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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의 작업실의 문이 열리고, 현애와 세훈이 안으로 들어온다.
물을 끼얹은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영의 작업실 안의 분위기는 일순에 다운된다. 그때까지도 웃고 떠들던 리하르트가 얼굴색을 바꾸고는, 둘이 들어오는 걸 보더니 약간 몸을 움츠리며 말한다.
“뭐야, 좀 나아질 줄 알았더니 여전하잖아.”
리하르트의 말대로, 여전히 현애와 세훈의 주위는 냉랭하다. 그나마 아까보다는 살짝 온도가 올라간 것이기는 하지만, 작업실 안에 있는 리나와 리하르트가 느끼기에는 별 차이가 없다.
“보리차도 차가워지더라고요.”
세훈의 말에 수영의 얼굴은 살짝 일그러지지만, 잠시 후 수영은 의식적으로 얼굴빛을 고쳐 본다. 목소리도 조금 낮춰 본다.
“후... 아무튼, 좋아. 이제 좀 편하게 앉아도 돼.”
현애는 애써 심호흡을 하며 앉는다. 그리고 조용히 바란다. ‘그 말’만은 제발 하지 않기를. ‘그 말’을 들어 버린다면, 아마 미쳐 버리리라.
“자, 좀 마음이 풀어졌기를 바라.”
“네... 네.”
“그러면, 이제 또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본론이라니... 또다시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현애의 표정이 또다시 약간 일그러진다. 수영은 여전히 오른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그러면서도 현애의 일그러진 얼굴을 의식한 듯 최대한 자극적이지 않게 말한다.
“자, 아까 어디까지 말했더라?”
“왜 하필이면 저를 콕 집었나... 그거였죠.”
이제 모르는 사람도 알 정도다. 현애의 목소리가, 매우 은밀하게, 부글부글 끓는다. 조금이나마 효과가 있었던 보리차의 미미한 효과도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다시, 주위에 앉은 리나와 리하르트도 겉옷을 껴입어야 할 정도로, 주변은 아까보다 더한 초겨울이 되어 있다. 하지만 수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앞에 놓인 따뜻한 보리차를 마신 다음 입을 연다.
“그래. 내가 너를 ‘로이 팔코’의 직접적인 모델로 삼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 하지만 단 하나로 축약하자면, 단 하나로 축약하자면!”
모두들 수영의 입을 주목한다. 세훈, 리나, 리하르트는 초롱거리는 눈으로, 현애는 잔뜩 찌푸린 눈으로. 거기에다가 희미하게 보이는 찬 안개는 덤이다.
“완벽해. 네 모든 것이, 성별만 바뀐 로이 팔코 그 자체였단 말이야!”
순간 세훈은 손뼉을 친다. 그렇다.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최강 냉동인간>의 주인공 로이 팔코의 지금까지 밝혀진 정보를 살펴보면 이렇다. 그는 치료를 위해 동면에 들어갔고 약 1,500년 후 다른 행성에서 깨어났다. 냉동인간이 되기 전에는 초능력은 모른 채 살아왔다. 해동되고 나니, 그에게는 초능력이 생겼다. ‘모든 것을 얼리는’ 능력이었다. 지금까지의 레귤러 멤버는 남자 하나에 여자 둘이다. 히로인 한 명은 강화계 능력이고, 또 하나는 어떤 것이든 멈출 수 있는 능력이다. 후드를 쓴 적의 공격을 집요하게 받았다. 생각해 보니, 대체로 모두 맞아떨어진다!
하지만 뭔가 다른 것도 있기도 하다. 성별이 바뀌었으니 사용하는 능력이 바뀐 것 그렇다 치더라도, 그것 말고도 또 다른 게...
“아, 맞다.”
세훈은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손뼉을 친다.
“그런데 작가님, 로이는 여동생 한 명만 있지 않나요? 그거는 좀 다른 것 같은데.”
그랬다. 로이 팔코에게는 끔찍이 아끼던 연년생 여동생 ‘에스더 팔코’가 있었다. 직접 등장하는 일은 없지만, 작중에서 로이가 여동생 이야기를 많이 언급했기에, 비록 ‘옛날 사람’이기는 해도 독자들에게는 에스더도 나름 인기가 좋다.
“아, 그거?”
수영은 알겠다는 듯 말한다.
“클리셰를 좀 쓴 거지. 남주인공이니만큼, 여동생 하나 있는 구성이 인기가 많잖아?”
“아하!”
세훈은 자기가 전에 본 다른 소설들을 생각하며 손뼉을 친다. 그러고 보니 <어둠을 가로지르는 기사>의 주인공도 여동생이 있었던 것 같다. 드릴맨의 작품은 아니긴 하지만. 한참 정신을 팔다 보니, 주위의 온도가 더 내려가고, 안개가 더 짙게 끼게 된 것도 모를 정도다.
“아무래도, 띠동갑 오빠 하나에 열 살 터울 언니 하나씩 있는 구성은, 좀 뭐랄까... 순정파 조연 여자 캐릭터에 더 어울리지 않겠어? 너희들 생각은 어때?”
“그렇죠, 그렇죠.”
“저 그런데 드릴맨 씨.”
현애가 수영을 노려다 보며 말한다.
“제 오빠하고 언니에 대해서 왜 그렇게 잘 알아요? 아니 설마, 남의 가족 구성도 캐고 다닌 건가요?”
“캐고 다닌 게 아니라니까? 아니, 그걸 캐고 다닌다고 말하면 안 되지! 나는 스토커가 아니야! 말하는데 나는 취재를 하는 것일 뿐이야! 자료가 있기에 그걸 좀 참고할 뿐이라고!”
“그 자료를 누가 주는 건데요! 왜 남의 신상정보며 가족에 대한 걸 그렇게 꿰고 다녀요?”
“말할 수 없어! 최고 기밀이라니까!”
“아니, 기밀이니 뭐니 저하고는 상관없고요.”
현애의 목소리는 더욱 굵어지고, 이제 방안은 마치 완전히 겨울이 된 것만 같이 춥다.
“그 뭐냐, 제 신상정보를 상의도 없이 멋대로 넘겨 준 그 녀석은 도대체 누구냐고요!”
“오, 저거군!”
수영은 자신의 눈앞에 벌어진 상황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현애의 주위를 둘러싼 차가운 아우라를 보고 만족감에 겨워 미소를 짓는다. 이를 슬슬 부딪치면서도, 온몸을 벌벌 떨면서도, 리나는 알 것 같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수영의 미소는, 처음 수영과 대면하고 미소를 지은 자신과 같다!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저렇게 드러내 줄 줄이야! 내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니!”
수영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다. 흥분과 감동, 그리고 희열로. 물론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상황보다는, 자기 앞에 선 <최강 냉동인간>의 주인공 로이 팔코의 모델이, 직접 저렇게 아우라를 뿜어내 주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 더욱 중요하다! 물론 좀 진정은 시켜야 하겠지만.
“뭘 그렇게 뚫어지라 보는 거예요?”
“아, 아니...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나는 단지...”
“얼음 맛 좀 볼래요?”
현애가 잔뜩 열을 내며 수영에게 다가가려다가, 잠깐 멈칫한다.
이상하다. 이건!
수영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이것!
냉기가 아닌가!
냉기 능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이제껏 자기 자신밖에 못 봤는데!
“뭐죠, 드릴맨 씨? 속임수를 쓴 건가요?”
“아, 속임수는 아니야. 그렇다고 내가 원래 냉기 능력자인 건 아니지.”
“그럼, 제 능력을 베껴 썼다는 거네요?”
“얼추 맞아.”
“......”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여기를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싶지만, 이런 게 능력이라니 어쩌랴. 일단은 가만있자... 일단은.
“이제 이걸로, 좀 더 실감 나게 쓸 수 있겠어. 로이 팔코의 초능력에 대해 말이지.”
수영은 이제 싱글싱글하며 콧노래를 부르기까지 한다. 손으로는 교향곡 지휘자라도 된 듯, 과장되게 휘두르기까지 한다. 좋다. 모든 게 완벽하다. 이대로라면 완벽하다! 완벽하다! 그렇게 잠시 도취하여 있다가, 조용히 그 모습을 보고 있는 현애를 다시 본다.
맞다... 하나 빼먹었다.
“아, 하나만 더 묻자.”
“하, 뭔데요?”
현애는 최대한 차분하게 수영을 보고 말한다.
“빨리 말하세요.”
“미안한데 로이 팔코라는 캐릭터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미안하지만 네가 하나만 더 도와줘야겠어.”
“하, 뭐죠?”
“로이 팔코의 과거편을 좀 더 맛깔나게 써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학교폭력이라든가, 여자친구와의 이별 같은, 요즘 나돌고 있는 클리셰로는 안될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수영은 현애의 눈치를 살짝 본다. 그리고 속으로 안도한다. 이 정도 냉기라면 충분히 방어는 가능하다. 아무리 상대방의 능력을 조금 못하게 베껴오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냥 냉기로 얼린다든가 춥게 한다든가, 아니면 얼음을 만든다든가 하는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충분히 방어해 내며,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무사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수영은 충분히 마음을 먹고, 심호흡을 한번 한다. 정신을 집중하고, 또렷한 눈으로 현애를 바라보며, 말한다.
“아무래도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는다는 건 슬픔이 크겠지. 그래서 겪는 어려움도 분명히 있을 거야. 그렇겠지?”
“그렇죠.”
다행이다! 목소리는 차가워도 공격적으로 나오지 않는 게 어디인가! 수영은 겉으로는 그냥 무덤덤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떨린다. 자칫 잘못하면 건드려 버릴 것만 같다. 건드리면 안된다. 마치 말벌집을 떼 내려는 사람과도 같고, 외나무다리의 중간 지점에 온 사람과도 같다. 수영의 심정은 그렇다.
“아마 이런 경우가 있겠지.”
수영은 마치 지면 깊숙한 곳에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지만, 속으로는 가시밭길을 걷는 듯한 심정으로 말한다.
“개중에 보면 특히 예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그런 사람들이라면 으레 하는 말이 있지. ‘너는 부모도 없냐’고 말이야. 특히 너...”
하지만 수영의 말은, 거기서 멈추고 만다.
수영이 멈추려고 한 게 아니다.
일격에 멈춰 버렸다.
말을 미처 다 하기도 전...
퍼억-
“끄윽...”
세훈의 눈에, 리나의 눈에, 리하르트의 눈에.
보였다!
현애의 주먹을 꽉 쥔 오른손이, 수영의 얼굴에 정면으로 직격하는, 그 모습이!
“야앗!”
“뭐, 뭐하는 짓이야, 작가님한테!”
리나와 리하르트의 경악스러운 반응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현애는 쓰러진 수영에게 윽박지른다.
“야, 이 잘난 작가님아, 너 대체 나보고 뭐라고 했냐? 어엉?”
“아... 아니... 잠깐...”
“뭐라고 했냐고!”
난데없이 얼굴을 얻어맞고서도, 수영이 감싼 곳은 얼굴이 아니다.
“잠깐... 잠깐! 내 오른손... 손목이 삐끗했다고! 잠깐...”
“잠깐이고 뭐고, 방금 나보고 뭐라고 했냔 말이야!”
“아니, 아니... 오해라니까.. 오해... 부모도 없냐...”
다음 순간, 수영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낀다.
냉기... 극지대에 온 것만 같은 추위. 그것도 못 느낄 정도의..
광포함...
극강의 분노!
“뭐어어어어어어어어어!!!”
잠시 후.
“으... 으... 그렇다고... 이렇게... 할... 것까지야...”
“야, 좀... 제발 좀 참아! 제발 좀!”
리나가 왼쪽, 리하르트가 오른쪽에서 현애의 양팔을 붙잡고 있다. 현애는 아직도 얼굴을 붉힌 채, 차가운 숨을 내쉬며 씩씩댄다. 수영은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신음을 흘리며, 일어서지도 못하고 오른손목을 왼손으로 꽉 쥐고 있다.
“그러고 보니까 말이죠.”
세훈이 리하르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목소리를 죽이고 조그맣게 말한다.
“현애가 평소에 가족들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하더라고요.”
“그래...? 추억이 많았나 보네. 동면하기 전은 아득한 옛날일 텐데.”
“주리가 그러는데, 주리하고 둘이 있을 때면 부모님하고 언니하고 오빠하고 있었던 이야기가 거의 절반이었다고 하네요.”
“정말이야? 그렇게나 추억이 많이 남았을 정도면, 뭐...”
그리고 그 주, 5월 26일 월요일부터 5월 30일 금요일까지, <최강 냉동인간>은 ‘작가 사정상’ 일주일을 휴재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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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0-10-20 16:28:16
방약무인의 태도로 자신만 생각한 작가 주수영의 태도에 속이 뒤틀리는 분노를 느꼈어요.
저렇게 자신만의 세계에서 타인을 장기말처럼 보는 저런 사람은 작가로서는 취재운운하면서 타인의 신상을 파고들고 헤집어놓는 등의 행태를 보이는 정도겠죠. 하지만, 기업경영자나 정치가 등이 된다면...
물론 어떤 경우에서나 인간이 목적이고 절대적으로 도구가 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인데다 이상향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보니 그것까지는 기대하지는 않지만, 수영은 현애를 납득시킬 일말의 노력도 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도발했고. 그게 바로 "작가 사정상 휴재" 를 이끌어버린 사건.
그러고 보니, 죠죠의 기묘한 모험 4부도 같이 떠오르네요.
키시베 로한의 실언에 그대로 통제불능이 되어버린 히가시카타 죠스케의 분노.
시어하트어택
2020-10-20 23:40:54
사실 저 에피소드는 죠죠 4부에서 좀 많이 따 왔습니다. 세부적인 내용은 많이 달라지기는 했는데 큰 틀은 같습니다. 주인공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려 버렸으니 저렇게 얻어터지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하겠죠.
SiteOwner
2020-11-20 21:56:40
살아 오면서 주수영과 같은 유형의, 인간을 자신의 도구로밖에 안 보는 사람을 만난 적이 좀 있었습니다.
물론 험한 꼴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불쌍하게 여겨진 적은 없습니다. 타인을 도구로밖에 안 보는 사람이 존중받아야 할 이유도 정당성도 없었으니까요. 현애의 분노가 냉기능력으로 발현된 게 그나마 수영에게는 천만다행이었지, 만일 화염능력이나 죠죠의 기묘한 모험 5부의 메탈리카같은 능력이라면 1주 휴재로는 답이 안 나올 것입니다.
학원강사 시절에 저를 내쳤던 학원이 그해가 끝나기 전에 결국 문을 닫고 말았는데, 학원장이 "당신 아니라도 학원경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차피 강사는 도구일 뿐이다." 라고 한 게 기억납니다. 그렇게 문제가 없어서 폐업했을지는 상상에 맡깁니다.
시어하트어택
2020-11-21 23:29:24
그러셨군요. 마음고생이 좀 있었겠습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대우받아야 하지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