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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터즈] Chapter 7: 보어헤스. Episode 27

Papillon, 2020-11-09 12:00:05

조회 수
143

대화가 끝나고 에스텔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저택 구석에 있는 작은 후원이었다.

아니, 여기를 후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일반적인 귀족 가문의 집에 있는 후원은 그래도 꽃이라도 한 송이 자라기라도 할 텐데, 이곳에는 꽃은 물론 풀 한 포기조차 자라지 않았다.

그나마 꽃 비슷한 거라고는 저 나무 정도인데……,


아무리 봐도 관상용은 아니지?’


꽃이 피지도 않고 단단하기만 한 품종. 거기에 더해 겉에 보이는 칼자국들이 새겨져 있다. 이파리도 없어서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화룡점정은 나무에 걸려있는 무수한 끈들. 한쪽에는 쉽게 풀 수 없는 올가미가, 다른 한쪽에는 무겁기 그지없는 쇳덩이가 매달려 있는 것이, 누가 봐도 수련 도구라는 걸 알려주었다.


오랜만이군.”


하지만 에스텔에게는 추억이 깃들어 있는 장소인지, 그녀는 그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무를 쓰다듬었다.


일곱 살 무렵에는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지.”

일곱 살이요?”


저기 있는 추 중 가장 가벼운 게 어지간한 밀 포대 두 개 이상의 무게입니다만?

덩치가 있는 성인 남성도 한 번에 두 개 이상의 밀 포대를 들고 옮기지 못하는데, 저걸 수련용으로 쓰다니. 아무래도 내 생각 이상으로 에스텔은 굉장히 혹독한 훈련을 거친 모양이다.

나는 잠시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로즈마리의 따가운 시선에 빠르게 표정을 정돈했다.


마투술과 평범한 격투기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다행히 에스텔은 내 표정을 못 봤는지 아무렇지도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나저나 마투술과 평범한 격투기의 차이라.


마투술은 마력을 쓴다는 것이겠죠?”

그렇다면 마투술은 어떻게 마력을 쓸 수 있을까?”

글쎄요…….”


원래 그러니까?

이런 건 대답이 되질 않는다. 애초에 그런 말을 듣고 싶어서 에스텔이 내게 묻지도 않았을 테고.


그러고 보니 진짜 어떻게 하는 거지?’


어떤 유파이든지 마법은 마력을 이용한다. 그리고 그 마력을 운용하기 위해, 각 유파는 다른 방법을 이용한다. 연금술사는 촉매를 주로 쓰고, 사령술사는 주문을 자주 쓴다. 나 같은 둔갑술사도 티가 나지 않게 손으로 수인을 맺어서 변신한다.


역시 잘 모르는군.”


내가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하자, 에스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심상과 동작. 이 두 가지의 조화로 마투술사는 마력을 운용한다.”


심상과 동작이라.

동작이야 이해가 가지만 심상이란 건 정확하게 뭘 말하는 거지?

물론 다른 마법사들도 심상을 쓰긴 하지만, 이걸 동작과 조화시켜야 한다는 건 잘 모르겠는데.


, 예를 들어,”


결국 말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에스텔은 마력 검을 들고 허공에 찌르기를 날렸다. 그와 동시에 분명 다섯 걸음 이상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단단한 나무에 검으로 베어낸 자국이 생긴다.


저게 사자의 포효였던가?’


전에 살인귀와의 전투 중 보여줬던 기술.


이 기술은 원거리의 적을 베는 기술이지. 이 기술은 흑사자라는 별호로 불리신 소여 가의 4대 백작님이 만들었다고 하더군. 듣기로는 그분은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거리의 적의 수급을 취하셨다더군.”

그게 심상이랑 무슨 상관인가요?”


그냥 어디에나 있을 법한 과장된 전설 아닌가?


상관이 있지. 그게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 마투술의 시작이니까. 그게 가능하고, 그 당시 흑사자 님은 어떤 마음으로 검을 펼쳤을지 상상하는 것. 그것이 마투술에서 말하는 심상이다.”


실제 어떤 존재가 펼친 위업이 실제 사건이라고 믿고, 그 마음가짐을 따라 하며 동작을 펼치는 것.

그것이 에스텔이 설명한 마투술의 요체.

나름대로 흥미로운 소재이기는 했다. 만약 이게 학과 강의라면 듣길 잘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저기, 그 이론에 대한 설명이 굳이 필요한가요?”


로즈마리가 나에게 살기마저 담긴 시선을 보내는 걸 애써 무시한 채, 나는 손을 들어 에스텔에게 질문했다. 솔직히 인제 와서 마투술 이론에 대해 안다고 해도, 그걸 실전에 써먹는 것은 불가능할 텐데.


그야 지금부터 그대에게 써먹을 편법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지.”


이런 내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에스텔은 피식 웃으며 내 질문에 대답했다.


편법이라고?’


뭔가 숨겨진 방법이라도 있나?

내가 그것을 질문하기도 전에 에스텔은 검을 내려놓은 채 어떤 동작을 취했다.


권법인가?’


평소 에스텔이 펼치던 무술과는 전혀 다른 투로.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에게는 지나치게 익숙했다.


상형권, 정확하게 말하면 동물상형권이다.”


에스텔의 입에서 설명이 흘러나왔다.


동물상형권은 동물의 행동을 흉내 내서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대다수의 마투술사는 꺼리곤 하지. 동물이라고 해봐야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닐뿐더러, 그 마음가짐을 흉내 내기도 힘드니까. 하지만 그대라면 어떨까?”


그 말을 끝으로 에스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연무를 이어갔지만 나는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둔갑술사다. 그리고 나는 변신한 상태에 익숙해지기 위해 누구보다 동물과의 소통에 익숙해진 존재. 그런 만큼 에스텔이 지적한 문제는 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익히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


내가 생각을 끝낼 무렵, 에스텔의 연무 역시 끝이 났다.


방금 보여준 것은 늑대의 움직임을 본뜬 권법이다. 그리 어렵지는 않겠지?”

, 늑대로 변신하는 것도 몇 번 해봤으니까요.”


도시에서는 별로 쓸 일이 없었지만. , 대형견으로 변신한 것까지 합한다면 제법 많이 변신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면 이야기가 쉽겠군.”


그 말에 에스텔은 한시름 놨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3만 번.”


갑자기 터무니없는 숫자를 말했다.


?”

“3만 번 반복이라는 소리다. 동작이 틀릴 경우, 숫자로 쳐주지 않겠다.”


아니 이 무슨 무식한……!

하지만 내 경악한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에스텔은 그저 씨익 웃어 보일 뿐.


잘못 골랐나?’


새벽 늦게까지 몸을 놀리며 나는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다.


?

***?????? ***

?


역시 내 생각이 맞았군.’


그레고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에스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고르는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빠르게 권법에 익숙해졌다.

100.

그가 완전한 투로를 그리기까지 걸린 횟수.

길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소여 가의 마도기사 후보생들이 투로를 완성할 때까지 걸리는 횟수의 10분의 1밖에 되질 않는다.

이 정도라면 천재는 힘들어도 수재 소리는 들을 만한 재능일 터.


제법이군요.”


에스텔의 옆에 서있던 로즈마리 역시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에스텔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를 긍정했다.

본디 그녀의 목표는 그레고르가 3일 동안 한 개 이상의 동물상형권을 완성하도록 하는 것. 비록 동물상형권이 그리 고위급 무예가 아니더라도, 대성한다면 그럭저럭 위력적인 전투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셋이라면,


범속한 마투술사보다 기술 면에서는 우위겠지.’


물론 둔갑술사라는 특성상, 마투술에 최적화되지 않은 마력을 지녔기에 성장 한계 역시 당연하지만, 사도의 힘까지 합쳐진다면 얘기가 다르다.


충분히 강해질 수 있어.’


하지만 에스텔의 만족스러운 표정과는 달리 로즈마리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부족합니다.”


이윽고 로즈마리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부정. 그 말에 에스텔은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인가? 저 정도라면 기술적으로 어지간한 가문의 기사들보다 나을 텐데.”

평범한 마도기사를 상대하는 것이라면 저도 아가씨의 손을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상대가 그리 좋지 않군요.”

보어헤스 백작 말인가?”

.”


에스텔은 잠시 눈을 감고 보어헤스 백작의 모습을 떠올렸다.

확실히 보어헤스 백작의 몸은 굉장히 단련된 상태. 순수한 육체의 단련 정도라면 그녀나 소여 백작보다 우위에 서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


뛰어난 마도기사 특유의 기도는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는 전투마법사(戰鬪魔法師, Battle Mage)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에스텔은 살짝 눈가를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전투마법사라.’


마도기사와 함께 전투에 특화된 마도유파. 하지만 무예와 마법을 하나로 생각하는 마도기사와는 다르게, 전투마법사는 마법과 무술을 별개로 나눠서 이용한다.


그렇기에 수준을 알 순 없다.’


무술만으로는 분명 그녀와 로즈마리를 비롯한 마도기사에 비해 떨어지겠지만, 전투마법사 특유의 파괴술과 함께 펼친다면…….


초 근접전으로 가면 승산은 있다.”

그럴지도 모르죠.”


비록 둘 다 전면전에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근접전에서는 마도기사 쪽이 우위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떻게든 근접전으로 몰고 간다면……,


권능만 없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에스텔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권능. 사도의 힘.

그녀는 그레고르의 권능과 살인귀의 권능이 대해 알고 있고, 그것이 전투 중에 어떤 변수가 될 수 있는지도 누구보다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애초에 첫 전투에서 그레고르가 압도당한 이유 중 하나는 그 권능 때문이었으니까.


“4대 가문 소속의 역대 사도들은 자신들이 사용한 권능을 정리해 두었습니다. 아가씨 역시 사도가 되셨다면 소여 가에 내려온 비서를 통해 이를 배우게 되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읽더라도 그리 도움이 되진 않을 테지.”


권능의 사용법은 사도가 익힌 기술에 따라 달라진다.

그레고르의 권능, ‘포식자 군세는 그레고르가 둔갑술사이기에 사용할 수 있던 권능이다. 만약 그레고르가 다른 유파의 마법사라면 전혀 다른 권능을 사용했을 터.


소여 가의 권능 사용법은 그레고르에게 도움이 안 돼.’


역으로 그레고르의 가능성을 제약해버릴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답이 없는 상황에 에스텔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믿을 것은 그저 그레고르가 지닌 가능성뿐.


저 남자를 신뢰하시는군요.”


그런 에스텔의 태도를 조용히 바라보던 로즈마리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입을 열었다.


그렇게 저 사내를 믿으시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글쎄…….”


어째서일까?

에스텔 역시 이에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재능이 있긴 하지만 압도적인 수준은 아닙니다. 그리 신뢰가 갈 만한 이는 아닐 텐데요.”

“…….”

그가 아가씨의 은인이라는 것은 알지만 저로서는 아가씨가 그를 이렇게 신뢰하는 이유를 이해할 순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로즈마리의 목소리는 흔들림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말은 정론. 에스텔로서도 쉽사리 부정할 순 없는 말이었으니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에스텔은 이윽고 무언가 떠올린 듯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변하는 걸 보았거든.”


그와 만난 첫날. 그의 눈동자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는 살아있는 사람. 그녀 역시 기사의 의무로서 그에게 잘해줄 뿐, 그레고르에게 호감을 느끼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지만 그는 변했다.”


폐인이나 다름없으면서도 괴물을 상대로 싸웠다. 사도를 상대하면서도 결국 승리를 거둬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죽어가던 사람은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이로 변했다.


솔직히 가능성이 높진 않다고 생각한다. 그가 이기긴 힘들겠지.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가 변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를 믿어주고 싶구나.”

그렇군요.”


에스텔은 고개를 돌려 로즈마리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미혹의 안개는 에스텔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에스텔의 말을 부정하는 말은 하진 않았다.


저도 믿을 수 있으면 좋겠군요.”


에스텔과 눈빛을 교환하던 로즈마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있으면 좋겠다.

중립적이지만 확실히 발전한 태도.

에스텔은 그런 로즈마리에게 미소를 지어주고는 고개를 돌려 그레고르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3.’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그레고르가 이길 수 있도록 하리라.

Papillon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4 댓글

마드리갈

2020-11-09 22:52:32

허락된 시간인 3일은 운명을 바꾸는 힘을 위한 시간이네요.

보다 높은 차원으로의 업시프트(Upshift)일지, 나락으로 떨어지는 다운시프트(Downshift)일지는 그레고르와 에스텔의 행보가 결정하겠죠.


자신의 혈육에조차 매정한 소여 백작과는 달리, 에스텔은 자신의 수련도구에의 애정을 갖고 있네요.

정말 같은 혈통인데도 사람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게 여겨지고 있어요.

마도기사와 전투마법사는 다르군요. 게다가 권능은 또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기도 하고...

로즈마리가 최소한 에스텔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에 희망이 읽히고 있어요. 비록 그게 작은 희망이라도.

Papillon

2020-11-10 02:30:10

에스텔이 소여 백작의 딸이긴 한데, 정작 성장기에 소여 백작을 만난 적은 손에 꼽을 정도라서요. 에스텔의 성격 중 일부는 어머니, 일부는 로즈마리 덕입니다. 그 중에서도 긍정적인 건 로즈마리의 영향이 큰 편이죠.


전투마법사와 마도기사의 차이는 일대일로 대칭하기는 힘들지만 비유하자면 군인과 격투기 선수의 차이입니다. 군인이 격투기를 배우긴 하지만 여전히 주력 무기는 총과 포를 비롯한 화기죠. 마찬가지로 전투마법사는 마법을 보조하기 위해 무예를 익히긴 하지만, 기본적인 전투력은 파괴술이라는 마법에서 나옵니다. 전장에서의 역할도 둘이 차이를 보이죠. 어느 한쪽이 낫다고 하기에는 애매합니다.?

SiteOwner

2020-12-24 21:39:36

이미 6년 전 여름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예전에 살았던 동네에 가 본 적이 있었습니다.

특별한 것도 없는 동네였습니다만, 뭔가 말하기 힘든 감정이 차올라서 결국은 타고 온 차를 돌려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작중의 후원에 대한 에스텔의 감정도 이런 것과 닮아 있는 게 아닐까 싶군요.

게다가 에스텔의 인품은 예의 환경에서 어떻게 저렇게 형성될 수 있는지 기적이라고 부를만하겠습니다.


그레고르의 성장은 괄목할만하군요. 정말 수직상승하는 것처럼.

흔들리지 않는다는 라틴어 문구인 닐 아드미라리(Nil admirari)는 에스텔을 위한 말일 것입니다.

Papillon

2020-12-31 23:03:40

에스텔이 선인이 된 데에는 로즈마리의 공이 컸습니다. 그녀가 없었다면 에스텔의 성격은 그리 좋지 않았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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