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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8일 수요일, 미린역 남쪽 카페거리.
“하아... 그날 어떻게 했기에 손목이 아직도 지끈거리는 거야.”
수변공원 한쪽에 마련된 벤치에 앉은 수영이 보호대를 찬 오른손목을 자꾸 만지작거리며 앓는 소리를 낸다. 옆에는 노트가 담긴 가방이 있다.
“휴재는 했지만... 다음 주가 돼도 손목이 안 나으면 어떡하지.”
한 1분 동안 손목을 주무르던 수영은 시계를 본다.
3시 30분.
지금쯤이면 하교하는 학생들이 하나둘씩 거리로 쏟아져 나올 때다. 그리고 딱 지금이다. 오늘의 취재 대상이 여기를 돌아다니고 있을 만한 시간은.
보인다.
미린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남학생, 여학생 다섯 명이 이리로 오고 있는 모습이.
그중에서도 맨 앞에서 걸어오며 깔깔 웃어대는 갈색 머리의 여학생...
어떻게 잊으랴!
저 얼굴을, 그저께 저녁의 그 얼굴을 말이다!
“야, 남궁현애! 너 말이야, 너!”
하지만 전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쪽으로는 시선을 주지도 않는다. 수영은 악에 받쳐서 다시 현애가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키우고 말한다.
“남의 손목을 이렇게 만들어 놨는데 그냥 지나가? 그리고 이거 때문에 쓰는 속도도 3분의 1로 느려졌고, 이것만 아니었어도 조회수가 최소한 10만 정도는 더 나왔을 거라고!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하유, 드릴맨 씨, 이 잘난 작가님아.”
“왜, 또 왜!”
“그쪽이 먼저 그런 이야기를 안 했으면 지금은 손목이 아플 일도 없고, 연재도 잘 하고 있을 거 아니야? 안 그래?”
“......”
수영은 얼른 뭐라고 말해 보려고 했지만, 할 말이 생각이 잘 안 난다. 뭐라고 한 마디는 해야겠는데, 그렇다고 수영 자신에게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고...
또다시 말 없는 대치가 시작되려다가...
“어? 잠깐. 드릴맨 작가님이라고?”
현애 옆에 있던 동급생들이 수영 앞에 모여들어, 저마다 노트나 태블릿 등을 들고 들뜬 얼굴을 하며 말한다.
“<전지적 도련님 시점> 잘 봤습니다!”
“저도요! 사인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리 그저께의 나쁜 일 때문에 잔뜩 기분이 상해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팬들이 자신을 알아봐 주는 것을 보니, 기분이 풀릴 수밖에. 수영은 얼른 얼굴을 풀고는, 펜을 꺼낸다. 사인을 해 주기 전에, 우선 오른손목을 한번 주무르고는, 심호흡을 한번 한다.
그리고 오른손을 몇 번 휘두른다.
“저... 작가님.”
그중 한 명이, 수영이 손목을 잡고는 조그맣게 앓는 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말한다.
“손이 좀 아프신 것 같은데 좀 천천히 하시죠.”
“천천히 하라니? 나는 이미 다 끝났어.”
“저... 정말요?”
“다 끝났다고요?”
동급생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는지, 큰 소리로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한다.
“손을 대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다 끝났단 말인가요?”
“맞아. 사인은 끝났어. 봐.”
다들 자신이 들고 있는 노트와 태블릿을 본다.
수영의 말대로, 이미 사인은 다 끝났다! 연재 사이트에 있는 표지와 종이책 표지 한쪽 구석에 항상 있는 그 사인이다!
“아참, 너희들 이름을 안 넣었지?”
“마... 맞아요! 제 이름도 넣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좋아. 너희들 이름이 어떻게 되지?”
“에... 저는 나타샤 로젠가르텐이요.”
“조제 엔히크스라고 합니다.”
“알렉산더 페페를레라고 써 주세요.”
“니라차 아리아눈타카라고 적어 주시면 돼요.”
수영은 차례대로 동급생들에게 이름을 적어 준다. 그런 모습을 보고 옆에서 현애가 빈정대듯 말한다.
“참 열심히 한다.”
“아니, 넌 좀 가만히 있어 봐! 내가 수전노나 관심병 도진 사람인 줄 알아!”
“수전노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관심종자 같이는 보여.”
“휴... 말을 말지.”
수영은 그렇게 말하며 가방을 뒤지다가, 뭔가가 생각났는지 가방을 내려놓고 자신의 AI폰을 들고 잠시 뭔가 열심히 넘기더니, 사진 하나를 찾아낸다. 그리고 보여준다.
“혹시, 이 애 아는 사람?”
수영의 AI폰에 나온 건 붉은 파마머리를 한,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의 사진이다.
“음... 글쎄요.”
“이 사진만 봐서는 저희도 잘 모르겠는데요.”
동급생들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이 애 본 적 있어?”
“아니, 몰라. 미린초등학교인가? 이런 애는 못 봤는데.”
“본 것 같기도 하고, 안 본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는데.”
친구들이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보던 현애가, 다시 수영을 노려본다.
“에휴.”
“아니, 또 왜!”
“이제는 나로도 모자라서 다른 애들까지 캐고 다니네.”
“아니, 너!”
수영이 순간 얼굴을 붉히며 말한다.
“말이 좀 심하잖아!”
“심하기는. 내가 틀린 말 했어? 남들 모르게 뒤나 캐고 다니고 사생활까지 속속들이 훑고 다니는 게 잘 하는 짓이야?”
“아니, 내가 말했잖아! 취재하고 스토킹은 다른 거라고!”
현애와 수영이 서로를 노려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을 그때쯤.
“여기-”
카페거리 쪽에서 누군가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린다. 수영이 앉은 벤치 쪽을 보고 부르는 소리다. 수영이 딱 들어보니,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된다. 하지만 카페거리 쪽은 수영이 앉은 자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흠... 설마, 이 사진에 나온 앤가?
여기서 사진이 보이지를 않으니, 보일 때까지는 그저 상상할 수밖에. 목소리로 봐서는 이 사진에 나온 애가 맞는 것 같은데...
아무튼, 수영은 조금 전까지 현애와 말다툼하던 것도, 고등학생들에게 사인해 주던 것도 잠시 잊은 채, 귀는 온통 카페거리 너머로 향하고, 손에 땀이 쥐어진다.
“어? 너희들!”
이건 현애의 목소리. 거기에다가 아는 사람을 만날 때 하는 말! 그렇다면 가능성은 더 크다!됐다.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다니! 성공이다. 오늘의 취재!
“빨리 와!”
“걱정 마, 이미 다 왔거든!”
드디어 코앞까지! 이제 수영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일어서자!
“어, 뭐야.”
수영의 입에서 조그맣게 김빠진 목소리가 나온다.
아니다.
이 애들은, 전혀 다르지 않은가...
한 명은 금발에 가까운 머리를 꽁지머리로 묶었고, 약간은 통통한 체격에, 빨간 야상재킷을 입었다. 또 한 명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듯한 검은 머리를 뒤로 묶었고 초록색 계통 옷들을 입었다. 두 명 모두, 곱상한 얼굴이고 또 초등학생치고는 큰 키다. 160cm 정도는 되어 보인다. 분명히, 분명히 평소라면 분명히 취재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만큼 개성이 있기는 하지만... 수영은 일단 여기서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기로 한다. 오늘의 목표는 아니지만, 어쨌든 취재 대상으로 삼을 만한 가치는 있으니까.
금발 소년의 이름은 독고민. 미린초등학교 5학년 H반의 반장을 맡고 있다. 미린대 대학원에 다니는 독고반디가 누나고, 처음 듣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미린경찰서에서 근무하는 독고진언의 삼촌이기도 하다. 메이링과는 얼굴이 많이 닮았다. 머리를 뒤로 묶은 소년의 이름은 류젠리츠인 유. 민과는 같은 미린초등학교 5학년 H반이다. RZ그룹 집안으로, 하야토의 동생이다. 뒤로 묶은 머리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은 여자로 착각하기도 하며, 왼손잡이이기도 하다. 그리고 둘 다 초능력자다. 수영이 보기에는, 여느 또래의 아이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아, 맞다. 현애 누나.”
벤치에 앉아 있는 수영을 한번 보더니, 민이 말한다.
“왜?”
“저 형 혹시 누군지 알아?”
“몰라도 돼.”
현애는 수영을 한번 곁눈질로 노려보고는 약간의 신경질을 담아 말한다.
“아니, 몰라도 된다니, 말이 너무하지...”
수영의 목소리가 또다시 올라가려는 그때, 나타샤가 또다시 얼굴이 붉어지려는 수영을 제지한다.
“아, 얘들아, 여기 이 분은 좀 유명한 작가님이신데, 한번 인사해 볼래?”
“정말 작가님인가요?”
민과 유가 호기심을 보이며 돌아보자, 수영은 붉어지려는 얼굴의 핏기를 빼고, 다시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아, 맞아. 너희, 혹시 ‘드릴맨’이라고 하면 다들 알려나 모르겠네.”
“드릴... 맨이요?”
민과 유는 잠시 뭔가를 떠올려 보려 하더니, 머리를 긁으며 말한다.
“모르겠는데요.”
“만화 사이트에 그런 작가는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그래... 모르는구나.”
수영은 ‘역시나’하는 얼굴을 하며 말한다.
“내가 쓰는 글은 보통 중학생 이상부터 많이 읽더라고.”
“어? 만화 그리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 보기에도 만화가로 보였는데...”
수영은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형형색색의 물방울이 그려진 셔츠를 입고 머리는 산발하고 거기에다가 머리띠까지 하고 있으면 누가 봐도 한눈에는 소설가로는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 그러면,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
“네? 뭘요?”
“너희들, 혹시 만화 중에 <좀비매직>의 리리카 작가 알아?”
“아! 알죠.”
“혹시 왜요?”
“나 그 작가하고 친구인데. 인터넷상으로만 아는 게 아니고 진짜로.”
“어? 정말요?”
리리카 작가의 이름이 나오니까 민과 유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혹시 그럼, 저희도 한번 만나볼 수 있는...”
그때.
“아, 잠깐만, 잠깐만.”
수영의 눈에 뭔가 들어온다. 수영의 눈에 뭔가 들어온다. 분홍빛이 도는 붉은 파마머리를 한, 파란 티셔츠를 입은 통통한 체격의 어린아이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한눈에 보니, 수영은 바로 알 것 같다. 그 사진, 그 사진! 열어본다. 맞다... 맞다! 파마머리, 얼굴 모양, 전부! 일치한다!
“어... 찾았다, 찾았어!”
“뭐야, 또 스토킹할 대상을 찾았다는 거야?”
“아니, 넌 좀 가만히 있어 봐! 내가 취재할 대상을 찾았다는데...”
현애도 수영을 따라 돌아본다.
그 순간, 알 것 같다. 몇 번 본 것 같은 얼굴이다. 학교나 이 주변 동네에서 본 건 아니고, 전학 오기 전에 본 것 같은데... 아니면, 동면 전이었나? 아무튼, 본 것 같다!
“어? 저 애, 며칠 전에 전학온 애 아니야?”
민이 유를 보고 말한다.
“맞다, G반에 전학 왔지, 참.”
그 파마머리 소년은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더니, 발걸음을 주저하는 것 같다. 민이 앞으로 나와서 괜찮다며 손을 흔든다. 또 잠깐을 머뭇거리다가, 얼굴을 붉히며 사람들 앞으로 슬금슬금 다가온다. 수영이 보기에도 답답해 보일 정도로 말이다.
“안녕, 오랜만이야.”
현애가 그 파마머리 소년을 보고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오랜만이라니?”
“아... 맞다. 너, 해동자 교육센터에 있다 왔다고 했지, 참.”
“맞아.”
다시 그 파마머리 소년을 돌아본다.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기는 하지만, 여전히 시선을 피하고 있다.
“괜찮아, 괜찮아. 와도 돼, 와도 돼.”
파마머리 소년은 또다시 머뭇거리다가, 현애가 다시 한번 오라고 손짓하자, 겨우 종종걸음으로 사람들 앞에 온다.
“저... 정말... 와도... 되는... 거죠?”
“그럼, 그럼.”
현애의 손짓에 파마머리 소년이 좀더 가까이 온다. 그리고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다. 과연, 수영이 찾던 그 파마머리 소년이 맞다!
“안녕하세요, 제... 제 이름... 제 이름은...”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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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0-10-25 15:52:54
이번 회차를 읽으면서 분노가 확 치밀어오르네요.
수영은 생각하는 게 너무 자기중심적. 진짜 저런 인성으로 괜찮을까 하는 생각부터 나는. 정당방위의 피해자가 "그래도 내 인권은 소중하다" 라고 주장하면서 소송을 거는 듯한 역겨움이 확 느껴지네요. 게다가 이제 소위 취재대상은 현애도 모자라서 문제의 파마머리 소년에까지...
그렇죠. 아무리 유명인이라도 자신의 관심밖에 있으면 모르더라도 이상한 게 아니예요.
저 또한 그래요. 국내 연예계에 관심을 안 가지다 보니 포털사이트에 국내 연예인의 이름이 검색어 상위에 올라와도 "유명인인가?" 라고 여길 뿐 아예 존재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든지...
시어하트어택
2020-10-25 23:44:53
저도 그렇습니다. 유명인이라고 해도 제 관심 밖이라면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죠. 어디서나 그걸 알아 달라고 하면서 날뛰는 사람들이 문제기는 합니다만...
SiteOwner
2020-12-04 20:35:27
수영의 행태를 보니까 어떤 심리학 책에서 읽었던 게 생각납니다.
누군가가 복사기를 쓰려는 찰나에 끼어들어 복사기를 먼저 쓰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어떤 말을 하든지간에 거부하기보다는 허락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는 급한 용무라는 이유를 대지 않고 그냥 "제가 먼저 써야 하는데 양보해 주시겠어요?" 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허락받는 경우가 의외로 꽤 됩니다. 결과적으로 수영의 심리 또한 그렇게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행위가 결과적으로 스토킹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지만 최소한 스토킹으로 매도당하는 것은 나쁘다는 전제만큼은 동의하는.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맹목적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바람직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초등학생이 키 160cm면 최소한 작다는 말은 안 어울리겠군요. 특히, 국민학생 때 키 150cm를 못 넘은 저로서는 더더욱 그렇게 보입니다. 이후에 급격히 커져서 지금은 180cm인 것을 생각해 보니 격세지감마저 느껴집니다.
시어하트어택
2020-12-05 23:04:57
뭐, 직업정신이 너무 투철하다 보니(?) 그런 거라고 봐도 되겠군요... 뭐든 지나친 건 좋지 않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