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입니까?”
에스텔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내 몸이 먼저 반응해버렸다. 그런 내 반응이 의외였는지 커지는 에스텔과 로즈마리의 눈. 조금 창피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당황하지 않고 똑바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이어지는 침묵.
두 사람 다 당황했는지 내게 대답해 줄 생각은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결국 둘 다 이성을 찾았고, 그중 먼저 입을 연 것은 로즈마리 쪽이었다.
“어째서냐니 왜 그것을 당신이 묻는질 모르겠군요.”
“그건……,”
“에스텔 아가씨도 저도 소여 가의 사람. 그에 비하면 당신은 완벽한 외부인입니다. 그러니 가주님이 내리신 명령에 대해 왈가왈부할 자격 따위는 없어 보입니다만.”
그야말로 정론.
로즈마리가 지적한 대로 내게는 소여 백작이 에스텔에게 내린 명령에 대해 논박할 자격 같은 건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부족한 두뇌 깊은 곳에 숨겨진 지혜의 샘을 발굴해보고자 했지만, 메마른 황무지에 괭이질하는 것처럼 답은 돌아오질 않는다.
하지만 다행히도 구세주는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본녀가 묻는 건 어떠하냐?]
“이드라 님.”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개입한 이드라의 목소리에 로즈마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본녀 역시 부외자라 여기지는 않으리라 신뢰하노라.]
만약 눈앞에 이드라의 모습이 보인다면 킥킥대는 것이 분명했을 정도로 놀리는 기색이 다분한 목소리이지만 로즈마리는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드라는 소여 가에게 있어서 결코 외부인, 아니 외부신이라고 할 수 없는 존재. 나에게 했던 것과 같은 논리로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로즈마리는 고민에 빠진 듯 한동안 인상을 찌푸린 채 테이블을 노려보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에게는 구원을 청할 사람 따위는 없었다.
“……아가씨가 임무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한숨 소리와 함께 에스텔의 복귀 이유를 털어놓는 로즈마리. 그 말을 듣고 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도둑놈!’
처음 만난 날, 에스텔은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이는 이드라의 신물이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소여 가에서 유출되었다는 뜻. 그렇다면 나를 찾아온 에스텔의 목표 역시 결국 신물 회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하지만 지금 그녀는 신물을 회수할 수 없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가계약 시점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나는 완전한 사도. 이제는 죽거나 아니면 완전히 패배하지 않는 이상 신물을 반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패배한 뒤 사도 자격을 잃은 후 신물을 넘긴다면 어떨까?
‘최고로 멍청한 짓이지.’
내가 정식 사도가 된 이상, 나의 패배는 곧 이드라가 이번 사도야행에서 탈락한다는 의미. 그렇게 되면 신물을 회수한다고 해도 다음 사도야행까지 손가락이나 빨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에스텔은 분명 임무에 실패했다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정말로 에스텔이 실패했다고 단정 지을 필요가 있을까? 내가 소여 가를 위해서 일한다면 딱히 실패라고 할 필요까지는……,
“물론 당신을 회유하는 것 역시 저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 중 하나입니다. 하나 착각하시는 것이 있군요. 그 임무를 받은 건 저지 에스텔 아가씨가 아닙니다.”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로즈마리는 차가운 목소리로 내 기대를 묵살했다.
“아가씨가 받은 임무는 신기를 회수해 사도가 되어 사도야행에서 싸우는 것. 이미 그것은 수행할 수 없는 의뢰가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소여의 기사에게 하지만 따위는 없습니다. 성공과 실패. 그게 전부입니다.”
“…….”
“거기에 아가씨가 수행해야 할 다음 임무는 이미 정해진 지 오래입니다. 그런 고로, 에스텔 아가씨는 반드시 내일까지는 복귀해야만 합니다.”
이래서야 아무 말도 못 하겠는데…….
‘힘으로 처리해버릴까?’
고민하던 찰나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사도의 힘.
소여 가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소여 백작이 신물 회수를 요구한 걸 생각하면 사도와 전투를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닐 터. 내가 변신해서 쳐들어간다면 백작으로서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해버릴까?’
마음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너무나 달콤한 유혹의 꿀. 지나치게 오랫동안 힘이 없이 살다 보니 그 맛이 더 달콤하고 유혹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힘……,”
그 유혹에 내가 넘어가 로즈마리를 위협하려던 찰나, 따스한 손길이 내 팔을 부여잡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지 말거라, 그레고르.”
에스텔.
여태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는 절박한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뭘 하려고 한 거지?’
이런 식으로 힘으로 처리하려고 해서는 그 녀석이랑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히히히, 놀자~’
순간 녀석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린 것 같은 착각에 나는 몸서리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힘으로 해결하는 건 안 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일반적으로는 소여 백작 같은 대귀족이 나 같은 평민을 만나 줄 이유가 없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그가 심부름꾼 길드에 의뢰하러 오던가 아니면,
‘나를 가문 소속 마법사로 들이든가.’
그렇다면 방법이 없지는 않지.
생각이 끝났다면 이제 행동할 시간이다.
“좋습니다. 여기에서 그걸 말리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제안을 하고 싶군요.”
“제안?”
혹시나 내가 사도의 모습이 될 것을 염려했는지, 내 행동을 주의 깊게 바라보던 로즈마리는 예상치 못한 나의 발언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시했다. 무표정한 얼굴 때문에 무언가 기괴하다고 느낄 법도 하건만, 나이에 비해 동안인 그녀의 모습 덕에 은근히 귀엽다는 느낌도 든다.
‘뭐 감상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지만.’
“저를 소여 가의 일원으로 삼는 것 역시 선택지라고 하셨죠?”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는 아직 보류 중이고요.”
“하지만 제가 그쪽을 제안한다고 해서 반대하시지는 않겠죠.”
“그야 그렇습니다만.”
좋아, 그렇다면 이야기가 쉽지.
“소여 가의 봉신이 되기 전에 백작님을 한번 뵙고 싶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가문이든 마법사를 고용할 때 가주가 직접 면접을 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기왕에 이렇게 된 거 지인인 에스텔이 복귀할 때 따라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군요.”
급조한 주장이긴 하지만 막상 말을 하니 술술 흘러나왔다. 로즈마리 역시 내가 한 말이 틀린 것은 아니기에 반발하지는 않고 있고.
“흠…….”
고민의 늪에 빠졌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책상을 검지손가락으로 딱딱 때리던 로즈마리는 이윽고 결론을 내렸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만, 지금 저로서는 반대할 이유는 없군요. 받아들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았어!
마음속으로는 환호성을 내지르면서도 나는 그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이 기쁨을 숨기고자 노력했다.
이후 이어진 것은 그리 대단할 건 없는 대화였다. 내일 몇 시에 만날 것인지, 어디서 볼 것인지, 교통수단은 무엇으로 할 것인지 같은 그저 소소한 이야기.
‘음식이 더럽게 맛없다는 건만 빼면 괜찮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나와는 달리 에스텔은 로즈마리가 사라질 때까지 어두운 표정을 풀지 않았다.
혹시 내가 모르는 뭔가 있나?
?
***?????? ***
?
‘결국 이렇게 되었나.’
소여 백작이 자신의 복귀 명령을 내렸다는 말에 에스텔은 참담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실패.
그녀에게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단어.
어린 시절부터 소여의 명예로운 마도기사가 되는 것을 추구해온 그녀에게 실패란 언제나 피해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항상 성공을 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한 사람 몫의 기사가 된 이후 이런 대실패를 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이라면 에스텔 역시 이렇게 마음이 복잡하진 않았을 것이다.
실패는 쓰지만 그렇다고 해도 절대적이진 않다. 실패는 곧 성장의 계기. 원인을 분석하고 다음 기회를 노린다면 오히려 더 큰 성공으로 나아가는 길이 될 수 있다. 하나 그것은 그녀를 부른 것이 기사단장이나 평범한 상사일 때의 이야기.
‘백작님은 쉽게 명령을 내리시지 않는다.’
그녀가 아는 소여 백작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름으로 그녀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항상 기사단장이나 교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명령을 내렸을 뿐.
그런데 그가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명령을 내렸고, 그것은 그리 가벼운 의미가 아니었다.
에스텔이 태어난 이래 소여 백작이 본인의 이름으로 내린 명령은 단둘뿐.
한 번은 현 기사단장을 기사단장 직위에 임명할 때. 이는 인사권이 가주의 권한이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번은……,
‘상대를 소여 가에서 완전히 지워버릴 때.’
마지막 자비인지 아니면 실망의 표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소여 백작은 상대방을 소여 가에서 완전히 없애 버리기로 했을 때 자신의 이름으로 명을 내렸다.
아마도 그녀를 부르는 이유는 두 번째에 가까울 터.
그랬기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마치 깊은 늪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 같은 감각.
하지만 그녀를 대신해 사도가 된 이는 그녀가 늪에 잠기도록 허하지 않으려는 모양이다.
“왜 그런 제안을 한 거지?”
그레고르의 숙소로 돌아가는 길.
그녀는 자신과 발을 맞추며 걷던 그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글쎄요.”
이에 대한 답을 생각하진 않았는지 머리를 긁적이는 그레고르. 그런 그의 태도에 왠지 모를 답답함을 느끼는 에스텔이었지만, 그녀는 조용히 그가 대답하길 기다렸다.
“그냥 에스텔을 거기서 보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냥인가…….”
입에 담으면서도 헛웃음이 나오는 어처구니없는 대답. 혹시나 무언가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착각했던 에스텔로서는 실로 맥이 빠지는 결말이었다.
고작해야 ‘그냥 그렇게 느껴서’라니…….
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느끼든 상관없다는 듯이 그레고르는 계속해서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네, 그냥이요. 왠지 지금 보내면 에스텔을 다신 못 만날 것 같았거든요. 아무래도 그건 싫더군요.”
“…….”
“에스텔은 제 소중한 동료니까요. 이대로 헤어지고 싶지는 않아요.”
“동료인가…….”
실로 오랫동안 듣지 못한 말.
기사단에서 활동할 때만 해도 가끔 들은 적은 있었지만, 가주의 뜻에 따라 사도 후보가 된 이후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래서 사도야행이 끝나기 전까지는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나는 너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는데.”
“아뇨. 에스텔은 언제나 절 도와줬어요.”
“그저 인질이지 않았던가?”
지난 싸움에서 그녀가 없었다면 그레고르는 더 쉽게 이길 수 있었을 터. 그걸 고려한다면 동료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도 없으리라.
“음. 말을 하기가 조금 어려운데.”
그런 에스텔의 냉소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생각이 나질 않는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는 그레고르. 그런 그에게 그녀가 다시 한번 자기 생각을 밝히려고 했지만,
“전 혼자서 싸울 수 없거든요.”
그레고르의 입에서 그녀가 전혀 이해하지 못할 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겁쟁이입니다. 그래서 싸우는 게 싫어요.”
전사라면 내뱉기 치욕스럽기 그지없는 말. 하지만 심부름꾼으로 살아온 기간이 훨씬 긴 그에게는 그리 이상한 특성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싸워야만 할 때가 있는 것도 알아요. 그런 상황에서도 도망치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진 않아요.”
“…….”
“에스텔은 그런 제가 다시 도망치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어줬어요. 그러니 이대로 보내고 싶진 않아요. 은혜를 갚아야 하니까.”
“은혜라…….”
그런 사소한 이유로 소여 백작과 적대하겠다니.
“후회할 거다.”
“까짓것 후회 한 번 하죠. 그래서 나쁜 것도 없는데요.”
그런 그의 모습이 걱정돼서 한마디를 했건만, 그레고르는 실실 웃으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 모습이 어째서일까…….
‘따뜻하군.’
머리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이라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가슴 한쪽이 따스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왠지 걱정이란 게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는군.’
그렇게 생각하며 에스텔은 가벼운 마음으로 숙소로 향했다. 내일 아무 일도 없기를 기도하며.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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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0-11-08 20:14:23
에스텔이 그레고르를 처음 봤을 때 도둑놈이라고 말한 이유가...납득했어요.
그리고, 이전보다 그레고르가 많이 성장했다는 게 크게 느껴져요. 에스텔과 이드라의 만남으로부터 흐른 시간은 짧긴 했지만, 그레고르가 여러 가지를 입체적으로 생각하는 사려깊은 인물이 되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겠죠. 그래서 그 점이 인상적으로 여겨졌어요. 그레고르가 로즈마리의 면전에서 논변을 바로 입밖에 낸다든지 에스텔을 생각하는 발언을 한다는 것도 그래서일 거라고 보면서...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는 게 인생인데, 소여 가의 방침은 글쎄요.
역시 별로 좋다고는 여겨지지 않고 있어요. 이제 그 실상을 볼 수 있겠죠.
그나저나, 그레고르의 환청, 한순간이지만 정말 끔찍하네요. 읽은 순간 피부가 갑자기 쓸리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어요.
Papillon
2020-11-09 00:21:49
성장일수도 있고 회귀일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레고르 원래 성격은 이 쪽에 가까웠는데 그간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억눌려있던 것에 가까워서요.
SiteOwner
2020-12-14 20:58:59
참신한 표현과 자승자박의 전개에 감탄하면서 이번 회차를 읽고 있습니다.
메마른 황야에 괭이질...힘만 들고 소득은 없는 것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재미있게 느꼈습니다. 게다가, 로즈마리가 그레고르를 타박준 논리로는 이드라를 부외자 취급해 버리는 결과로 귀결되니 그야말로 자승자박 그 자체입니다.
그레고르가 느낀 환청, 역시 그 살인귀 블레어의 목소리이군요...역시 무섭습니다...
그레고르가 에스텔을 여기는 마음, 이것이 바로 용기의 원천. 무서운 현실에 맞설 수 있는 용기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Papillon
2020-12-20 03:45:49
로즈마리가 그레고르를 냉대하는데는 사실 다른 이유도 하나 있긴한데, 이는 추후에 밝혀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