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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제 이름은...”
파마머리 소년은 시선을 자꾸 피하고, 말은 자꾸 더듬는다. 성격 급한 조제는 한 대 쥐어박을 듯한 기세로 파마머리 소년을 노려보고 있고, 다른 동급생들도 답답한 듯 한숨을 푹푹 내쉰다든가, 안쓰럽다는 듯 바라본다. 반면 수영은 기대와 두근거림을 안고 파마머리 소년의 입에서 나올 말에 관심을 쏟고 있고, 현애는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저는... 제 이름은...”
“떨지 마. 여기 있는 사람들 나쁜 사람들 아니니까, 자신있게 말해도 돼.”
현애의 말에 파마머리 소년은 조금, 아주 조금 고개를 들고, 말한다.
“제... 이름은... 쿠리카라 료고요... 이번 달에... 전학... 전학 왔어요...”
료의 힘겨운 소개가 끝나자 다들 답답했는지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하나둘 한숨을 조용히 내쉰다. 료는 거기서 더 말을 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시선을 피한다.
“괜찮아, 괜찮아. 굳이 그렇게 안 떨어도 되는데...”
수영이 뭔가 말을 걸어 보려고 하지만, 료는 더욱 시선을 피하더니, 슬금슬금 자리를 벗어나려고 한다.
“저... 그럼... 저... 저는... 이... 이만...”
아까부터 계속 더듬거리던 것은 심해졌고, 고개는 또다시 푹 숙인 채, 도망가려고 한다.
“아니, 괜찮다니까. 괜찮대도...”
수영이 료를 붙들어 보려 하지만, 수영이 한발 늦었다. 이미 료가 종종걸음으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한 지 오래다.
“미... 미안... 미안... 미안해요! 저... 저는... 저는 이만...”
“잠깐... 잠깐만 기다려 봐! 나는...”
하지만 이미 도망가 버린 뒤다. 그저 쏜살같이 뛰어서 어디론가 가는 료의 뒷모습만 보일 뿐. 현애는 그런 료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찰 뿐이다.
“왜 저러지?”
료의 뒷모습을 보던 조제가 한 마디 한다.
“왜 저렇게 사람을 피하는 거야?”
“나인들 알겠냐. 동면을 너무 오래 하다 보니까 저러는 거 아니야?”
니라차도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다.
“글쎄. 동면하고 저런 내성적인 성격은 별로 상관관계가 없는 것 같은데.”
멀리 멀어져 가는 료의 뒷모습을 끝까지 본 나타샤가 한 마디 한다.
“오히려 저런 건, 동면 말고 다른 문제가 있지 않나 한데, 나는...”
“그래...”
“아, 맞다.”
미동도 없이 벤치에 앉아 있던 수영이 현애를 노려보며 말한다.
“너 왜 이번에는 내 탓 안 하냐.”
“아니, 내가 뭘 했다고 그래.”
“이번에도 ‘그렇게 겁주니까 애가 도망가는 거다’ 하고 마구 내 탓을 하려나 했는데, 의외로 안 하니까 그러지.”
“아, 그거? 해동자 교육센터에 있었을 때부터 저랬던 것 같은데.”
현애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다. 수영은 한편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궁금증이 든다.
“그... 그래? 혹시 뭐 하나만 더 물어 보자.”
“뭔데.”
현애의 목소리가 다시 퉁명스럽게 변한다.
“하... 맞아, 맞아. 저 료라는 애, 지구에서도 저랬어?”
“아니, 대단하신 작가님.”
현애의 목소리에 김이 빠진다.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도 푹 내뱉는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왜? 내가 무슨 헛소리를 했다고?”
수영의 목소리가 다시 올라간다.
“말해 봐! 내가 무슨 헛소리를 했다는 거야?”
“말이 되는 소리 좀 해. 무슨 동면에서 깨어나면 서로 다 아는 사이인 줄 알아? 냉동인간에 대해 쓴다는 분이 그런 것도 모르면 어떡해?”
“아니, 나는 그냥 한번 물어본 거지.”
“무슨 소리야? 다른 것 다 제쳐놓고, 저 쿠리카라 료라는 애는 나보다 200년에서 300년은 더 전 사람인데 아는 게 이상하지 않아?”
“......”
“내 말이 맞아, 틀려?”
할 말을 잃었는지, 수영은 그냥 한숨만 쉬며 머리를 긁을 뿐이다.
“아니, 왜 말을 안 해? 맞냐고, 틀리냐고?”
“아, 맞아, 맞아.”
그다음 날인 목요일 오후.
미린역 남쪽 카페거리에 있는 한 카페의 야외 테라스에 수영이 혼자 앉아서 노트에 뭔가를 적고 있다. 어제와 달리 머리는 위로 묶었고, 셔츠는 꽃들이 잔뜩 그려져 있다. 맞은편 의자에는 가방이 놓여 있고, 테이블에는 노트북과 커피, 그리고 반쯤 먹은 샌드위치가 있다. 뭔가를 적던 노트를 내려놓고, 거리 쪽을 내다본다. 밖에는 초등학생들이 하나둘 다니고 있다. 키가 큰 종업원이 와서 커피를 건네주자, 그는 커피를 한 잔 마시고는 턱을 괴고 밖을 바라본다.
“맞아. 어제 여기쯤으로 지나갔지...”
수영은 혼자 중얼거린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또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시계를 본다. 2시 50분.
“지금이 딱 미린초등학교 하교 시간이지. 그렇다면 그 전까지는 흥미로운 뉴스나 좀 보고 있을까...”
그렇게 말하고서, 수영은 인터넷 창 한쪽의 ‘관심기사’를 클릭한다. 그러자 노트북 위 홀로그램에 기사들이 나타난다.
[동구 아체토역 서측 지구에서 쓰레기 수거장 폭발 사건 또 발생, 지난 폭발 사건들과의 연관성은?]
[<단독보도> 공동묘지에 밤마다 나타나는 ‘좀비’들... 초자연현상인가?]
[여러 종족들이 말하는 ‘흡혈귀’]
[냉동인간! 오해와 진실]
한참 수영이 기사를 보고 있을 때.
“작가님-”
누군가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카페 바로 앞이다.
돌아보니 민과 유, 그 사이에 료가 끼어 있다. 여전하다. 고개를 숙이고 자꾸만 다른 데를 보는 그 모습은.
“아, 너로구나.”
수영은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료는 이번에는 뒷걸음치거나 하지 않고, 어색하게나마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수영이 보기에는 료의 다리가 조금씩 또 후들후들 떨리는 것 같지만, 그래도 뒷걸음질치거나 도망가지 않는 게 어디란 말인가.
“그래... 좋아.”
수영은 조금 긴장했던 얼굴을 풀고 말한다.
“그런데 너희들끼리 있을 때는 그렇게까지 많이 떨거나 긴장한다거나 하지는 않네?”
“네, 맞아요. 이것도 꽤 나아진 것이기는 해요.”
“어... 정말?”
“처음 만났을 때는 제대로 쳐다보거나 하지도 못하고, 그냥 말도 몇 마디만 겨우 했거든요.”
민과 유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수영은 잠시 셋을 훑어본다. 얼핏 보니 이렇게 셋이 같이 있을 때는 수줍어하거나 떨거나 그런 모습은 없다. 꽤나 자연스럽게 히히덕거리는 모습이다.
“흐음... 너희들 혹시 말이야.”
“어? 왜요?”
“내가 알기로는 너희들도 초능력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런 건 어떻게 알았어요? 우리가 말해 준 것도 아닌데.”
민이 약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수영을 본다.
“그거? 아, 어제 본 그 형 누나들이 알려 주더라. 너희들 가고 나서, 그냥 살짝 알려 주던데.”
수영은 대충 얼버무린다. 사실은 귓속말 같은 것으로 알게 된 게 아닌, 나름 다른 경로를 통해 알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게 혹시, 의사소통을 잘 하게 해 준다든가... 뭐, 아무튼 그런 능력 아니야?”
“아니요, 전혀.”
“어... 그래?”
왠지, 초능력을 사용할 때의 특유의 느낌은 들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슨 초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일까? 궁금하다! 그리고 알고 싶다!
“혹시 그럼 너희들의 능력이 뭔지는... 알면... 실례되는 건가?”
“아니요, 전혀 그럴 건 아닌데요.”
민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보여 줄까요?”
“응? 좋아, 좋아. 한 번만 보여 주면...”
수영이 막 뭔가 말하려는 때.
감각이 이상하다.
몸이 뭔가에 잡혀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공중에 떠 있다. 어느 새!
주위를 한번 보니...
떠 있다!
불그스름한 아우라에 둘러싸여서 말이다!
“서... 설마...”
수영의 추측이 맞다면, 이건 염동력이다. 아니, 확실하다. 염동력이 확실하다! 주변의 물건들까지 지면 위로 떠오르는, 이 굉장히 강한 아우라를 지닌 능력은 말이다!
그러고 보니까, 들었다. 저 염동력이라는 능력은, 아무 초능력자에게나 있는 게 아니다. 매우 강한 능력이기에, 손에 꼽을 정도로만 있다고 들었다. 그런데 오늘 염동력 능력자를,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수영의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때다.
♩♪♬
수영의 AI폰에서 나는 소리다. 메시지 도착음 같은 건 아니다. 직감한다. 이 소리는 불길한 소리다. 그리고 공중에 둥둥 떠 있는 AI폰을 집어 본다.
[배터리 5% 남음]
수영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진다. AI폰의 배터리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으아... 그러고 보니까, 아침에 충전하는 걸 깜박했잖아!”
생각해 보니, 보조 배터리도 안 가져왔다. 왠지, 가방 안에 보조 배터리의 감촉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수영의 바로 앞에 떠 있는 노트북도 밑에 뭔가가 깜박거린다. 10%밖에 안 남았다! 이건 도대체, 도대체...
“설마 전기 때문에 그러는 건가요, 작가님?”
수영이 돌아보니 이번에는 류젠리츠인 유가 수영을 보고 있다.
“아니, 네가 뭘로 도와 줄 수 있다고...”
막 그렇게 말하려던 때. 수영의 눈에 들어온 것은...
겉면에 미약한 전류가 흐르는 AI폰, 표시창에 나타난 ‘배터리 100%’, 그리고 찌릿거리는 전기가 감싼 유의 왼손.
“뭐야, 나는 또 돈다발 같은 거 준다는 줄 알았는데.”
“왜요, 그럼 유전이라도 줘요?”
“뭐, 달라는 말은 아니고.”
말은 그렇게 해도 다들 깔깔깔 웃는다. 특히 수영의 웃음은 반쯤은 진심이다. 수영과 테이블, 의자, 기타 모든 사물들이 바닥에 원래대로 내려앉자, 수영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염동력과 전기 능력을 직접 경험해 볼 수 있었던 건, 큰 행운이었다! 이제 조금 더 쓰기가 수월해질 것 같다!
“그런데 너희들, 이 능력 말이야.”
수영은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민과 유를 보고 눈을 밝히며 묻는다.
“혹시 어떻게 얻게 된 거야?”
“저는 원래부터 있던데요?”
민의 말은 ‘뭘 그런 걸 다 물어 보냐’는 듯한 말투다.
“그래? 그럼, 여기 옆에 네 친구는 아니라는 소리네?”
“네, 맞아요. 저는 선천적인 초능력자는 아니에요.”
민 대신 유가 대답한다.
“능력이 생긴 지 한 달 정도 됐을 거예요.”
“음... 정말?”
수영은 더 궁금해진다. 아니, 자극이 점점 더해진다. 순간적으로 ‘지금 쓰는 <최강 냉동인간>의 노선을 바꿔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다. 지금껏 본 적 없는 강한 초능력, 그리고 생생한 체험. 반드시 써야겠다. 반드시 소재로 써야겠다. 수영은 그렇게 마음먹는다.
“음? 잠깐.”
수영에게 뭔가 이상한 낌새가 든다. 한 명이 없는데...
안 보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있었던, 료가 말이다!
“너... 너희들...”
“어? 왜요?”
“료 혹시 못 봤어?”
수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안 보인다. 카페거리, 카페 안쪽, 심지어 다른 카페 쪽에도!
“어디 간 거야? 왜 안 보여?”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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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0-10-25 16:13:40
파마머리의 소년은 쿠리카라 료. 글자 그대로 샤이 베이비라고 할 수 있는 유형의...
그런데 역시 근묵자흑인가요. 현애가 무심코 말해버린 정보가 결과적으로 수영의 호기심에 불을 놔 버렸어요. 그게 좀 패착이네요.
결국 수영이 대형사고를 치는 것에서도 아이고 했어요.
타인의 초능력을 열화카피하여 쓰는 거나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 형국이나 뭐가 다를지...
시어하트어택
2020-10-25 23:46:28
다음 회차에 이 에피소드의 결말이 날 겁니다. 어찌 수습이 될 건지 기대해도 좋습니다.
어딘가에 이런 속담이 있죠.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라고 했던가...?
SiteOwner
2020-12-04 20:50:05
냉동수면기술이 실체화되면 이런 일도 일어나겠다는 것에 호기심이 자랍니다.
이미 현애조차도 현재 만난 사람들보다 훨씬 앞의 시대에 생존해 있었다가 냉동수면 후 이렇게 새로이 살아가게 되었는데, 쿠리카라 료는 현애가 원래 살던 시대보다도 2, 3세기 전의 사람. 역시 알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지금 생존중인 사람이 조선 경종-순조 때 살았던 사람을 직접 만났을 리가 없는 게 당연하다 보니 말이지요.
미국의 영화 저지드레드, 소설 공룡 1억년 등에서 보이는 다른 시대의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여기에서도 보여서 재미있습니다. 그나저나 수영의 저 반풍수 기질,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것인지...
시어하트어택
2020-12-05 23:12:17
뭐, 그런 시대가 온다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지요. 분명히 어리게 보이는데 알고보니 자신보다 100살은 더 많은 사람이라든가, 냉동되었다가 깨어났더니 조카가 노인이 되었다든가. 어느 책에서 본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