지금 꾸고 있는 꿈을 말하는 건 아니겠고, 목표를 말하는 건가?
“저는 딱히 꿈이라고 할 것은 없습니다만…….”
[그것은 거짓말이로구나.]
“네?”
나름대로 솔직하게 말한다고 한 말인데 바로 부정당하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나 자신이 꿈이 없다고 여기는데 이 신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사실 당신에게는 당신조차 모르는 숨겨진 열정이 있어요’ 같은 식의 사이비 신관들이나 할 법한 발언을 하려는 건가?
[꿈이 없는 이는 애초에 본녀의 영지에 발을 들이지 못한다. 하지만 그대는 너무 쉽게 본녀 앞에 도달할 자격을 얻었지.]
하지만 이어진 말은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 세계가 그런 법칙에 따라 운영된다고 하는데 내가 뭐라고 답하겠는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도 전혀 모르겠는데 말이죠.’
하지만 그래도 모르겠다는 건 여전히 모르겠다는 거다. 어린 시절의 나라면 모를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목표라고 해봐야 하루 벌어 하루를 버티는 일에 불과한데, 무슨 놈의 꿈을 찾는다 말인가?
“저는 그저 하루하루 먹고사는 것이 목표인 인간입니다.”
[정말인가?]
“예전에는 다른 꿈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에게는 더는 꿈이 없습니다.”
[예전?]
“내 예전이요.”
[그때는 어떠한 꿈을 꾸었는가?]
아픈 질문을 하네.
나는 그 말에 순간적으로 짜증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지만 상대가 신이라는 생각에 억지로 이를 눌러 참았다.
“……영웅이 되고 싶었습니다.”
감정을 다스린 끝에 겨우 뱉은 한 마디.
그래, 영웅.
나는 영웅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빌어먹을 둔갑술을 택했고 이 모양 이 꼴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
[자신의 꿈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구나. 후후, 보면 볼수록 소여 그 아이와는 달라서 실로 흥미롭구나.]
언뜻 무례해 보일 수 있는 내 태도가 오히려 재미있었는지 그녀는 빙긋 웃어 보였다.?
[변하고 싶지 않으냐?]
“네?”
[꿈에서부터 도망치는 삶에서 나와 새로운 존재로 우화하고 싶지 않으냐는 말이다.]
새로운 존재.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나. 뭐 좋다. 그것 역시 여흥이니, 음?]
갑자기 안개가 짙어지며 그녀의 모습이 손끝에서부터 불꽃이 되어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바깥에 손님이 온 모양이로구나.]
손님?
[그대와의 만남은 이걸로 끝이 아니니, 본녀는 다시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마.]
본녀는 그대가 마음에 들었으니 말이다.
그녀의 뒷말 역시 안개처럼 흩어지며 귓가에 살며시 스며들었다가 사라졌고,
“움직이지 마라, 도둑놈!”
다른 이의 차가운 목소리가 칼날처럼 박혀왔다.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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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0-10-11 13:12:31
나무의 모양이 기괴한 것도 그 자체로 무서운데 붉은 숲...게다가 그게 갑자기 빙설의 숲이 되었다 봄, 여름의 숲으로 돌아와 있고...이런 변화,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진다면 생각이고 뭐고 전혀 못할 것 같네요.
그런데, 기묘하게도 "그녀를 만나야 한다" 라는 생각만이 주인공의 생각 속에 선명히 남는다니...
그렇게 만난 그녀는 미녀의 모습을 하지만 인간은 아닌 존재. 신이었군요.
친절한 것 같으면서도 무섭고, 멀리 있는 존재인 것같은데도 주인공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고...확실히 무섭게 느껴지네요. 그런데 그 아이와 다르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주인공을 도둑놈이라고 부른 그의 등장, 정말 산 넘어 산이네요...
Papillon
2020-10-11 14:47:08
일단 신이니만큼 자기 영지 내에서는 거의 무엇이든 알 수 있고 지배할 수 있지요. 마침 관장하는 영역이 꿈과 몽환이기도 하고요.
SiteOwner
2020-10-21 20:13:54
붉은 숲...체르노빌 근처의 그 붉은 숲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어릴 때 했던 게임에 나오는 황폐한 숲까지 떠올랐습니다. 킹스퀘스트 시리즈였는지 아무튼 퀘스트로 끝나는 것만 알 뿐 이름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주인공이 겪은 일련의 사건, 정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가득차 있고, 제가 주인공이라면 정말 혼란스러워서 주인공처럼 행동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군요. 청운의 꿈을 안고 상경했지만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으로 20대의 시간을 많이 채웠던 저의 지난날이 겹쳐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주인공처럼 이드라같은 존재를 만날 수 있다면 무엇을 말할지도 상상해 보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어질 인연은 언젠가는 이어진다는 게 있는 것일까요.
Papillon
2020-10-22 01:08:59
특이한 숲은 묘한 매력이 있는 장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